***신구약 성경강해***/- 예렘미야 애가 강해

[스크랩] 예레미야애가를 소개합니다. (김형익목사)

에반젤(복음) 2019. 12. 28. 10:01


      

[매일말씀묵상]

예레미야애가를 소개합니다.

1.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주전 586년) 직후 기록된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가 5편의 기록이다. 예루살렘 멸망을 통하여 경험한 개인적인 깊은 고통과 영적인 고뇌, 시온의 멸망을 실행하신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오직 하나님의 속성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 나타난다. 애가는 탄식으로 시작해서(1:1~2)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마친다(5:21~22). 애가 전체에는 하나님의 인자(헤세드)와 긍휼에 대한 절절한 고백이 있다(3:22~24). 애가는 1,2,4장이 ‘슬프다’(히브리어로 ‘애카’)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경을 따라서 애가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물론 우리말로는 슬플 ‘애(哀)’자를 써서 슬픈 노래라는 의미의 ‘애가’지만 발음은 히브리어 제목 ‘에카’(“어찌..!”)와 비슷하다. 애가의 1~4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22자의 순서를 따라 각 절이 시작되는 아크로스틱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1,2,4장은 각각 22절로 되어있고 각 절의 첫 자는 히브리 알파벳의 순서를 따른다. 3장은 66절인데, 3절씩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여 66절까지 그 순서를 따른다. 5장은 아크로스틱 형식을 띠고 있지 않다.

2. 애가에는 적어도 세 화자(speaker)가 등장한다. 예레미야 선지자 자신, 시온(의인화된 예루살렘) 그리고 시온의 사람들이다. 처음 두 장에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시온이 말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루살렘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성 자체의 패망을 슬퍼한다. 4~5장에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시온의 백성들이 말한다. 그들은 적군의 손에 점령당한 예루살렘 백성들로 인해 괴로워한다. 그리고 3장에서는 예루살렘이 의인화되어 말하지만 사실상 예레미야 선지자와 멸망하는 예루살렘이 동일시되어 있다. 선지자의 개인적 비통함은 예루살렘의 고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는 고통이 점점 커져서 3장에서 절정에 이르고 4장에서는 약간 축소되었다가 5장에서 슬픔의 탄식으로 마친다. 이 애가로 인해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린다.

3. 래리 크랩은 <하나님의 러브레터>에서 예레미야 애가의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고난은 회개로의 부르심이란다. 비록 귀에는 거슬리지만 자비로운 부르심이다. 그리고 모든 고난은 고통스럽지만 소망으로 가는 기회다.” 우리는 래리 크랩의 말에 덧붙여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성품이 있다(애 1:18).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성품은 하나님의 백성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조금의 양보나 타협도 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애가도 하나님의 러브레터다. 자, 이제 이 하나님의 러브레터를 읽어보자.

예레미야애가 1장 환난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찬 279)

1. 선지자가 슬퍼하는 것은 사람들이 포로로 붙잡혀가고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습 때문이다. 사랑 받던 공주가 하루 아침에 과부의 신세가 된 형국이다(1). 밤새 울고 눈물이 뺨에 흐르나 위로할 자도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였다(2). 유다가 그렇게 의지하던 동맹정책이 아무 쓸모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 많던 도로는 적막하고 제사를 드릴 사람도 없고 제사장들은 탄식할 뿐이다(4).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 전인 주전 597년에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의 정황을 묘사하는 것 같다. 이렇게 시온의 영광이 사라진 것은(6) 유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곤고함이다(5).

2. 선지자는 이 환난 속에서 예전의 행복한 날들(아마 요시야 왕 때 개혁을 일으켰던 시절)을 회상하지만 이것은 비참함만 더해줄 뿐이다(7). 예루살렘은 범죄로 말미암아 그 벗은 몸을 드러내게 되었고 주변의 나라들은 이를 멸시한다(8). 이 범죄는 감출 수 없고 숨길 수 없다(9).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말씀하셨건만 유다는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유다의 영광인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들이 들어가 약탈과 모욕을 안겨주었다(10).

3. 12절부터는 선지자의 탄식이라기 보다 예루살렘의 탄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로 인해 탄식했는데 이제 탄식의 주체가 나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을(12)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 예루살렘을 이기게 하셨다고 표현한다(13). 이 진노를 인하여 예루살렘이 탄식하고 우는 것을 선지자는 그리고 있다(14~16). 하나님의 진노가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들을 다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불결한 존재일뿐이다(17).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18).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에 범죄하는 백성을 의롭게 다루시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것은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20). 선지자는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는 모든 악한 민족과 나라들을 심판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21~22).

5. 환난을 당할 때, 중요한 것은 자기의 환난과 고생 자체를 주목하고 거기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자신의 범죄함, 패역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20). 환난이 범죄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일 때, 더욱 그렇다.
C.S.루이스의 말대로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다.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게 소리를 지르실 때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다.

6. “하나님 아버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을 사는 시대에, 저희가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 울 줄 알게 하옵시고, 이 고통 속에서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를 주옵소서. 또한 공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주의 교회를 회복시키시는 복된 은혜를 베푸사 주의 교회와 주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