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바울과 갈라디아서

에반젤(복음) 2019. 12. 12. 20:07



       

바울과 갈라디아서                                                        



6장 밖에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문헌 중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이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폰 보라(자기 아내의 이름) 라고 불렀다. 이렇게 중요한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서가 바울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역사적 자료도 갖고 있지 않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베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쓴 편지인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갈라디아에 있었던 교회에 관한 그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갈라디아 교회들이 존재할 당시 그들은 어떠한 종교적, 문화적 환경을 갖고 있었는지 혹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은 다음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에 관해 답변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고고학적 발견도 성곽의 유적도 비문도 비석도 혹은 그 밖에 어떤 다른 역사적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2. 저자 문제

갈라디아서가 바울 자신의 편지임을 갈라디아서 자체가 증명해 주고 있다. 서두인 1:1과 결론 부분인 6:11에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고 또한 친필을 첨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13-17에서 과거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던 일과 복음 전도자로서의 부르심, 1;18-19에서 자신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베드로와 야고보와의 만남을, 2:1-10에서 자신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2:11-16에서 자신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일, 4:13-16에서 자신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던 일과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호의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학적 내용은 전통적으로 바울의 편지로 알려진 로마서와 고린도 전후서와 일치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편지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3. 수신자 문제

그렇다면 바울은 이 편지를 누구에게 보냈을까? 바울은 수신자들을 갈라디아 교회들’ ‘갈라디아 사람들’ ‘형제 자매들’ ‘나의 작은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전에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자들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수신자들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럼 바울이 지칭하는 이 갈라디아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당시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의 북부에는갈릭인종들이 살고 있는 갈라디아라는 지역이 있었고 남부에는 로마에서 갈라디아라고 부르는 행정적 지역이 있었다. 행전 16:6절에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이 북부 갈라디아 지역을 다녀갔다는 말을 하지만 복음을 전파하거나 직접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없다. 반면에 행전 13-14장에는 바울의 제 1차전도 여행 중에 로마의 행정지역인 갈라디아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직접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또한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교회에 혼란이 생겼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북부 갈라디아 보다는 남부 갈라디아에 훨씬 많이 살았다. 북부 갈라디아 보다는 남부 갈라디아 라고 한다면 갈라디아서는 한 교회에 보낸 편지라기 보다는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로 보여진다. 1:2절도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4. 바울의 반대자들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논쟁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례적으로 감사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간단한 인사로 시작하면서 익명의 반대자들에게 바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이 익명의 반대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자들로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이다. 그럼 이 익명의 반대자들은 누구인가? 이 편지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권면적이고 목회적인 편지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편지에서 익명의 반대자들을 3인칭 그들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2인칭 너희로표현하여 그들과’ ‘너희를엄격하여 구분할 뿐만 아니라 복음/다른 복음, /율법, 자유/노예, 성령/, 그리스도/할례 등을 날카롭게 대조한 것을 보면 이 익명의 반대자들은 교회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유대인들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유대인들은 어떤 자들인가? 첫째, 그들이 복음을 말한 것을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예루살렘을 강조한 것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와 관계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율법, 할례 등 유대적 요소를 강조한 것을 보면 유대주의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들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을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유대적 전통에서 사는 것을 문제삼지는 않으나 이것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려는데 문제를 삼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무엇 때문에 할례나 율법의 행위들을 바울의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강요했는가?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 이후에도 할례와 율법의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이 된다고 믿었던 율법주의자들이었는가 아니면 이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지고 약속된 의와 구원과 축복을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언약적 신율주의이었는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더하여 할례와 율법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누리는데 필수적인 조건으로 주장한 것으로 봐서 바울은 이들을 율법주의자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바울이 전한 복음은 거짓이 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는 것이다.

 

5. 갈라디아서의 중심주제

갈라디아서의 중심주제를 놓고 두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의견이다. 전통적인 의견에 따르면 갈라디아서는 신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는 문제를 두고 벌어진 문제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 사도가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갈라디아 교회 안에 제기된 신분에 관련된 문제를 듣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히 쓴 편지로 보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바로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였고 그의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존폐가 달려 있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만일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을 결정하는 구원과 의의 수단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고 성령의 선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거짓 사도가 될 것이고 자신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이방인 선교 사역도 함께 무너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적인 입장에서 갈라디아서를 1-2장은 바울의 자서전’ 3-4장의 복음과 율법의 대조’ 5-6장은 윤리적 권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다른 의견으로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에 기반을 둔 삶의 문제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익명의 반대자들에 대한 변증이 아니라 갈라이다 교인들을 권면하고 설득하는 편지라는 것이다. 안디옥 사건의 본질은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은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베드로 자신이 믿고 고백하고 가르치는 그리고 바울과 예루살렘에서 합의했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동하지 않은 삶의 문제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일어나 자리를 떠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에 역행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견은 갈라디아서를 2등분으로 구분하고 있다. 1-2장의 I(바울) 부분과 3-6장의 You(갈라디아 교인들)로 구분하고 있다. I 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 기원을 옹호하는 변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패러다임과 모델로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I 부분에서 가장 클라이막스로 안디옥 사건을 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베드로를 비교하면서 베드로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고 믿었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믿음은 삶을 나타내고 삶은 믿음을 증거한다. 3-6장의 You 부분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이 아닌 믿음이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리고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사건의 베드로가 보여준 것처럼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면서도 성령으로 행하지 못하고 육으로 행하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6. 기록 연대 문제

주후50/51. 고린도에서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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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갈라디아서                                                        



6장 밖에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문헌 중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이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폰 보라(자기 아내의 이름) 라고 불렀다. 이렇게 중요한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서가 바울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역사적 자료도 갖고 있지 않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베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쓴 편지인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갈라디아에 있었던 교회에 관한 그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갈라디아 교회들이 존재할 당시 그들은 어떠한 종교적, 문화적 환경을 갖고 있었는지 혹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은 다음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에 관해 답변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고고학적 발견도 성곽의 유적도 비문도 비석도 혹은 그 밖에 어떤 다른 역사적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2. 저자 문제

갈라디아서가 바울 자신의 편지임을 갈라디아서 자체가 증명해 주고 있다. 서두인 1:1과 결론 부분인 6:11에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고 또한 친필을 첨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13-17에서 과거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던 일과 복음 전도자로서의 부르심, 1;18-19에서 자신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베드로와 야고보와의 만남을, 2:1-10에서 자신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2:11-16에서 자신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일, 4:13-16에서 자신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던 일과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호의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학적 내용은 전통적으로 바울의 편지로 알려진 로마서와 고린도 전후서와 일치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편지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3. 수신자 문제

그렇다면 바울은 이 편지를 누구에게 보냈을까? 바울은 수신자들을 갈라디아 교회들’ ‘갈라디아 사람들’ ‘형제 자매들’ ‘나의 작은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전에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자들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수신자들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럼 바울이 지칭하는 이 갈라디아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당시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의 북부에는갈릭인종들이 살고 있는 갈라디아라는 지역이 있었고 남부에는 로마에서 갈라디아라고 부르는 행정적 지역이 있었다. 행전 16:6절에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이 북부 갈라디아 지역을 다녀갔다는 말을 하지만 복음을 전파하거나 직접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없다. 반면에 행전 13-14장에는 바울의 제 1차전도 여행 중에 로마의 행정지역인 갈라디아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직접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또한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교회에 혼란이 생겼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북부 갈라디아 보다는 남부 갈라디아에 훨씬 많이 살았다. 북부 갈라디아 보다는 남부 갈라디아 라고 한다면 갈라디아서는 한 교회에 보낸 편지라기 보다는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로 보여진다. 1:2절도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4. 바울의 반대자들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논쟁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례적으로 감사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간단한 인사로 시작하면서 익명의 반대자들에게 바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이 익명의 반대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자들로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이다. 그럼 이 익명의 반대자들은 누구인가? 이 편지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권면적이고 목회적인 편지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편지에서 익명의 반대자들을 3인칭 그들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2인칭 너희로표현하여 그들과’ ‘너희를엄격하여 구분할 뿐만 아니라 복음/다른 복음, /율법, 자유/노예, 성령/, 그리스도/할례 등을 날카롭게 대조한 것을 보면 이 익명의 반대자들은 교회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유대인들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유대인들은 어떤 자들인가? 첫째, 그들이 복음을 말한 것을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예루살렘을 강조한 것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와 관계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율법, 할례 등 유대적 요소를 강조한 것을 보면 유대주의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들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을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유대적 전통에서 사는 것을 문제삼지는 않으나 이것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려는데 문제를 삼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무엇 때문에 할례나 율법의 행위들을 바울의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강요했는가?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 이후에도 할례와 율법의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이 된다고 믿었던 율법주의자들이었는가 아니면 이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지고 약속된 의와 구원과 축복을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언약적 신율주의이었는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더하여 할례와 율법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누리는데 필수적인 조건으로 주장한 것으로 봐서 바울은 이들을 율법주의자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바울이 전한 복음은 거짓이 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는 것이다.

 

5. 갈라디아서의 중심주제

갈라디아서의 중심주제를 놓고 두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의견이다. 전통적인 의견에 따르면 갈라디아서는 신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는 문제를 두고 벌어진 문제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 사도가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갈라디아 교회 안에 제기된 신분에 관련된 문제를 듣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히 쓴 편지로 보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바로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였고 그의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존폐가 달려 있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만일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을 결정하는 구원과 의의 수단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고 성령의 선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거짓 사도가 될 것이고 자신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이방인 선교 사역도 함께 무너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적인 입장에서 갈라디아서를 1-2장은 바울의 자서전’ 3-4장의 복음과 율법의 대조’ 5-6장은 윤리적 권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다른 의견으로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에 기반을 둔 삶의 문제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익명의 반대자들에 대한 변증이 아니라 갈라이다 교인들을 권면하고 설득하는 편지라는 것이다. 안디옥 사건의 본질은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은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베드로 자신이 믿고 고백하고 가르치는 그리고 바울과 예루살렘에서 합의했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동하지 않은 삶의 문제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일어나 자리를 떠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에 역행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견은 갈라디아서를 2등분으로 구분하고 있다. 1-2장의 I(바울) 부분과 3-6장의 You(갈라디아 교인들)로 구분하고 있다. I 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 기원을 옹호하는 변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패러다임과 모델로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I 부분에서 가장 클라이막스로 안디옥 사건을 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베드로를 비교하면서 베드로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고 믿었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믿음은 삶을 나타내고 삶은 믿음을 증거한다. 3-6장의 You 부분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이 아닌 믿음이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리고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사건의 베드로가 보여준 것처럼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면서도 성령으로 행하지 못하고 육으로 행하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6. 기록 연대 문제

주후50/51. 고린도에서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