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고전,후서 강해

[스크랩] 고린도후서 (개론)

에반젤(복음) 2019. 12. 17. 18:34



         고린도후서(개론)




1. 기록된 동기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직접적인 원인은 첫 서신이 신속히 전달된 후에 일어났던 위태로운 상황들이 그 중심이 되었다. 바울은 악한 관습들을 고치고 예루살렘에 있는 궁핍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갔다.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자 심령이 편치 못하여 마게도냐로 갔다. 바울은 거기에서 위로를 주는 소석을 가지고 고린도에서 돌아온 디도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위로를 주는 소식은 험악하고 위태로운 상황들이 고린도 교회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바울은 신속하고도 엄격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일을 처리해야 했다.
1)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더 명확하게 제시해야 했다.

2)그들을 재촉하여 약속한 연보를 하도록 해야했다.

3)자신의 사도직과 사도권을 변호함으로써 모든 반대를 물리쳐야 했다.
이 요점들은 이 둘째 서신의 모든 사상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2. 기록된 시기와 장소
이 서신이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기록되었다는데는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지 몇 개월 후 혹은 일년 후나 혹은 그 이상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A. D. 57). 그리고 이 서신은 마게도냐에서 기록되었는데 아마도 빌립보였던것 같다.

3. 기록의 통일성
오늘날 어떤 학자들은 고린도 후서가 통일성이 없는 서신이라고 주장한다.
1)그들은 6:14-7:1가 사상의 흐름을 차단하는 삽입 부분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그러나 바울의 사상 전개 방법이 항상 현대의 전개 방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또 이 학자들은 9장이 거의 8장의 내용과 중복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편견없이 이 장을 연구해 보면 9장이 결코 8장의 반복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3)이 반대론자들은 무엇보다도 후반 단락(10:1-13:14)이 논조와 사상에 있어서 전반 단락(1:1-9:15)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본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냈던 어떤 "상실된" 편지 곧 "준엄한" 편지의 일부였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는 그 단편적인 편지에 대하여 증거가 되는 사본이 전혀 없다는 사실로 반박된다. 더우기 이 서신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매우 놀라운 통일성이 발견 될 것이다. 명백하게도 고린도의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현대의 어떤 학자도 이 서신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과 조화가 되지 않거나 혹은 실제 상황과 핀트가 맞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없다.

4. 사상의 전개
이 서신에서의 사상 전개는 아직도 완강한 반항세력의 수중에 있는 지역을 진군하는 막강한 군대와 같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을 훼방하는 그 반항자들이 존재하는 한 결코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 그의 서신은 그리스도의 사도권에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최후의 통첩이었다.

5. 영향력
우리는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는 그리 분명치 않은 어떤 특징들을 발견한다. 전도자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선도들을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할려고 했던 "거짓 사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할 때, 그는 바로 그 영혼을 드러내고 있고, 감추어진 그의 삶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추가하고 있다. 이 서신은 생동적이고도 영감이 넘치는 바울의 불후의 저작이다. 이 서신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필적하고도 남음이 있다(고린도후서 10:5.ASV).

6. 신령한 메시지
고린도 후서는 바울의 모든 서신들 중에서 가장 인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바울에 대해 배울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서신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교리적인 논쟁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서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을 보게 된다.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우리는 바울이 때때로 기쁨의 정상에 올라 있는가 하면 또한 어떤 때는 절망의 골짜기에 내려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길이 언제나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것과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 조차도 절망과 낙망의 순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비록 바울이 종종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연약하고 실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혜 대해서-죽음에 대해서도 -이길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로 인해 용기를 가지게 된다. 또한 이 서신은 우리에게 바울이 몹시 사랑했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회중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말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대담하고 도전적인 말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서로 다투고 분리된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인해 괴로워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분노한 아버지 같이 그 자녀들을 위해 변호하고 책망하고 한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있는 가난하고 고난 받는 형제들을 도와 주기 원한다. 그러한 사실은 교회의 하나됨을 증명해 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관심의 표현일 것이다. 어떤 다른서신도 우리에게 교회들에 대한 바울의 관계성을 이토록 많이 보여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어떤 다른 곳에서 보다도 고린도 후서에서 더욱 명확하게 사도로서의 소멸과 권위를 밝히고 있다. 비록 바울이 열 두 제자중 하나는 아니었지만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임한 사도로서의 소명을 믿었고 그의 권위를 위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제도도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바울은 어떤 직책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그의 권위의 닻을 내렸다. 이것은 언제나 모든 그리스도의 선지자, 사도 혹은 사역자의 본원적인 권세가 된다. 그는 이 권세를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