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로마서 강해

[스크랩] <로 8:29>의 “미리 아신”의 의미

에반젤(복음) 2019. 12. 22. 22:52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
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
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9,30>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롬 8:29의 “미리 아심”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용도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반적인 견해가 있었다.
주석가들의 한 계층(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바울은 하나님
께서는 그의 은총의 제공에 호응할 자들로 “미리 아신” 자
들(즉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
을 믿을 자들로 그가 아신 자들)을 구원하도록 예정하셨다
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고데이(Godet)는 롬 8:29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이번 절에서 하나님께
서 이와 같이 그들을 미리 아셨는가?” 그러고는 답하기를 “
그들은 구원의 조건들 즉 ‘믿음’을 확실히 이루도록 「미리
알려진」 것이며 그래서 ‘믿음에 의하여’ 그의 것으로 미리
알려진 것이다”라고 했다.

“미리 아신”이라는 단어는 이와 같이 알미니안 주의자들에
의해 하나님께서 어느 죄인들이 믿을 것인가 등등을 미리
보셨으며 이러한 지식의 근거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
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었다.

주석가들의 다른 계층(칼빈 주의자들)은 다음 두 가지 근거
에서 상기 견해를 거부했다. 첫째, 알미니안들의 해석은 바
울의 언어의 의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리와 조화를 이루
지 못하기 때문이다. 칼빈 주의자들은 그 구절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어떤 개인들에게 두셨다는 것(즉 미리 아신)을
가르치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받도록 예정했거나
인을 쳤다고 주장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개인들에 대하여 무엇을 아셨다
는 것(그들이 이것이나 저것을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인들 그 자체를 아셨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일고 있는 그들을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예정하셨다. 여기에 사용된 “미리 아신”이라
는 단어는 이처럼 “미리 사랑하신”이라는 말과 동등하다고
이해되어져야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
님께서는 그들을 구원을 위해 인치셨다.

두 개의 상반되는 해석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시간을 통하여 내려다보시고 어떤 죄인들이 믿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며, 또한 이러한 미리 아시는 믿음에 근
거하여 그들을 구원하도록 예정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
께서는 그의 마음을 어떤 개인들에게 두시며, 그들을 위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반드시 소명을 받아 성령
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주어지며 어떻게 하여
구원되어 지도록 예정되어지는가? 다른 말로 바꾸자면 ‘개
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의 원인이나 결과가 되는가?’이
다.

A. 롬 8:29의 “미리 아신”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항상 모든 피조물과 모든 사건들에 대한 완
전한 지식을 소유하셨다.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어떤 것이
그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때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롬
8:29,30에 언급된 것은 미래 사건들에 대한 그의 지식(사
람들이 무엇을 할 것이라는 등등에 대한)이 아니다. 왜냐하
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미리 아신 그들을 예정하셨
으며, 부르셨으며, 칭의하셨다는 등등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정되고, 부르심을 받고 칭
의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모든 사람들은 29절에 언급되어
진 의미대로 하나님에 의해 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알미니안들이 억지로 어떤 제한적인 개념(qualifying noti
on)을 첨가시키는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그
구절에서 그 언어 자체에 포함되지 않는 어떤 사상 이를테
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 믿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
들을 예정하셨고, 부르셨고, 칭의하셨다는 사상을 읽는다.
그러나 “알다”, “알았다”, “미리 알았다”하는 단어의 성경적
용법에 따른다면 이와 같은 첨가를 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불필요한 이상 그것은 부적당하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개인들을 알고 계시다고 말할 때 그것
은 가금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과 그들은 그의 이성과 염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 3: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
셨다. 주님은 땅의 모든 족속들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
는 특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알았다. 그들은 그가 그의
마음을 두신 그의 택한 백성들이다.

신 7:7,8 ; 10:15을 보라. 이스라엘은 특별한 의미에서 하
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징계하신다(히 12:5,6
참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렘 1:5)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의 의미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 대해 아셨다는 것이 아니
라 그는 예레미야를 그의 어머니의 복중에 짓기 전에 그 선
지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역시 개인적이며 친근한 인식의 의미에서 “알았
다”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
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
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
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라
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그
들에 대하여 모든 것(그들의 악한 성격과 악한 일들)을 너
무도 많이 알고 계시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뜻하는 바는 ‘나는 너를 친근하게나 개인적으로 결코
알지 못했으며, 나는 너를 결코 나의 총애나 사랑의 대상으
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어야만 한다.

바울 사도도 고전 8:3과 딤후 2:19에서 이와 꼭같은 방식
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주
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 주님은 모든 사람들
에 대하여 아신다. 그러나 그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롬 8:28)(자기 백성
된 자들)을 아실 뿐이다.

“미리 아신”의 이러한 의미에 찬동한 머리(Murray)의 주장
은 매우 훌륭하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
들’을 설명되어져야 한다. ‘자들’은 동사의 목적이며 수식
하는 부가어(qualifying addition)는 없다. 이것은 그 자체
가 만약 어떤 다른 불가피한 이유가 없다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 내에 전제되어진 차별을
포함하고 있음을 설명해 준다. 만약 바울 사도가 마음속에
어떤 수식하는 어구(qualifying adjunet)를 생각했다면,
그것을 지원한다는 것은 간단했을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부가하지 않은 이상 우리들은 그가 사용하는 실제 술어들
이 차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을 의문시 하지 않을 수 없다
.

성경의 용법은 확인하는 답변을 제공해 준다. 비록 “미리
아신”이라는 술어가 신약 성경에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경의 용법에 “알다”라는 단어에 그렇게도 흔히
주어진 의미를 무시한다는 것은 전혀 변호할 여지가 없다.
“미리 알다”는 단순히 “알다”라는 단어에 “미리”의 사상이
부가될 뿐이다. 성경에는 수차 “알다”는 단순한 인식의 의
미 이상의 시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관심을 둔다와 특별한 흥미, 기쁨, 애정, 및 행위와 더불어
안다는 것은 ‘사랑’과 실제적으로 동의어적인 의미로 사용
된다(창 18:19, 출 2:25, 시 1:6, 144:3, 렘 1:5, 사 3:2, 호 1
3:5, 마 7:23, 고전 8:3, 갈 4:9, 딤후 2:19, 요일 3:1 참조).

왜 이 “알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그것이 꼭 같은 종류의 구
조 속에서 나타나고 또 선택의 사상이 잠재적으로 존재하
는 곳인 롬 11:2에서처럼 이 구절에서는 이 구절에서는 ‘미
리 알다’에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지의 이유는 없다(롬 11:5
,6 참조). 이 의미가 인식되어질 때 어떤 수식하는 개념을
부가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은 그
자체 내에 요구되어진 차별을 지어주는 의도를 포함 한다
고 알 수 있게 된다. 그곳은 ‘하나님이 관심을 두신 자들’ 혹
은 ‘하나님이 구별된 애정과 기쁨을 가지고 영원부터 아신
자들’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미리 사랑하신 자들’과 실질적
으로 동등하다.

더욱이 이 해설은 쇠사슬의 각각의 고리(예정하신 이도 하
나님이시며, 부르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칭의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며 영화롭게 하는 이도 하나님이시다)에 있어서
그렇게도 착실한 능력있고도 단호한 행위와도 일치한다. “
믿음의 선견(先見)은 이들 다른 실례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결정적 행위(determinative a
ction)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우리가 거의 기대하지 않
는 점에 전체적인 강조점을 두는 약점이 될 것이다. ... 그것
은 차이의 선견(foresight of difference)이 아니라 이것을
있게 하는 예지이며 존재를 인식하는 선견이 아니라 존재
를 결정하는 예지(foreknowledge)이다. 그것은 주권적인
독특한 사랑(a sovereign distinguishing love)이다.”

핫지(Hodge)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알다’는 가끔 ‘시
인하다’와 ‘사랑하다’이므로 그것은 이 경우에 있어서 특별
한 애정의 개념을 표현하거나, 혹은 ‘택하다’나 ‘예정하다’(
determine upon)를 뜻하기도 한다. ... 그 단어의 용법은
이 ‘보다 더 좋아하다’라는 일반적 개념의 수식어로 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백성’ 즉 사랑하신 혹은 선
택하신이며(롬 11:2) ‘진실로 창세전부터 예정된(헬라어로
미리 알려진), 즉 ‘결정된’, ‘선택된’ 자이며(벧전 1:20, 딤후
2:19, 요 10:14,15 및 행 2:23, 벧전 1:2 참조), 그러므로 그
개념은 분명히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 자들이며, 이와
같이 사랑함으로 나머지 일류들로부터 구별하거나 선택한
자들인 것이다. 혹은 그 두 개념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
그가(하나님이) 선택하신’ 그들을 그가 예정하신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사람들에 대하
여 아셨다 하더라도, 성경이 때때로 “알다”라는 단어를 사
용할 때의 의미로 즉 친근한 개인적 인식과 사랑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아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롬 8:29,30
에 설명되어진 대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신 자
들을 미리 아셨다는 것은 이 후자의 의미에 있다.

B. 롬 8:29은 신앙, 선한 공적 등등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위에 지적한 것처럼 롬 8:29의 단어 “미리 아신”에 믿음과
같은 어떤 한정하는 개념(qualifying notion)을 부가한다
는 것은 불필요하며 그 때문에 변호할 여지가 없다. 알미니
안 등은 그 언어가 이 개념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의 사상체계가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첨가한다. 그들은
무조건적 예정과 선택의 교리를 회피하기 위해 그렇게 한
다. 이와 같이 특정한 개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구원받
기를 원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구원받기를 원하
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구원은 궁극
적으로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선물이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
이 아니다.

할데인(Haldane)은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면서 롬 8:29에
언급된 예지는 미리 알려진(보여진) 믿음이나 선한 공적 혹
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죄인의 응답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했다. “믿음은 예지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지는 예정 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리고 믿음은 예정의 결과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는 다 믿더라(행 13:48)” 또한 그것은 선한 공적들의 예지
를 의미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정의 결과이기 때
문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의 이 일은 하나님이 전
에 예정하사(엡 2:10)”

또한 그것은 외부적 소명과의 우리의 협력의 예지를 의미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효과적인 소명은 그 협력
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과 은총에 달려있
기 때문이다(고후 1:9). 그러므로 이 예지는 이미 설명한
바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도록 예
정하신 자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모든 부르신
자들은 그에게 미리 알려진다. 즉 그들은 그의 무궁한 사랑
의 대상자들이며 그들의 부르심은 이 자유스런 사랑에서
출발한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
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

머리는 롬 8:29의 “미리 아신”은 믿음의 선견(foresight)과
관계한다는 견해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확실히 정당하
게 말했다. “이 해석의 거부는 한 예정자로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미리 아신’이 믿음의 선견을 의미한다는 것이
수긍이 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주권적 선택의 성경적 교
리는 제거되어지거나 논박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음을 미리 아시며 그는 진행하는 모든 것을 미
리 아신다는 것은 확실히 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간단하다. 언제부터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이 믿음이 생기
는가? 유일한 성경적 답변은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그 믿
음은 그 자신이 창조하신 믿음이라는 것이다(요 3:3-8, 6:4
4,45,65, 엡 2:8, 빌 1:29, 벧후 1:2 참조). 그러므로 그의
영원하신 믿음의 선견은 그가 믿을 것으로 미리 아신 자들
속에 이 믿음을 생기게 하실 그의 작정에 의해 필수조건으
로 되어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고유한 영원하고
도 주권적인 믿음과 그것의 결과를 위한 선택에서 생기는
그 차별에게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것이 이 구
절에 적용되어진 것처럼 단순히 하나의 해석이다. 우리들
은 주석학적 근거에서 ‘미리 아신’은 믿음의 선견과 관계한
다는 견해를 거부할 수 밖에 없다.”

D. N. 스틸, C. C. 토마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