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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에 관한 일반적인 배경

에반젤(복음) 2019. 12. 16. 09:09



           

 고린도에 관한 일반적인 배경



  희랍의 전설에 의하면 시지프스는 고린도의 왕이었다고 한다.  그는 거만한 태도로 신들을 무시했으므로, 거대한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에 처해졌다. 바위를 밀어 올려 정상에 이르면 바위는 또 다시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 그는 또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20세기의 철학자인 까뮈는 고린도 왕에 관한 이 전설 속에서 목적 없이 불합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였다.1)


  고린도 사람들은 그들의 전설에 나오는 왕처럼 자기중심적인 거만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세기의 고린도 사람들은 변덕스러운 제우스신을 향하지 않고 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그의 종 사도 바울을 향하고 있었다.2)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그들의 시대정신을 초월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는 힘든 부담을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의 많은 도시 교회들과 아주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의 특성을 연구하는 것은 오늘날의 도시 교회를 연구하는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무수히 받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참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도 여러 가지 정의가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교회다운 교회’가 될 때 ‘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정답은 매우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며, 유지해 가며, 주어진 사역을 감당할 것인가는 난제가 아닐 수 없다.



  A. 고린도 시



    1. 고린도의 명칭


  고린도는 헬라어로 ‘코린도스’(Κορινθος)라고 부르며, 정확한 어원을 찾기는 힘들지만, 그 말의 뜻은 ‘장식’이라는 의미이다.3)



    2. 고린도의 지리적 특성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좁은 지협의 남쪽 약2킬로미터 지점, 즉 ‘북위 35도 56분, 서경 22도 56분’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다.4) 그러므로 고린도는 “두 바다 사이의 고린도” (bimaris Corinthus, by Horatius)라고 불려졌다.5)


  서쪽으로는 ‘고린도 만’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샤론 만’이라고 부르는 ‘아에기나 만’이 자라잡고 있다. 따라서 이 도시는 해상부역에 알맞은 입지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었다.6)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제적 이점은 대단하였다. 그곳은 남북으로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의 양 옆구리에 바다를 끼고 있어서, 북쪽과 남쪽을 잇는 육로를 관장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를 뚫는 ‘그린도 운하’가 개통되기까지는 양쪽의 해로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고린도 운하는 네로 황제에 의해 착공되었다가 곧 중단된 것인데, 1893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7) 때때로 선박들의 화물운송을 통제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으며, 상업상으로도 여전히 중요했음이 분명하다.8)


  고린도를 경유하여 이탈리아와 소아시아 간에 화물을 운반하던 선주들은 그리스 남단 주위의 위험한 해로를 피하여 항해했다. 소형 선박들은 항로를 따라 지협을 가로질러 항해를 했으며, 대형 선박들의 화물은 동쪽 항구에 정박해서 기다리고 있던 수송선으로 옮겨졌다.9)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고린도를 ‘그리스의 다리’라고 불렀다. 결과적으로 고린도는 ‘고대 세계의 피카디리 광장’이니, ‘그리스의 로비’니 하고 부를 만큼 매우 번화한 국제도시가 되었다.10)



    3. 고린도의 역사


  주전 4,000년경까지 고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이 도시 국가를 세우기 시작하던 주전 8세기경에는 고린도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스에서 첫째가는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도시의 큰 부와 명성은 대략 주전 600년경까지 이르고 있다.11)

 

  브루스(F. F. Bruce)는 고린도가 헬라의 고대 성읍이었으며, 그 이름은 주전 10세기 초에 도리아 헬라인들이 그곳에 이르기 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nth-"음을 가지고 있는 단어군은 일반적으로 헬라 시대 이전에 형성된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12)


  고린도는 테베, 아테네, 스파르타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한 맹주도시였다. 그 전성기는 주전 7세기 경 키프셀루스(Cypselus)왕의 시대였다. 이 때 고린도는 “전 헬라의 빛”(umen totius Graeciae)라는 별명을 얻었다.13)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 이 도시는 아직 잘 알려진 도시가 아니었다. 주전 145년 경 로마의 ‘루시우스 멈미우스’(Leucius Mummius)장군에 의해 온 도시가 불타 망해버린 폐허 지대로 그 이후 약 100년 동안 고린도라는 이름은 역사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아폴로 신전의 기둥 몇 개뿐이었다. 모든 시민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지역이 그대로 버려질 리가 없었다.14)


  주전 44년 혹은 46년에 ‘쥴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이 도시를 복구하여 로마의 식민지로 만들고 그 이름도 ‘콜로니아 라우스 쥴리아 고린도’(Colonia Laus Julia Corinthus)라고 붙였으며, 이때부터 번영을 누리는 전기를 이루게 되었다.15)


  시저는 지정학 상 이곳이 군사적, 상업적인 중요성이 있음을 인식하고서 고린도를 재건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목적을 위하여 대부분 자유민으로 구성된 ‘식민이민단’(colony)을 보냈다.


  그러므로 고린도에 거주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살펴볼 때, 그들의 이름 중에 로마식 이름이 많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오(Gaius, 고전1:14), 군도(Quintus), 브드나도(Fortunatus, 고전 16:17), 그리스보(Crispus, 고전 1:14), 아가이고(Achaicus, 고전 16:17)등이 로마식 이름이었다.16)


  하지만 이 식민이민단은 새로이 세워진 도시에 기틀을 놓는 역할 이상은 하지 못했다. 즉 상인들이 그리스 전역에서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유대인들도 역시 이 도시가 제공하는 상업상의 편리함 때문에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 와중에서 고린도의 부와 예술, 문학, 사치 등이 부흥되었다.17)


  이로써 고린도는 로마 정부의 소재지로서 ‘아가야’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심지어 학문과 문학의 중심지였던 아테네를 능가하면서 로마, 그리스, 유대, 수리아, 애굽 등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자리를 잡아 갔다.18)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그 영토의 총독은 갈리오였다(행 18:12).


  주후 2세기경에는 황제 하드리안(Hadrian)이 아름다운 여러 공공건물들을 건설함으로써 도시를 새롭게 하였다. 이 도시는 1458년 사라센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중세 시대에도 그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858년에 가공할만한 대지진이 발생하여 고린도 시는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이곳의 도시민들은 고대 도시에서 약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오늘날의 시가지를 건설하였다.19)



    4. 고린도의 도덕적 상태


  고린도인은 그 명성에 알맞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 곳의 귀족들은 ‘부의 축적’을 제일의 가치로 여겼으며, 그 결과 고린도는 악과 부도덕이 혼재하는 천박한 도시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헬라어 ‘코린디아조마이’(κορινθιαζομαι, ‘부도덕을 훈련하다’ 혹은 ‘간음하다’)는 바로 고린도에서 유래한 말이다.20)


  따라서 ‘고린도식 생활’이라고 하면 “화려함과 방종함”을 뜻하는 말로 이해될 정도로 도덕적인 부패로 유명하였다.21)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고린도 지방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고린도 인들의 도덕성에 대해 그 도시 이름에 붙여진 풍자적 말들이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은 ‘코린디아 코레’(κορινθια κορη, 고린도 창부)였다.22)


  이 말은 플라톤이 최초로 사용하였으며, 원래는 ‘고린도 소녀’(Corinthian girl)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의미가 전용되어 ‘창녀’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23) 이러한 관용구의 생성 과정을 보아도 고린도 시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코린디악세스다이’(κορινθιαξεσθαι, 고린도 난봉꾼), ‘코린디아스테스’(κορινθιαστες, 고린도 탕아)와 같은 말들이 있었다. 따라서 ‘고린도 인이 되어라’는 말은 ‘창녀가 되어라’는 욕설의 은어였다고 하니 고린도의 도덕성을 짐작할 만하다.24)


  이러한 까닭에 “고린도로 항해하지 말라”는 격언까지 생겨났다.25) 이것은 도덕적 타락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작가들은 고린도를 ‘선원의 낙원’, ‘주정뱅이의 천국’, ‘정숙한 여인의 지옥’ 등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26)


  어떤 이들은 고린도가 매춘과 술과 방탕으로 이름난 고대 세계의 ‘허영의 시장’이었다고 묘사한다. 심지어 연극에서도 고린도 인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주정뱅이의 역할을 맡았다.


  다른 이들은 이에 덧붙여 말하기를, 사도 바울 당시에 고린도의 윤리적 상태는 지중해 연안의 다른 어떤 항구들보다 더 저급했거나 최소한 나은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고린도 인들은 철학과 지적인 논쟁에 대한 막연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27)


  그리고 이와 같은 부도덕한 생활 모습이 교회에까지 침투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근친상간(고전5:1-13)과 창녀들과의 음행(고전 6:12-20)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5. 고린도의 인구


  지리적 여건에 의해 고린도의 인구는 급팽창하였고,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할 때는 60만 내지 70만의 인구가 있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노예들이었다. 이상근 박사는 고린도 시의 시민이 대략 60만 명이었으며, 그 중에서 노예가 40만 명이었다고 주장한다.28)


  따라서 부를 자랑하는 고린도의 경제는 특정인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고린도에 사는 모든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부와 사치가 극에 이른 반면,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고전 7:20-24; 11:21-34).29)


  고린도의 시민들은 로마 사람, 헬라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직업의 분포 면에서 보면 유동적인 형태의 직업들, 즉 선원과 상인들이 꽤 많았으며, 노예들도 아주 많았다.30) 이러한 고린도의 인구 구성을 볼 때 범세계적인 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가 복음전파의 전략적 요충지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고찰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복음 전파와 선교의 전략적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선교의 접촉점이 중요한 선교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6. 고린도의 사회생활


      (1) 종교


  고린도 지방에는 당시 여러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종교적 혼합주의가 생겼다.31) 이 도시에는 애굽 우상을 위한 신당들이 많이 있었다. 그 원인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무역차 이 항구에 오는 배들이 많이 있어서 우상을 수입시킨데 있다.32)


  고린도는 특히 아프로디테(Aphrodite)숭배의 중심지였다. 이 여신의 우상은 ‘전쟁의 신’ 아레스(Ares)의 군장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그의 투구는 여신의 발판이 되고, 그의 방패는 여신의 거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채의 기슭에는 뱃사람들의 수호신인 멜리케르테스(Melicertes)의 신전이 있었다. 이 이름은 두로의 주신인 멜카트(Melkart)의 헬라식 명칭이었다. 그리고 2년마다 열리는 축제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을 모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이 “많은 신과 많은 주”(고전 8:5)를 숭배했다고 지적하였다.33)


  고린도에 사는 희랍인, 로마인, 유대인들이 각각 상업에는 특출하였으나, 그들의 ‘낮은 도덕생활’과 ‘무너진 윤리기준’은 부도덕을 권장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1,000명의 신전 노예들은 유명한 ‘판데미안 비너스’(Pandemian Venus)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창녀의 일에 종사하도록 바쳐졌다.34) 신전에 살고 있던 이들 여 사제들은 그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을 상대로 종교적 행위로서의 매춘을 행하였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의 이러한 배경이 반영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원리적으로는 ‘성적인 부도덕’을 버렸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 내의 그러한 부도덕을 용납하고 있었다.35)


  도날드 거스리(Donald Guthrie)는 고린도가 아프로디테 여신에 대한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그 숭배는 매우 비도덕적이라고 알려졌지만,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고린도의 방탕함이 조장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36) 즉 그의 언급은 고린도 사람들이 원래 방탕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의식이 인정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는 것이다.37)


  이처럼 고린도는 많은 우상 신들과 다양한 우상 숭배가 있었던 도시였다. 그리고 유대교는 그 당시 고린도에 있던 동방 종교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였다.38) 그러나 유대인의 회당은 사도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도달했을 때, 고린도 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다(행18:1-4).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세속적으로 번창하며 타락한 대도시에 와서 전도한다는 것에 심적 억압을 받아서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다(고전 2:1-4).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새 힘을 얻고 전도에 임한 것을 볼 수 있다.


      (2) 상업


  고린도의 상업은 지협을 가로지르는 해운업을 통하여 왕성해졌다. 그리고 고린도에서 생산된 수공품 중에서는 도기와 놋 제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업 활동을 통하여 고린도는 부와 사치의 근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는 항상 모든 종류의 사치를 조성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와 예술로 유명한 장소가 악으로 유명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39)


  호머(Homer)시대로부터 고린도는 항상 부와 연관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고린도는 고린도 지협의 서쪽 2.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고린도 만의 펠로폰네시스 해안가에 있는 작은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의 기원은 고대의 고린도가 지진으로 파괴된 1858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모든 그리스의 빛’이라고 자처했던 고린도 시는 오늘날 현대 도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5.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가야(Archaia) 혹은 팔라야(Palaia) 고린도의 가난한 마을로 존재하고 있다.40)


      (3) 교육


  고린도에서는 예술과 과학의 연구가 성행하였다. 그래서 고린도에는 언어연구실과 철학학교들이 있었다.41) 그러나 다소(Tarsus)의 대학교에서 훌륭한 스승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사도 바울은 독선적이고 피상적인 지성주의를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었다(행 1:20-21, 27; 2:1-8 참조).42) 다소는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중요한 도시이며, 사도 바울의 출생지였다(행 9:11; 21:39; 22:3). 다소는 지중해에서 약 18km 정도 떨어진 키드누스(Cydnus) 강변에 위치한 도시였다.43)


  아마도 고린도에서는 고대 헬라의 전통적 철학이 성행하였으나(고전 1:19절 이하 참조), 현실 생활에 압도당하여 철학의 깊이를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44) 그리고 철학과 문학이 성행하여 “고린도식 언어”라고 하면 세련되고 교양 있는 말솜씨를 뜻하기도 했다.45)


  그러나 고린도 인들의 악은 그리스의 학문과 철학의 통찰력에 의해서 생기기도 하였다. 고린도에는 수사학자와 철학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허망하고 자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복음의 단순한 교리를 경멸하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고린도의 교육은 오히려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며, 성도의 거룩한 삶에 걸림돌이 되기가 일쑤였다.46)


      (4) 스포츠


  고린도에는 2년마다 개최되는 운동 경기가 있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올림픽 게임과 비슷하였다. 이러한 고린도 지협의 경기를 ‘이씨미언 게임’(The Isthimian Games)이라고 불렀다.47)


  이것은 ‘고대 4대 제전’ 중의 하나였다. 고대 4대 제전이란 그리스의 올림푸스 산에서 4년 마다 열린 ‘올림푸스 제전’(Olympian Games), 2년 마다 그리스의 니미어 계곡에서 열린 ‘니미어 제전’(Nemean Games), 4년 마다 그리스의 델피에서 열린 ‘피시언 제전’(Pythian Games) 그리고 고린도에서 2년 마다 열린 ‘이스무스 제전’이었다.48) 고린도는 헬라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로마의 검투경기를 수입한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49)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린도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른 바 ‘우민화정책’중에서 ‘3S’로 알려진 영화(Screen), 성(Sex), 스포츠(Sports)를 고루 갖춘 총체적인 타락의 온상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씨미언 게임’을 관람하기 위해서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전도대상자가 되었고, 군중들이 운집한 경기장은 복음 전파의 장소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롬 8:28)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씨미언 게임’은 사도 바울을 고린도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였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다.50)



    7. 고린도 시의 고고학적 발굴


  고린도의 발굴은 1892년에 그리스 고고학 사업부에서 실시하였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 1896년에 아덴에 있던 미국 고대 연구학회에 의하여 조직적인 발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에 전 도시를 발굴하였다.51)


  고대 고린도의 유적 발굴에 참가한 학자들은 옛 로마 도시의 중요한 건물들의 위치를 상당한 정도로 찾아볼 수 있었다. 고린도는 두 개의 시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우뚝한 언덕을 배경으로 한 아크로 고린도(Acrocorinth, 해발 575m)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위치한 곳으로 유명하며, 요새 가운데 하나였다. 레가에움(Lechaeum) 도로변에는 상점들이 광장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광장 부근에서 발견된 라틴어로 된 비문에는 ‘마셀룸’(Macellum)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헬라어로는 ‘마켈론’(μακελλον)이며, ‘시장’을 뜻하는 낱말이었다(고전 10:25).  그리고 상가 중앙에는 단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곳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반대되는 교훈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잡혀왔던 곳일 것이다(행 18:12).52)


  광장의 북쪽에는 큰 공회당과 낮은 기둥 둘을 가진 직사각형의 방이 있는데, 이곳은 재판과 상거래의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공회당의 서쪽에는 아폴로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부근에서 발견된 흰 대리석 조각에는 헬라어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없는 “~~고게 에브라~~” 라고만 기록된 것이 남아있다. 아마도 이것은 “유대인(히브리인)의 회당” 이라는 뜻인 “쉬나고게 에브라아이온”의 일부일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회당 문 위 인방에 붙였던 것인 듯하다. 사도 바울의 설교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발굴물은 라틴어가 새겨진 비문인데, 그 뜻은 “에라스투스는 자신이 조영관(관직 이름)이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자신의 비용으로 포장도로를 놓았다”(ERASTVS. PRO. AED-S. P. STRAVIT)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주후 25년에서 50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인 듯한데, 이 사람은 필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장 23절에서 언급한 “재무 에라스도”라는 인물일 것이다.53)


  그렇다면 그는 사도 바울의 친구로서 이방의 유대교인으로 기독교회에 들어온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된 도기에는 권투 경기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승리자에게는 ‘승리의 잔’ 이 주어졌다.54)


  B. 고린도 교회



    1.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역


  바울 사도는 제2차 선교여행에 있어서 주후 51년 말엽에 이곳으로 처음 오게 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행18:1-11).55) 델피(Delphi)에서 발굴된 석문에 의하면 갈리오가 주후 51년 혹은 52년 경에 총독으로 취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56) 이 시기는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하고 있던 시기였다.57)


  바울은 본래 고린도에 장기 체류할 계획은 없었던 것 같다(살전 2:18). 그러나 주님께서 바울을 그 곳에 보내셨다는 증거를 환상 가운데 보여 주심으로(행 18:9-10), 그는 본래의 계획을 변경시켜 1년 6개월간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


  바울은 그 곳에 있던 천막 깁는 일을 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58)라는 유대인 부부의 집에 거하면서 일을 하다가 얼마 후 곧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바울의 설교에 많은 열매가 맺히지 못하게 되자(행 18:6), 그는 아굴라의 집을 떠나 회당 옆에 살고 있는 이방인 유스도의 집으로 그의 전도 본부를 옮겼다.


  아마도 바로 그 무렵 당시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가족이 주를 믿게 되었고, 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철학자 세네카의 동생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왔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송사했으나 그 결과는 무위로 끝났다.59)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주로 이방인들이었고(고전 12:2), 사회 계급은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전 1:26). 그러나 그 중에는 유대인 크리스천도 있었고(행 18:4; 고전 7:18), 상류층과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전 11:21 이하; 행 18:8; 롬 16:23). 고린도교회에는 바울 이후로 아볼로가 활동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유대인 크리스천으로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이었으나,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어 에베소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더 확실히 배운 후 이 곳에서 일을 하였다.60)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능력 있는 사역을 하였으며, 고린도교회에는 아볼로를 추종하는 분파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아볼로가 이러한 분열을 조장하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만 주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역은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결실을 거둔 것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이 사역하는 동안에 고린도는 물론이요 인접 여러 도시들에도 교회가 세워졌다(롬 16:1; 고후 1:1; 살후 1:4).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성장함에 따라 유대인들의 회당장인 그리스보를 비롯하여 여러 저명인사들이 개종하였다(행 18:1; 고전 1:14). 그러나 전반적으로 대다수의 교인들은 고린도 사회의 하류층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고전 1:26; 6:9-11), 따라서 자기들의 이방 풍습을 버리는 것에 애로를 느낀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6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고린도서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2. 사도행전에 나타난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


  사도행전에는 고린도서가 써졌을 당시에 사도 바울이 활동한 내용들이 개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요약해서 기억하고 있으면 고린도서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62)


(1) 아덴에서의 전도를 마친 후 사도 바울은 처음으로 고린도에 들어갔다(고전 2:1;

    행 18:1).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겨져 있었으나 사도 바울로부터 아덴으

    로 속히 오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렸다(행

    17:5).


(2) 그 당시 로마에서 고린도로 온 사람들이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생활

    하며 활동하였다(행 18:2-4).


(3) 실라와 디모데가 사도 바울과 합류하였다(행 18:6-8).


(4) 유대인들에게 첫 번째 증거를 한 뒤 사도 바울은 회당에서 그 옆에 있던 유스

    도의 집으로 옮겼는데, 그리스보(고전 1:14)와 함께 갔었다. 많은 고린도 사람

    들이 세례를 받았으며, 새로운 곳에서의 그의 수고에 보답하였다. 그러나 대부

    분 사도 바울에게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행 18:6-8).


(5) 그리스도의 특별한 환상이 사도 바울에게 용기를 주었다(고전 2:3). 1년 6개월

    을 머물렀고, 그 동안에 반란이 있었으며 갈리오[소스데네] 앞에 사도 바울이

    나타났었다(행 18:9-18).


(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사도 바울은 에베소로 건너갔다. 사도 바울은 예루

    살렘으로 가는 길이었으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에 남아 있었다(행

    18:18-21; 고전 16:9).


(7)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갔다(행 18:22-23). 얼마 동안은

    안디옥에 있었고, 그 뒤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차례로 방문하였다.


(8) 아볼로가 에베소에 왔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뒤 형제들

    은 아볼로에게 아가야로 가라고 권고하였다(행 18:24-28). 아가야에서 아볼로

    는 바울이 “심은 것”에 물을 주었다(고전 3:6).


(9) 사도 바울이 여행을 마치고 에베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만났다(행 19:1-7). 아볼로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10) 에베소 회당에서 3개월 동안 강론하였다. 그 뒤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고

     용되어 또는 자발적으로 있었다. 아시아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들

     었다. 손수건과 앞치마의 기적이 일어났다(행 19;8-12).


(11) 에베소에서 마술이 사라졌다. 그리고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행

     19:13-20).

(12) 이 일이 다 된 후에, 즉 3년 뒤에(행 20:31),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계획하였다. 디모데와 에라스도가 사도 바울보

     다 먼저 마게도냐로 보내졌다(행 19:21-22).

(13)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 데메드리오의 폭동이 일어났다

     (행 19:23-41).


(14) 사도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드로아를 거쳐(고후 2:12) 마게도냐로

     갔다(행 20:1).


(15) 사도 바울은 헬라에서, 아마도 고린도에서 3개월을 보냈다. 그 후에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먼저 마게도냐로 갔다. 그

     곳에서 드로아와 밀레도 등을 거쳐 예루살렘에 이른 뒤 다시 거기에서 마지막

     으로 로마까지 갔다.


  이와 같은 일정을 고찰해 볼 때 고린도에 대한 사도 바울의 두 번의 방문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언급되지 않은 방문이 있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가 있으나(고후 2:1; 12:14, 21; 13:1-2 참조), 이것이 실제로는 두 번째로 방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계획하고 발표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던 방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후 1:23).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의 대적들로 인한 계획 변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과의 관계는 사도행전과 더불어 살펴본다면 더욱 확실한 해답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모든 서신서들의 연구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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