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에서의 몸 담론과 권력
'미시정치학'적 페미니스트 비평을 위하여
김덕기 | 대전신학대학·신약학
I. 서론: 바울의 몸에 대한 최근 연구의 접근방식과 문제제기
이 글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몸 담론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최근의 [고린도전서] 연구의 핵심 쟁점은 바울의 신학적 담론이 로마 제국주의의 문화와 정치체제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정치적 독해가 어느 정도 타당한지에 관한 것이다. 페미니스트 신약학자들은 이러한 독해가 바울 자신이 당시의 제국주의의 가부장제적 상징적 질서와 문화적 약호를 내재화시키거나 다양한 소수들의 목소리를 억압하였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로마 제국주의의 미시권력의 가부장적 상징체계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우리는 이러한 최근의 논쟁의 핵심적인 문제인 바울의 몸 담론과 권력과의 관계를 '미시정치학'적 방법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어떻게 여성들의 입장을 억압하는 권력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논의함으로써 위의 쟁점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주제는 인간의 주체성과 공동체성이 교차하는 몸 담론의 권력 효과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자신의 주체성이 몸과 연관되며, 동시에 이 몸이 사회적 훈육과 다양한 권력관계를 생산하는 미시권력의 배치의 대상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새로운 권력에 대한 이론에 의해서 우리는 고대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교회의 공동체 내외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바울의 몸 담론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여성의 입장에서는 어떤 권력 효과를 가져왔는지 탐구하게 될 것이다. 우선 우리는 바울의 몸에 관한 신학적 담론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지 고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아볼로(Apollo)의 지혜 인식론과 여성 예언자들의 '영광의 신학'의 도전으로 야기된 복잡한 갈등의 담론적 상황 속에서 몸에 대한 바울의 일관된 견해가 어떻게 바울과 다른 견해의 기독교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지, 탐구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는 그 핵심 내용 전체가 거룩의 가치를 구현하는 몸의 담론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몸에 관한 직접적 담론 뿐 아니라 이와 간접적으로 연관된 주제를 다루는 다음과 같은 고린도전서의 부분들을 탐구하려 한다. 즉 사회적 몸의 기초로서 영적 지혜론(2장), 몸의 음행에 대한 윤리적 원칙(6장), 남녀평등을 위한 성과 결혼생활에 대한 몸의 윤리(7장), 예배 때의 여성의 머리 모양에 대한 신학적 근거(11,1-16)에 관해서 바울의 몸 담론이 어떻게 구체적인 공동체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다양한 종류의 공동체나 여성들에게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지 검토하게 될 것이다.
II. 바울의 여행일지와 편지의 구조 및 고린도 도시의 역사
[고린도전서]와 관련된 바울의 여행일지
⑴ 바울은 실루아누스와 디모데([고후] 1,19)를 데리고 50년 늦은 봄 또는 이른 여름에 고린도에 도착했다. 41년에 크라디우스 황제에 의해서 로마로부터 추방당한 기독교인들 중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함께 정착하여 텐트 작업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서 데살로니가 전서를 썼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 명단은 [사도행전] 18장 1-18절, [고린도전서] 1장 14-16절, 16장 15-17절, 그리고 [로마서] 16장 21-24절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고, 인원은 40-5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다수가 이방인들이었고, 몇몇은 유대 회당과 연루되었다.
⑵ 바울은 50년 4월부터 51년 9월까지([사도] 18,11) 고린도에 약 1년 반(18개월)을 머물렀고, 고린도에 떠나기 직전에 로마의 행정구역인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 앞에 유대인들에 의해 끌려갔다. 그러나 고소는 기각되었다.
⑶ 51년 9월 예루살렘에서의 회담을 마치고 고린도의 동쪽 항구인 Cenchreae로부터 안디옥을 향하여 항해했다. 안디옥에서 바울은 (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방종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할례를 받을 것인지의 문제([갈라] 2,1-10)에 대해서 협상하였다.
⑷ 바울은 52년 봄(아마도 4월?)에 안디옥을 떠났다.
⑸ 바울은 에베소에 52년 여름 말기(8월)에 도착하여 54년 10월까지 2년 3개월 머무름([사도] 19,8-10).
⑹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기 직전에,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온 유대인 전향자 아볼로가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축복'으로 고린도를 향하여 항해했다.([사도] 24,18-24)
⑺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한 2-3년 동간 가장 바쁘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갈라디아서](53년 봄)와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53년 여름)를 썼다.
⑻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54년 4-5월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① 클로에(에베소의 비즈니스 여성)가 자기 고용인들을 고린도에 보냄. 이들이 에베소에 돌아와 보고함(1,11)
② 바울이 놀라서 디모데를 보냄(에베소에서 고린도로)
③ 디모데가 오는 중에 고린도로부터 대표들([고전] 16,7 : 스테파니스, 포튜나투스, 아가이쿠스)이 편지들을 가지고([고전] 7,1) 에베소에 도착. 그들이 바울의 질문들에 모든 답변들을 제시함.
④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동역자 소스데네를 데려와서, 편지를 씀 그러나 그들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허용할 수 없어서 소스데네가 오는 것은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다.
편지의 종류들
① 잃어버린 이전 편지, ② [고린도전서](7-16장이 중요 부분), ③ '잃어버린 눈물의 편지', ④ [고린도후서] (1-9장이 중요 부분), ⑤ [고린도후서] 10-13장.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집필의 내용과 배경
⑴ [고린도 A서] : [고린도전서] 5장 9절.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렀을 때([고전] 16,8) '잃어버린 이전의 편지'([고전] 5,9)를 썼다.
⑵ [고린도 B서] : [고린도전서] 7-16장 중심으로. 고린도 교회의 사신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가 가지고 온 질문들을 기록한 편지에 대해서 서신으로 답변한 바울의 편지.
⑶ [고린도 C서] : [고린도후서] 2장 3-4절. 디도 편으로 보낸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고후] 2,3f) 쓴 편지. 이것은, [고린도후서] 10-13장과 동일시되지만, [고린도후서] 12장 18절이 [고린도후서] 8장 6절, 16-19절을 지시하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10-13장이 소위 '눈물의 편지'가 아닐지도 모름.
⑷ [고린도 D서] : [고린도후서] 1-9장. 적대자들에 대한 바울의 권위 변론과 헌금 모금.
⑸ [고린도 E서] : [고린도후서] 10-13장. '지극히 큰 사도들'의 대한 바울의 사도성의 변호.
[고린도전서] 전체의 의미구조
⑴ 서론(1,1-9)
⑵ 공동체에서의 분열(1,10-4,21)
⑶ 몸의 중요성(5,1-6,20)
⑷ 고린도 사람들의 질문들(편지로)에 대한 답변(7,1-14,40)
① 사회적 지위의 문제들(7,1-40)
② 이방 환경으로부터 일어나는 문제들(8,1-11,1)
③ 예전적 모임에서의 문제들(11,2-14,40)
⑸ 부활(15,1-58)
⑹ 결론(16,1-24)
고린도 도시의 특성
⑴ 역사
① 기원전 146년 : 아카야 동맹군과 로마군과의 대접전. 아카야 동맹군의 패배로 고린도 건물들이 파괴되고 남자들은 몰살되고 여인들과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감.
② 기원전 44년 : 시저가 로마의 식민지로 고린도를 재건.
③ 기원전 27년 : 아가야 전지역을 다스릴 행정부가 고린도에 설치.
④ 기원후 44년 : 원로원 직할 구역이 되어 총독이 주둔.
⑵ 지리
① 서쪽 바다를 위한 북편의 '레헤움'과 동방 교역을 위한 항구 '겐그레아'는 고대 포세이돈(Poseidon)과 페이레네(Peirene)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의 이름이다.
② 레헤움 : 포세이돈 신전, 겐그레아 : 아프로디테의 신전과 석상
③ 방파제 위에는 포세이돈, 동상, 다른 끝에는 그리스 신 아스클레피우스와 이시스 신당이 있었다.
④ 고린도에 디오게네스(Diogenes of Sinope, C. 400-328 BC)의 무덤이 있으므로 견유학파와 같은 통속 철학이 유행하였다.
III. 바울의 인식론과 몸에 대한 이해: [고린도전서] 1장 18절-2장 16절을 중심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윤리적 주체화 양식을 헬라적 인간학의 용어를 차용하여 인간의 육체성과 영성의 이원론적 구도 속에서 확정지었다. 이 때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우주적 이원론은 헬라적 인간학의 조야한 이원론인 영과 육의 이원론으로 재구성되었다. 이제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유대 묵시문학의 옛 시대와 오는 시대의 이원론을 기독교 묵시문학의 이원론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이원론으로 재건립하고, 이를 다시 영, 혼, 육으로 헬라화시켰다. 여기서 영은 부활의 몸을 하나님의 숨겨진 지혜의 나타남으로 인식하는 능력으로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영적 인식론은 공동체 훈련을 위한 몸 담론을 정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한편으로 유대교의 묵시적 종말론의 신화를 탈신화화하면서 그 이원론적 결정론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탈코드화(decodage: 탈규준화)하는 비판적 속성을 갖고 있었다. 갈라디아에서 영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공유하는 '자유'의 주체화의 양식이 되었고, 육은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속박'의 주체화 양식을 의미했다. 바울은 이러한 영의 개념을 통해서 유대교의 율법에 속박된 코드화(codage: 규준화)된 주체화 양식이나 율법 자체로부터 탈코드화함으로써 묵시문학적 결정론에 매인 코드화된 주체화 양식까지도 비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원론은, 이제 그리스도 중심의 인류의 구원에 대한 통속적 대중화의 견지에서 헬라화된 당시의 사람들에게 설득될 수 있도록 선교의 효과적인 전략으로 작동하여, 자유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헬라화된 영의 주체화 양식은 '예수 사건'(예수의 말과 실천)의 탈권력의 에토스를 탈각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재화된 묵시문학적 이원론에 의해서 여기에 영적인 신자와 육적인 비신자의 이원론적 배제주의 논리가 개입하게 되었다.
[갈라디아서]의 이러한 영의 개념과 달리, 이제 [고린도전서]에서의 바울의 새로운 영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을 중심으로 한 교회론을 확립하는 인식론의 근거로 활용하게 되었다. 바울은 우선 하나님의 지혜(지식)를 오해하고 자유방임주의나 금욕주의 윤리를 실천하는 자들에 대해서 비판하기 위해서 영적 인식론에 근거한 몸의 신학을 제시하였다. 우선 바울이 지혜를 영과 대비시키는 인식론을 논의하는 것은 구약의 정결례를 대체하는 새로운 공동체 형성의 모델로서 몸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기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영 체험의 하나됨에 의해서 교회공동체와 동일시된다.([고전] 12,12)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여성 예언자들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익명의 지도자(아마도 아볼로)의 엘리트적 지혜 인식론을 거부하였다. 바울은 1장 18절-2장5절까지 거의 지혜를 부정적으로 사용하면서 지혜에 대해서 말하기를 거절한다. 하지만 2장 6절부터 '온전한 자들'( )에게만 하늘의 지혜를 말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지혜 대신 영을 토대로 한 바울의 인식론은 몸과 영의 일치("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고전] 3,16-17)에서 드러나는 의지의 인식론이었다. 아볼로의 지혜의 인식론에서는 천상에 관한 지식이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를 지배할 수 있는 인식론이었다면([고전] 2,1-5), 바울의 영의 인식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알고 믿게 하는 영의 기능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과 의지("주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 [고전] 2,16)가 지식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식론이었다. 이제 이 히브리적 의미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영의 인식론은 바울이 제기하려는 교회 공동체로서의 몸의 인식론적 근거가 될 수 있었다.("몸이 성령의 전이다" [고전] 6,19) 이러한 인식론을 통해 바울은 엘리트적인 지혜의 인식론을 거부하고 영에 의해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의지를 부여하는 영의 능력이 사회적 몸(교회 공동체)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대중적인 영의 인식론은 하나님의 영이 몸에 거주한다는 관점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몸과 연관된 인간의 실천 행태와 주체화 양식을 조절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바울의 영과 몸의 상호관련성에 입각한 인식론은 바울이 몸 담론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용적인 유용성을 제공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우주적 신체)이 교회(사회적 신체)와 동일시되는 영의 체험 속에서 우리의 몸(개인적 신체)으로 전이될 수 있는 위의 인식론은 기독교인의 몸에 대해서 거룩의 가치를 요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도표 1> 참조) 그래서 바울은 5-6장에서는 음행의 문제와 연관된 자유방임주의와, 7장에서는 성생활과 결혼에 있어서의 금욕주의와 대항하기 위해서 몸의 신학을 윤리적 문제들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도표1> 바울의 지혜에 대한 비판으로서 영의 인식론
그러나 이러한 위의 전략은 몇 가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하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지혜를 어리석은 자를 택하시는 가치의 전도로 이해하고,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부활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영적 인식론에 근거한 바울의 몸 담론은 결국 여성 예언자들이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경험한 데서 오는 그들의 영광의 신학과 체험주의적인 영 이해([고전] 12-14장의 방언, 지식, 예언 체험)를 지나치게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몸에 대한 은유는 인간 몸의 유기체적 총체성과 위계적인 질서에 근거한 당시 유대 사회와 로마 사회의 가부장제 문화에 영합하는 점이 많았기 때문에 유대 주류사회의 창조질서에 근거해서 여성의 예배의 질서 문제를 풀어나가게 되었다.(11,1-16) 더군다나 아볼로의 인식론이 엘리트적 사유라고 그가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아볼로의 지혜 신학을 지지하는 여성 예언자들의 영광의 신학을 전(前)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빠진 윤리적 방임주의의 근거로 간주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의 몸에 대한 은유가 '머리'에 대한 유대 전통의 창조질서와 연합되어 여성들의 예배 참여에서의 역할과 여성 리더쉽에 제재를 가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바울의 한계는 그가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을 사용하여 기독교 묵시문학의 사상의 우주론적 이원론을 재해석-비신화화하는 데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였다. 몸 신학의 형성 과정과 결과에서 바울은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한 헬라적 이론을 [고린도전서]에서는 로마 시대의 몸의 메타포로 바꾸어 공동체의 유기체적 통일성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제시한 영의 인식론에 근거한 몸의 신학 담론은 바울이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론( )의 모델을 보수적 로마 사회의 유기체적 공동체의 이상과 적합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몸 윤리의 온건성과 철저성을 매개로 로마의 권위주의적 유기체로서의 몸 이해와 연결함으로써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로마 주류 사회에 심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여기에 편입할 수 있는 선교의 미시정치학적 전략을 드러낸다. 이러한 영에 근거한 바울의 몸 신학 담론 구성의 대가는, 결국 바울이 헬라화와 로마화를 외양상 거절하였을지라도, 그가 로마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적 위계주의 사회의 문화체계를 교회 권력의 장치와 통치기술에 접목시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IV. [고린도전서] 6장에서의 몸 담론의 미시정치학적 이해: 불트만의 해석학 비판을 통해서
우선 바울의 몸 이해를 위해서는 오늘날의 몸 이해와 고대의 몸 이해의 차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현대는 여성의 몸이 주된 관심이었지만 고대는 남성의 몸(투원반 던지기)이 몸의 모델이었다. 또한 고대의 몸 이해에는 영미의 청교도주의나 한국의 유교주의에서 볼 수 있는 금욕주의적 몸 이해와 다르다. 더군다나 소비사회, 환경-생태주의적 고려, 여성주의, 과학의 신사고의 새 문명에 따라 몸을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척도로 생각하는 현대적 몸 이해와도 다르다. 고대 사회에서는 유대교의 정결례와 같이 몸은 거룩의 지표로서 사회의 통합을 구현하는 장이었다.
[고린도전서]는 몸 담론에 의해서 다양한 집단들을 통합하고 이들이 직면하는 공동체의 윤리적 문제들을 대처할 수 있는 기준과 원리를 마련해야 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로서 창기들과 노예들이 많았다. 이것은 교회의 도덕적 문제를 야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와 같은 정황에서 지혜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1,26)와 그렇지 못한 자, 남성/여성, 이방인/유대인, 종/자유자 등의 다양한 집단들이 그리스도 이해와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로 논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소위 전 영지주의자들에 영향을 받은 헬라적 여성 예언자들의 도전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상류층이 주로 초기 교인들이었고, 바울과 아볼로, 게바와 그리스도의 계파가 있었다. 바울은 더군다나 특히 바울은 5-6장에서는 음행에 의한 자유방임주의의 윤리적 입장에 대항해야 했고, 7장에서는 결혼과 성생활에 대한 금욕주의의 윤리적 입장을 상대로 교회 공동체로서 몸의 윤리적 원리를 제시해야 했다.
바울은 헬라적 인간론적 개념의 준거틀 몸과 이 근거가 되는 영의 인식론을 통해 서 새로운 기독교 정체론('대안적 결성체': )을 만들려고 하였다. 여성 카리스마적 지도자(여성 예언자들)들이 아볼로의 지혜의 인식론의 도움을 받아 고린도 교회의 주류에 도전하였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은 이 아볼로의 지혜의 인식론에 대항하여 정교화된 영의 인식론을 제시하였다. 이에 근거해서 바울은 교회론과 윤리적 원리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몸에 근거한 교회론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몸의 담론에 근거한 공동체론은 유대교의 정체론의 변형이라는 차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바울은 유대교의 정결례, 성전, 회당, 장로제를 대신해서 몸의 은유를 통해 거룩의 의미([고전] 6장), 그리스도론적 교회론(6,19), 몸적 교회(12,27-31), 직제(12,28)를 다음과 같이(<도표 2>) 새로 제시하려 하였다.
<도표 2>
위의 몸 담론의 배경에 비추어 보면, [갈라디아서]에서의 영/육의 인간 이해에 근거한 불트만의 몸에 대한 실존주의 해석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트만의 몸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위의 배경에 보다 적합한 몸 담론의 미시정치학적 이해를 탐구하고, 이에 근거해서 [고린도전서] 6장 12-20절에 대한 새로운 주석과 현대적 해석의 예를 제시하고자 한다.
⑴ 불트만의 몸에 대한 실존주의 해석
불트만은 몸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을 시도하기 위해서 우선 바울의 몸의 용례를 검토함으로써 몸과 영과 혼의 비교의 관점을 제시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몸은 전인간(全人間: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가진 인격)적 존재 표현 양식이며 자기 이해이다.
㈎ 바울의 몸은 육의 형식이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간적인 양식이라고 불트만은 주장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몸은 인간의 본래 자아(가령, 그의 영혼)에 외부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 자아에 속해 있다 ... 인간은 몸(자아)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몸(자기 자신) 자체이다."(190쪽)
㈏ 자기 자신의 관계로서의 인간 존재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주체성과 객체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불트만은 바울의 이러한 몸 이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명료히 제시하였다.
인간이 몸으로 지칭될 때 인간을 보는 특별한 방법은 어떤 것인가? 인간이 몸이라고 불릴 때는 그가 자기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거나 한 사건, 한 일의 주체로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이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가질 수 있을 때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자신의 주체이면서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자, 자기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자, 다시 생소한, 자신의 뜻에서 발생하지 않은 사건에 예속된 자로 경험될 수 있는 자, 이런 자로서 인간은 몸이라 호칭된다 ... 자신을 조정하거나 아니면 이 조정력을 잃고 외부 세력에 희생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자체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외부 세력은 적대적인 것으로, 인간을 그 자신에게서 생소하게 하는 것으로 경험하거나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진 인간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는 구원의 힘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91-192쪽.)
특히, 몸의 자기 이해와 관련된 인격성은 부활 이후의 인간 존재의 성격을 드러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몸을 육체의 현상, 즉 육체 및 그것의 형식으로 나타냄으로써 부활의 몸의 자료가 육과 피가 아니라 영이라고 생각하는 신화적 부활론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의 의도는 몸과 관련해서 부활의 실존적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다. "몸의 존재로서 특수하게 인간적인 존재가 저 근본적인 의미에서 죽음도 넘어선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194쪽)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도 신앙과 희망, 사랑이 부활 이후에도 존속할 것이라는 것은 인간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가 제거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이러한 신앙과 희망, 사랑 안에서 결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 불트만의 몸, 혼과 영의 이해
① 몸은 '도피한다'와 관련된 실존적 상태를 의미한다.
몸은 이원론적 자기 이해에 빠질 수 있는 자아의 균열로 말미암아 본래의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특성을 나타낸다.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오는 긴장을 도피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몸은 '육'(삶의 양식)과 동의어로 쓰일 수 있다.
이원론적 자기 이해는 자기 자신과 거리를 갖고 외부 세력들이 침투하여 자신과의 거리를 분리로 경험하여 자신을 근본적으로 생소한 존재인 비아(非我)에 대한 관계로서 오해하거나 유혹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때 몸이 육신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데 이것이 (영지주의적) 이원론의 자기 이해이다. 이 때 인간은 육신이 감옥 안에 결박된 것으로 이해되고,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을 동경하게 된다. 이러한 해방의 실천이 밀의와 금욕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서의 인간 실존의 긴장을 도피하는 일이 된다.
여기에서 불트만이 주장하는 중요한 점은 바울이 이원론적 자기 이해를 극복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바울이 이 이원론적 자기 이해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몸의 삶으로서 부활의 삶을 상정한 것, 그가 몸을 육의 의미로 사용하였을 때조차도 몸과 육의 근본적 차이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반론으로 사용되는 [고린도후서] 5장 1절 이하와 12장 2-4절, [고린도전서] 7장 1-7절은 몸을 이원론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를 자세히 보면 이원론에 빠지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5장 1절 이하에서는 바울이 몸의 벗음보다는 덧입는 것을 주장하고, [고린도후서] 12장 2-4절에서는 육신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상정할 뿐 벗어났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7장 1-7절에서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고는 몸 밖으로 벗어나기를 그가 요구한 것은 아니다.
② 혼은 '원한다'와 관련된 인간학적 용어이다.
헬레니즘의 용법과 달리 몸과 혼은 대립되지 않는다. 구약성서의 '네페쉬'와 같이 혼은 생명과 관련된다.([로마] 11,3; 16,4) [로마서] 2장 9절, 13장 1절에 나오는 '모든 목숨(혼)'은 누구나의 뜻을 가지며 여기에서 혼은 인격, '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전] 12,5) 바울의 영지주의 화법, 즉 "첫 사람이 산 혼이 되었다."([고전] 15,45)에서처럼, 혼은 영과 대비해서 격하된 의미로도 사용된다. 또한 혼은 특수하게 인간의 생동성을 뜻하며 노력하고 원하며 무엇을 향한 '나'의 특성에 속한 것이다.([빌립] 1,27)
③ 영은 '안다'와 '행한다'의 의미를 내포한다.
'루아흐'와 '네페쉬'가 서로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 것처럼, 바울도 영을 혼과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고전] 7,34; 5,23.) 여기에서 영은 전인격을 의미한다. 이와 연관되어서 영은 인격을 나타내는 인칭대명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고전] 16,18; [고후] 2,3; 7,5) 또한 혼이 원한다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처럼, 영도 원한다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빌립] 1,27; [고전] 1,10; [빌립] 2,1; [고후] 12,18)
반면, 영의 의미는 혼의 의미와 달리 이성( )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서 인간의 영이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의미에서 현대적 의미의 '자기의식'을 뜻할 수 있다. 영은 '안다'와 관련된 인간학적 용어이다. 특히 [로마서] 8장 15-16절, [고린도전서] 2장 10-11절에서 바울은 신의 영은 신을 알지만 인간의 영은 인간을 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영은 인식론적 모티브와 관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영은 혼의 의미와 자기의식의 의미가 더하여져서 이 의도적이고 목표가 확고한 주체처럼 '행동한다'의 의미가 확정된다.([로마] 8,26; [고전] 2,10; [고후] 3,6)
현대적 재해석 : 위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의 몸 담론이 이원론에 빠지지 않았다고 보는 타당성은 불트만이 몸을 개인의 실존적 결단의 인격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바울이 이원론에 줄곧 빠지게 되는 경우는 오히려 공동체에 적용하였을 때이다. 이때에 바울은 몸 담론에 의해서 교회의 체제를 구축하려 했기 때문이다. 몸을 영과 혼의 용례 속에서 분석하는 불트만은 바울의 담론에서 이상주의적인 현대적 인간 이해를 추출하는 비정치적인 실존주의 해석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다. 바울에게서 주체와 객체의 존재 표현으로서의 몸은, 물적 조건을 강조하는 미시정치학에 의해서 재기술하면, 훈육의 생체권력이 배치되는 '기관 없는 신체'와 같은 객체(대상)로, '욕망하는 생산'의 주체로, 그리고 이 둘의 연접에 의해 형성되는 정신분열적인 '유목적 주체'로 이해될 수도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몸은 우리의 권력관계에서 자신의 이해를 극대화하고, 지배 권력에 복속되기 위한 성향체계(아비튀스: habitus)를 체현하는 장치와 관련된다. 실존주의적 이해와 달리 몸과 연관된 인간 이해를 미시정치학적으로 기술한다면, 몸은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기반과 자신의 내적 자유와 삶의 익숙한 현실 안주의 본능이나 자신의 성취욕과의 갈등 속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은 인간 존재의 정체성과 공동체성의 이중성을 몸에 체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몸은 지배 권력의 훈육 과정과 생체권력의 권력기술에 순복하는 권력의 내면화와 이로부터 탈주하려는 주체화의 전략이 공존하는 권력의 배치 활동의 물질적 터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위의 두 가지 물질적 조건과 탈주의 욕망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육체에 적합한 삶의 주체를 창조적으로 구성하는 '존재양식'을 담는 그릇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 '존재양식'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는 물질적 토대와의 중층결정된 모순을 일으키는 가치평가적인 문화적 약호와 무의식적으로 연관된 가치의 상징체계이다.
⑵ [고도린전서] 6장 13-21절의 주석적인 고찰과 몸의 미시정치학적 이해
① [고린도전서] 6장 13절 :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13a) "... 주는 몸을 위하시니라."(13b)
인격(자신과 자신의 관계)으로서의 몸( )은 음란을 위하지 않게 주를 위해 조절되어야 한다. 바울은 영/혼/육으로 나누어서 말할 때가 있다.([데전] 5,23) 바울의 몸에 대한 전체적인 사상에 의거해 보면, 몸은 공동체의 영( : 영적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고,([에베] 4,4-6) 혼( )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는 개별적인 생명력을 말한다. 반면, 영과 관련 없는 개인의 육( )적인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양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한다.([갈라] 5-6장)
바울의 인간학에 비추어 보면, 6장 13절에서의 몸 담론은 몸의 육성(肉性)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몸이 주를 위할 뿐 아니라 주가 몸을 위한다는 것은, 몸의 육성만을 드러내고 있기보다, 공동체로서 교회의 몸과 우리의 신체적 몸을 주가 '감찰'하고 계신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주가 몸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몸은 음란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몸이 주를 위해, 주가 몸을 위한다는 것은 우주적 몸과 사회적 몸의 상호 교호 및 조응관계를 암시한다.
현대적 재해석 : 위의 주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불트만의 실존주의 해석과 차이가 난다. 이것은 철저하게 고린도 교회의 음란에 관한 구체적인 공동체 윤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몸이 실존적인 윤리의 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바울은 사실 여기에서 몸의 '육체성'과 '초월성'으로서의 주가 아니라, 몸의 '주체성'과 '외부성'으로서의 주를 대비시키고 있다. 한편으로, 바울은 공동체적 윤리의 근거로서 외부성의 주름이 내재화된 그리스도를 상정하게 됨으로써 로마의 제국주의적 통치의 정점이 되는 로마의 황제와 대결하는 대항문화의 몸 담론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외부성으로 존재하는 주는 우리 몸을 '감찰'함으로써 새로운 주체화의 전략에 관한 유목적 사유를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바울은 이러한 몸에 대한 은유를 통해서 로마의 제국주의 통치의 이상이 내재화된 교회 권력의 의도를 감추고,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부장제적 상징체계에 근거한 교회를 '우주적 몸'으로서 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와 몸이 상호교호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외부성이 내재화된 주름을 통해서 억압적 권력 장치로부터 '탈영토화'(d territorialisation)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② [고린도전서] 6장 15절과 6장 19-20절 :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창기의 지체로 만들 수 없다."
이 구절의 몸의 용례에서는, 몸이 여러 다른 소재들로 각인 될 수 있는 육체의 형태나 형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육체를 내가 조정하거나 다른 세력에 의해 조정될 수 있는 가능성 즉, 나의 전존재를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의 표현'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의 몸은 나와 거리를 두고 나의 육체를 대상화 될 때 나타나는 책임적인 존재로서의 인격을 나타낸다.
불트만은 이러한 특성의 성서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몸을 자기 자신을 조정하고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만들 때 예수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지닌다고 보았다.([갈라] 6,17) 반면 몸은 자신의 조정력을 빼앗는 외부세력에 의해서 영향력을 받는다. 예를 들면, [로마서] 6장 12절의 '몸의 욕심들'은 [고린도전서] 15장 44-49절의 '영의 몸'과 [빌립비서] 3장 21절의 '영광의 몸'과 대조된다. 불트만은 위의 몸의 이중성이 실존론적 특성을 드러낸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몸으로서의 인간의 특징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 이 관계가 바로 된 것일 수도,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을 소유할 수 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 ... 그의 몸됨 자체는 어떤 선한 것도 어떤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로지 그가 몸이라는 이유에서만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신과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그에게 있다.(193-194)
이와 비슷하게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은 몸의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나타내 보여 준다. 예를 들면, 6장 19절에서 몸이 나에게 객체와 주체가 될 때 그 결과를 제시한다. 객체의 경우,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성령의 전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고 값으로 산 것이다. 몸은 내가 갖는 소유물이기 보다 언제나 외부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반대로 6장 20절에서는 몸이 주체로서 나의 의지에 따라 이를 처분할 수 있다. 나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몸을 주체로서 내가 하나님께 다시 되돌려야 하는 의무는 객체로서 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으로 사셔서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재해석 : 이 부분은 불트만의 몸의 이중성이 적용되기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몸이 행동의 주체이며 객체이다'라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존주의적 인격성의 이중성을 나타내기보다 오히려 사유와 몸과의 관련성을 차단하고 사유와 지성적 자아와의 연관성의 고리로서 이해한 코기토(cogito)로서의 인간의 주체성을 비판하고 있다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몸의 이중성은 영과 육, 지성과 감성, 몸과 머리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극복한다.
여기에서 불트만의 실존주의 해석과 달리, 몸의 객체성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요구된다. 몸은 몸 안의 힘과 욕망을 생산하는 기구가 될 수 있고, 자신과 타자의 욕망과 권력이 등록되는 장소도 될 수 있다.([로마] 6,12: '몸의 욕심들') 여기에서 몸이 한 개인의 도구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권력기구의 배치 활동의 대상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불트만의 개인주의적 실존주의적인 인간 이해와 거리가 있다.
한편으로, 바울은, 몸이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이 세상 권력의 장치에 의해서 포획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몸과 연관된 인간의 성향체계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용하는지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한편으로 몸이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주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권력에 의해서 복종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값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무상 증여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권력에 복속되는(sujettissment) 성향체계로 훈육되어야 할 몸이다. 더군다나 미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될 몸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 '성령'( )이 계신 성전으로서 인간의 몸은 이와 적대적인 세상 권력과 구별되는 교회의 영적 훈련에 복속되어야 할 대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몸은 교회 권력의 장치에 의해서 포획될 또 다른 객체가 될 위험이 있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 6장 14-18절, 19-20절 : 직설법/명령법과 몸의 공동체성
특히 14절은 과거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과 미래의 하나님의 우리의 부활의 능력이 동시에 연관된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에 의해서 우리의 몸의 부활과 교회의 우주적 몸의 연대성이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미래의 직설법적 형태의 부활은 현재의 명령법적인 우리의 행위의 당위성과의 긴장을 보여준다. 또한 몸의 객체와 주체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19-20절에서도, 바울은 우리 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부활의 몸이 될 것이기 때문에(미래의 직설법) 성령의 전이고,(현재의 직설법) 그리스도를 통해서 대속적인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과거의 직설법) 우리는 몸을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현재의 직설법)
이러한 몸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는 다음과 같은 몸의 공동체적 특성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 연관된다. [고린도전서] 6장 14-17절에서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주의 몸과 합하는 자는 한 영의 체험을 공유한다. 여기에서 창기의 몸과 혼합할 수 없는 영적인 몸은 거룩의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과 합한 그리스도인의 음행은 몸 안에 죄를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영이 우리 몸 안에 거주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5절의 몸과 지체의 메타포는 [고린도전서] 12장의 몸과 지체와의 관계에 대한 공동체성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 27-31절, 12장 12-26절에서와 같이 몸이 공동관계, 전인적, 우주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과 연관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우리 몸은 [고린도전서] 12장 21-26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의 비대칭적 분배와 반위계적 평등주의를 드러낸다.
현대적 재해석 : 몸은 사회적, 공동체적, 우주적 연대성을 의미하고 신의 계획이 실행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자아'에 기반한 개인주의와 이성 중심적 세계관과 대조된다. 개인적 몸에서 공동체성을 제거한 현대적 의미의 몸은 상품화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몸이 하나님과 연대 속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몸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면, 우리는 공동체의 부분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담당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지체인 몸은 '나'의 지위와 신분의 현재의 상태가 다른 사람 보다 더 많은 몸에 대한 특권을 누릴 수 없다. 다른 한편, 바울의 몸 이해를 [고린도전서] 12장의 반위계적 평등주의에 비추어서 이해할 때는 오늘날 교회의 파시스트형, 독재형, 실무형 리더쉽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바울이 강조하는 몸의 하나됨의 통일성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공동체의 다양한 목소리를 부정하는 역기능의 권력 효과를 생산할 수 있다. 더군다나 바울의 몸 담론은, '주의 몸'이 예수의 부활의 몸만을 주로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동일시하는 승리주의적 해석을 유도함으로써, 세상 권력을 철퇴시키는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 통치의 절대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사회가 몸의 은유를 통해서 로마의 황제의 특별한 몸을 '영토화'(territorialisation)한 것처럼,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에 근거해서 교회권력을 영토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V. [고린도전서] 7장에 나타난 가부장제적 미시권력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독해
[고린도전서] 7장은 흔히 여성해방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의 여지를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바울이 어떻게 종말론에 근거한 선교 팽창주의가 로마의 지배적인 가부장제의 문화와 연관되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우리는 바울이 7장에 어느 정도 남/녀의 평등주의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지 평가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수사학적 표현 중에서 그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향하여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고 있을지라도 남성에게 적용할 때와 여성에게 적용할 때 각각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독해의 방법은 다음과 같이 오늘날 페미니즘의 다양한 주장과 이에 따르는 성서 해석의 방식도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전략
법적 참정권 보장, 노동, 임금, 진급-경제적 동등성, 사회적 역할의 동등성, 문화와 언어에 내재된 차별성 비판, 남녀의 성적 차이에 대한 인정,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사회주의적 또는 환경주의적 입장.
여성주의 성서 해석의 종류
성서 전체가 거의 가부장제의 산물임. 메리 데일리(Mary Daly)
여성주의적/가부장주의적 요소들이 혼재: 재해석할 수 있음. 로즈마리 류터(R. R. Reuther)
파트너쉽과 돌봄의 가치를 중요시 함: 레티 러셀(Letty Russell)
해방을 위한 구체적 실천 전략 구상: 쉬쓸러 피오렌자(E. Sch ssler Fiorenza)
또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글을 제시하였을 때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자신의 윤리적 교훈을 오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윤리적 권고의 담론형태를 다양하게 제시하였을지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바울이 로마 제국과 유대교의 체제를 포함한 모든 세상 질서를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한 종말론적인 수사학과 윤리적 교훈은 가부장제적 문화체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7장 전체에서 자신의 명령, 윤리적 원칙, 권고와 주의 명령, 그리고 구체적인 제안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고찰하게 될 것이다.
<도표3>
우선 우리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한편으로는 남자들의 음행의 문제와, 다른 한편 여성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자발적인 금욕주의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에 직면하여 바울은, 부부 별거의 문제와 같은 결혼 생활에 대한 권고나 독신 생활에 대한 권고 부분에서, 무엇보다 금욕주의( : 금욕적 훈련)적 삶에 초점을 두고 있다. 외양상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과 성 생활을 멀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그냥 지냄은 부르심의 영에 의한 은사이므로(7,1; 7,7·20·24), 임박한 환난 때문에(7,26), 자유의 역설성: 부르심을 받은 신분 그대로(7,17-24), 분요함 때문에.(7,32-34) 또한 바울은 다양한 종류의 독신자들, 즉 자발적으로 별거하거나 성생활을 멀리하는 결혼한 사람들,(7,2-6) 과부들과 홀아비들,(7,8-11) 남편이 믿지 않아서 별거하려는 기독교인 여성들,(7,12-17) 결혼 적령기에 있는 여성들과 남성들(7,1; 7,36-40)에게, 이들이 고린도 교회에 윤리적인 쟁점을 야기시킨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결혼의 불가피성과 관련된 '윤리적 원칙'과 '명령'의 형태로 특별한 윤리적 지침을 제안하게 된다.
특히 위에서 구체적인 '권고'나 '구체적 제안'에 대한 성서 구절들을 주석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로마 시대의 고린도의 정치적 사회적 정황에 관한 최근 연구 경향을 고려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 정황, 종교-철학적 배경과 로마의 정치적 정황은 바울의 7장의 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시의 결혼에 대한 로마 시대와 유대 사회의 풍습과 가치는 시민권 가진 사람이 소수였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면서 많이 죽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결혼을 권장하는 풍토였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여성들에 경우 오랫동안의 약혼기간 후에 10대 중반에 결혼하였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에 비해 노예와 같은 열등한 지위에 있거나 결혼한 상태였다. 특히 과부들은 재혼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대부분 종교적 이유로 고린도 교회의 중대한 문제를 야기시켰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로마의 결혼 풍습과 함께 바울의 유대주의의 결혼 풍습도 바울의 독신생활에 대한 권장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줄 수 있다. 당시 유대교 관례에 의하면 보통 남자는 18-20세에 결혼을 하였다. 이에 따라 바울은 율법에는 흠이 없었다고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빌립] 3,5-6) 바울 자신은 결혼했을 가능성이 더 있다. 아니면 바울이 기독교인이 되고나서 아내를 사별하였거나 아내가 그와 함께 여행을 하는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7장 8절에서 바울은 독신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이를 직접적으로 권장하였다기보다는 고린도 교회의 남자들의 음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욕을 참기보다는 결혼할 것을 간접적으로 권장하는 방식으로 제안하게 된 것이다.
위의 배경에 비추어 보면, 바울의 독신생활 권장에 대한 수사학이 이렇게 여러 번 나오지만 전부 노골적이라기보다 매우 암시적인 방법으로 제시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위의 정황을 고려해 보면, 바울의 독신생활에 대한 권고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고찰된 결혼 제도([고전] 7,31)의 일시성.
로마 제국의 가부장제에 대한 암시적인 비판.
여성과 함께 목회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 목회를 빙자하여 여성(자매된 아내)을 고생시키지 않으려 함.([고전] 9,5-6)
유대교와 다른 남녀관계의 동등성을 실험함.
기독교적 금욕주의 스타일을 일상성에서 실천함.
자족( )의 정신을 선교의 자비량 전략을 통해 실천함.
위에서 바울의 독신생활의 장려는 확실히 당시 문화에 대한 중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는 반면, 바울의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당시의 로마제국의 가부장제를 수용한 흔적도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7장 17-24절에서 [갈라디아서] 3장 36-28절의 세례 예문에 나오는 헬라인과 유대인, 종과 자유자의 이항 대립에 관해서는 언급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이항대립에 관해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바울은 노예와 자유자의 신분 차별의 장벽이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된 것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노예의 신분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당시의 여성 노예에 대한 남서의 성적 폭력의 문제를 논의하지 않게 되고, 음행에 대한 남성의 문제를 제도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로 취급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또한 바울은 신학적으로는 남자가 여자를 멀리하는 것이 좋다(7,1)는 방식으로 독신생활을 명시적으로 권고하지만 남자가 결혼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결혼하는 데 많은 제약을 제시하게 된다. 심지어 남자에게는 정욕 때문에 결혼하거나 결혼시키게 되기를 원하였지만 여성에게는 이혼을 금지하거나 여성이 자신의 몸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부부 생활에서의 몸의 주도권과 결혼 여부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울은 여성과 남성에게 각각 다른 윤리적 기준을 적용한 흔적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바울은 여성들의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보다, 여성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라도 남성에게 성적 유혹이나 정욕을 참지 못하는 것보다 결혼할 것을 권고한다. 여성에게는 이러한 방식으로 결혼할 것을 권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독신생활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그는 결혼한 여성들이 관심이 너무 많이 분산되는 것과 달리, 독신 여성들은 몸과 영혼이 둘 다 거룩하여져서(7,37) 주에게 봉사하는데 훨씬 열성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반면, [고린도전서] 7장 29-31절은 위의 두 가지 공동체의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하는 데 사용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반적 자세를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내 있는 자/없는 자, 우는 자/울지 않는 자, 기쁜 자/기쁘지 않는 자에 나타나는 '호스 메'( : 마치 ∼아닌 것처럼)의 세 가지 대조는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문제나 음행하는 남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과 윤리적 원리를 제안하고자 제시한 것이다. 역리의 방법(I am a Brahman, therefore I am not a Brahman.)이 동양 종교의 체험적 신비주의를 나타내는 것과 달리, 이것은 논리적인 연관관계를 나타내지는 않는 상식적인 삶에 대한 역설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위의 대조적인 두 항의 관계는 논리적인 역설이나 모순 관계가 아니고, 기호학적 사각형의 반대 관계(<도표 4> 참조)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것은 아내가 있다면 이는 누군가에 의해서 증여로 주어졌기 때문에(<도표4>의 ①) 아내를 포기하게 되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표4>의 ②)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자발적 포기의 삶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위의 금욕적 훈련( )은 견유학파나 스토아주의와 다르다. 견유학파에서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토아주의에서는 소유하고 있는데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있는데 이를 포기함으로써 없는 것처럼( ) 생각하고 살아가는 자발적 포기의 삶'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의 또 다른 대조항들(매매하는 자들은 소유하지 않는 자처럼,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사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에코페미니즘의 주장과 연관될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이 두 가지에서는 기독교의 금욕적 훈련 양식이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이루려는 자족함( )의 삶의 방식([빌립] 4,11-13)과 환경 자원의 고갈을 비판하는 현대의 생태주의적 생명신학의 주체화 전략을 나타낸다.
다른 한편, 바울의 윤리-도덕의 신학적 근거로서 종말론의 가치와 기능은 일반적인 윤리 강령을 제시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여성들에게는 현재의 정황을 변화시키거나 비판하는 데는 별로 큰 도움을 주지 못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결혼한 남자들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게 되기를 종용하게 한다. 더군다나 바울이 7장 31절에서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러라"라고 주장할 때, 세상의 결혼제도도 주가 오실 때까지 임시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종말은 '환난'의 날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남자들의 음행과 여성들의 금욕주의적인 결혼생활의 원인이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 주장과 비종말론적 영광의 신학에 기초한 현세적 삶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종말론적 수사학과 금욕주의적 윤리 원칙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7장 29-31절에서의 신학과 윤리와의 관계에서도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가 없는 자처럼 지내기를 권고하는 부분은 7장 25절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행하는 권고로 시작하였지만 여성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남성이 아내가 있는 경우 한 가지만을 언급한다. 이것은 달리 음행의 문제로 남성이 결혼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경향을 암시한다. 더군다나 7장 26-28절에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은 7장 1절의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는 말과 함께 연결되어서 여성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배제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7장 29-31절도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적 문화가 내재화된 윤리적 강령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28절에서 결혼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남성들의 결혼을 정당화할 뿐 여성들의 금욕 생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이 원리가 여성에게 적용되었을 때에는 결혼한 여성이 금욕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주관하는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우리는 바울의 몸 담론이 구체적인 공동체의 문제에 적용되었을 때에는 당시 공동체의 가부장제의 권력의 배치를 옹호하고 몸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여성을 멀리하는 독신생활을 요청하면서도 이 경우 음행에 빠지는 것을 우려해서 독신생활을 하지 말라는 또 다른 요청을 하게 된다. 이것은 모순된 명령을 동시에 함으로써 바울의 몸 담론이 욕망의 이중규제(double bind)에 매여 있는 위선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제의 권력체계와 공모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몸 담론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으로는 결코 제시할 수 없는 구체적인 권력관계와 권력의 기술의 문제와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VI. [고린도전서] 11장 1-16절에서의 여성의 문제와 바울의 가부장적 권력 형성
[고린도전서] 11장 1-16절은 바로 위의 몸에 대한 신학을 구체적인 여성의 머리 모양의 문제에 적용한 결과물이다.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누구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들이 영지주의적 밀의 종교에 가입한 여성들이라기보다 아볼로의 신학적 경향에 동조하고 체험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기독교 여성 예언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헬라적 여성 예언자들, 팔레스틴 기독교인과 헬라적 기독교인 등과 논쟁하면서 여성의 예배 때의 태도를 규정하기 위해서 몸의 탄생 과정과 관련된 유대교의 우주적 질서와 창조적 질서와 상식적인 자연적 질서를 함께 논의한다. 이 서신에서는 투쟁 과정의 섬세한 의견들의 대립은 억압되었고, 바울 자신의 신학적 권위([고전] 11,1)와 논증의 권위(11,16)가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배치되게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1-16에서 바울은 여성 예언자들의 영적 체험에 기초한 부활의 신학과 이에 근거한 남녀 평등주의 세계관을 억압하고, 로마 제국주의의 위계주의적 세계관을 내재화한 가부장제적 권력의 장치를 자신의 수사학에 끌어들이게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었던 경험에 의해서 복음을 재해석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내세움으로써, 고린도교회의 여성 헬라적 예언자들의 활동을 억압하고 이들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사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사회적 지위와 자유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경험에 의해서 복음을 재해석하여 현재의 영적 체험에 기초한 영광의 신학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예배시의 머리 모양에 관한 권면에서 사용된 바울의 수사학은 유대 정통주의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로마 주류사회의 위계주의 세계관을 그대로 차용한 흔적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바울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위계적 질서를 확립한다.([고전] 11,3) 바울은 여기에서 '우위성'(권세)과 '두부'(頭部) 둘 다를 의미하는 '머리'( )라는 용어를 수사학적으로 사용하여 여성이 머리를 덮어쓸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영광(반사물)이고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므로, 여성이 남자의 권세 아래 있다는 표시를 '머리' 위에 두라(7·10절)는 수사학과 연관된다.
더군다나 [고린도전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이러한 수사학과 함께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로마 주류 사회의 위계적 질서와 영합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15장 23-28절의 부활에 관한 바울의 주장에서 '정사'( ), '권세'( ), '능력'( ), '지배하다'( ), '복종하게 하다'( )의 용어들은 로마의 정치적 지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32-34의 교회에서 여자들은 잠잠하고(Mulier Taceat in Ecclesia)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으니 오직 복종하라는 권고에도 '복종하라'( )는 말이 나온다. 이러한 수사학적 기술들은 로마의 위계적 질서를 가부장제적 교회권력에 암시적으로 재기입(reinscription)시킨다. 또한 위계질서를 드러내는 직선적 연결망, 즉 너희-그리스도-하나님(3,22), 아이-아버지-그리스도 안에서(4,14), 여자-남자-그리스도-하나님(11,3)은 당시의 로마의 위계적 질서를 암시적으로 합리화하는 흔적을 갖고 있다. 특히 [고린도전서] 1장 2-16절에서 바울은 여자가 남자를 생물학적으로 낳을 수 있지만(12절b), [창세기] 2장의 전승에 의해서 남자로부터 여자가 낳음을 받았다(8-9절)는 수사학적 논증을 사용하여 가부장제 질서를 합리화한다. 위의 연결망에서 중간항인 '그리스도', '아버지'나 '그리스도'는 이 위계질서의 중계자를 표시하는 것으로 로마시대의 후원자 제도(the patronage)를 지지하는 흔적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바울과 고린도교인들의 관계처럼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후자가 전자에 복종해야 할 위계적 지배 관계이다.
바울은 이처럼 로마 문화 전통, 유대 문화 전통, 그리고 기독교의 세례예문 전승과 이중적 의미를 가진 단어들을 나열하는 수사학적인 논증의 방법을 사용하여 예배 때의 여성이 머리를 덮어쓰거나 길러야 하는 근거와 강력한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게 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종합하고 최근의 역사비평적 주석과 에코 페미니즘 해석을 첨가하면 아래 <도표 5>와 같다.
고전 11:1-6의 내용 구조와 페미니즘 해석 <도표 5>
바울은 결국 유대교와 로마제국을 배타적으로 거부하고 있지만, 타자의 가부장제적 위계질서를 내재화하여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신의 담론의 '미시권력'에 포획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고린도전서는 로마제국의 헬라 문화와 종교를 이방신에 사로잡힌 영의 세계로 신화화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지위가 향상된 헬라적 여성 예언자와 이를 지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 대적하는 세력으로서 묘사한다. 이렇게 바울은 로마제국의 헬라문화를 종말론적 전투의 희생물로 만듦으로써 자신이 속하고 있는 헬라적 선교 기독교와 유대 민족주의와 화해하려는 방식으로 승리주의의 배타주의 논리를 형성하였다. 여기에 바울의 미시권력의 파시즘은 바울의 유대 민족주의적 담론에 의해서 로마제국에 대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 제국의 통치 전략과 위계적 질서를 내재화하는 '이중 규제'의 한계성을 띠게 되었다.
VII. 결론: 몸 담론의 미시정치학적 페미니스트 비평의 중요성
우리는 위의 고린도전서의 맥락 속에서 바울의 몸 담론의 모호성과 이중성, 그리고 이론과 그 적용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 이후의 헬라적 공동체와 유대공동체 모두에게 설득될 수 있는 교회 권력 생산의 형태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를 동일시하고 이에 근거한 윤리적인 주체화 양식(기독교인의 자기 정체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몸의 신학이 서구 기독교에 의해서 왜곡되게 해석되었을 때 억압적 교회권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전유되었던 해석 모델을 간략히 검토하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해석으로부터 탈피하는 미시정치학적 페미니즘의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몸의 이해가 서구 기독교와 한국 개신교에서 잘못 전유되었을 때 발생하는 교회권력의 위계화 현상에 주목하고자 한다. 위의 미시정치학적 해석은 한국교회가 고린도전서에서의 몸 담론을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목소리를 인식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길잡이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영적 지혜론과 공동의 영체험에 근거한 바울의 몸 담론은 이론적으로는 유대교 묵시문학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평등주의를 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바울은 특히 그리스도의 영을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미시권력의 장치로서 몸 내부에 둠으로써 성전체제와 로마제국의 가부장제적 권력장치를 탈영토화하시키는 주체화 전략을 제시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역설적인 종말론적 윤리 원칙을 직설법/명령법의 형태(고전 6:11-20, 고전 7:29-31)로 제안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역동적으로 사회 체제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주체화 양식과 지배권력에 대한 대항문화적 몸 담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독신생활과 여성의 머리 모양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 때 유대교의 불평등한 결혼관습과 성생활의 성향체계(아비튀스)와 로마 제국과 유대교의 위계적 가부장제의 상징체계를 다시 끌어들여야 했다. 여기에서 몸 담론은, 교회의 '사목적 권력'을 정당화하는 지식의 도구로 동일시되면서, 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위에 복종과 헌신의 주체를 등록시키는 권력의 장치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율법이 규정하는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가족, 회당과 국가의 체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형성을 위해서 몸의 사회성을 기반으로 하는 '해방의 종교'를 제시한 공헌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조건을 변경시키려는 유대문화와 로마 제국주의의 근본 구조를 변혁시키는 '탈권력의 종교'와 인권에 기초한 남녀 평등과 내적 자유를 균형있게 조화시키는 '시민적 도덕'(civilit )의 종교를 형성시키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제국의 위계주의적 질서에 대항하는 구체적인 주체화의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유대 정통주의의 위계적인 창조의 질서를 다시 불러오게 되었을 때 그는 묵시문학에 내장되었던 변혁의 잠재성을 삭제하고 몸의 평등성보다는, 몸의 통일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몸 담론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왜곡되게 전유될 수 있는 여지를 그 자체로 내포하고 있었다. 서구 기독교는 바울의 몸 이해를 자아의 모델에 근거하는 개인주의적 몸이나, 국가의 모델에 의존하는 집단주의적 몸이나, 가족의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가부장제적 몸으로 해석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전유해 왔다. 한편으로는 고린도전서의 몸의 이해를 개인주의적 실존주의에 의해서 재해석함으로써 몸을 개인적 몸 안의 내적 투쟁을 극화하고, 몸을 反위계적인 교회공동체의 은유로 이해하기 보다 영과 육의 싸움의 전쟁터로 이해함으로써 교회 권력의 배타주의 논리를 내재화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몸을 바울 이후에 제도화된 교회권력과 동일시함으로써 로마제국의 정치적 권위체제의 위계주의적 세계관을 '사목적 권력'의 양태 속에 내재화하였다. 이제 바울 서신의 몸에 대한 해석에 의해서 정당화된 사목적 권력은 복종과 헌신의 덕목 속에 억압적 권력을 과잉결정하는 상태를 수반하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 몸의 메타포는 로마제국의 황제나 교황의 몸에 의해서 형성된 초코드화된 권력의 장치가 아니라, 가부장제적 가족 공동체의 몸에 의해서 코도화된 위계적 교회체제로 해석되어 남녀차별을 합리화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도 바울의 몸 담론을 이원론적인 개인의 주체화 양식이나 사목적 권력의 집단적 기제, 또는 가부장제적 교회의 코드화된 권력 장치에 의해서 전유하는 왜곡된 해석 방식에 구조적으로 타성화된 것도 사실이다. 샤머니즘, 호국 불교, 유교의 종교적 아비튀스가 이러한 몸 담론의 해석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위의 가부장제적인 교회권력을 몸과 동일시하면서 일어나는 한국 교회의 배타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 팽창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맡고 있는 것이다.
위의 바울의 몸 이해의 왜곡된 전유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의 종말론적 사유에 의거한 몸 담론이 현대의 에코페미니즘의 요구에 부응하는 대항문화의 비판적 요소들(탈영토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의 바울의 종말론적 몸 담론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우주적 '사건'을 평등주의적 비위계주의적 공동체의 사회적 몸에 구현시키는 탈영토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바울이 표방하는 금욕주의적 자족의 삶의 방식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에 의해서 포획된 국가와 가족의 미시권력으로부터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우주적 몸을 탈영토화하는 주체화의 전략을 암시적으로 제공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미시정치학적 페미니즘의 독해에 의해서 바울의 몸 담론의 억압적 역기능을 비판하고, 그 탈영토화의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우리시대의 미시권력의 장치으로서 존재하는 위계주의적 가부장제를 해체하기 위해서 대항문화로서의 脫(탈)권력의 몸 담론을 새롭게 형성해야 할 것이다.
[출처] 고린도전서에서의 몸 담론과 권력|작성자 성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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