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울은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 지방에 도착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 교회를 세운 후, 베뢰아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도착했다(행 16:11~18:1). 그는 고린도에서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이라 할 수 있는 18개월 동안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행 18:11).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선 바울에게 고린도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신적 확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둘째로 바울은 뜻밖에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대 그리스도인 부부를 고린도 도시에서 복음의 동역자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체류하던 중에 A.D. 49년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칙령 -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행 18:2) ?에 의해 로마에서 고린도로 이주한 상태였다. 그들은 천막을 만드는 동일한 직업을 통해 더욱 쉽게 동역했을 것이며, 바울은 그들 부부의 집에 묵으면서 생활할 수 있었다(행 18:23).
셋째로 이런 상황에서 빌립보 성도들의 후원금을 갖고 마게도냐에서 내려 온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합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참조 행 18:5, 빌 4:15, 고후 11:9).
넷 째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 중에 아가야 지방의 새 총독으로 부임한 갈리오(Gallio, A.D. 51년 7월~52년 6월의 재임 기간) 앞으로 고소당했던 것이 무죄 판결 받은 것을 들 수 있다(행 18:12~17). 따라서 고린도 성도들[소수의 유대인(행 18:8)과 다수의 이방인들(고전 12:2)의 혼합]은 전도자 바울에 의해 복음을 듣고 회심했으며, 나름대로 복음 양육을 받고 교육을 받았으며, 바울에 의해 고린도교회가 세워졌다(참조 행 18:1~19, 고전 3:6, 10, 4:15).
고린도전서 5장 9절에 의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이전에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로선 그 서신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1.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게 된 동기/목적은 다음과 같다. (1)바울은 고린도 성도들 안에 분쟁이 있음을 글로에의 가족들로부터 전해 들었다(고전 1:11~12). (2)바울은 고린도교회로부터 편지를 통해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해 답변해야 할 책임을 강하게 느꼈다(참조 고전 7:1, 16:17). 그 질문들은 고린도전서 안에서 “…에 대하여는”(peri)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각 장(고전 7:1, 25, 8:1, 11:2, 12:1, 15:1, 16:1)에서 논의되고 있다(11장과 15장의 내용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됨). (3)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로 구성된 세 명의 고린도교회 대표들(고전 16:17)이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와 고린도 성도들(교회)의 상황들(분열의 문제, 성-도덕 문제, 소송 문제, 결혼 및 이혼 문제, 부부 사이의 성 생활 문제, 우상 제물 음식 문제, 성만찬 오용 문제, 은사주의자들의 은사 활용 문제, 방언 오용 문제, 예배 생활과 관련된 문제, 죽은 자들의 부활 문제, 종말 문제 등)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해 주었다. 따라서 바울은 명확하게 이런 문제들(고전 1:11~12, 5:1, 6:1, 16, 7:10~11, 8:1, 11:46, 20~22, 14:26~33, 15:12)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고린도전서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당면 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복음의 본질적 요소를 서신 초두뿐 아니라 기회가 될 때마다 서신에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즉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1:2) 고린도 성도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고전 1:17, 23~24, 2:2)와 부활하셔서 장차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고전 1:7, 3:12~15, 5:5, 7:26, 31, 11:26, 15:23, 29, 36~57, 16:22)에 대해 새롭고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따라서 (1)구원에 이른 성도들의 정체성(신분)에 대한 이해. (2)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십자가 사건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삶)를 밝히고 있다. 즉 구원론과 함께 종말론적 삶에서 온전한 기독론에 대한 이해가 성도들 삶의 문제를 푸는 열쇠인 셈이다.
고린도전서를 파악하는 구조2
1. 서론(1:1~9)
1-1. 인사말(1:1~3)
1-2. 감사와 찬미(1:4~9)
2. 교회 분열 조짐에 따른 교훈(1:10~4:21), ‘글로에 사람들이 전해 준 내용에 대한 답변’(참조 1:10~6:20, 1:11)
2-1. 분열의 사실(1:10~17)
2-2. 분열의 원인(1:18~4:13)
2-2-1.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오해(1:18~3:4)
2-2-2. 기독교 사역과 사역자들에 대한 오해(3:5~4:5)
2-2-3. 기독인에 대한 오해(4:6~13)
2-3. 분열 해결을 위한 권고(4:14~21)
3. 성도답지 못한 도덕-윤리적 불감증에 따른 교훈(5:1~6:20)
3-1. 음행에 대한 가르침(5:1~13)
3-2. 세상 법정에서 송사 사건에 대한 가르침(6:1~11)
3-3. 성적 부도덕함에 대한 가르침(6:12~20)
4. 결혼에 대한 교훈(7:1~40), ‘고린도 성도들이 전해준 서신에 대한 답변’(참조 7:1~16:9, 16:17)
4-1. 일반적 가르침(7:17)
4-2. 기혼자들을 위한 가르침(7:8~24)
4-3. 미혼자들을 위한 가르침(7:25~40)
5. 우상에 바쳐진 음식을 대한 교훈
(8:1~11:1)
5-1. 우상 제물에 대한 일반적 가르침(8:1~13)
5-2. 바울 자신에 대한 적용, 사도직 변호 및 권한의 절제(9:1~27)
5-3.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교훈 및 적용(10:1~22, 10:23~11:1)
6. 공동 예배에 대한 교훈(11:2~14:40)
6-1. 여자들의 수건을 쓰는 것에 대한 가르침(11:2~16)
6-2. 성찬에 대한 가르침(11:17~34)
6-3. 영적 은사에 대한 가르침(12~14)
6-3-1. 은사에 대한 시험(12:13)
6-3-2. 은사의 통일성(12:4~11)
6-3-3. 은사의 다양성(12:12~31a)
6-3-4.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할 은사(12:31b~13:13)
6-3-5. 방언보다 우월한 예언
(14:1~25)
6-3-6. 공동 예배에서 은사 사용에 대한 가르침(14:26~40)
7. 부활에 대한 교훈(15:1~38)
7-1. 부활의 확실성(15:1~34)
7-2. 부활 사건의 반대에 대한 고려(15:35~57)
7-3. 결론적 호소(15:38)
8. 연보에 대한 교훈과 바울의 계획(16:19)
9. 결론
9-1. 형제들에 대한 추천 및 그들의 문안(16:10~20)
9-2. 바울의 문안과 축도(16:21~24)
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
바 울은 아쉬움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한 고린도 성도들의 소식을 접하고 문제투성이인 그들이지만 서신 첫머리를 의미 있게 시작하고 있다. 즉 바울은 그들에게 ‘성도’ 안에서 문안(1:13)을 올릴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령한 여유(1:49)를 먼저 전한 후에 교훈적 답변을 시작하고 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의 첫 아홉 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바울이 많은 문제들 앞에 있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이미 역사하셨고(과거), 지금도 역사하시며(현재), 앞으로도 역사하실(미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충분히 기초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신을 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고린도전서의 신학적 메시지는 선교사의 열정과 목자의 통찰력을 소유한 바울의 뜨거운 심령을 활자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장 10절에서 16장 4절까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구체적 상황을 거론하는 중에 목양적 차원에서 문제점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이런 처방 속에서 바울의 신론, 기독론, 성령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이 자연스럽게 관계 문맥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다른 서신들을 포함해)를 오늘날의 ‘신학 교리서’나 ‘조직 신학 교과서’로 간주하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같은 입장이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주제나 교리’를 도외시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서신 자체가 담지하고 있는 역사적 문맥(정황)을 무시한 교리화나 신학화는 성경 본문 자체의 세계를 해석자(들)의 이념적 틀로 이데올로기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먼저 ‘글로에의 종들에 의해 알게 된 내용을 1장 10절에서 6장 20절에 걸쳐 고린도 성도들에게 답변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 (1)성도들 사이의 경쟁적 분열과 (2)성도들의 음행(근친상간)과 도덕적 타락(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에 대해 경계하며 교훈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계속해 고린도 성도들(스데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 참조 고전 16:17)이 전해 준 서신 내용들에게 대해 7장 1절에서 16장 9에 걸쳐 답변하고 있는 듯하다. (3)결혼에 대해 일반적 가르침으로부터 기혼자와 미혼자 그리고 과부의 재혼에 대해 각각 교훈한 후 (4)성도가 이방 신(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를 논하고, 바울 자신의 사도직 권리와 실천적 적용을 모범적으로 예시하면서 복음에 따른 신약 성도의 삶이 율법에 따른 구약 성도의 삶보다 더 고상하고 성숙해야 함을 밝힌다.
(5)이어서 바울은 공식 예배 중에 여자들의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예의에 대해 논한 후 (6)성찬(애찬)의 예절과 성도들의 신령한 은사 활용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다시 한번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자랑이나 유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신앙 공동체의 덕을 위해 자신의 은사가 쓰임 받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7)부활의 성격에 대해 먼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초대 교회 전승에 기초해 논증한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예수 부활의 중요한 의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고린도 당시 및 오늘의) 성도들의 미래와 필수 불가결한 사건임을 설파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의 장래 부활에 보증이 된다는 것이다.
(8)끝으로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자신의 전도 여행 및 고린도 방문 계획을 언급하면서 동역자들의 안부를 대신 전한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마지막 문안과 축도는 그가 얼마나 예수 중심적이며 - 이것은 곧 하나님 중심적 삶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 철저한 종말론적 인식 속에서 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예수의 제자로서 바울의 헌신적 삶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린도전서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와 비교해 볼 때 오늘의 성도들을 위한 ‘순수한 교리’나 ‘체계적 신학’이 약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고린도전·후서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의 역할’을 충실히 보여주는 바울의 서신서임에 분명하다. 즉 과거와 오늘의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복음과 일상적 삶을 위한 신학과 그에 따른 원리’가 장마다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본 서신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큰 신학적 꼭지점을 잠시 언급한 후에, 성도들 특히 오늘의 설교자 또는 목회자의 리더십에 적용돼야 마땅한 신학적 원리(메시지)를 제시함으로써 ‘고린도전서에서 드러난 신학’을 대신하려 한다.
고린도전서 신학의 꼭지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바울은 서신서 전체에 걸쳐 고린도 성도들이 ‘구원(칭의) 그 후의 삶(성화)’으로 당연히 나가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교훈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의미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종말론적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언약 백성들이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길로 초청받게 된 것과 그에 따른 감사와 감격이 성도들의 여러 현안 문제들을 푸는 열쇠가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종말의 구원자)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 모두에게 ‘복음(구원)’의 소식이 아닐 뿐 아니라, 실제로 그들에게 거리낌이요 미련한 것이었다(1:21).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계시된 사건임을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 중에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이다(1:18~2:16).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메시지에 기독론(특히 지혜-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종말론 그리고 인간론이 상호 깊이 관련돼 있음을 보게 된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15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다뤄지는 것은 여러 모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1장)과 ‘그리스도의 살아나심’(15장)은 성도들의 일상에 알파(처음)와 오메가(마지막)와 같은 신앙(구원)의 중심을 차지할 메시지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자(참조 고전 15:34)는 ‘육에 속한 자’(고전 2:14)가 아닐지라도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3)가 되어, 신분상 성도이지만 삶에선 성도답지 못한 행실을 드러내는 연약함에 자주 빠지게 된다(5장부터 15장에 나타난 고린도 성도들의 문제, 참조 고전 4:6~13, 10:1~13).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신학-복음적 메시지는 회심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구원-윤리적 삶의 끊임없는 변화와 성숙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이다. 따라서 구원 이후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 안에 함께 연합된 종말론적 긴장(‘이미’와 ‘아직’)이 요구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7~58).
삶과 리더십에 적용해야 할 신학적 원리
누가 나를 불렀는가: 신적 기원의 원리
바 울은 1장 1절에서 자신의 목회 리더십의 뿌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즉 신적 기원(“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에 기초하고 있음을 담대히 말하고 있다(참조 고후 1:1, 엡 1:1, 골 1:1, 딤후 1:1). 17절 상반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자신은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소명 의식이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바울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다메섹 도상의 회심과 소명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 사건 후에도 계속적으로 신령한 체험을 통해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늘 새롭게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후 12:19, 참조 행 13:13, 16:6~10, 18:9~10, 19:21, 20:22~23). 그리고 바울의 신적 소명 의식은 “성령의 나타남과 도우심”(2:4, 참조 2:12~13, 12:13) 가운데 삶의 현장에서 열매를 맺게 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복음의 사역자로서 리더십의 신적 기원을 철저한 소명 의식과 함께 인식하고 있다. 그에 따른 사역의 결실은 삼위일체 배경과 조화로 가능했던 것임을 관찰할 수 있다.
사역자들은 누구인가: 동역과 섬김의 원리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사역한 자신과 아볼로를 거명하면서 자신들은 하나님께 속하고 예속된 종들이라고 했다(3:45). 이런 면에서 고린도교회의 개척자인 바울은 복음을 심은 자로, 후임자였던 아볼로는 물을 준 자로 묘사되고 최종으로 자라게 하신 분은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천명한다(3:67). 이런 중에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님의 사역자들과의 관계를 설명한다(3:89). 즉 바울이 주님의 다른 사역자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바로 동역하는 모습이었다. 개인이나 자신들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께 속한 동역자’로서 같은 목적을 갖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다. 21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거룩한 성전인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분열에 이를 정도로 사람을 우선하고 자랑하는 성도들이나 그런 자랑에 우쭐하는 사역자들 모두 옳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논증에 따라 3장의 결론은 고린도 성도들이 주님의 사역자들(지도자들)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고린도 성도들이 서로 ‘우리는 누구 누구에게 속했다’라는 주장들로 인해 발생한 교회 내의 분쟁에 대해 바울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해 완전히 의미를 반전시키고 있다. 즉 ‘너희가 어떤 지도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지도자들이 너희에게 속했다’는 뜻이다. 21~22절의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라는 메시지는, 고린도 성도들이 몇몇 지도자들을 자랑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 편이다’, ‘우리는 저 사람의 것이다’라고 하는 주장에 상관없이 ‘주님의 사역을 맡은 지도자들이 오히려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로서 고린도 성도들의 것이다’는 뜻이다. 즉 바울은 자신과 같은 사역자들이 고린도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섬김의 크리스천 리더십을 확고히 보여 준다.
어떠한 마음을 품을 것인가: 아비의 원리
우리는 4장 14~16절을 통해 바울의 복음 사역자와 지도자로서 또 다른 귀중한 자세를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비 같은 심정을 가진 지도자의 이미지와 자신을 본 받으라고 외칠 수 있는 모델 역할의 이미지다. 6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불렀던 바울은, 14절에서 같은 대상을 향해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고 부르고 있다. 나아가 바울은 자신을 다른 사역자들과 구별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 이것은 바울 자신이 다른 사역자들보다 뛰어났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애정과 열정이 ‘선생’이 아닌 ‘아비’의 심정이었음을 간증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사역을 비유적으로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 해산하는 수고”(갈 4:19)를 한다고 밝혀 ‘아비’뿐 아니라 ‘어미’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4장 6~13절은 이런 떳떳함 속에서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과 방종을 책망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10~13절에서 지도자인 바울의 자기 부인을 통한 겸손과 고통이, 바울로부터 양육을 받았던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과 거짓된 자랑과 함께 역설적으로 대조를 이루면서 나타난다. 따라서 바울은 당당하게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아비의 심정으로 사랑을 품고 책망하면서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6절).
초점을 어디에: 공동체를 세우는 덕의 원리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10:23~24). 이것은 6장 12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자기 삶의 원리를 드러낸 경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도들의 ‘단순한 지식’은 오히려 교만하게 함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를 어지럽게 만드는 한편, 성도들의 사랑은 개인과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의 필수 덕목(8:1)임을 언급하고 있다(참조 14:12, 26). 고린도전서 13장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나타낼 수 있는 최고 삶의 열매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4장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함으로써, 성도 개인의 유익을 저버리고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다른 회원들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임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누리고 있는 고린도 성도들이 이제 율법이 아닌 사랑의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난 자들답게 자기 신앙의 자유함을 넘어서 신앙 생활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회원들을 배려하고 섬길 것을 요구한다. 이런 상호 문맥들에서 바울의 논리적 결론이 담긴 메시지가 10장 31절 말씀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믿음이 어리고 약한 성도들을 배려하고 섬기는 것임을 의미한다(참조 10:32~33).
성도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 원리
바 울이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그림 언어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 내용은 성도들의 은사가 많든 적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직분자이든 평신도이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모두 성령의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들로서 하나의 몸이라는 진리이다(참조 3, 13절). 나아가 고린도 성도들 중에 은사가 더 적고 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신앙 공동체에 별 도움이 안 돼 보이는 자들을 더욱 존귀하게 여기고 그들이 혹 소외돼 고린도 성도들 중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더 잘 돌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12장 22~26절에서 말하는 바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는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약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다른 강한)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목회 신학적 리더십은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들을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조화와 균형 가운데 잘 활용하는 지혜와 통찰력이 요구된다. 성도의 다양성과 통일성이 유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는 리더십을 말한다. 이것은 무엇보다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도록 도와준다. 담임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의 여러 교역자들도 다른 일반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신앙 공동체의 한 지체임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이것은 오늘날 신체적, 경제적, 영적으로 약한 자들이 교회에서 무시당하는 풍토가 옳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또한 교회 지도자가 품어야 할 이미지는 군림하는 세상 왕이 아닌 섬기는 종의 이미지여야 함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침을 받아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의 구조와 행정은 필히 사회 단체의 조직과 다른 면을 보여줘야 한다. 성도들의 각양 다른 배경과 은사들에도 불구하고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이 깨어지지 않는 교회의 신비한 속성이 세상 공동체들을 향한 또 하나의 경쟁력이다.
어떻게 영향력은 발휘되나: 믿음과 삶의 일치 원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을 출산했다고 비유적으로 말하면서 담대하게 제안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4:16). 바울의 이런 제안과 명령은 그의 ‘말과 행동’ 즉 ‘믿음과 삶’이 상당히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울의 영적 훈련과 성숙의 기준은 다름이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1:1, 참조 갈 4:12, 빌 3:17, 살전 1:6, 2:14, 살후 3:7, 9). 복음의 일꾼인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는 무엇보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리스도와 주가 되신다. 이것은 고린도전서뿐 아니라 그의 모든 서신에 깔려 있는 전제이다.
또한 ‘신앙의 대상’(the object of faith)이신 나사렛 예수는 바울에게 ‘신앙의 모범’(the example of faith)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바울은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다(참조 빌 2:5~11). 이런 점에서 바울의 ‘고난 목록’(4:9~13, 참조 고후 4:7~10, 6:9~10, 11:23~33)은 자신의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음을 변증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성도들을 감동시키는 영적 재산이기도 하다. 실로 바울의 고난 목록이 당시 자신의 사도됨을 간접적으로 변증해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영향력은 어디서: 성경과 성령 중심의 원리
고린도전서 10장에 구약 성경의 한 사건에 대한 바울의 해석이 나타난다. 그리고 총 16장으로 구성된 고린도전서에 구약 성경을 암송하는 듯 바울에 의해 구체적으로 언급된 성경 구절 인용이 적어도 22번이 된다(참조 고후 14번, 롬 59번, 갈 12번). 고린도전서나 바울의 다른 서신들이 모두 그 지역 성도들의 문제들을 목회 차원에서 해결해 주기 위한 편지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바울은 성도들의 일상의 문제 하나하나를 ‘성경 중심적’으로 처리한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을 반대하던 적지 않은 유대주의자들도 성경 중심적이었다는 점이다(참조 9:1~27, 4:14~21, 고후 11:11~2:13). 그들도 철저하게 ‘모세 율법 중심적’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중에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과 논쟁할 때 나타난 현상과 유사하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긴장할 필요가 있다. 즉 신앙인들에게 두 가지 유형의 성경-중심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과거 유산이나 전통에만 호소하는 성경-중심적이요, 다른 하나는 과거 유산과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오늘날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성령께 귀 기울일 줄 아는 성경-중심적인 것이다.
맺음말
분명히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삶의 문제를 선교-목회적 차원에서 다루는 중에 기록된 서신이다. 그리고 이 서신은 역사적 상황과 문맥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당면한 ‘구원 그 이후’의 현안 문제에 대해 바울이 답변한 것이다. 바로 이 문맥에서 바울의 신앙과 신학이 드러나고 있다. 즉 바울의 신앙과 신학은 항상 삶의 현장에서 교회 공동체를 섬기며 세워나가는 복음의 도구들이었다. 그리고 이 신앙과 신학은 세상 사람들이 꺼리고 어리석게 여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한 것이요, 또 이것을 새롭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성도들에게 답변하는 바울의 신앙과 신학이 자신의 실제적 삶으로 검증된 메시지(설교)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1:1)는 바울의 간증은, 필자를 포함해 오늘날의 모든 설교자들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4:20)을 먼저 심각하게 받아들인 후, 비로소 우리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메시지(설교)가 될 듯싶다.
주(註)
1. 정경으로서 신약 성경에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간의 서신 교환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두 서신서의 내적 증거에 따르면, 바울은 두 번 이상에 걸쳐 고린도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학자들 사이에 고린도전서와 후서에 대한 ‘분할 이론’이 다양한 가설과 함께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분할 이론’은 서신들에 대한 ‘온전한 역사적 재구성’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확증적이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불확실성 내지 불충분성을 안고 있다.
어쨌든 사도행전과 고린도전·후서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문 및 서신 교환들이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오고 갔음을 알 수 있다. (1)제2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의 고린도 첫 방문(행 18:1-17). (2)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최초의 (하지만 소실된) 서신(고전 5:9) - 고후 6장 14-7장 1절이 소실된 서신의 내용. (3)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보낸 서신(고전 7:1). (4)고린도 성도들이 보낸 서신에 대한 바울의 답장이 ‘고린도전서.’ (5)바울의 두 번째 고린도의 짧은 방문(참조 고후 2:1, 12:14, 13:1-2). (6)두 번째 방문 후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슬픔의 편지’(고후 2:3, 7:8) - 고린도후서 10-13장이 ‘슬픔의 편지’ 내용? (7)디도로부터 고린도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바울이 또 다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 ‘고린도후서.’ (8)제3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의 세 번째 고린도 방문(행 20:1-3).
2. 고린도전서에 대한 최근 구조 분석은 1세기 당시 그레코-로만 서신의 수사학적 구조 내지 특징의 배경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M. M. Mitchell, Paul and the Rhetoric of Reconciliation: An Exegetical Investigation of the Language and Composition of 1 Corinthians (Louisville: Westminater Press, 1992); B.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1 and 2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5), 39-48, 73-77; A.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2000), 46-52를 보라.
둘째로 바울은 뜻밖에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대 그리스도인 부부를 고린도 도시에서 복음의 동역자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체류하던 중에 A.D. 49년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칙령 -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행 18:2) ?에 의해 로마에서 고린도로 이주한 상태였다. 그들은 천막을 만드는 동일한 직업을 통해 더욱 쉽게 동역했을 것이며, 바울은 그들 부부의 집에 묵으면서 생활할 수 있었다(행 18:23).
셋째로 이런 상황에서 빌립보 성도들의 후원금을 갖고 마게도냐에서 내려 온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합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참조 행 18:5, 빌 4:15, 고후 11:9).
넷 째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 중에 아가야 지방의 새 총독으로 부임한 갈리오(Gallio, A.D. 51년 7월~52년 6월의 재임 기간) 앞으로 고소당했던 것이 무죄 판결 받은 것을 들 수 있다(행 18:12~17). 따라서 고린도 성도들[소수의 유대인(행 18:8)과 다수의 이방인들(고전 12:2)의 혼합]은 전도자 바울에 의해 복음을 듣고 회심했으며, 나름대로 복음 양육을 받고 교육을 받았으며, 바울에 의해 고린도교회가 세워졌다(참조 행 18:1~19, 고전 3:6, 10, 4:15).
고린도전서 5장 9절에 의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이전에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로선 그 서신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1.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게 된 동기/목적은 다음과 같다. (1)바울은 고린도 성도들 안에 분쟁이 있음을 글로에의 가족들로부터 전해 들었다(고전 1:11~12). (2)바울은 고린도교회로부터 편지를 통해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해 답변해야 할 책임을 강하게 느꼈다(참조 고전 7:1, 16:17). 그 질문들은 고린도전서 안에서 “…에 대하여는”(peri)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각 장(고전 7:1, 25, 8:1, 11:2, 12:1, 15:1, 16:1)에서 논의되고 있다(11장과 15장의 내용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됨). (3)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로 구성된 세 명의 고린도교회 대표들(고전 16:17)이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와 고린도 성도들(교회)의 상황들(분열의 문제, 성-도덕 문제, 소송 문제, 결혼 및 이혼 문제, 부부 사이의 성 생활 문제, 우상 제물 음식 문제, 성만찬 오용 문제, 은사주의자들의 은사 활용 문제, 방언 오용 문제, 예배 생활과 관련된 문제, 죽은 자들의 부활 문제, 종말 문제 등)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해 주었다. 따라서 바울은 명확하게 이런 문제들(고전 1:11~12, 5:1, 6:1, 16, 7:10~11, 8:1, 11:46, 20~22, 14:26~33, 15:12)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고린도전서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당면 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복음의 본질적 요소를 서신 초두뿐 아니라 기회가 될 때마다 서신에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즉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1:2) 고린도 성도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고전 1:17, 23~24, 2:2)와 부활하셔서 장차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고전 1:7, 3:12~15, 5:5, 7:26, 31, 11:26, 15:23, 29, 36~57, 16:22)에 대해 새롭고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따라서 (1)구원에 이른 성도들의 정체성(신분)에 대한 이해. (2)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십자가 사건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삶)를 밝히고 있다. 즉 구원론과 함께 종말론적 삶에서 온전한 기독론에 대한 이해가 성도들 삶의 문제를 푸는 열쇠인 셈이다.
고린도전서를 파악하는 구조2
1. 서론(1:1~9)
1-1. 인사말(1:1~3)
1-2. 감사와 찬미(1:4~9)
2. 교회 분열 조짐에 따른 교훈(1:10~4:21), ‘글로에 사람들이 전해 준 내용에 대한 답변’(참조 1:10~6:20, 1:11)
2-1. 분열의 사실(1:10~17)
2-2. 분열의 원인(1:18~4:13)
2-2-1.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오해(1:18~3:4)
2-2-2. 기독교 사역과 사역자들에 대한 오해(3:5~4:5)
2-2-3. 기독인에 대한 오해(4:6~13)
2-3. 분열 해결을 위한 권고(4:14~21)
3. 성도답지 못한 도덕-윤리적 불감증에 따른 교훈(5:1~6:20)
3-1. 음행에 대한 가르침(5:1~13)
3-2. 세상 법정에서 송사 사건에 대한 가르침(6:1~11)
3-3. 성적 부도덕함에 대한 가르침(6:12~20)
4. 결혼에 대한 교훈(7:1~40), ‘고린도 성도들이 전해준 서신에 대한 답변’(참조 7:1~16:9, 16:17)
4-1. 일반적 가르침(7:17)
4-2. 기혼자들을 위한 가르침(7:8~24)
4-3. 미혼자들을 위한 가르침(7:25~40)
5. 우상에 바쳐진 음식을 대한 교훈
(8:1~11:1)
5-1. 우상 제물에 대한 일반적 가르침(8:1~13)
5-2. 바울 자신에 대한 적용, 사도직 변호 및 권한의 절제(9:1~27)
5-3.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교훈 및 적용(10:1~22, 10:23~11:1)
6. 공동 예배에 대한 교훈(11:2~14:40)
6-1. 여자들의 수건을 쓰는 것에 대한 가르침(11:2~16)
6-2. 성찬에 대한 가르침(11:17~34)
6-3. 영적 은사에 대한 가르침(12~14)
6-3-1. 은사에 대한 시험(12:13)
6-3-2. 은사의 통일성(12:4~11)
6-3-3. 은사의 다양성(12:12~31a)
6-3-4.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할 은사(12:31b~13:13)
6-3-5. 방언보다 우월한 예언
(14:1~25)
6-3-6. 공동 예배에서 은사 사용에 대한 가르침(14:26~40)
7. 부활에 대한 교훈(15:1~38)
7-1. 부활의 확실성(15:1~34)
7-2. 부활 사건의 반대에 대한 고려(15:35~57)
7-3. 결론적 호소(15:38)
8. 연보에 대한 교훈과 바울의 계획(16:19)
9. 결론
9-1. 형제들에 대한 추천 및 그들의 문안(16:10~20)
9-2. 바울의 문안과 축도(16:21~24)
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
바 울은 아쉬움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한 고린도 성도들의 소식을 접하고 문제투성이인 그들이지만 서신 첫머리를 의미 있게 시작하고 있다. 즉 바울은 그들에게 ‘성도’ 안에서 문안(1:13)을 올릴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령한 여유(1:49)를 먼저 전한 후에 교훈적 답변을 시작하고 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의 첫 아홉 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바울이 많은 문제들 앞에 있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이미 역사하셨고(과거), 지금도 역사하시며(현재), 앞으로도 역사하실(미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충분히 기초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신을 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고린도전서의 신학적 메시지는 선교사의 열정과 목자의 통찰력을 소유한 바울의 뜨거운 심령을 활자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장 10절에서 16장 4절까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구체적 상황을 거론하는 중에 목양적 차원에서 문제점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이런 처방 속에서 바울의 신론, 기독론, 성령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이 자연스럽게 관계 문맥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다른 서신들을 포함해)를 오늘날의 ‘신학 교리서’나 ‘조직 신학 교과서’로 간주하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같은 입장이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주제나 교리’를 도외시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서신 자체가 담지하고 있는 역사적 문맥(정황)을 무시한 교리화나 신학화는 성경 본문 자체의 세계를 해석자(들)의 이념적 틀로 이데올로기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먼저 ‘글로에의 종들에 의해 알게 된 내용을 1장 10절에서 6장 20절에 걸쳐 고린도 성도들에게 답변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 (1)성도들 사이의 경쟁적 분열과 (2)성도들의 음행(근친상간)과 도덕적 타락(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에 대해 경계하며 교훈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계속해 고린도 성도들(스데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 참조 고전 16:17)이 전해 준 서신 내용들에게 대해 7장 1절에서 16장 9에 걸쳐 답변하고 있는 듯하다. (3)결혼에 대해 일반적 가르침으로부터 기혼자와 미혼자 그리고 과부의 재혼에 대해 각각 교훈한 후 (4)성도가 이방 신(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를 논하고, 바울 자신의 사도직 권리와 실천적 적용을 모범적으로 예시하면서 복음에 따른 신약 성도의 삶이 율법에 따른 구약 성도의 삶보다 더 고상하고 성숙해야 함을 밝힌다.
(5)이어서 바울은 공식 예배 중에 여자들의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예의에 대해 논한 후 (6)성찬(애찬)의 예절과 성도들의 신령한 은사 활용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다시 한번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자랑이나 유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신앙 공동체의 덕을 위해 자신의 은사가 쓰임 받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7)부활의 성격에 대해 먼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초대 교회 전승에 기초해 논증한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예수 부활의 중요한 의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고린도 당시 및 오늘의) 성도들의 미래와 필수 불가결한 사건임을 설파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의 장래 부활에 보증이 된다는 것이다.
(8)끝으로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자신의 전도 여행 및 고린도 방문 계획을 언급하면서 동역자들의 안부를 대신 전한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마지막 문안과 축도는 그가 얼마나 예수 중심적이며 - 이것은 곧 하나님 중심적 삶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 철저한 종말론적 인식 속에서 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예수의 제자로서 바울의 헌신적 삶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린도전서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와 비교해 볼 때 오늘의 성도들을 위한 ‘순수한 교리’나 ‘체계적 신학’이 약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고린도전·후서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의 역할’을 충실히 보여주는 바울의 서신서임에 분명하다. 즉 과거와 오늘의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복음과 일상적 삶을 위한 신학과 그에 따른 원리’가 장마다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본 서신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큰 신학적 꼭지점을 잠시 언급한 후에, 성도들 특히 오늘의 설교자 또는 목회자의 리더십에 적용돼야 마땅한 신학적 원리(메시지)를 제시함으로써 ‘고린도전서에서 드러난 신학’을 대신하려 한다.
고린도전서 신학의 꼭지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바울은 서신서 전체에 걸쳐 고린도 성도들이 ‘구원(칭의) 그 후의 삶(성화)’으로 당연히 나가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교훈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의미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종말론적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언약 백성들이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길로 초청받게 된 것과 그에 따른 감사와 감격이 성도들의 여러 현안 문제들을 푸는 열쇠가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종말의 구원자)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 모두에게 ‘복음(구원)’의 소식이 아닐 뿐 아니라, 실제로 그들에게 거리낌이요 미련한 것이었다(1:21).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계시된 사건임을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 중에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이다(1:18~2:16).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메시지에 기독론(특히 지혜-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종말론 그리고 인간론이 상호 깊이 관련돼 있음을 보게 된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15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다뤄지는 것은 여러 모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1장)과 ‘그리스도의 살아나심’(15장)은 성도들의 일상에 알파(처음)와 오메가(마지막)와 같은 신앙(구원)의 중심을 차지할 메시지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자(참조 고전 15:34)는 ‘육에 속한 자’(고전 2:14)가 아닐지라도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3)가 되어, 신분상 성도이지만 삶에선 성도답지 못한 행실을 드러내는 연약함에 자주 빠지게 된다(5장부터 15장에 나타난 고린도 성도들의 문제, 참조 고전 4:6~13, 10:1~13).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신학-복음적 메시지는 회심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구원-윤리적 삶의 끊임없는 변화와 성숙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이다. 따라서 구원 이후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 안에 함께 연합된 종말론적 긴장(‘이미’와 ‘아직’)이 요구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7~58).
삶과 리더십에 적용해야 할 신학적 원리
누가 나를 불렀는가: 신적 기원의 원리
바 울은 1장 1절에서 자신의 목회 리더십의 뿌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즉 신적 기원(“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에 기초하고 있음을 담대히 말하고 있다(참조 고후 1:1, 엡 1:1, 골 1:1, 딤후 1:1). 17절 상반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자신은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소명 의식이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바울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다메섹 도상의 회심과 소명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 사건 후에도 계속적으로 신령한 체험을 통해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늘 새롭게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후 12:19, 참조 행 13:13, 16:6~10, 18:9~10, 19:21, 20:22~23). 그리고 바울의 신적 소명 의식은 “성령의 나타남과 도우심”(2:4, 참조 2:12~13, 12:13) 가운데 삶의 현장에서 열매를 맺게 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복음의 사역자로서 리더십의 신적 기원을 철저한 소명 의식과 함께 인식하고 있다. 그에 따른 사역의 결실은 삼위일체 배경과 조화로 가능했던 것임을 관찰할 수 있다.
사역자들은 누구인가: 동역과 섬김의 원리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사역한 자신과 아볼로를 거명하면서 자신들은 하나님께 속하고 예속된 종들이라고 했다(3:45). 이런 면에서 고린도교회의 개척자인 바울은 복음을 심은 자로, 후임자였던 아볼로는 물을 준 자로 묘사되고 최종으로 자라게 하신 분은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천명한다(3:67). 이런 중에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님의 사역자들과의 관계를 설명한다(3:89). 즉 바울이 주님의 다른 사역자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바로 동역하는 모습이었다. 개인이나 자신들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께 속한 동역자’로서 같은 목적을 갖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다. 21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거룩한 성전인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분열에 이를 정도로 사람을 우선하고 자랑하는 성도들이나 그런 자랑에 우쭐하는 사역자들 모두 옳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논증에 따라 3장의 결론은 고린도 성도들이 주님의 사역자들(지도자들)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고린도 성도들이 서로 ‘우리는 누구 누구에게 속했다’라는 주장들로 인해 발생한 교회 내의 분쟁에 대해 바울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해 완전히 의미를 반전시키고 있다. 즉 ‘너희가 어떤 지도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지도자들이 너희에게 속했다’는 뜻이다. 21~22절의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라는 메시지는, 고린도 성도들이 몇몇 지도자들을 자랑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 편이다’, ‘우리는 저 사람의 것이다’라고 하는 주장에 상관없이 ‘주님의 사역을 맡은 지도자들이 오히려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로서 고린도 성도들의 것이다’는 뜻이다. 즉 바울은 자신과 같은 사역자들이 고린도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섬김의 크리스천 리더십을 확고히 보여 준다.
어떠한 마음을 품을 것인가: 아비의 원리
우리는 4장 14~16절을 통해 바울의 복음 사역자와 지도자로서 또 다른 귀중한 자세를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비 같은 심정을 가진 지도자의 이미지와 자신을 본 받으라고 외칠 수 있는 모델 역할의 이미지다. 6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불렀던 바울은, 14절에서 같은 대상을 향해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고 부르고 있다. 나아가 바울은 자신을 다른 사역자들과 구별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 이것은 바울 자신이 다른 사역자들보다 뛰어났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애정과 열정이 ‘선생’이 아닌 ‘아비’의 심정이었음을 간증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사역을 비유적으로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 해산하는 수고”(갈 4:19)를 한다고 밝혀 ‘아비’뿐 아니라 ‘어미’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4장 6~13절은 이런 떳떳함 속에서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과 방종을 책망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10~13절에서 지도자인 바울의 자기 부인을 통한 겸손과 고통이, 바울로부터 양육을 받았던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과 거짓된 자랑과 함께 역설적으로 대조를 이루면서 나타난다. 따라서 바울은 당당하게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아비의 심정으로 사랑을 품고 책망하면서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6절).
초점을 어디에: 공동체를 세우는 덕의 원리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10:23~24). 이것은 6장 12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자기 삶의 원리를 드러낸 경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도들의 ‘단순한 지식’은 오히려 교만하게 함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를 어지럽게 만드는 한편, 성도들의 사랑은 개인과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의 필수 덕목(8:1)임을 언급하고 있다(참조 14:12, 26). 고린도전서 13장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나타낼 수 있는 최고 삶의 열매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4장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함으로써, 성도 개인의 유익을 저버리고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다른 회원들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임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누리고 있는 고린도 성도들이 이제 율법이 아닌 사랑의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난 자들답게 자기 신앙의 자유함을 넘어서 신앙 생활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회원들을 배려하고 섬길 것을 요구한다. 이런 상호 문맥들에서 바울의 논리적 결론이 담긴 메시지가 10장 31절 말씀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믿음이 어리고 약한 성도들을 배려하고 섬기는 것임을 의미한다(참조 10:32~33).
성도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 원리
바 울이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그림 언어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 내용은 성도들의 은사가 많든 적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직분자이든 평신도이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모두 성령의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들로서 하나의 몸이라는 진리이다(참조 3, 13절). 나아가 고린도 성도들 중에 은사가 더 적고 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신앙 공동체에 별 도움이 안 돼 보이는 자들을 더욱 존귀하게 여기고 그들이 혹 소외돼 고린도 성도들 중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더 잘 돌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12장 22~26절에서 말하는 바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는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약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다른 강한)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목회 신학적 리더십은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들을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조화와 균형 가운데 잘 활용하는 지혜와 통찰력이 요구된다. 성도의 다양성과 통일성이 유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는 리더십을 말한다. 이것은 무엇보다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도록 도와준다. 담임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의 여러 교역자들도 다른 일반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신앙 공동체의 한 지체임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이것은 오늘날 신체적, 경제적, 영적으로 약한 자들이 교회에서 무시당하는 풍토가 옳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또한 교회 지도자가 품어야 할 이미지는 군림하는 세상 왕이 아닌 섬기는 종의 이미지여야 함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침을 받아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의 구조와 행정은 필히 사회 단체의 조직과 다른 면을 보여줘야 한다. 성도들의 각양 다른 배경과 은사들에도 불구하고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이 깨어지지 않는 교회의 신비한 속성이 세상 공동체들을 향한 또 하나의 경쟁력이다.
어떻게 영향력은 발휘되나: 믿음과 삶의 일치 원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을 출산했다고 비유적으로 말하면서 담대하게 제안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4:16). 바울의 이런 제안과 명령은 그의 ‘말과 행동’ 즉 ‘믿음과 삶’이 상당히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울의 영적 훈련과 성숙의 기준은 다름이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1:1, 참조 갈 4:12, 빌 3:17, 살전 1:6, 2:14, 살후 3:7, 9). 복음의 일꾼인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는 무엇보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리스도와 주가 되신다. 이것은 고린도전서뿐 아니라 그의 모든 서신에 깔려 있는 전제이다.
또한 ‘신앙의 대상’(the object of faith)이신 나사렛 예수는 바울에게 ‘신앙의 모범’(the example of faith)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바울은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다(참조 빌 2:5~11). 이런 점에서 바울의 ‘고난 목록’(4:9~13, 참조 고후 4:7~10, 6:9~10, 11:23~33)은 자신의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음을 변증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성도들을 감동시키는 영적 재산이기도 하다. 실로 바울의 고난 목록이 당시 자신의 사도됨을 간접적으로 변증해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영향력은 어디서: 성경과 성령 중심의 원리
고린도전서 10장에 구약 성경의 한 사건에 대한 바울의 해석이 나타난다. 그리고 총 16장으로 구성된 고린도전서에 구약 성경을 암송하는 듯 바울에 의해 구체적으로 언급된 성경 구절 인용이 적어도 22번이 된다(참조 고후 14번, 롬 59번, 갈 12번). 고린도전서나 바울의 다른 서신들이 모두 그 지역 성도들의 문제들을 목회 차원에서 해결해 주기 위한 편지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바울은 성도들의 일상의 문제 하나하나를 ‘성경 중심적’으로 처리한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을 반대하던 적지 않은 유대주의자들도 성경 중심적이었다는 점이다(참조 9:1~27, 4:14~21, 고후 11:11~2:13). 그들도 철저하게 ‘모세 율법 중심적’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중에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과 논쟁할 때 나타난 현상과 유사하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긴장할 필요가 있다. 즉 신앙인들에게 두 가지 유형의 성경-중심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과거 유산이나 전통에만 호소하는 성경-중심적이요, 다른 하나는 과거 유산과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오늘날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성령께 귀 기울일 줄 아는 성경-중심적인 것이다.
맺음말
분명히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삶의 문제를 선교-목회적 차원에서 다루는 중에 기록된 서신이다. 그리고 이 서신은 역사적 상황과 문맥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당면한 ‘구원 그 이후’의 현안 문제에 대해 바울이 답변한 것이다. 바로 이 문맥에서 바울의 신앙과 신학이 드러나고 있다. 즉 바울의 신앙과 신학은 항상 삶의 현장에서 교회 공동체를 섬기며 세워나가는 복음의 도구들이었다. 그리고 이 신앙과 신학은 세상 사람들이 꺼리고 어리석게 여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한 것이요, 또 이것을 새롭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성도들에게 답변하는 바울의 신앙과 신학이 자신의 실제적 삶으로 검증된 메시지(설교)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1:1)는 바울의 간증은, 필자를 포함해 오늘날의 모든 설교자들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4:20)을 먼저 심각하게 받아들인 후, 비로소 우리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메시지(설교)가 될 듯싶다.
주(註)
1. 정경으로서 신약 성경에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간의 서신 교환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두 서신서의 내적 증거에 따르면, 바울은 두 번 이상에 걸쳐 고린도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학자들 사이에 고린도전서와 후서에 대한 ‘분할 이론’이 다양한 가설과 함께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분할 이론’은 서신들에 대한 ‘온전한 역사적 재구성’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확증적이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불확실성 내지 불충분성을 안고 있다.
어쨌든 사도행전과 고린도전·후서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문 및 서신 교환들이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오고 갔음을 알 수 있다. (1)제2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의 고린도 첫 방문(행 18:1-17). (2)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최초의 (하지만 소실된) 서신(고전 5:9) - 고후 6장 14-7장 1절이 소실된 서신의 내용. (3)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보낸 서신(고전 7:1). (4)고린도 성도들이 보낸 서신에 대한 바울의 답장이 ‘고린도전서.’ (5)바울의 두 번째 고린도의 짧은 방문(참조 고후 2:1, 12:14, 13:1-2). (6)두 번째 방문 후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슬픔의 편지’(고후 2:3, 7:8) - 고린도후서 10-13장이 ‘슬픔의 편지’ 내용? (7)디도로부터 고린도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바울이 또 다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 ‘고린도후서.’ (8)제3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의 세 번째 고린도 방문(행 20:1-3).
2. 고린도전서에 대한 최근 구조 분석은 1세기 당시 그레코-로만 서신의 수사학적 구조 내지 특징의 배경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M. M. Mitchell, Paul and the Rhetoric of Reconciliation: An Exegetical Investigation of the Language and Composition of 1 Corinthians (Louisville: Westminater Press, 1992); B.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1 and 2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5), 39-48, 73-77; A.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2000), 46-5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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