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시선
교회가 역사 앞에서 한 민족이나 국가를 도덕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주도하지 못할 때 나라와 국가는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법과 도덕적인 신념이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연히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율법이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고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과 통혼하는 등 죄악에 빠져 지내게 되었다. 이때 에스라를 중심으로 바벨론에서의 2차 귀환과 개혁이 일어나게 되는데, 본 연구에서는 그 구체적인 귀환 정책과 개혁을 살펴보며 그것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찾고자 한다.
1. 에스라 인도하의 제2차 귀환(스7, 8장)
6장과 7장 사이에는 최소한 58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은 대략 어느 시기인가? 그리고 에스라는 어떠한 인물인가? 에스라와 함께 2차 귀환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얼마이며, 이들이 귀환 중에 아하와 강에 도착하여 누구를 모집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재정관리자 10명을 세운 목적과 몇 개월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는가?
1) 하나님의 인도하심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은 대략 주전 458년의 일이다. 에스라는 율법에 정통한 학사로서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B.C.464-424년)이 이스라엘의 신앙 부흥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보낸 사람이다. 아닥사스다 왕은 포로귀환과 성전 예배의 회복과 율법 준행에 필요한 원조를 지원해 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에스라와 함께 2차 귀환에 참여한 사람들은 약 9천 명 정도가 되는데, 에스라는 그들과 함께 9일 동안 여행한 후에 아하와 강에 도착하여 성전 제사를 감당할 레위인을 모집하였다. 이는 서기관이었던 에스라의 성전 예배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표출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켜 주심을 바라면서 금식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앗수르 군대의 호위를 거절하고 귀환자들로만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재정 관리자 10인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성전 기명들과 무리들이 바친 예물을 관리하도록 하였다(스8:25-30). 2차 귀한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4개월에 걸친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렸다.
2) 매일 자신을 점검하는 신앙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배려로 풍성한 헌물과 함께 본토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는 감격에 차서 하나님을 송축하였다(스7:27,28). 찬양은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은총에 대해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연구하고 준행하여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스7:10). 우리도 에스라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2. 에스라의 종교개혁(스9,10장)
제1차 귀환(B.C.537년) 이후 스룹바벨이나 예수아가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은 영적 지도자가 없이 약 58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나태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 범죄함의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에스라의 첫 번째 종교개혁 정책은 무엇인가? 또한 3개월간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은 모두 몇 명이었는가?
1) 에스라의 회개 운동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의 문화, 종교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과의 결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는 포로귀환자들에게 첫번째로 닥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저녁 제사를 드리기위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모였을 때 중보적인 성격을 띤 회개 기도를 하였다.
이 에스라의 회개 기도는 곧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의 회개 운동으로 이어졌다. 스가냐가 먼저 이방인 아내를 내어보내고 이에 용기를 얻은 에스라가 총회를 소집하여 이방 여인을 내어버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많은 비로 인해 야외에서 있지 못하고 결국 방백들로 하여금 통혼자들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3개월간의 통혼자 조사를 통하여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 112명의 명단을 파악하였다.
2) 신앙의 순수성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 문제는 에스라 때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요한 문제로 취급된다. 구약 시대에는 신7:1-4에 근거하여 잡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그 이유는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으로 신앙의 순수성과 혈통적 단일성이 유지되지 못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통해 요셉이 애굽 여인과 결혼한 것 (창41:45)이나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사실(민12:1)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엄격하게 금지시킨 것은 우상 숭배나 종교적 혼합주의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에도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 문제는 단순히 사랑이나 윤리적인 차원이 아닌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할 일이다.
이스라엘의 회개 운동은 단순히 감정적인 입술의 회개가 아니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차원까지 나아갔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도 수많은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회개 운동처럼 진정한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는 참된 회개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나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 문화나 비기독교 문화와 타협하여 세상 문화를 아무런 여과 없이 수용할 때 자칫 신앙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윤리나 도덕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에스라 당시에도 선민 이스라엘 백성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근신하며 깨어 있지 못함으로써 타락하고 말았다. 이럴 때 나타난 에스라의 종교개혁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오늘날도 교회가 계속해서 개혁되지 못한다면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다시 타락하고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본문 해설
1.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예물헌납
디아스포라(Diaspora)란 바벨론에 의해 출애굽 이후 살아오던 약 속의 땅에서 쫓겨나 새계 각처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을 뜻한다. 에스라 7장에 나타난 유대인들도 바벨론에 의해 바벨론 땅에 사로잡혀 간 자들인데, 이들은 비록 팔레스틴밖에 거주할지라도 조상의 나라요, 열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분산되어 사는 나라에서도 일정한 단위 지역으로 모여 회당을 만들어 거기서 예배를 드렸고, 이때 바쳐진 예물은 예루살렘으로 보내었다. 또한 성전이 존속하는 한 바쳤던 반 세겔의 성전세도 예루살렘으로 헌납했다. 이처럼 팔레스틴이 아닌 다른 여러 곳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민족의 통일성을 유지해 왔다. 한편 이런 풍습은 유대, 로마 전쟁(A.D.66-70)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승리로 말미암아 이 풍습은 주피터(Jupiter)신전에 예물을 바치도록 강요됨에 따라 변질되고 말았다. 한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예물을 헌납하는 것 외에 매년 세 차례씩 그들의 민족적 축제일에 팔레스틴을 순례하기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족적 동질성을 잃지 않게 된 것이다.
2. 포로귀환 시대의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
1) 이방인과의 통혼금지
성경은 근본적으로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하고 있다(출34:12,16; 신7:3,4). 그런데 성경에서 이렇게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하고 있는 이유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이거나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근성을 고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이방 신들을 섬기는 자들과 통한함으로써 맺어질 유혹, 즉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이유가 아닌 경우에 성경은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모세도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민12:1). 그리고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의 경우에도 이방 여인으로서 히브리인과 결혼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신7:10-13에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규례까지 소개하고 있다. 즉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상태가 죄인의 상태임을 인정하고 또 정결 의식을 통해 그 죄 된 상태를 해결할 때 그도 선민의 대열에 낄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세오경에서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것은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 보존을 위한 것이지, 결코 혈통적 배타주의적 민족주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 포로귀환 시대의 특수성
에스라 개혁 운동 당시 이방여인과 통혼한 백성들이 이방인아내와 자식들을 내어 보낸 것은 당시의 시대적 특수성에 의해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포로 생활로 말미암아 여러 면에서 잃어버렸던 선민의 면모를 회복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선민으로서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이방인 아내와희 이혼은 이화 같은 중차대한 종교적 민족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은 대부분 제1차 포로귀환시 귀환한 자들로서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예술살렘 성전재건 사업에 참여했던 자들이었다(B.C.516년). 그러나 성전 재건 이후 곧 신아억으로 나태해져서 앗수르의 식민지 이주정책에 따라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시마리아인들과 약 60년 동안 섞여 살면서 이방 종교에 상당히 물들어 있었다.
3. 세금
1) 조공
'측량하다. 수치를 재다'라는 의미의 (ddm)마다드에서 유래된 여성 명사로서 '측량줄(렘31:39), 도량형' (레19:35)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스7:24에서는 '측량된 세금' (느5:4)으로 그 의미가 확정되어 정복국이 포로나 노예나 돈 및 생산물의 형태로 피정복국에 부과하는 세금 또는 공물을 뜻한다.
2) 잡세
구약에서 스4:13,20; 스7:24에만 나타나는 단어로서 소비된 물품에 대한 세금을 가리킨다. 이것은 달리 수입 상품에 추징되는 관세로서 토관세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 관세를 뜻하는 헬라어 telo"(텔로스,마17:25; 롬13:7)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다.
3) 부세
'걷다, 외국에 가다'라느 의미의 동사 &lh(할라크)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그 본래 의미는 '여행' (창24:42)이며, 이것이 함축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여행자가 여행 도중에 지불해야 하는 '도로세' 또는 '통행세'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