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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공동체 연구

에반젤(복음) 2019. 12. 16. 09:04



                

고린도공동체 연구

 

 

 

Ⅰ. 고린도의 사회적 배경

 

  바울 당시에 고린도 성읍의 인구는 자유인이 약 250,000명, 노예가 400,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숫자상으로 고린도는 헬라의 중심 도시였다.

 

  1. 상업

 

  고린도는 고린도 지협의 바로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여행자들과 상인들의 교차로였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었다.
  (1)하나가 겐그리아로서, 사론 만(Saronic Gulf) 동편 7.2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2)또 하나는 레기움(Lechaiom)으로서, 고린도 만 서편 2.4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상품들은 디올코스(Diolkos) 지협을 통해 운반되었는데, 작은 선박들은 짐을 가득히 실은 채 도로 위로 지협을 가로질러 운반되었으며(길 위에로 당겨져 옮겨졌음),
큰 선박들의 짐들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수레에 실려 운송되었다.
이달랴(이탈리아)와 서바나(스페인)에서 오는 상품들은 고린도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이송되었으며, 소아시아와 베니게(페니키아)와 애굽(이집트)에서 오는 상품들은 고린도를 통과하여 동쪽으로 이송되었다.

 

  2. 문화

 

  물론 고린도가 아덴(아테네)과 같은 학문적인 도시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는 전형적인 헬라 문화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고린도 시민들은 헬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3. 종교

 

  고린도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신전들이 바울 당시에 모두 사용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 신전들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 중 하나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는데, 이 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적인 매음행위를 자행하곤 하였다. 고린도에 있는 극장의 북편으로 약 400m 쯤에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서있고, 주전 6세기에는 도시의 중앙에 아폴로 신전이 서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에 하나의 회당을 세웠는데 글자가 새겨진 회당의 인방 돌이 옛 고린도의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4. 고린도 성의 부도덕성

 

  당시 큰 상업 도시가 그러했듯이, 고린도 성읍도 개방적이고 무절제한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더구나 아프로디테 여신의 숭배로 말미암아 매음행위가 종교의 미명하에 더욱 성행되고 있었다. 한때는 1,000명의 성별된 창녀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린도의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인화 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성적 부도덕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 교회에 많은 성적인 문제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
 

II. 고린도의 지리·역사적 배경

 

  그리스의 펠로포네스 해안에 위치한 고린도(북위 35도56분, 경도 22분 56분)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려고 18개월을 머물렀던 도시이다(행 18:1-18)

 

  1. 지리적 배경

 

  첫 번째 정착민들은 물이 풍족하고 주변지역에서 우뚝솟아 기름진 평야지대를 감독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한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 해변에서 203km 떨어진 바위산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번성한 고린도는 해안 평지에서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지역(Acr-ocorinth, 575m)까지 두 개의 계단식 평지에 형성되어 4km2정도의 넓이를 가진다. 이 도시는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오는 지협(地峽)에 의하여 동서로 경계지어진다. 10km의 성벽은 그 가장자리를 따라 지어져 최적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에 의해 단단히 묶여져 있다.
  건물이 지어진 지역은 결코 성벽을 넘어서지 않았고 여분의 공간은 위험 시기에 사람들에게 거주공간과 식량을 제공하였다.
  고린도의 첫 번째 항구는 레기움으로 고린도 시와 그 항구인 레기움을 연결하는 긴 성벽은 전체길이가 2.5km이고 각 성벽이 1.2km로 평행으로 지어져있다.
  인공적으로 바다를 두른 항구(double port)의 넓이는 460,000m2고 부두의 길이는 7km이다. 지금은 항구의 아주 일부분이 발굴되어있다(Roux 1958: 103).
  고린도의 두 번째 항구는 겐그리아이다. 고린도 동쪽으로 9km 떨어진 사론 만에 위치한다. 인공적인 이 항구는 30,000 m2 정도 되며 큰 건물들이 북쪽 방파제위에 우뚝 솟아있고 네 개 구역으로 된 저장 창고들은 남쪽의 인공 방파제 안쪽을 따라서 정렬되어있다. (Sacraton, Shaw, and Ibrahim 1978: 14, 41).
  이 두 항구를 차지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펠로포네스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6km의 넓은 지협을 실질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고린도를 고대 세계의 중요한 교차로로 만든 것이다(Strabo 8.6.20).
  평지 가장자리의 경사지는 전통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함께 부유함으로 유명하고 또한 동서와 남북 무역을 통한 세금 징수를 통하여 고린도의 금고는 항상 가득 찼었다. 호머의 시대부터 고린도와 함께 한 수식어는 '부유한'이었다.
  오늘날 고린도는 고린도 운하의 서쪽 2.4km에 위치한 고린도만의 펠로포네스 해안의 작은 도시가 되었다. 현 유적지는 1858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대도시의 남서쪽 5.6km에 위치한 '모든 그리스의 빛'이었던 고린도가 지금은 아가야 고린도지방의 가난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2. 발굴역사

 

  첫 번째 발굴은 독일 고고학 연구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1886). 1896년 아테네의 고전 연구의 미국인 학교(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가 그 장소에 대한 책임권을 따내 계속적인 발굴을 이끌었다. 서론적인 연구는 American Journal of Archeology 와 Hesperia에 나오고 최종보고는 '고린도'(1930-)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의 전시대 유물이 나왔다. 고린도 외의 주요 발굴은 지협(1952-60과 다시 1967-1978)과 겐그리아(1963-68)에 대하여 행해졌다. 협곡에 대한 최종보고는 겝할드(Gebhard, 1973)와 브로닐(Broneer 1971; 1973)에 의해 출판되었고 스크란톤(Scranton)과 솨우(Shaw), 이브라힘(Ibrahim)은 겐그리아에 대하여 보고하였다(1978).

 

  3. 고린도의 역사

 

  고린도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분은 주전 146년 말까지 온 그리스도시와 줄리아스 시이져(주전44년)에 의해 설립된 로마식민지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500만년전의 도시의 기원과 그 연속되는 역사에 대하여는 살몬(J. P. Salmon)이 정리하였다(1984).
  오랜 세월 고린도는 변화를 반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변화를 희구하는 뛰어난 경영과
한편으로 예외적으로 다양하고 생산적인 경제 때문에 색다른 사회적, 정치적인 안정을 누려왔다.
  고린도는 유명한 고린도인의 청동제품에 더하여 세라믹과 직물, 조선, 건축술이 유명하
다. 동서 무역의 발전을 위하여 고린도와 사론만(Saronic gulfs)의 연결 운하는 주전 6세기 일찍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효화되었을 때 페리안델(Periander 주전 625-585)은 가벼운 배가 한 쪽 바다에서 포장된 잘린 홈을 따라 달려서 다른 쪽 승강장으로 잡아당겨 옮겨지도록 하는 해협 포장도로(dilkos)를 만들었다. 해협의 서쪽에서 길이 460m되는 하나의 부두(dock)가 발굴되었다.
  넓이는 3.4에서 6m로 다양하고 그 홈은 별도로 1.5m가 된다. 많은 횟수에 걸쳐 수선된 이 길은 적어도 주후 9세기까지 상품을 운송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편의시설은 상인들이 '말레를 지날 때는 네 집을 잊어 버리라"고 할만큼 위험하기로 이름난 말레 곶(Cape Maleae) 주위를 항해하는 것을 피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성공은 상대적으로 그들의 위치가 요충지가 아니고 그들이 거주지가 산업적이 아닌 이들의 질투를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주전 5-4세기 아테네 작가들은 고린도를 상업화를 사랑하는 상징적인 도시로 언급하였다. 아리토파네스(Aristophanes)는 '간음하다'라는 동사를 가지고 '고린도인화 하다'라는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내었다. 필레타에루스(Philetaerus)와 폴리오쿠스(Poli-chus)는 고린디안테스(Korinthiates), '매춘부와 노는 사람'이라는 연극을 썼다.
  플라톤은 매춘부를 의미하는 고린디아 코레(Korinthia Kore), '고린도 소녀'라는 용어를 썼다 (Rest. 404d). 그러나 이런 신조어들은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실제로 고린도는 그 동시대에 그렇게 나쁘지도 썩 좋지도 않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 도시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드려진 도시도 아니었고 1000 명의 성스러운 창녀들에 관한 스트라보(Strabo)의 이야기는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Conxelmann 1967).
  와이즈만(1979: 450-62)은 146년 고린도의 멸망으로 이끄는 사건에 대하여 잘 요약하였다. 로마가 두 번째 마게도야 전쟁(주전 200-196)후 그리스의 도시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양한 동맹 안에서 연합하는 것까지 허용하였을지라도 후에 이것은 로마에게 위협이 되었다.
  고린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아가야 동맹을 깨고자한 로마의 시도에 대해 아가야 동맹은 주전 146년 스파르타를 징계하는 전쟁을 함으로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메텔루스(Metellus)가 세 아가야 군대를 패배시킨 후에 북쪽으로부터 해협으로 도달할 때 그는 사령관이라고 추정되는 루시우스 뭄미누스(Lucis Mummius) 집정관의 퇴각과 합세하였다.
  아가야의 보루인 고린도는 노예들로부터 징집된 훈련되지 않은 14,000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으로 로마의 23,000의 보병과 3,500의 기병 그리고 원군에 대항하여야 했다. 전쟁결과는 예상되는 대로였다.
  도시의 전리품은 목격자 폴리비우스(Polybius)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주전 79-77년 사이에 고린도를 방문한 키케로(Cicero)에 의해 확인된 것같이 도시가 완전히 멸망하거나 사람들이 멸절되거나 하진 않았다(와이즈만 1979: 494-95).
  고린도는 비록 완전히 부셔졌더라도 천연적인 상업 중심지였고 뭄미우스는 재해를 피해 피하였던 시민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 확실하다.
  로마 식민지로서의 설립은 많은 고전 작가들이 줄리아스 시이져에 의한 공이라고 하며 아피안(Appian)은 카르타고의 약탈 후 102년째 주전 44년이라고 정확한 연대를 말하였다. 비문들은 그 새 도시의 이름을 Colonia Laus Julia Corinthiensis라고 보여준다. 그 도시가 로마에대한 위협 없이 1세기 넘게 평화를 되찾았기에 로마 시이져의 관심은 더 이상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린도의 경제적인 잠재성은 로마에도 잘 알려졌고 이것이 해협을 통과하는 운하를 만들려고까지 한 계획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출처] 구린도 공동체연구    작성자 : 성산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