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예렘미야 애가 강해

예레미야 애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반젤(복음) 2019. 12. 28. 09:58


          

예레미야 애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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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불꽃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개혁의 횃불을 드높이 들었던 요시야가 허망하게 죽고 만 것입니다.

므깃도 전투 - 훗날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으로 묘사함 - 는 치열했습니다.

이집트와 맞선 요시야입니다.

그는 국제정세를 잘 읽었습니다.

이집트의 편을 드는 것이 별로 유익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요시야가 이집트의 군대를 막다가 전사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유다의 마지막 희망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요시야의 개혁을 내심 반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자신의 사명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래서 가시 돋친 말도 서슴없이 내놓았습니다.

그래도 들을 귀가 있는 자가 왕이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통렬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래도 그것을 타당한 줄 아는 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어쩌면 요시야의 통치 시절의 예레미야는 행복한 선지자일지 모릅니다.

상당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음성인줄 알고 겸비할 줄 아는 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요시야가 죽은 것입니다.

그것도 꿈을 이루기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데 죽은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슬픔을 노래로 승화시킵니다.

그 속에는 미처 요시야에게 전하지 못한 가슴 아픈 진심을 담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저자의 이름을 곁들여 슬픔의 노래라 하여 “예레미야 애가”라 부릅니다.

애가는 분명 슬픔의 노래입니다.

아니 그 이상의 노래입니다.

바로 장송곡입니다.

아마도 가장 슬픈 노래가 장송곡이 아니겠습니까?

망인(忘人)을 떠나보내며 슬픔을 짓누르며 장탄식을 쏟아냅니다.

 

원래 예레미야 애가는 남 유다의 멸망을 가슴아파하며 되새김하는 회고의 노래입니다.

유대의 절기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픈 날이지요.

국가의 멸망을 곱씹으며 반성의 기회로 삼는 그 날에 부르는 처절한 노래입니다.

그래서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예레미야 애가가 성문서에 편집되어 있습니다.

성문서의 메길로트에 포함된 다섯 편의 노래 책 중 하나이지요.

기왕에 메길로트란 말이 나왔으니 확인의 차원에서 한번 복습해 보기로 합시다.

메길로트는 이스라엘의 고유한 절기와 맞춘 성경을 말합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유월절에는 아가를 부릅니다.

오순절에는 룻기,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부릅니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절기들입니다.

여기에 비교적 후대에 생긴 두 개의 절기가 포함됩니다.

그 하나가 유다의 멸망을 기억하는 애도일입니다.

그 날에 부르는 노래가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벨론 포로기 말엽에 유다의 위기가 발생합니다.

하만이란 고위관료가 애매히 유대인을 모함한 것이지요.

아예 떼로 유대인을 말살할 끔직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을 무산시키고 유대인을 살려낸 쾌거가 에스더의 활약이지요.

그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의 전적인 조언을 따른 결과입니다.

그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그 부림절을 맞아 읽는 책이 에스더서이지요.

 

자,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예레미야 애가의 기록연대도 대충은 짐작이 갑니다.

요시야의 사망 이후, 그 언저리에 저작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애가는 장탄식을 늘어놓는 정신없는 가운데 읊은 노래입니다.

그런데 정작 애가를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그 정교함에 탄복합니다.

바로 기억을 더듬기 좋도록 히브리어 알파벳 어순에 따라 노랫말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레미야 애가는 애가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시적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기교적인 아크로스틱(acrostic)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알파벳 어순에 맞추어 시상을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아크로스틱 구조의 시는 기교에 몰입하다보니

시상이 그리 탁월하지는 않습니다.

낡은 일기장에서 습작시인의 글을 찾아냈습니다.

 

   구름이 햇살을 가리는

나른한 봄날

두꺼운 책장 사이로

라일락 향기가 콧등을 간지럽힌다.

모르는 이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바람에 실려 온 그리운 이의 그 훗 이야기 …(1990. 3)

 

언제 이런 글을 썼을까 추억을 더듬을 겨를도 없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크로스틱 구조였습니다.

한글 알파벳 어순에 맞춰 나름의 시상을 읊은 것이지요.

히브리 시의 아크로스틱 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이 모두 22개입니다.

물론 정확하게는 23개이지만 중복의 의미가 있는 철자가 하나 있지요.

그래서 아크로스틱 구조로 된 히브리 시는 모두 22개, 혹은 그 배수의 절로 구성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시가 시편 119편일 것입니다.

여덟 절을 한 단위로 해서 히브리어 알파벳 어순에 맞춰 율법의 찬가를 읊었습니다.

대단한 시편이지요.

아크로스틱 구조는 기교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주로 찬가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애가, 그것도 가장 슬픈 장송곡에 이런 기교의 시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의 탁월한 시적 감각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레미야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요시야의 사역이 나름 상극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를 기리는 시를 읊었겠냐고 말하는 것이지요.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들 수 있는 판단의 자료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레미야가 지닌 비전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시야의 사역과 예레미야의 사역은 비전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시야의 사역이 현재적 사역이라면 예레미야의 사역은 미래적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청결 행위와 뒤 이은 성전파괴의 예고와 맞물린 형국이지요.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청결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반면 예레미야의 예언은 성전파괴가 지닌 영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새 언약의 시대를 멀리 내다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요시야를 미워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과 다르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행보를 미워하겠습니까?

선지자이기에 그저 박수를 칠 수 없다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덜컥 요시야가 사망합니다.

비극적 소식이 아닙니까?

내심 요시야의 개혁운동에 박수를 보낸 예레미야입니다.

물론 그 개혁의 한계를 알기에 비판의 메시지를 전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개혁을 하지 않는 것보다야 백번 천 번 옳은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요시야의 관계를 원수처럼 이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장송곡임에도 예레미야 애가는 소망을 놓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절묘하게도 아크로스틱 구조로 시를 쓰면서

동시에 교차대구법의 형식도 취하고 있습니다.

인쿠르지오 양식으로 예레미야 애가를 살피면 3장이 결론이 됩니다.

3장에서 예레미야는 유다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쫓기는 이 처참한 신세

생각만 해도 소태를 먹은 듯

독약을 마신 듯합니다.

주여 이 몸 잊지 마시고,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두고두고 기다리겠습니다.

주 야훼의 사랑 다함 없고

그 자비 가실 줄 몰라라.

그 사랑, 그 자비 아침마다 새롭고

그 신실하심 그지없어라.

‘나의 몫은 곧 야훼시라’ 속으로 다짐하며

이 몸은 주를 기다리리라.

야훼께서는 당신을 바라며 찾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신다.

야훼께서 건져 주시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공동번역 예레미야 애가 3: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