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당시와 관련되는 성벽 재건 방해에 관한 삽입 기사(4:7-22)를 제외하면, 본서는 페리시아 왕 고레스 1세의 1차 귀환 조서가 내려진 B.C. 538년으로부터 에스라를 위시한 일부 백성들이 2차로 귀환한 B.C.458년까지 약 80년간의 기간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에 1차로 포로로 잡혀 간 이래(단1:1-5)약 70년의 세월이 경과한 후 하나님은 마침내 ‘남은 자들’을 유대 땅으로 보내사 당신의 나라를 새로이 건설하게끔 하셨다. 본서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발판삼아 언약 공동체를 새로이 구성하고자 하는 희망찬 전진과 끊입없이 대두하는 대적들의 집요한 방해 공자ㄱ, 그러나 마침내 믿음으로 이 모든 날관을 극복해 가는 용기와 지혜의 흔적들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암담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궁극적 타개책은 얼마든지 모색될 수 있음을 가르치는 봇서는 성전 재건과(1-6장) 개혁 운동(7-10장)의 두 부분으로 대별된다.
1. 제목과 저자
1) 제목
본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에즈라'로 불렀다. 그러나 에스라 2장의 내용이 느헤미아 7장에서 반복되며, 이 두 책이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닌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두 책은 별개의 것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헬라어 칠십인역에서는 본 서를 '에스라1서'라고 했으며, 라틴어 벌게이트역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에스라'로 칭하였다. 그러므로 본 서의 제목은 본 서의 저자인 동시에 중심 인물인 제사장 에스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 저자
에스라서의 저자는 지금까지 학사인 에스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에스라서에서 저자에 관한 정확한 언급이 없고, 문장도 1인칭과 3인칭이 섞여서 나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서로 다른 몇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탈무드의 기록에는 본 서의 저자를 에스라로 밝히고 있다.
또한 문장의 주어가 바뀌는 경우는 저자가 한 사람일 때도 나타나는 것으로서 고대 바벨론 문서나 다니엘서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에스라가 자신을 가리켜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스7:6)라고 부르는 것이 에스라 저작설에 대해 약간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이러한 묘사도 역사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오히려 에스라의 지식과 그 심오한 사상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본 서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역대기와 비슷한 문체로 기록되었으며, 사건 묘사의 치밀성으로 보아서도 에스라의 저작인 것이 유력하다.
2. 기록 연대와 기록 목적
1) 기록 연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와 역대기는 그 시대적 배경이 연속적이어서 기록 연대상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① 후기 연대설: 에스라서를 느헤미야서보다 더 늦게 기록되었다고 보는 견해로서 비평주의적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모빙켈(Mowin-ckel)은 본 서의 기록 연대를 주전 200년경으로 잡았으며, 토레이(Torrey)는 주전 250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초의 비평주의자 학자들은 느12:11, 22에 나오는 얏두아가 요세푸스의 책에 나오는 알렉산더 대왕의 얏두아와 동일 인물임을 내세워 주전 30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② 전기 연대설: 이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은 느12:11, 22에 나오는 얏두아가 요세푸스의 책에 나오는 얏두아와는 동명 이인이라고 주장하며 후기 연대설을 반대한다. 에스라서는 느헤미야의 귀국 후인 주전 444년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에스라서에서는 전기 연대설을 지지하며, 에스라가 느헤미야 때의 대제사장인 여호하난의 방에 들어간 기록을(스10:6) 통해 볼 때, 에스라서는 에스라 생애 말기인 주전 444년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2) 기록 목적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거의 같은 시기의 포로귀환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라나 느헤미야의 기록 목적이 유사하다.
에스라서의 기록 목적은 첫째, 포로귀환 이후에 벌어진 성전 건축의 역사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둘째, 성전 건축과 같은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에스라 3장에 나오는 성전의 기초 건축을 위한 백성들의 일치 단결(1절), 방해 세력에 맞서는 용기(3절), 자발적인 예물 헌납(4-7절), 조직적인 역할 분담(8, 9절) 등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셋째, 70년이라는 바벨론 포로 기간과 포로귀환 그리고 성전 재건을 통해서 드러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포착될 수 없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3. 주제 및 특징과 구성
1) 주제 및 특성
제 2의 출애굽이라 불리우는 포로 귀환의 역사를 보여 주는 본서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하에 그 백성들이 신앙을 회복하고 팔레스틴에 재정착해가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와 느헤미야서에는 심오한 신학적 주제들과 이 두책의 특질을 보여 주는 특유의 강조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첫째로, 선민 이스라엘의 예배와 신앙의 구심점인 성전이 재건되는 과정을 부각시키고 있다. 포로 이전 시대의 대속죄일에는 민족적 죄악을 용서받는 의식이 성전에서 거행되었다(레16장). 그외에도 성전 예배나 성전에서 거행되는 각종 희생 제사는 백성들의 여호와 신앙을 순결하게 보존하는 버팀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며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이러한 종교적 행사들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귀환한 백성들이 제일 먼저 제단을 쌓고 성전을 재건하고자 한것은 너무도 당연히 선행되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성전 재건은 단순히 훼파된 건물의 재건이라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거나 왜곡된 종교 의식과 행사들을 새롭게 회복시키는데 보다 큰 의의가 있었다. 본서에 등장하는 에스라의 종교 개혁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관계가 강조된다. 족장 시대 이래로 언약은 여호와와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수단이었다. 언약의 중요한 측면 중의 하나는 여호와와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수단이었다. 언약의 중요ㅕ한 측면 중의 하나는 그것이 제공하는 약속과 그에 대한 기대였다. 이러한 특성은 여호와 신앙을 지탱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포로 후의 유대 백성이 그토록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꿋꿋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큰 힘으로 작용했다. 언약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백성들 상호간의 관계 또한 규정하고 있어서 그들간의 결속을 강화시켜 주엇다. 따라서 언약 관계하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백성들 상호간에 대한 사랑 또한 중요하였다. 느헤미야가 동족간의 착취를 엄금하였던 것도 이러한 취지에서 이해된다(느5장). 요컨대, 포로 귀환민들에게 있어 언약 관계란 곧 살아있는 관계였으며 매일의 삶속에서 충실히 구현되어야 할 상항이었다.
셋째로, 언약 백성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돋보인다. 이사야 선지자는 “남은자 곧 야곱의 남은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라고 예언하였다(사10:21,22).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는 이러한 예언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에 그대로 성취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스룹바벨의 영도하에 귀환한 유대인들의 수효는 거의 5만 명에 육박했지만(2:64이하) 그들은 세계 도처에 흩어졌던 디아스포라의 인원에 비해서 극히 미미한 수효의 남은자에 해당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9:15). 아울러 그들은 살아서 유대 땅에 돌아온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일관된 사랑 덕분임을 고백하였다(9:8,9).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한 씨’로서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태를 보존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져야 했다(9:2, 말2:15).
넷째로,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이 강조된다. 귀환민들은 ‘남은자’ 혹은 ‘거룩한 씨’로서 하나님의구속 역사를 이어가고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신령한 메세지를 전달할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본서와 느헤미야서에서는 한결같이 신앙의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다(10장,느8,13장). 특히 본서 10장에는 이방인과 통혼한 백성들에게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단순히 혈통상의 배타성이나 국수주의적 편협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방 문화와 우상 세력으로부터 여호와 신앙을 수호하려는 숭고한 동기에 기인한 조치였다. 특히 유대 땅과 인접한 사마리아 지역에는 포로기 이후로 종교적 혼합주의가 창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적인 신앙을 침해하는 큰 위협 요소로 작용하였다.
2) 구성
예스라서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의 조서로부터 시작된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약 5만 명에 달하는 귀환민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런 본 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스 1-6장)와 후반부(스 7-10장)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에스라 이전의 사실에 관한 내용으로 주로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일어난 제1차 귀환과 귀환자의 명단(스1:1-2:70) 그리고 성전 재건의 시작과 중단, 재개와 완성(스 3:1-6-22)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반부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성전 재건이다. 후반부는 에스라 이후의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약58년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여인과 혼인하는 등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해 갔다. 이런 시점에서 에스라 인도하의 제2차 귀환(스7:1-8:36)이 이루어졌고 그후 에스라의 종교개혁(스9:1-10:44)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언약 갱신이 완성되어 갔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본문 해설
1. 에스라서의 저작 목적
에스라의 중요성은 서두에서 말하고 있는 저작목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서는 히브리 사람들이 70년동안이나 포로로 잡혀 있다가 막 해방되려는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의 고레스 왕을 세우셨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하나님께 불복종하고 사악하므로 바벨론 사람들에 의하여 벌을 받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바벨론 역시 잔악하고 사악하므로 패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렘25:11-25).
이사야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백 년 이상 이전에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사로잡혀 포로가 되고, 그 잔악하고 사악한 나라도 계속해서 패망할 것과(사13:19, 20),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고레스에 대해서(사44:28) 예언했다. 따라서 예스라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민족들을 어떻게 주관하시는가를 명쾌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란 B. C. 605년에 처음 유대인들이 사로잡혀 갔던 때로부터 B. C. 538년 고레스가 칙령을 발하여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돌아온 때까지를 말한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서를 통해서도 에스라서의 연구에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며, 제1진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운명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 두 권은 모두 귀환 초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최초의 총독인 스룹바벨 통치하에서의 성전 재건을 다루고 있다.
2. 저자와 저작 연대
에스라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역대기뿐만 아니라 에스라서의 저자를 제사장이자 서기관인 에스라라고 말한다. 에스라는 서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자였으며 모세 율법의 교사였다. 그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제2진의 귀환자들 혹은 대표관들과 함께 B. C. 457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 사이의 지배적인 견해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혹은 연대기 편자가 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의 3부작내용을 참조하고 그외의 다른 많은 자료들을 모아서 역대기-에스라- 느헤미야 역사서의 한 부분으로서 에스라서를 편집하여 썼다는 것이다.
에스라서의 일부분은 이스라엘의 동쪽과 북동쪽에 인접한 나라들에 의해 사용되던 아람어로 씌어졌는데, 고대의 중근동에서는 외교적인 언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에스라서는 주로 일반적인 기록과 공식적인 문서의 필사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연결된 역사서와 함께 아람어로 되어 있다. 또한 유대 관리들이 바사 왕에게 보낸 서신이나 그 관리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왕의 답신과 칙서도 아람어로 되어 있다. 여러 가지의 역사적인 기록과 기자 작신이 쓴 연결된 역사서에서 취한 유다의 극적인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에스라의 나머지 부분들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에스라의 특징은 역사가들이 그것은 에스라의 개인적인 전기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점이며, 또한 그것은 그 저자가 원본에서와 같이 1인칭 대명사인 '나'와 '우리'로 썼다는 것이다. 그 책의 나머지 부분은 주로 3인칭으로 되어 있다. 에스라서는 책 속에 있는 것을 근거하여 볼 때 제사장이나 서기관인 에스라가 인도한 제2진의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B. C. 457년 이후에 씌어졌음이 틀림없다. 더욱이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가 하나로 연결된 역사서라고 가정할 때 그 저작 시기는 더욱 늦어진다. 즉 연대기에 언급된 다리오 왕(Darius Codomannus B. C. 335-330)과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가 언급한 알렉 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 C. 336-323)의 시대만큼이나 늦게 저작되었다. 그렇지만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에 있는 역사와 관련된 주요 사건을 볼 때 유대인의 역사적인 에스라서는 그 저작 시기를 약 B. C. 432년까지 거슬러 생각할 수 있다.
3. 에스라의 특징
① 역대기서, 이스라서, 느헤미야서는 서로 연결되어 이스라엘 왕정 초기부터 왕정의 몰락과 회복의 전과정을 파노라마(Panorama)식으로 개관한 책이다.
② 선민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야기된 포로 생활을 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귀환하여 새로운 신앙 공동체로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③ 역대기가 솔로몬 성전 건축과 파괴를 줄거리로 진행된 반면, 에스라서는 스룹바벨 성전의 건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는 저자인 제사장 출신 에스라의 집필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4. 에스라와 그리스도
본서에는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삼하7:4-17) 하나님이 이방 땅에서 고통당하던 다윗의 후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금 불러 모으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1차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의 주역이었던 스룹바벨이 여고냐의 손자로서 바로 메시야 계보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대상3:17-19, 마1:12,13)후에 메시야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한 예시라 할수있다. 또한 대적들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전 재건을 완성한 것은,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메시야 사역을 완수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승리를 연상시킨다.
5. 포로 및 포로 귀환의 역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국가를 통해 당신의 거룩한 구속의 역사를 전개시켜 나가고자 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신령한 자태를 상실하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방인의 손에 의해 멸망당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왕하17:6; 25:8-12).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때가 이르매 마침내 포로지로부터 귀환하게끔 섭리하셨다. 또한 포로기 자체가 이스라엘의 신학적 발전에 끼친 영향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왜곡된 선민 의식에 근거하여 형성된 혈통상의 배타주의와 포로 상황에서 강력히 대두한 보편주의 사상 사이의 긴장은 유대교 및 나아가 기독교 발전에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성전이나 왕궁과 같은 외적인 제도적, 민족적 표징들보다는 말씀에 대한 가중된 집중 역시 포로기의 중요한 유산이다. 이제 네 차례에 걸친 바벨론 포수와 세 차례에 걸친 포로 귀환의 역사를 도표를 통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 바 벨 론 포 수 ]
포로 순서 | 1 차 포 로 | 2 차 포 로 | 3 차 포 로 | 4 차 포 로 |
연 대 | B.C. 605 년 | B.C. 597 년 | B.C. 586 년 | B.C. 582 년 |
바벨론 왕 | 느부갓네살 | 느부갓네살 | 느부갓네살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 | 느부갓네살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 |
유대 왕 | 여호야김 3년 | 여호야긴 1년 | 시드기야 11년 | 그달랴 총독 |
포로 과정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느고를 격파하고 그 동맹국이던 유다까지 완전히 점령함. 이때 성전 기구의 일부를 바벨론의 시날 땅으로 약탈해 감. | 느부갓네살이 그의 심복들을 앞세우고 예루살렘을 재차 침공하여 포위 공격함. 유다왕 여호야긴은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함. 느부갓네살은 대부분의 유다 백성을 사로잡아가고,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약탈해가고 성전의 금기명을 훼파하였음. |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재위에 있은지 8년 되던 해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치고 대신 시드기야를 유다 왕위에 세움. 그러나 시드기야가 반(反)바벨론, 친애굽 정책을 추진하자 느부갓네살은 자기를 배반한 시드기야를 징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하도록 시켜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함. 이때 바벨론 군대는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을 처토화 시킴. | 국수주의자였던 이스마엘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된 그달랴를 살해하자, 느부사라단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백성들을 또 한차례 사로 잡아감. |
포로자 | 유다왕 여호야김과 왕족및 다니엘을 위시한 일부 귀족들이 잡혀감. | 여호야긴과 왕족들, 대부분의 귀족들과 용사들 및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다 백성들이 잡혀갔으며 그중에는 에스겔 선지자와(겔1:1-3) 모르드개(에2:6)도 포함됨. | 예루살렘 성중에 남은 백성과 항복한 자들 중 빈천한 자를 제외하고 모조리 끌려감. | 남은 유다 백성중 일부가 잡혀감. |
참고성경 | 단 1:1-5 | 왕하 24:10-17 | 왕하 25:8-12 | 렘 52:30 |
[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
귀 환 순 서 | 1 차 귀 환 | 2 차 귀 환 | 3 차 귀 환 |
연 대 | B.C. 537 년 | B.C. 458 년 | B.C. 444 년 |
바 사 왕 | 고레스 | 아닥사스다 1세 | 아닥사스다 1세 |
인 도 자 | 스룹바벨, 예수아 | 에스라 | 느헤미야 |
조서내용 | 포로민 귀환 허가, 성전건축 허가, 성전 기명 반환, 성전 건축 자재 지원 | 포로민 귀환 허가, 제물,재정 지원, 성직자 세금 면제, 자체 관료 조직 허용 | 예루살렘 성벽 재건 허가, 건축 자재 지원. |
귀환자 수 | 일반회중 : 42,360 명 노비 : 7,337 명 노래하는자 : 200 명 도합 : 49,897 명 | 남자 : 1,496 명 레위인 : 38 명 수종자 : 220 명 도합 : 1,754 명 | 통계없음 |
관련사건 | 성전 건축 개시(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B.C.520년까지 중단). 제사를 드림. 장막적 준수. 성전 건축 재개. | 이방인과의 통혼으로 인해 상실된 신앙의 순수성 회복을 위한 개혁이 에스라에 의해 주도됨. | 사마리아인들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52일만에 완공됨. 에스라가 율법을 선포하고 가르침. |
참고성경 | 스 1:1-4:6 4:24-6:22 | 스 7:1-10:44 | 느 1:1-13:31 |
6. 포로귀환을 중심으로 본 선민의 신앙사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단순히 어떤 왕조의 흥망사, 정치사 혹은 문화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가를 보여 주는 소위 신앙사요, 구속사라 할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은 고대 문명의 중심지인 메소포다미아와 애굽을 잇는 교두보에 위치하였으며, 경제적.문화적 유통의 길목이요, 정치적,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열강들의 각축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위치에 당신의 백성을 거주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유무 정도에 따라 때로는 번영을 허락 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엄청난 시련과 환난에 봉착하게도 하셨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포로 귀환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왕정시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신앙상태와 주변 열강들과의 관계의 변천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기로 하자.
1). 포로 이전까지
B.C. 1050년경 사울의 등극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부국 강병의 풍요와 영광을 누렸으나 솔로몬의 우상숭배를 계기로 하여 급속히 몰락해 가다가 솔로몬 사후에 마침내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왕하25:8-12). 하지만 부녕ㄹ 왕국국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국분열의 1차적 원인이었던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전철을 위우치기는 커녕 도리어 더 큰 죄악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남왕국 유다의 몇몇 현왕들의 단절적인 종교개혁을 제외하고는 남북왕국을 통털어 대체로 여호와 신앙을 도외시하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우상 세력을 추종하기까지 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로 ‘제사장 나라’
(출19:6)다운 거룩한 자태를 드러내어 당신의 신령한 구속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격을 스스로 상실함으로써,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 등을 통해 남북 왕국의 파멸과 심지어 성전의 파괴까지 선포하였다(사1:1-12:6). 그리고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B.C. 722년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B.C. 586년에 함락되고 말았다 (왕하17:6; 25:8).
2). 포로기 및 포로 귀환 이후
남북 왕국의 멸망으로 인해 비록 국가 단위의 이스라엘은 붕괴되었지만, 이스라엘을 통해 구속사를 전개시키겠노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은 그 와중에서도 소수의 남은자들 곧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자들을 통해 계속 달신의 신령한 계획을 전개시켜 나가셨던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중에는 이방 문화에 흡수되어 민족적 정통성을 상실한 자들도 많았지만 소수의 유대인들은 오히려 보다 깊고 미래 지향적인 신앙에로 나아갔다. 즉 이들은 민족의 멸망의 원인에 대해 깊은 통찰을 갖게 되었고 혈통적 배타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다원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안목에서 율법을 재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의식적이고 외형적인 제도보다는 말씀 자체에 더욱 집중하였으며, 다윗 시대에 배태한 메시야 사상이 서서히 자라간 시기도 바로 이무렵이었다. 특히 B.C. 537년의 제 1차 포로귀환을 필두로 하여 도합 세차례에 걸쳐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고 B.C. 516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됨으로써 이스라엘은 새로이 민족적 존재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사의 궁극적 의미보다는 피상적 현실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암매한 시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또다시 영적 나태에 빠져 들어갔으며 결국 바사,마케도니아,로마등 이방 열강들의 손아귀에서 헤어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B.C. 400년경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이후에는 예언마저 중단되어 심지어 구속사의 맥락마저 끊어진 듯한 암담한 고갈 상태를 맞이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신음하는 민중들 사이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메시야에 대한 대망 사상이 한층 무르익어 갔다.
3). 메시야 탄생 이후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와 메시야 왕국을 대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영적인 하나님 나라와 진정한 메시야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결국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된 복음은 이방 세계의 빛으로서 증거되어 갔고, 예수님 이래로 성도는 영적 이스라엘(교회)을 통한 신앙사의 전개 중에서 위대한 종말론적 소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해 왔다.
*** 본서의 관련 연대표 ***
연 도(B.C.) | 사 건 | 성 경 본 문 |
538 년 | 고레스의 조서 | 스 1:1,2 |
537 년 | 스룹바벨 인도하의 1차 귀환 | 스 2:1-70 |
536 년 | 성전 재건 작업 개시 | 스 3:8-13 |
536 년 | 성전 재건 작업 중단 | 스 4:23 |
520 년 | 성전 재건 작업 재개 | 스 4:24-5:2 |
520 년 | 다리오의 성전 재건 승인 조서 | 스 6:6-12 |
516 년 | 제 2성전 완공 | 스 6:15 |
479 년 | 살라미스 해전 | |
479 년 |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 에 2:12-18 |
458 년 | 아닥사스다의 귀환 조서 | 스 7:11-26 |
458 년 | 에스라 인도하의 2차 귀환 | 스 7:1-10 |
| 성벽 재건 방해 | 스 4:7-23 |
445 년 | 느헤미야의 탄원 | 느 1:1-3 |
444 년 | 느헤미야 주도하의 3차 귀환 | 느 2:9-11 |
444 년 | 성벽 재건 완수 | 느 6:15 |
432 년 | 느헤미야의 2차 귀국 | 느 13:6,7 |
7. 내 용 전 개
본서는 포로귀환을 허락하는 바사왕 고레스의 조서로부터 시작된다. 70년이 지나면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하게 되리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렘29:10)대로, 마침내 스룹바벨의 영도하에 약 5만영에 달하는 귀환민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 사건은 복음 시대의 교회가 영적 바벨론의 사슬로부터 온전히 구원받을 것을 예언한 계시록(계18:21-19:5)의 성취를 예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며, 전반부는 에스라 이전의 사실에 관해서 그리고 후반부는 에스라 이후의 사실에 관해서 각각 기록하고 있다.
1). 성전재건(1-6장)
에스라 당시로부터 약 2세기 전에 이사야는 성전 재건을 예언한 바 있다(사44:28-45:4). 그 예언대로 바사 왕 고레스는 B.C. 538년에 유대인들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락했다. 스룹바벨은 성전 재건 사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등의 예비 작업을 실시하였으며(3:1,2), 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