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다니엘 강해

다니엘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반젤(복음) 2019. 12. 27. 16:59


          

다니엘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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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지서의 마지막 책이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서를 대할 때마다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다니엘서가 대선지서에 들어와 있습니까?

예언의 분량이 12장에 불과한데 어떻게 대선지서라 말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이사야서가 66장, 예레미야서가 52장, 물론 예레미야 애가는 5장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와 함께 다룬다는 측면이 있지요.

에스겔서 역시 48장입니다.

그러니 다니엘서는 명함도 못 내밀지요.

그래서 다니엘서가 왜 대선지서로 분류되는지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학창 시절, 구약을 가르치는 교수님께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답변을 해 주시긴 했는데 그리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약을 가르치게 되면서 자문자답을 해 보았습니다.

저의 답변 역시 궁색한 변명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질문을 했으니 답변은 하겠습니다.

다니엘서가 대선지서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인 것 같습니다.

다니엘서가 소선지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선지서는 성경이 편집될 당시에 한 권의 뭉치로 있었습니다.

그 소선지서에 상응하는 예언서에 대한 명칭으로 대선지서가 나온 것이지요.

잘 아는 대로 히브리어 성경은 전체를 세 개의 큰 그룹으로 구분합니다.

율법서와 선지서와 성문서이지요.

각각의 그룹에 성경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선지서는 전기 선지서와 후기 선지서로 나뉘어 있지요.

히브리어 성경은 명쾌하게 선지서의 의미를 암시하고 있지요.

곧 율법서에 대한 현재적 해석이 그것입니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사무엘서와 열왕기가 전기 선지서인 까닭이지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율법서에서 보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이하의 성경은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끝내 그 땅에서 쫓겨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언약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반면 후기 선지서는 선지자들의 활약을 기록합니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의 경고가 태반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이스라엘에 강력한 경고를 날립니다.

 

다니엘서는 수많은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서로 분류하지 않았습니다.

제 3의 그룹인 성문서의 말미에 배치해 두었습니다.

다니엘서가 지닌 그 아름다운 믿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에스겔 선지자가 인정한 의인 세 사람 중 한 분이 다니엘입니다.

노아와 욥과 다니엘입니다.

에스겔은 그 시대의 부패한 정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인들을 내세웁니다.

대단한 의인들이지만 그래봤자 자신만 건질 수밖에 없는 영적 어두움을 지적합니다.

그 세기적 의인이 다니엘입니다.

그 다니엘이 기록한 예언의 말씀인데 선지서가 아닙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음도 검증되고 예언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서는 선지서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성문서에서 분류되지 못한 나머지 그룹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성문서는 크게 메길로트 부문과 에메트 부문으로 나뉩니다.

이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책들은 말 그대로 기타로 분류된 셈이지요.

메길로트는 이스라엘의 절기와 관련된 책들입니다.

이스라엘의 5대 절기에 맞춰 다섯 권의 책이 있습니다.

에메트란 말은 진리란 말인데 욥기와 잠언과 시편을 말합니다.

성문서의 중요한 책들은 절기의 책과 진리의 책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 나머지가 다니엘서와 에스라 - 느헤미야서와 역대기입니다.

 

다니엘서가 예언서로서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은 헬라어 번역성경의 공입니다.

칠십인 경은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면서 아예 분책과 재편집을 시도합니다.

그 결과 다니엘서는 예언서의 자리에 배치되었습니다.

칠십인 경은 소선지서를 하나하나 분책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선지서를 분책하되 연속되게 배치하였습니다.

칠십인 경 역시 소선지서의 연속성을 인정한 셈이지요.

그 결과 다니엘서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대선지서가 끝나고

소선지서가 시작되는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다니엘서는 소선지서가 아니기에 대선지서인 것이지요.

 

자, 그러면 히브리어 성경은 왜 다니엘서를 선지서 그룹에 두지 않았을까요?

다니엘의 시대에 선지자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에스겔이나 예레미야가 그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조금 뒤에는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합니다.

그러니 선지자가 없는 시대이기에 다니엘을 선지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한 예언의 성격이 문제가 됩니까?

다니엘의 예언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활동하던 시대에 선지서의 분류가 끝난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다니엘 이후의 선지자도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가 그들입니다.

그러니 선지서의 편집문제도 아님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거듭 강조하지만 예언의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물론 다니엘서에는 전기의 색채도 드러납니다.

믿음의 영웅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활약도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기(傳記)의 성격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서들을 보면 대체로 그와 유사한 흐름들을 보입니다.

이사야서는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열왕기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온통 예언으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다니엘서에 담긴 전기의 성격이 예언서의 유무를 가늠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서는 왜 히브리어 성경에서 예언서가 아닐까요?

그것도 제 3의 그룹인 성문서의 말미에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니엘은 소년 시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당한 일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은 개방적인 인재등용정책을 펼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재를 키우는 미래계획도 가동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인재양성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 받은 세대입니다.

바벨론에서 소년의 과정을 통과하며 베벨론 식 교육을 받습니다.

물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왕이 내린 음식을 마다하고 채소만을 고집합니다.

흔히 “하나님 앞에서”라는 코람데오(Coram Deo)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좋은 신앙은 결단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신앙은 언제나 자기훈련의 과정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틀림없이 소년 다니엘은 좋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변하지 아니하고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 성경 편집자들은 다니엘서를 선지서로 편집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보통 믿음이 아닌 귀감이 될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다니엘을 통하여 이방인들조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그 방식이 특이하게도 이상(異象)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의 방식 때문에 선지서로 편집되지 않은 것일까요?

이상은 다니엘서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이나 스가랴 역시 이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다양한 방편이 있습니다.

이상도 그 방편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상이라는 예언의 전달방식이 선지서의 여부를 좌우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시대나 예언의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앞에서 잠시 힌트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소년 시절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일반적 포로의 삶과는 달리 다니엘은 인재등용의 과정을 학습 받습니다.

왕의 특별한 배려와 관심 속에 차세대 중요 관료후보로 훈련을 받습니다.

왕이 음식을 하사할 만큼 차출된 소년들을 특별한 대상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런 교육과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다니엘의 특별한 재능과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받은 바벨론 식 교육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물론 다니엘이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 바벨론 식 교육은 대 제국 바벨론의 발전과 연관된 것입니다.

바벨론의 웅대한 미래비전의 프로그램인 셈이지요.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린 이가 다니엘입니다.

결과적으로 다니엘이 훈련받고 교육받은 모든 것은 바벨론을 위해 쓰였습니다.

 

이쯤에서 생각해 봅시다.

바벨론은 어떤 나라입니까?

바벨론은 바로 유다를 멸망으로 이끈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에서 다니엘은 성공한 삶을 누립니다.

고위관료로 모든 수혜를 누리며 삽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니엘의 성공을 질시한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다니엘은 여전히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때로는 발목을 잡을 때도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믿음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순수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니엘의 출세가도는 조국 유다가 아닌 바벨론이었습니다.

결국 후대의 성경 편집자들의 고민을 하나 남긴 셈이지요.

일반적으로 성경 편집자들은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입니다.

선민사상에 투철한 성경 편집자들의 관점에서 다니엘서의 예언서 편집은 상당히 껄끄러운 과제입니다.

다니엘서가 지닌 탁월한 신앙관과 예언의 내용들은 충분히 예언서로 편집할 만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시각이 존재합니다.

 

다니엘서를 외견상으로만 보게 되면 어떤 주제가 보입니까?

그 표면적 주제의 하나가 출세지향주의입니다.

요즘 다니엘 식 교육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제일주의를 강조하는 측면이 있겠지요.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흐름은 분명 출세지향주의입니다.

다니엘처럼 세상에서 출세하자라는 식의 암시가 있습니다.

물론 아니라고 완강하게 손사래를 치겠지요.

그러나 교육을 받는 대상자들은 다니엘처럼 신앙제일주의로 살아가면 출세할 수 있다는 암시를 받습니다.

그런 암시도 없이 “다니엘처럼” 이란 표현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다니엘처럼” 이란 구호에는 출세에 대한 암시가 있는 셈입니다.

자, 문제는 출세,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출세한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다니엘이 총리가 되기까지의 출세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어느 나라의 총리가 되었느냐가 문제입니다.

유다를 무너뜨린 바벨론의 총리를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다른 나라라고 감각이 무디어지면 곤란합니다.

일제시대에 만약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면 어떻습니까?

일본을 위해 일하는 고위관료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왜 오적(五賊)이란 말이 있고 매국노(賣國奴)란 말이 나오고 친일파(親日派)가 등장합니까?

우리에게 친일파란 말은 언제나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을 다니엘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유다의 독특한 혈통주의에 입각한 사관에서 다니엘서는 난감하기만 합니다.

예언서로 받아드리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예언서가 아닌 성문서의 하나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칠십인 경의 편집자들은 감각이 달랐습니다.

다니엘의 출세지향주의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오직 그의 예언에만 관점을 맞춥니다.

다니엘서의 전체적 흐름을 예언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았습니다.

다니엘서가 예언서의 하나임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예언서의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의 고민입니다.

 

순전히 제 관점입니다만 다니엘서의 배치는 절충의 산물로 보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소선지서란 말에 익숙합니다.

그 소선지서에 다른 예언서를 끼어 넣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다니엘서의 분량으로는 소선지서의 위치가 적당합니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소선지서의 개념을 분책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칠십인 경의 편집자들은 예레미야 애가를 그 문학적 성격보다 저자에 초점을 맞춰 배열합니다.

시가서의 하나로 배치해도 충분한 예레미야 애가가 예레미야서의 다음에 위치한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니엘서 역시 대선지서가 끝나고 소선지서가 시작되는 사이에 편집합니다.

나름의 묘책인 셈이지요.

결과적으로 다니엘서가 소선지서가 아닌 대선지서로 분류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호세아나 아모스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 앞에 배치되는 적절한 안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