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강가에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시 137편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이국 땅에서 고난을 겪는 유대인들의 아픔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1-3). 그들은 바벨론 강변에서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조국과 시온을 애타게 그리워했다(4-6).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도와준 에돔(7-)과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8-)의 파멸을 위해 기도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후손들은 마지막 두 차례에 걸친(주전 596, 586년) 바벨론 침공으로 말미암아 지중해 연안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들에게 임한 재난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끝맺게 했지만, 한 편으로는 새로운 역사가 싹트고 있었다.
1. 주전 586년 이후의 유다의 지리적 상황
1-1. 국가 조직의 해체
유다는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나라와 국가 조직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전지역을 완전히 파괴시켰기 때문에 다시 재건하는 데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유다의 성읍들은 대부분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에 황폐된 채로 남아 있었다.
1-2. 유다 지역이 둘로 분단됨
이때에 유다의 영토는 둘로 나뉘어졌다. 유다의 일부분은 북쪽 사마리아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영토는 에돔 족속이 점유하고 있었다. 에돔 족속은 이때에 거주지를 사해 남동쪽에서 헤브론으로 옮겼으며, 후에 그들은 이두메아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후에 유대의 왕이 된 헤롯이 이두메아인이었다).
2. 흩어진 유대인들의 상황
유능한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그리고 유다에 남겨진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 정치적인 고역을 견디다 못해서 봇짐을 싸서 짊어지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수의 유대인들만 예루살렘 안팎에 남아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2-1. 애굽
다윗의 자손이며 국수주의자였던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한 군부 지도자들은 바벨론을 대신해서 이 지역을 관할하던 그달리야(그다랴) 총독을 살해했다. 그 후에 그들은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피신을 했다. 그 후로 애굽은 점차로 유다 난민들의 주요한 집결지가 되었고, 약 100년이 지난 후에는 유다 자손들이 나일강 어귀에 있는 엘레판틴 섬(현재의 아스완 섬)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아낫 여신을 함께 섬기는 혼합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후에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와 그 밖의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되었으며, 헬라 시대에는(주전 333년 이후) 애굽이 사실상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디아스포라)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2-2.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
수많은 유대인들은 애굽뿐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있는 여러 나라로 이민을 가서 살았다. 그리고 후에는 유대에 사는 유대인보다 유대를 떠나 사는 유대인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흩어져 살던 각 나라에서 유대인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 때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2-3. 바벨론
가.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얼마나 되는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일반적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실제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은 약 4,600명 정도였다(렘 52:28-30). 이 숫자가 당시의 관습대로 남자들만 계산한 것이라고 간주해도, 바벨론에 끌려간 전체 포로의 수는 15,000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유로운 생활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인들은 그 곳에서 생활하는 데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바베론에서 일정한 거처를 정하고(겔 8:1 - )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지 주민들과 함께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당시 반 유대 움직임이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데 큰 불이익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바벨론 문명이 고국의 문명보다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목축과 농사에 의존하던 단조로운 생활을 벗어나서 바벨론 안과 그 주변에서 고도로 발달된 농업 기술과 산업 시설들을 접촉할 수 있었다.
다. 회당의 발생
특히 바벨론 포로 시대에는 상당수에 달하는 유다 백성들이 예배와 율법 연구를 위한 모임들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에 회당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회당이란 말은 "함께 모인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쉬나고게"에서 나왔다.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흩어져서 살고 있던 여러 지역에 회당을 세우고 전통적인 종교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세워지게 되었다.
2-4. 포로 기간 중의 신학적 활동
가. 새로운 환경에 맞는 신학의 필요성
몇세기 동안 이스라엘의 영토는 가나안 땅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기업으로 주셨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년에 일어난 바벨론 포로 사건은 이러한 그들의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굳게 믿었던 가나안 땅은 이방인인 바벨론인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리고 바벨론인들은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파괴해 버렸다. 택함을 받은 민족은 포로가 되어 낯선 이국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곳에서 가나안 땅보다 더 좋아보이는 문화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바벨론에 세워진 거대하고 화려한 신전들을 보고, 자신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보잘 것 없는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여호와께서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신인가?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바벨론 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포기하고 싶었고, 주변 환경에 익숙해 지면서 점점 더 바벨론 종교와 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당시의 환경은 유대인들에게 신학에 개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1)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를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2)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은 지켜질 것이며, 만일 지켜진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성취될 것인가 ?
3)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이 아닌 바벨론에 있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실 수 있는가?
4)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바벨론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가?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많은 의문점들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답변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삶의 환경이 넓어짐에 따라 세계적인 안목을 가져야 했으며, 현재에 처함 새로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야 했다. 만일 그들이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서 세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경을 통해 자기 백성을 더 성숙한 백성으로 만드셨다. 이러한 환경은 오히려 유대인들의 신앙을 더 넓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서 조상들의 신앙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으며, 또 그 이해를 잘 보존했다.
이러한 신학적인 기초 공사는 주전 597년과 586년의 대재난이 있기 전에 이미 잘 다져져 있었다. 위대한 선지자들은 오래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지 않고, 참된 예배는 특별한 장소에서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데 있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은 지역적 문제나 건물이나 제사와 같은 외적 요소에 있지 않으며, 참된 신앙은 공의와 자비와 사랑을 행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바벨론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외식과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국을 떠나 바벨론에 살면서 형식과 외식을 떠나 자비와 공의와 경건을 되찾게 되었다.
나. 제사 공동체에서 율법 공동체로
바벨론에 살던 포로들은 약속의 땅과 성전을 잃었지만, 역사와 전통은 그대로 고수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이 왜 이방인의 포로가 되었는지 발견하려고 했다. 그들은 성경 연구를 통해서 자신들이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들은 후손들이 자신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이러한 내용을 정리해서 후세에 남기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이 때에 바벨론에서는 여러 권의 책들이 편집되거나 완성되었다(왕하 25:27-30). 이로 인해 바벨론 포로 기간에 율법에 대한 관심이 더 고조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결과를 문서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주권을 잃고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준수하는데서 찾으려고 했다. 영토와 성전을 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준수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출 19:6-). 이러한 생각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성전중심의 "제사공동체"에서 "율법공동체"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배후에는 타락한 백성을 정결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선지자들을 통해서 죄악에 물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씻고, 그들을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백성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셨다. 율법을 잊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은 연단 과정을 통해서 찌끼가 제거되고,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백성들로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계획을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을 통해서 전해주셨다.
3. 포로 기간 중의 문서 활동
포로 기간 중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예레미야 애가서는 포로 후 유대인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유대인들이 포로가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며, 포로 중에 어떻게 소망을 유지하고, 그들의 멸망에 동조하며 기뻐했던 에돔 족속에 대해 어떻게 처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4. 예레미야 애가서
1-1. 저자 - 예레미야
1-2. 제목: 애가("슬프다"는 뜻)
1-3. 예레미야 애가서의 문학 형식과 내용 개관
예레미야 애가서는 다섯 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장이 한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5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1-4장)은 모두 답관체 형식(첫 글자가 히브리어 22개의 알파벳 순서를 따름)으로 되어 있다.
특히 3장은 히브리 알파벳 문자 마다 3절씩 기록하여 총 66절로 구성되어 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주전 597년과 586년에 일어난)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 애가서 저자는 애가서 1 장에서 주전 597년의 예루살렘 점령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 애가서 2,4장은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는 애가서 저자의 슬픔이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슬퍼한 이유는 주전 597년에 예루살렘이 침공을 받은 후에 다시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공격을 받았기 때문)
- 애가서 3장과 5장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포로 이송이 끝난 후에 백성들이 체험했던 혼란과 기근과 정치적인 압박에 초점이 맞추고 있다. 애가서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그들을 심판하신 여호와께 자비를 구하고, 자신들을 친 바벨론에 대해 보복해 주기를 간구하고 있다.
1-4. 예레미야 애가의 중심 메시지
애가서 메시지의 사상들적 배경은 무엇인가? 유다는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북 이스라엘이 당했던 것과 같은 비극을 맛보아야만 했다. 멸망 직전에 요시야 왕은 여러 부분에 걸쳐서 대개혁을 감행했다. 그는 성전을 정화하고 수리했으며, 지방의 산당들을 철폐하고 각종 이교적 요소들을 제거했다. 또한 그는 모세의 율법을 국가 생활의 중심으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애굽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고,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틈에 끼어 노리개 감이 되고 말았다. 또한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애굽과 손을 잡고 바벨론에게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유다는 3차에 걸친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면 마지막 요시야의 개혁은 아무 효험이 없었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바벨론 신보다 약한 분이란 말인가?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점령되고 큰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가? 예레미야 애가서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을 하고 있다.
애가서는 애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완전히 죽은 시체를 위한 장송곡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다는 실제로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들은 많은 고난과 슬픔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살아계셨다! 하나님은 바벨론 신에 눌려 힘을 못쓰는 분이 아니라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치신 분이었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무관심하거나 무력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보다 적극적으로 범죄한 자기 백성을 징계하고 연단하여 자원하여 율법을 준수하는 백성을 만드시길 원하셨다(1:13-15, 2:1-8, 22, 3:1-18, 43-45 등). 애가서 저자는 여호와께서 여전히 살아계시며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점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연단 기간이 끝나면 자기 백성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반면, 예레미야 애가서는 명말한 예루살렘을 돌이켜보면서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애가서 저자는 성과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며, 처녀와 소년들이 칼에 맞아 죽고, 굶주린 여인들이 자기 아이를 먹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이러한 암울한 광경을 보면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둠과 절망 속에서도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며.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고백한다. 그는 어둡고 암울한 속에서도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통해 한 줄기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1-5. 애가서의 히브리 성경에서의 위치
애가서는 유대인의 정경 중에 지혜서에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예루살렘 멸망 기념일(주전 586년과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기념하는 날-7월 중순)에 읽으면서 자신들의 일을 반성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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