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에베소서 강해

에베소서의 주제

에반젤(복음) 2019. 12. 11. 14:05




  

에베소서의 주제

p.255.

곧 하나님이 값없이 선택하여 주신 일에 관해 논하면서 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영생을 얻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 나라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하고 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값없이 양자로 삼아주신 은혜라는 사실에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하심이 빛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아주신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구원을 얻는 참된 원천이다......(p.256) 바울은 저들이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복음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진지하게 논하는 한편 복음이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우연히 전래되었다든가 난데없이 저들에게 날아온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할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257)그리고 바울이 저들의 과거생활의 불행한 상태를 저들의 안전(眼前-눈앞)에서 묘사하는 동시에 저들이 아주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그리고 놀라운 긍휼에 의한 것임을 저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제 4장에서 그는 주님이 그의 교회를 다스리며 보호하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즉 그것은 사람을 통하여 전파되는 복음에 의해서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가 다른 방법으로는 건전하게 보존될 수 없다는 것과 이것이 참된 완성의 목표라는 결론을 짓게 된다.

제1장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1-12).

1절. 하나님의 뜻으로......사도 된 바울......

p.258.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호칭하고 있다. 그것은 화해의 일을 맡은 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사신이기 때문이다. 정말 ‘사도’라는 말은 특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후에 4장 11절에서 언급할 것이지만)복음의 사역을 맡은 자가 다 한결같이 사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무나 이와 같이 명예로운 칭호를 자칭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소명을 기다릴 것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소명만이 정당한 사역자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악한 사람의 중상을 반대하고, 또 무모한 논란의 모든 경우를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라고 부른 자를 그 바로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라고 했다. 왜냐하면 거룩하지 않은 자는 신실하지 않은 자요, 반대로 신실하지 않은 자는 거룩하지 않은 자이기 때문이다.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p.259.

그는 에베소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장엄하게 찬미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려는 것이며 또 충만한 은혜로 채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넘치는 은혜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들과 그 은혜를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시키는 자들은 그들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은혜를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 은혜를 흐리게 하는 새로운 교의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의 목표는 에베소 사람들아 거짓 사도로 인해 그들의 신앙이 동요하여 자기들의 소명을 의심스럽게 여기며 무언가 다른 구원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의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알리면서 그들을 찬송으로 무장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그는 동시에 구원의 확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다 더 큰 확신에 주기 위하여 그 근원으로 인도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인데 하나님은 그 선택에 의하여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를 양자로 선택하셨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구원받은 것은 우연적인 사태나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불변 한 예정에 의하여 된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사람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축복하고 있다. 그러나 사제의 축복은 일반 사람의 기도와는 다르다. 사제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요, 보증이 (p.260)되는데, 왜냐하면 사제들은 주의 이름으로 축복할 권위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찬송의 고백으로써 하나님과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신령한 복......

바울이 말할 때 ‘하늘에 속한’이라고 했는데, 거기에 ‘곳’ 혹은 ‘것’을 덧붙어 읽어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얼마나 훌륭한가, 즉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축복이며, 또 영생인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뿐 이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축복이며, 또 영생인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과연 기독교는 다른 곳에서 그가 가르치고 있는 대로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축복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딤전4:8). 그러나 금생에 관한 약속의 목표는 마치 그리스도의 나라가 신령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신령한 축복이 그 목표인 것이다. 바울은 율법적인 복이 내포된 모든 유대교의 상징과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무용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우리의 소명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행복의 기초와 첫째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에 참여하도록 부르셨는가? 어째서 풍성은 은혜를 날마다 부어주시는가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시는가 하는 이유를 물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는 이 원리로 돌아가 설명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이 무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이므로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존엄성이 어떻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더욱이 우리에게 무슨 공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궤변가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미 그만한 자격이 (p.261)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고 앞으로 자격자가 될 것을 하나님이 예견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셨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유치한 궤변인가!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이미 상실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에 의하여 우리를 멸망해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그 뿐이지 예견 따위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장 11절에서 똑같은 논지를 썼다. 거기서 야곱과 에서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 자식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르본느의 어떤 궤변가는 비록 그들이 아직 한 번도 행동한 바가 없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을 예견하셨다고 항변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항변은 부패한 인간성에 대하여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다만 멸망할 재료 밖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선택이 값없이 되었다는 사실을 두 번째로 확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그것은 응당 우리 자신 밖에서 된 것이요 우리의 어떤 가치가 고려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공덕과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배제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았다는 것을 바울이 말할 때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으로서는 선택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바울은 여기서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직접적인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어떤 일이나 일은 한가지이지만 그 한가지 일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두 가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모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건축하는 목표는 집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적인 목표에 불과하다 최종적인 목표는 그 집 안에서 편히 사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이렇게 한 번 간단히 언급해 둘 필요를 느낀 것은 바울이 곧 다른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전혀 모순됨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 받은 최고 목적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 다음 이차적인 목표는 우리의 성화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무흠함과 인간이 지닌 모든 미덕은 선택의 열매 라는 결론을 짓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번 여기서 인간의 공덕을 (p.262)중요시하는 생각을 뒤집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택할 만한 가치를 예견하셨다고 하면 그가 여기서 언급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것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거룩하고 흠 없이 사는 것은 무릇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어떤 사람은 거침없이 온갖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도대체 이러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울의 말을 믿는다면 후자는 그의 부패한 본성대로 살게 내버려진 자요 전자는 거룩함에 이르도록 선택되었다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분명히 말해서 원인은 결과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결과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증언하고 있는 대로 선택은 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서 바울은 그렇다고 선택이 방종의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악한 사람들이 자 이제 우리가 좋아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자 택함을 받았다면 멸망받지는 않을 것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불경건한 언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선택한자를 부르시고 또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에 선택의 은혜거룩한 생활을 분리 할 수 없다고 했다. 카다르파 사람이나 세레스틴파 사람, 그리고 도나티스파 사람이 이 말씀으로부터 추론하여 우리가 지상 생애에 있어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거론할 것도 없다. 그러한 완성은 우리가 인생의 전 과정을 통하여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달려갈 길을 다 달리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예정설을 마치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처럼 생각하여 무섭게 여기고 피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예정설을 무익하고 온통 해독스러운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예정설을 바울이 여기서 다룬 것처럼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며, 또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올바르고 진지하게 잘 다룬다면 이것보다 더 유익한 교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지식을 넘치게 하는 참된 샘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핑계하려고 하지만, 선택은 자신들의 어떤 주장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저들의 입을 막아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가 아닌 엉뜽한 방향으로 나아가 위험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서 예정에 관해 바울이 논한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잘 기억하도록 하자.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이 구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의 비중을 더욱더 높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양자로 삼으심과 양자로 삼으시기 이전에 일어난 영원한 선택에 대해 왜 그처럼 열렬하게 강조했는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여기보다도 더 엄숙하게 선포된 구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구원에 대한 세가지 원인이 언급되었는데, 그 넷째 것은 나중에 간단히 첨가되어 있다. 동력인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고, 질료인그리스도이며, 목적인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말한 각 원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동력인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양자로 삼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를 예정하셨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전체적인 문맥에 내포되어 있다. ‘예정하사’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 말의 순서에 좀더 주의해야 한다. 그때는 우리가 아직 존재하기 전이다. 따라서 우리 편에는 아무런 공덕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원인은 우리 인간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이 정도의 서술로써 만족하지 않고 ‘그의 안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분명히 하나님은 자기 밖에서 원인을 찾으시지 않았고 다만 그의 뜻으로써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위의 내용은 다음의 말씀, 즉 ‘기쁘신 뜻대로’란 (p.264)말씀이 더욱 그 의미를 밝혀 주고 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외부적인 모든 원인과 비교하였기 때문에 '뜻‘이라는 말씀만으로도 족하다. 그래서 바울은 모호한 점을 전혀 남기지 않기 위해서 ’기쁘신‘ 이라는 대조적인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기쁘신‘이란 말은 분명히 인간의 공덕을 배제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실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시지 않고, 또 우리 인격의 어떤 가치에 의해 우리들과 화해하시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동기는 오직 그의 기뻐하시는 영원한 뜻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신중하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 이외에 아무 것이나 생각하지 않도록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궤변론자들은 여러 가지 이견들을 여기에 혼합하면서 거기에 대해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끝으로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에카리토-센 엔 카리티: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란 말씀을 보충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떤 공덕이나 이유에 근거한 사랑이 아니고 값없는 은총에 의한 사랑이며, 또 우리를 마음에 맞는 자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영원한 선택과 지금 밝히 드러난 사랑, 곧 질료인은 ’그리스도‘인데,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까지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한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그는 곧 가장 숭고하고 궁극적인 목적이어서 풍성한 은혜를 영광스럽게 찬양하는 것이라고 첨가했다. 그러므로 이 영광을 가리우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뒤엎으려는 자이다. 궤변론자들의 교훈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은 인간 구원의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고 말았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p.265.

이 구절도 역시 질료인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되었는가에 대한 사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요구를 만족시켜 드렸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은혜를 구한다면 항상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피로 향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속죄하여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납하도록 하며 악마와 죽음의 결박을 풀어주는 의가 바로 여기서 온다. 이렇게 우리의 구속의 방법을 정의하는 결정적인 선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한, 우리는 무서운 속박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죄의 대가인 형벌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은 더없이 귀중한 자유이다.

그의 은혜의 풍성을 따라.

그는 여기서 다시 동력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풍성한 능동적 친절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보내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풍성’이란 말과 ‘넘치게 하사’란 말을 썼는데, 이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더욱 커보이게 하면서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깊이 감탄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컨대 사도 바울이 여기서 높이 찬양하고 있는 은혜의 풍성함은 사람들이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됨을 바랐던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 세상이 자기 힘으로 구속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하찮은 만족이나 그와 비슷한 모든 그릇된 사상이 일어나는 사례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인가 외부적인 도움이 없으면 말라서 그 힘을 상실해 버리는 것처럼 여기는 사상이다.

8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이제 바울은 형상인의 (p.266)복음 전파에 관하여 서술하게 되었는데, 복음 전파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애가 우리에게까지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되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양자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에 “지혜와 총명”이라는 장엄한 칭호를 붙였는데, 이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것과 상반된 모든 교훈을 멸시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전파한 기본 교리보다 더 숭고한 것을 가르치는 체하면서 교묘하게 에베소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마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능한 한 복음을 헐뜯으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대조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위안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의 권위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지혜’라는 것은 충분한 또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한다.

9절. 그 뜻의......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만사가 지혜롭게, 그리고 순서를 따라 적절하게 배열되었다. 실제 하나님만이 그 예정을 알고 계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그 예정을 은밀히 간직해 두시려고 하시는 동안 그 뜻이 사람에게는 숨기어 있다는 것, 나아가서 그 예정이 인간에게 알려져야 할 때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있다는 것, 그 이상으로 도리에 합당한 일들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이것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이방인들을 양자로 삼으시고자 하는 결정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감추어져 왔다. 다만 그것이 계시될 때까지 하나님께 유보되었던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이 불평하여 이르기를 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이방인이었던 자들이 교회에 용납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며 또 전례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만큼도 모른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리고 (p.267)어째서 다른 때를 택하시지 않고 하필 이때를 택하셨느냐고 질문하는 자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택하신 시기는 ‘때가 찬’, 무르익고 적당한 시기라는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풀어주고 있다. 계속되는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추측을 삼가고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경륜’이란 말도 같은 방향에 역점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만물의 관리와 실현이 하나님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10절. 하늘에 있는......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틴어 역에는 ‘회복하다’는 말로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거기다가 ‘요약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아나케팔라이오사스다이)의 본래 의미를 그대로 두는 것이 본문의 문맥상 더 적합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모든 것이 흩어진 상태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질서 있는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실로 그리스도 밖에서는 이 세상에 파멸밖에 남을 것이 없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졌으니 어찌 방황하며 흩어지지 않겠는가? 피조물의 올바른 상태는 하나님께 밀착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질서 있는 정상 상태로 회복되도록 통일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요, 그리고 우리 서로가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없이는 온 세상은 무질서한 혼돈이요, 무서운 혼란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참된 통일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하늘에 있는 존재들을 여기에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을까? 천사들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까지 분산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천사들이 흩어지지 않고 연합되었다는 것은 천사가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과 결합되고 또 이러한 은혜스러운 일치에 의해서 다간이 공통적인 복을 얻기 위하여 인간이 그들과 같이 일체가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마치 한 건물 중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는가 혹은 아주 무너졌다고 하면 비록 어딘가 아직 완전한 모습으로 남은 곳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보통 건물 전체를 수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천사들은 (p.268)흩어진 상태에서 연합된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께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접근해 나아가서는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연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사이에 중보자가 없다면 어떻게 그 관계가 이루어지겠는가? 그들이 피조물인 한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하여 보호를 받지 않으면 변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영원히 행복할 수도 없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사도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 견고한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인간은 상실된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천사는 그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둘을 친히 자기 몸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께 결합시켜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진정한 화합이 있도록 하신 것이다.

11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

이 우화적인 표현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우화적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인간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이루신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공헌한 것처럼 그 자신을 어떤 모양으로도 찬양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에 의해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그 자신 이외의 어떠한 것에도 이끌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결정만본질적인 선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사역의 동기를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획을 공격하는 자들의 실수라기보다 오히려 광기는 변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바울은 여기서 비로소 구분을 짓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는 일반적으로 선택된 자 전체에 관하여 언급해 왔지만 이번에는 그 자신과 유대인,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첫 열매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 관하여 말하고, 다음으로 에베소 사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들이 교회에 있어서 소위 장자격이었던 바울이나 또 다른 신자들과 똑같이 간주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의 상태가 그들의 상태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우리들도 그 예정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람이 영원한 선택에 의하여 값없이 양자의 신분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은 순수한 은혜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2절.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p.269.

그는 다시 한 번 그 목적을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다만 긍휼의 그릇이 될 때만 우리에게 비추어진다. 그리고 이 ‘영광’이라는 말은 특히 하나님의 자비로 비추시는 영광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써만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1:13-23).

13절. 그 안에서 너희도.

바울은 복음을 두 가지로 수식하고 있다. 즉 ‘진리의 말씀’, 그리고 그것이 곧 에베소 사람의 ‘구원의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수식어에 대해서는 우리의 주의를 신중히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복음에 대한 의심에 경멸로써 물들도록 시도하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두 가지 방패로서 바울이 우리에게 무장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의심을 품을 만한 경우에 있어서도 복음은 거짓 없는 확실한 진리일 뿐만 아니라, 엄격히 말해서 그밖에 다른 진리가 없기 때문에 복음만이 ‘진리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는 확신에 서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멸시하거나 싫어하는 유혹을 받지 않으려면, 복음의 능력과 효과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말한 것과 같이 다른 데서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여기서 더욱 밝혀 주며, 에베소 사람들은 구원에 참여한 자가 되었으니 이미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에베소 사람에게 가르치고 있다. 세상이 대체로 그렇듯이 복음을 무시하고 착란된 인간의 허구를 즐기면서 많은 우회로를 지나 방황하는데 지쳐 싫증난 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p.270)이러한 사람은 잠시동안은 배우기는 하지만 결코 진리를 인식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며, 생명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복음을 받아서 복음 안에서 굳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의심할 것 없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가 복음에 돌리는 확실한 증명이다. 복음을 보증함에 있어서 성령에 의한 것보다 더 나은 보증이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바울이 ‘내가 복음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한 것을 인간의 권위에 의하여 여러분에게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진리와 그 확실함을 여러분의 마음에 인치신 하나님 자신의 영을 보증으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함과 같다. 실로 이것은 인을 쳐서 보증하는 데서 취해진 적절한 비유이다. 인을 쳐서 보증함으로 사람들의 의심을 제거한다. 국왕의 서한이나 유언서에도 인을 쳐서 보증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옛날 친구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인봉하는 것을 주요한 표시로 삼았다. 요컨대 인을 쳐서 보증하는 것은 참 것과 거짓 것을 분별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뿐만 아니라 4장 30절과 고린도후서 1장과 22절에서도 성령이 이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진리를 확신시켜 주기까지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마음을 강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기의 구원이나, 그리고 모든 종교에 관해서 가지는 참된 확신은 육감이나 인간적이며 철학적인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친 보증에 의한 것인데, 성령의 인친 보증만이 신자의 마음에 더욱 확신을 주며 모든 의심을 제거한다. 믿음의 기초를 인간의 지혜 위에 둔다면 위태롭고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믿음을 갖게 하는 수단이라면, 성령은 그 설교를 효과있게 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인친 보증을 믿음에 종속시키려는 것처럼 생각된다. 만일 그렇다면 믿음이 성령의 보증보다 앞서는 것이다. 나는 성령은 믿음에 대하여 두 가지로 사역한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믿음이 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다. 결국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조명함과 동시에 마음에 확신을 주는 것이다. 믿음의 시작은 인식이다. 믿음의 완성은 확고부동한 확신인데, 그것은 어떠한 의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두가지는 각각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 사람은 믿음에 의하여 복음의 진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친 보증에 의하여 (p.271)믿음이 확고해진다는 바울의 진술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성령을 ‘약속의 성령’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성령이 맺는 열매 때문이다. 즉 성령은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헛되지 않도록 성취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증거를 주신다.

14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바울은 이 술어를 고린도후서에서 두 번, 즉 1장과 5장에서 각각 사용했다. 이 비유는 계약 원리에서 취해진 것인데, 계약은 보증을 함으로써 후회해도 소용없도록 확정된 증명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우리에게 확정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니, 그것이 취소될까봐 염려할 것은 없다.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만으로는 약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령의 보증에 의하여 지원을 받지 않는 한 우리가 그 약속 안에 마음 편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야말로 우리의 기업, 즉 영생에 대한 보증이며 구속에 대한 표적인데, 구속은 완전한 구속의 날이 이를 때까지를 의미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소망 가운데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으므로 누구나 이와 같은 보증을 필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을 완전히 받아 손에 쥐게 되면, 보증의 필요성도 사용도 끝나는 것이다. 보증의 표는 계약 당사자 쌍방의 약정이 완성될 때까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뒷편에서 “구속의 날까지”(엡4:30)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날은 사실 심판의 날인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함을 받았지만 그 구속의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멸망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면서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구원받을 것을 갈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소망할 뿐 그 약속의 열매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러 나타나실 그때 우리는 실제로 그 열매를 즐기게 된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8장23절에 ‘구속’이라는 말을 쓸 때 그런 의미로 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눅21:28)고 하실 때도 역시 그런 뜻으로 말씀한 것이다.

(페리포이에시스;그 얻으신 것)라는 말은 천국이나 혹은 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 이 말씀이 여기에 첨가된 것은 그들의 위안을 위해서 인데, 그들이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까지 희망을 (p.272)품기가 어렵다든가 또는 자기들에게 약속된 유업을 아직 받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실은 전체 교회의 공통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찬미’라는 말은 여기서는 앞에서와 같이 ‘선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때때로 은폐되어 밝히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이 찬양을 받으시며 밝히 알리어지도록 에베소 사람에게 그의 자비의 보증을 보여주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에베소 사랑들의 소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싫어하며 업신여기는 결과가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무한한 것에 관해서는 아무리 많이 말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함에 있어서 그렇다. 실로 신실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서 자기가 체감한 사실을 말로써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의 입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들의 귀는 찬양을 듣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과 모든 천사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그들의 최선의 웅변을 다 모은다고 해도 도저히 그 위대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입을 막는데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주장하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흐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더 강력한 논박이 없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17절 지혜와 계시의 정신....

이것은 소위 환유법에 의한 표현인데, 주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란 자연의 능력이나 은혜와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눈은 주께서 열어주시기까지는 소경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하는 모든 지식은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기까지는 어리석고 무식한 것뿐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은밀한 계시에 의하여 우리에게 그것을 밝혀주시기까지는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한다.

20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p.277.

그러므로 그리스도만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은 십자가의 약점을 깊이 감찰할 수 있는 유일한 거울이다. 우리 마음이 의와 구원, 그리고 영광을 신뢰하려고 분기할때에, 그 마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도록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아직 사망 권세 아래 있지만, 하늘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지금 생명을 지배하고 계신다. 우리는 죄의 멍에 아래서 몸부림치며 끊임없는 불행에 싸여 있으며 악전고투하고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는 천지를 다스리는 최고의 주권을 장악하여 그의 원수들을 정복하고 큰 영광 중에 개선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름 없이 미천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이미 천사들이나 인간들이 존경하며, 악마나 악한 사람들도 두려워하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선물의 결핍으로 인해 마음이 답답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다스리며 분배할 것을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며, 아직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의 보배와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마치 거울로 보듯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이 구절은 ‘하나님의 우편’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다른 어느 구절보다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능력, 즉 그의 이름으로 그가 천지의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처럼 스테반이 예수님께서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을 때 바울은 이것을 예수님이 앉으셨다고 기록했다며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것은 신체적인 위치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최고의 통치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모든 정사와 권세’란 말이 바로 그것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말의 전체 내용이 ‘오른편’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의 통치에 참여하게 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능력을 행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p.278)우편에 오르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상의 군주가 그의 대관에게 영예를 주어 그의 옆에 앉게 하는 데서 취해진 비유이다. 하나님의 오른편은 하늘과 땅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도의 나라와 능력은 어디에나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하늘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논증은 이것과는 맞지 않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우편이 꼭 하늘에만 국한된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높이 오르사 하나님의 하늘 영광과 천사들 사이에서 영원히 복된 최고의 지위를 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1절.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바울이 이와 같은 이름으로 천사들에 관해서 언급했는데, 천사들이 그렇게 불리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의 권력과 권세와 통치권을 행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피조물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늘 그의 이름으로 부르곤 하셨다. 그렇게 부를 때 천사들이 때로 (엘로힘;신들)이라고 호칭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므로 다양한 직무가 천사들 가운데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세밀하게 살피고 수를 맞추고, 그리고 그들의 계급을 정하는 것 등은 단순히 어리석은 호기심일 뿐만 아니라 사악한 경솔함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어째서 그는 단순히 그들을 천사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나는 이렇게 답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와 같은 칭호를 덧붙인다. 가령 어떤 이름으로 호칭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덧붙인다. 가령 어떤 이름으로 호칭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에 복종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하거나 탁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천사에 관하여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상상함으로써 하나님과 참된 중보자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미신이 옛적에 이방인에게도 있었고, 유대인에게도 똑같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천사들의 이러한 가공적인 화영(火影)이 인간의 눈을 혼미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노력도 이 문제에 계속 일어나는 악마의 간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천사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 때문에 이 세상이 얼마나 (p.279)그리스도와 멀어졌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개념도 천사에 관한 허탄한 이야기 속에 사라지지 않으면 안될 만한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모든 이름 위에......

여기서 ‘이름’은 ‘위대함’, 혹은 ‘탁월함’이라는 말에서 취해진 것이다. 그래서 ‘일컫는’, 다시 말해서 ‘이름지어진다’는 것은 명성을 떨친다든가 칭송 듣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라고 분명히 서술한 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함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하며, 또 이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속 번창할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사야가 그리스도를 일컬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 것도 똑같은 이유이다(사9:6). 결국 바울은 천사와 인간의 모든 영광은 제 위치로 돌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자리를 내놓게 하여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다른 모든 영광 위에 빛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22절. 또 만물을......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 임명되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칭호가 아니고 온 우주의 통치권을 그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라는 말은 최고의 권위를 의미하는 은유이다. 나는 사물의 명칭에 관하여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의 우상에 아첨하는 자들은 그들의 심술로써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만이 머리라고 부를 때는 다른 모든 것들, 즉 천사나 인간은 지체로서 제 위치에 적당히 있어야 하며, 다른 지체에 비하여 탁월하다고 해도 역시 공통적인 같은 머리 아래 붙어 있는 지체 죽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회가 지상에서 그리스도 외에 다른 머리를 가지지 않는다면 교회는 머리 없는 것(아케팔론)이 될 것이라고 떠들어대면서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스도만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을 얻는다고 하면 교회는 불구자처럼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못된 짓들인가!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 청종하여야 한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예속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교회의 공동체에 들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치는 다만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데에만 달려 있기 때문이다.

23절. 교회는......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p.280.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되사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그가 무에서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 데 그의 자비가 더 한층 크게 나타난 것이다. 만물이라는 말을 본문의 문맥에만 국한시켜 보아도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뜻과 능력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시지만, 특별히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영적 통치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을 세계 전체의 통치에 관한 말씀이라고 해도 지장될 것은 없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것은 본문의 문제에만 한정시키고 있다는 해석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제 2 장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10).

1절. 너희의......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p.281.

바울은 그들을 “죽었던 자들”이라고 말하고, 동시에 죽음의 원인을 “너희의 허물과 죄”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이며 현재의 죽음인데, 그들은 벌써 그 죽음에 의해 압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영적 죽음이란 영혼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면, 우리는 죽은 자로서 태어났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때까지 죽은 자로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도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시킬 기회만 노리고 있는 교황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는 절반은 죽은 자들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주님 자신이,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아담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생명과는 (p.282)전혀 관계가 없다는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중생은 영혼의 새생명을 말하는 것인데, 중생으로 인해 영혼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한 말은 아니다......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그것만이 곧 참되고 유일한 생명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 밖에서는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에는 온전히 죽은 자라는 것을 마음에 굳게 명심해야 한다.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바울이 “이 세상 풍속을 좇고”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그가 언급한 죽음이 인간성의 분노나 보편적으로 만연된 질병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 세상의 정상적인 풍속이라든가 하늘이나 땅, 그리고 공간이라는 모든 요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영향을 받고 있는 악풍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는 특별히 개개인 몇 사람에 대한 악덕이 아니라, 온 세상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3절.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p.284.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이나 교회 안에서 탁월한 자나 모두 다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생래적으로, 다시 말하면 날 때부터 곧 모태에서부터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펠라기우스파나 또 원리를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구절이다. 모든 사람에게 날 때부터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분명히 원형이다. 바울은 우리가 모두 나면서 유죄판결을 받은 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죄는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죄한 자를 벌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펠라기우스파는 궤변하기를 죄가 아담으로부터 온 인류에게 미쳤지만, 그것은 원형 (p.285)혹은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모방에 의해서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마치 뱀이 독을 그 어미뱀의 뱃속에서부터 받아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입고 태어났다고 확실히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또 다른 사람들은 원죄는 실제로 죄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펠라기우스파 못지 않게 바울의 말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유죄선고가 있는 곳은 반드시 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죄한 인간에 대하여 노하시지 않고 죄에 대하여 노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우리 속에 있는 부패가 하나님 앞에 로 간주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은 항상 숨겨진 씨를 보시고 정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대인은 성별된 자들의 자손인데 어째서 바울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노와 저주받을 자들이라고 했을까?’라는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인간성은 누구나 공통인데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차이는 다만 하나님이 저들을 약속의 은혜에 의하여 멸망에서 건져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에 불과하다. 또 ‘하나님이 인간성을 지으신 분이라면 어째서 우리가 날 때부터 멸망 받지 않도록 무죄한 자로 만드시지 않았는가?’라는 질문도 있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인간성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조부터의 타락이다’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유죄선고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에 대하여 논한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간성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처럼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 본성을 상실한 불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이제 제 2부가 계속되는데, 그 요점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사람 모두를 전에 얽매어 있던 멸망으로부터 건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긍휼에 풍성하신 (p.286)하나님이……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것 외에 어떤 영혼의 생명도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질 때 비로소 살기 시작한 것이요, 그리고 그와 더불어 영교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앞에서 바울이 말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론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앞에서 말한 죽음과 지금 말하고 있는 부활과는 서로 반대적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와 똑같은 영에 의하여 힘과 생기를 받는 것이므로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다.

그래서 그가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하면서 그것이 풍성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풍성하다는 것은 그 은혜를 풍부하고 장대하게 쏟아부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는 곧이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진 것임을 덧붙이면서 구원의 원인을 보다 밝히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에 두고 있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움직인 유일의 이유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로 요한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0, 19)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5절. 허물로......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이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삽입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은 너무나 적합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바울은 은혜의 풍성함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가지 말고 같은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확실히 인간의 망은을 차근차근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기의 이 삽입구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이 말한 부활과 또 하늘의 자리는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은혜가 이미 우리 손에 쥐어진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옮겨질 때 일어난(p.287) 상태의 변화를 더욱 찬양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에 옮겨진 것과 같은 의미를 말한다. 실로 우리의 구원은 아직도 소망 중에 가리어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불멸과 영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7절. 이는......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사랑이 자비에서 솟아났다는 것을 반복하여 제시 혹은 확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그 열매를 통하여 보여주듯이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상(無償)이라는 것을 확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시되 그저 통상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탁월하게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가 ‘그리스도’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여러 세대에......

바울은 목적인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에베소 교인들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수령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 목적이 옳은 줄을 알므로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더욱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또 하나님이 놀라운 사랑의 기억을 여러 세대에 주시려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이방인이 값없이 부름 받은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을 한층 더 증오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세에 걸쳐 기억되도록 한 것을 없애버리려고 즉각적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로 인하여 우리 조상들을 기꺼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하여 (p.288)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깨우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이 부름받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이며, 이것은 반드시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리고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전래되어야 하며, 이것이 침묵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기억에서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앞에서 서술해 온 것의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과 자유로운 부르심에 대해 말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결론에 이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에베소 사람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 즉 자유로운 사역이었으며, 다만 그들 편에서 말한다면 그들이 이 은혜를 믿음에 의하여 받았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양편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부담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순한 은혜이지 보상이나 보수가 아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제공된 구원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거기에 대하여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바울은 우리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편으로 말하면 그것은 다만 은혜요, 우리편으로 말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편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니 당연히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래서 자유의지나 선한 의도, 그리고 인간이 고안한 여러 가지 준비라든가 또 공덕이나 보상에 관해서는 전혀 입벌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 중에는 어느 하나도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한 몫 자랑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찬양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p.289)이다. 한편 바울은 인간의 측면에서 볼 때 다만 믿음으로 구원받는 방법을 확인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이 의뢰해 온 다른 모든 방법을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빈 상태로 하나님께 데리고 간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하여 인간 자신들은 아무 것도 주장하지 못하며, 다만 그들의 구원의 주로서 하나님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앞에서 그들의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 것을 이번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며, 앞에서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 대신 이번에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인간 편의 것은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바울의 주장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본서에서 길게 논하고 있는 요지, 즉 의가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이며, 또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복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제공되었으며, 어떠한 인간의 공덕으로도 말미암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이 세 구절 안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구절로부터 교황파 사람들이 일부러 논의하기를 회피하려고 말하는 헛된 궤변, 즉 바울이 우리에게 행함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말했는데, 그것은 의식에 관하여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그들의 주장을 쉽게 배격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다만 어떤 종류의 행위가 아니고 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인간의 모든 의, 즉 인간 전체나 인간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바울이 배척하고 있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조, 그리고 은혜와 행위와의 대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의식에 관해서만 이의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과 대조되어야 했을 것인가?

따라서 교황파 사람들도 바울이 여기서 우리의 구원의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돌리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엉뚱한 생각을 고안하여, 이것은 하나님이 최초의 은혜를 주심에 대한 언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사람의 구원 얻는 시초에서뿐만 아니라 구원 자체에 관하여 완전히 인간 전체와 인간의 모든 기증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교황주의자들이 그렇게 제멋대로 확장하여 해석하는 것은 실로 (p.290)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들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는 이 결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이중적인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어떠한 인간의 공덕이 조금이라도 평가되는 한, 반드시 인간을 자랑하는 것들이 남기 마련이다. 다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긍휼에만 온전히 찬양을 돌리지 않는다면 바울의 논술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선물’이라는 말을 다만 믿음에만 한정시키기 때문에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진술한 것을 다만 다른 말로 바꾸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바울은 반대적인 가정은 제시하지 않고 그가 앞에서 말한 바, 즉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것이요, 우리에게는 구원 얻을 만한 아무런 공력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는 선행은 모두 중생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행위 자체은혜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반적인 의미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의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의 자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언하고 있다. 이것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비록 범죄하여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태어났지만 그들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중생되어 새로운 인간으로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이 계속된다.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담 안에서 지음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받았다는 말이며, 또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된 인생이 아니고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가하고 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행이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고 있는 이상, 자유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독자들은 사도의 말에 정중한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도움을 받았다고도 말하지 않고, 또 나중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의지가 (p.291)준비되어 있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할 수 있는 대로 약화시키려는 무리가 항상 지껄이듯이 먼저 올바른 선택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여되고, 그 다음에 둘 중 자기가 원하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에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요,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지으신 것들이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선하게 되려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음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선택의 능력이라든가, 무엇인가 표현하기 어려운 준비라든가, 또 도움이라든가 하는 것들만이 아니고, 심지어 옳은 의지 그 자체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의 논의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의 의도는 인간이 구원 얻는 것은 자기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고,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지 않는 한 무(無)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 밖의 아무리 적은 것이라고 해도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돌린다면, 필경 구원 얻는 힘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이 된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는 진리를 해치기 위한 목적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자들은 실상 바울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부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을 헛된 줄로 알기 때문에 이러한 핑계로 슬슬 피하고 있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것은 의의 시작이 믿음에서 오기 때문이며,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중생에 의하여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새로워지며 선한 행실을 하면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믿음을 문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의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를 성취하는 것은 행위에 의해서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들은 의를 정의하여 정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적어도 삶이 선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새로 지음 받았을 때라고 말한다. 이러한 오류가 얼마나 오랜 옛날부터 시작되어 내려왔는지에 대해서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을 증명하기 위한 보증으로 이 구절을 인용한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숙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하(p.292)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도 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 것이며, 심지어 우리가 행하는 선행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면 조금 앞에서 말한 그런 사람들이 우리는 행위에 의하여 절반은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바울의 의도나 바울이 취급한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렇게 된다면 첫째 무엇으로 의가 성립되는가에 대하여 토론해야 될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결과적으로 의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선행도 우리 자신의 고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는 교리를 뒷받침하는 일이다. 바울은 의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는 그가 주로 양심이 죄 사함을 받기까지는 결코 평안치 못하다는 점을 자세히 논했지만, 여기서는 거기에 대하여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논하고 있는 문제가 다만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이것은 펠라기우스파가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적 교훈에만 적용시킬 것이 아니다. 그들에 의하면 마치 바울이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하나님이 명하시며, 또 착한 삶을 살기 위한 올바른 질서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해석한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앞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문제, 즉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논의를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우리는 자력으로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음 받고 받아들여진 이상, 선행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의하여 준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무엇보다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예비하셨다’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순서 자체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선행 때문에 우리에게 짐이 되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선행은 오래 전부터 간직해 둔 하나님의 보고에서 끄집어내 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 그들을 중생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2:11-3:13).

14절. 그는......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p.297.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에 유의해야 한다. 즉 유대인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얼마동안 이방인과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 표시로서 모든 의식이 있었고, 그 의식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를 증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이방인을 아껴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교회 안에 있었고 이방인들은 교회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 간격이 컸던 것이다. 모세가 그의 노래 가운데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32:8,9)라고 말한 대로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른 백성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경계를 정하셨다. 바울이 여기에 언급한 분개심은 바로 이런 데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버리시고 유대인만을 택하사 그들을 성결케 하시고,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오염에서 해방시킬 때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간격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유업을 밀폐하기 위하여 벽처럼 의식을 갖다 덧붙였다.

15절.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p.298.

바울은 여기서 더욱 분명히 ‘담’이라는 비유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설명하고, 지금까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외적 표시와 증거였던 의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대체로 할례나 제사, 그리고 결례나 어떤 일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만 유대인의 운명은 다른 사람의 운명과는 다르다는 것은 상기시키는 성화의 표시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백십자와 적십자가 불란서인과 버건디 사람의 구별점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바울은 다만 이방인이 더 이상 유대인과 차별이 없게 된 것은 그들이 똑같이 은혜의 교제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의식이 폐했기 때문에 구별의 표시도 이미 제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임금이 지금까지 서로 불화 했던 두 국민을 정복하고 자기의 통치권 아래 두며 그들이 화목하게 살기를 바랄 뿐 아니라 그들의 오랜 적대적인 기장이나 표시까지 제거하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또 마치 부채가 면제되어 채무의 증거가 파기된 것과도 같다. 바울은 이와 같은 비유를 이것과 똑같은 문제에 관하여 골로새서 2장 14절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기 ‘율법’이라는 말을 ‘폐하였으니’라는 말과 연결시키고 있지만, 그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의식적인 율법에 관하여 항상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단순한 생활 규칙만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규정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논한 것은 의식적 율법에 관한 것에 불과(p.299)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율법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통용되는 교훈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결코 우리를 유대인과 분리시키는 장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방인은 할례나 그 밖의 다른 옛 의식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유대인에게는 아직도 그것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이 구절에 의하여 논박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런 원리로써는 여전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간에 가로막힌 장벽이 남게 되며, 그것은 결국 거짓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바울이 ‘자기의 안에서’라고 말한 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여러 가지 인간의 상위점을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단일을 찾도록 한 것이다. 그들의 과거 상태는 둘이 서로 달랐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한 새 사람을 지어”라고 덧붙인 것은 그러한 뜻에서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더욱 명백히 가르친 바를 여기서는 은연중 알리고자 한 것뿐이다. 할례나 무할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며, 외적인 것은 모두 그리스도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뿐이다. 다만 새로 지음 받는 것만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전부이다(갈6:15).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두 새롭게 된다면, 유대인도 더 이상 그들의 이전 상태를 자랑할 것이 못되며,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해서도 전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마치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그가 서술한 바와 같다.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우리 자신들 안에 평화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은혜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중보자 없이는 율법도 의식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들이 누린 모든 특권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사함 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은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한 몸으로’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이 이방인과의 거룩한 연합을 이룰 때에만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유대인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십자가로......

바울은 결례를 위한 제물을 의미하기 위하여 십자가란 말을 (p.300)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이간하는 적대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가 말소되기까지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성결의 제물이 되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셨고 그로 말미암아 죄는 도말되었다. 바울이 여기서 십자가를 언급한 또 다른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의식의 폐함이 십자가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17절. 먼데 ......가까운데.

p.301.

이 두말은 장소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계약적인 이유로서 하나님께 가까운 자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방인은 아무 구원의 약속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리 있었기 때문에 멀리 있는 자라고 한 것이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p.302.

바울은 이미 말한 대로 에베소인은 과거의 계약과는 인연이 없는 자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만을 상대하여 ‘너희 상태가 변화되었다’고 (p.303)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외인으로부터 하나님의 교회의 시민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영광을 여러 말로써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인을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고 부르며, 다음으로 ‘하나님의 권속’, 끝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알맞게 다듬어진 돌이라고 했다. 바울이 그들에게 부여한 첫째 명칭은 흔히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교회를 한 도시에 비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전에는 속된 이교인이요, 경건한 성도들과 사귈 자격도 없는 자들이 이제는 아브라함이나 거룩한 족장들, 그리고 예언자나 왕들, 아니 천사들과도 똑같은 시민권을 가질 만큼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인가! 그러나 두 번째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접하는 것이니 결코 거기에 못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20-21절. 너희는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에베소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 또는 성도와 같은 시민이 되었는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도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찬사로서 세 번째로 예를 든 것이 곧 그들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교훈의 터위에 세움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어느 것이 참된 교회인가, 아니면 거짓 교회인가를 분별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나하면 이것은 큰 위험을 내포한 오해 같은 것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문제이면서도 쉽게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부당하게 거짓교훈으로 교회의 명칭을 참칭한 자들일수록 오히려 야단스럽게 교회의 이름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러한데 잘못 이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어떤 것이 참된 교회의 표시인가를 여기에 지적하고 있다.

여기 ‘터’라는 말은 틀림없이 교훈에 관해서 언급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언급한 것이 족장이나 경건한 왕들이 아니고 다만 가르치는 직무를 가진 자들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한 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신앙은 이 교훈을 터로 삼지 않으면 안될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도대체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발명에만 전적 의존하고 있는 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들이 우리가 순수한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배교자라고 반역하며 비난하겠는가? 그러나 거기에 터를 두었다고 하는 방법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만이 전체(p.304)교회를 지원하기 때문에 유일의 터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규정이요, 표준이시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게 되는 것은 교리 전파에 의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나 사도를 숙련된 건축기사라고 부른다. 바울이 선지자와 사도로서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 이외에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것은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살펴보아도 그릇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며, 친히 복음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 밖의 어떤 것에서 편히 쉬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면 그리스도 밖의 어떤 것에서 편히 쉬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충분히 이용하려고 하면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연관을 짓지 않으면 안된다. 또 이 본문에서는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것인가 하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래서 이 양자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을 배우도록 선지자와 사도들 사이에 훌륭한 일치가 있다는 것을 여기에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같은 터를 소유하고 또 공동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도들을 교사로 모셨기 때문에 선지자들의 교훈이 무용지물이 되는 아니다. 오히려 선지자나 사도들이 한 목표를 향하여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옛날 말시온파가 이 구절에서 ‘선지자’란 말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말시온파와 같은 환상적인 정신을 가진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 무리들은 복음이 모든 것을 종결시켰기 때문에 율법이나 선지자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은 도처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오셨다는 것과 또 선지자들의 기록을 통하여 말씀이 들려지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의견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화합 자체가 모든 예언서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 때 우리의 믿음의 권위를 유지하는데에 적지 않은 힘이 된다. 우리의 종교의 시작이 언제부터인가를 알아보려면, 천지 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교황파터어키 사람들, 그리고 다른 분파의 창시자들은 그들이 참되고 순수한 종교에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의 과거를 자랑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p.305.

여기의 본문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화합하기 위한 화해이다. 그것이 없으면 건물이 아니며, 하나의 혼합된 덩어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조화신앙의 일치에 있다. 그 다음에 진보와 성장이 따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보하기 위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결합하지 않는 자들은 세속적인 건물은 될는지 모르나,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과 공통된 점은 아무 것도 없다.

성전이 되어가고.

다른 곳에서는 믿는 사람 개개인을 일컬어 성전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그들 전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둘 다 적절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 용납하며 거룩한 연합을 이루어 많은 것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 각 사람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인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합될 때 성전(p.306)의 몸이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치된 단합을 이루도록 명하신 말씀이다.

제 3 장

3절.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p.310.

우리가 가장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면, 이전에 사도가 에베소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유일한 서한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나 구태의연한 것이고 부분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불경건한 냉소 가운데는 진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서신을 두고 바울의 진지한 태도, 그의 주장과 관심, 그의 열심과 정열, 그리고 기탄없이 형제들을 돌보는 그의 친근한 성품을 옳게 평가한다면, 그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여러 곳에 편지를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주님은 그가 그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인물로 택정한 자들을 그의 섭리대로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겨진 기록들이 충분한 증거나 되나, 그 양이 많든 적든 간에 그 기록들이 우연히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 성경의 조직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 이룩되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7절. 이 복음을......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p.313.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그의 직분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라고 말하면서, 그의 직분과 복음의 명령을 그 자신에게 결부시켜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정당성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주장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자기의 직분이 하나님 자신이 주신 은혜의 선물, 즉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포함된 은사였음을 확언한다. 그는 마치 자기가 그 직분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자기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온유하신 은혜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따라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과거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에서부터라도 주님은 사람들을 높이 들어 쓰실 수가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도 위대한 역사가 나타난다.

10절. 이제......정사와 권세들에게......

p.315.

이 구절의 말씀이 천사들에게 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무리들이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볼 만한 무리들에 속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그러나 가능한 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시고 값진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은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로 알게 되었던 것을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천사들이 우리들 가운데 함께 존재한다는 추리는 지나치게 진보된 근거없는 허구의 사색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사역자로 임명된 그 근본 목적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만약 천사들이 하나님의 눈을 흘리기 위하여 믿음의 행실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말씀의 지배를 벗어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의 외침은 인간들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헛수고가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3:12-21).

16절. 그 영광의......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p.321.

이러한 강건함의 확신은 성령이 역사하실 때 온다고 그는 선포한다. 이러한 확신이 오는 것은 인간 자체의 어떤 가능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일어난다. 이 말은 마치 선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역사하심으로 일어난다. 이 말은 마치 선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역시 우리의 강건함은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받은 확신이 신의 은총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그가 사용한 ‘하옵시며’라는 말로 잘 확증된다. 교황주의자들은 이것을 찬동하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제 2의 은사가 이미 우리에게 지불되었기 때문에 그 제 2의 은사는 제 1의 은사를 선하게 사용하는 데 따라서 줄 수 있는 은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바울이 승인한 것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이해하자.

17절.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고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p.323.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거하심의 결과에 대하여 다시 제기하고 있는데,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은혜를 아는 지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추구한다는 것은 참되고 가치 있는 영혼의 미덕을 따른다는 것이다......결국 우리가 바울이 한 말씀을 추론한다면 사랑은 우리 구원의 뿌리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더 이상 논급을 회피하면서 누구든지 사랑의 기초 위에서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을 맛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견인불발의 강하고 굳건한 그의 사랑을 소유할 때 구원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8절.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p.325.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찬동하는데, 회의론자(sophists)들은 왜 거부하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의 척도(측정)를 인간 감정(apprehension)의 지각에 의존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지식(scientia)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지식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신앙의 확실성지식(scientia)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20절. 능히 하실이에게.

p.326.

여기서는 소망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미래에 대한 언급을 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들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거나 특별한 감사를 드려야 할 터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시인해야 하고, 끝까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21절. 교회......예수 안에서 영광이......

p.326.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부르심으로 이방 가운데서 구출되었기 때문에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덧붙여 ‘교회 안에서’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감사해야 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교회에 널리 선포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의 은혜를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여기서 교회의 위대성을 더 강화하고 영존시키는 해석이 될 것이다.

제 4 장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4:1-14).

5절. 세례도 하나요.

p.330.

그러므로 한 세례는 삼위의 이름으로 성결케 되는 것이다. 아리우스파들이나 사벨리우스파들이 이 논증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슨 답변을 할 것인가! 세례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세례 속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이 거룩하고 신비한 연합의 기초가 하나님 한 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들이 부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세례 의식이 하나님의 한 본체 안에 세 인격으로 존재하심을 증명해 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8절.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p.333.

‘사로잡힌 자’란 사로잡힌 원수들을 가리키는 집합명사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원수들을 끌어내려 복종시키는 것을 단순히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사로잡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과 죄와 죽음과 모든 음부를 굴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 육신의 우리 육신의 오만불손만을 쳐서 복종케 하시려고 매일매일 순종하는 백성이 되도록 직접 역사하고 계신다. 반면 그리스도의 원수들(즉 모든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분노를 자신이 허락한 한도 내에서 억제시키고 그들을 쇠사슬로 잡아맨다는 것이다.

9절. 땅 아랫 곳으로......

p.335.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이 말씀이 림보나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현재의 생활 상태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증은 너무나 빈약하다. 이 구절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 땅의 어느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이 아니라 이 땅 전체와 하늘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높으신 처소로부터 우리의 깊은 심연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10절. 모든 하늘 위에.

하늘이란 모든 우주 공간보다 더 높은 곳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신 후에 계시는 곳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곳은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 우리들의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충만케 한다’는 말은 종종 ‘완전케 한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여기서도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셨다는 말을 들을 때 순간적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가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그리스도의 실체를 인간적인 상황에서 본다면 그가 멀리 떠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인 모습에서 볼 때는 우리에게서 떠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영적인 능력을 통해서 만물을 충만케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역사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속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행3:21)속박됨이 없으신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계신다는 것이다......(p.336)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전에는 하늘과 땅을 충만케 하지 않으셨는가? 그의 신성으로 볼 때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이전에도 모든 것을 충만케 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나라를 소유한 후와 같이 자기의 영적 권능을 행사하지 않으셨고 자기의 임재를 나타내시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16:7).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기 시작하실 때부터 또한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를 시작하셨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언급했던 은혜 시대에로 돌이켜 앞에서 간략하게 말했던 것보다 더 자세하게 말하기를, 마치 여러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이루듯이 이러한 다양성 등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되게 함을 성취시킨다고 하였다. 바울은 말씀의 외적인 사역의 유용함을 말한다. 복음이란 이러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파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주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서 세우신 실리적인 원칙이며,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완전하게 전파될 때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이 성령의 은사들을 말하면서 은사 대신에 직분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는 (p.337)언제든지 그 직분에 연결되어 있는 은사들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나 목회자를 세우실 때 그 사람들에게 외면적으로만 자격을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은사들을 주어서 자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세로 말미암아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자는 공연하고 무익한 칭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사명과 직분을 동시에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이제 다음의 말씀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1절. 그가......주셨으니.

바울은 먼저 교회는 말씀의 선포에 의해서 다스려지며, 사람이 창설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사도들은 자기 스스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택함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참된 목회자들은 자기 자신을 과신하여 자기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한다. 요컨대 바울은 교회의 통치가 말씀의 사역에 의해 이루어지며, 사람의 계획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우리가 침범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섭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이 사역을 대적하고 멸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이 사역의 창설자가 되심을 대적하는 자요,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직분을 주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세우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직분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가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시지 않으면 매우 다른, 성별된 그집누에 아무도 적합하거나 비슷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사역들은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있어야 할 은사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은사이다. 자기들에게 맡겨진 의무들을 행사하는 그리스도의 의무를 행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혹은 사도로

p.338.

여기에서 다섯 가지의 직분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두가지 직분은 한 가지 직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밝히지 않더라도 이 해석은 내게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나는 ‘사도’라는 말에는 일반적 의미나 어원에 따르는 의미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셔서 높은 영광을 받는 지위에 올려 놓으셨기 때문이다. 사도는 열두명이 있었고 바울이 후에 추가되었다. 이들은 온 세상에 복음의 교리를 선포하고, 교회들을 세우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는 직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맡겨진 교회는 그들 자신의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는 공통적인 명령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사도와 비슷한 직분을 가진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인데, 사도보다는 그 지위가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디모데와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문안에서 디모데와 같이 동역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면서도 자기와 동급에 잇는 사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도라는 이름이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것으로 보았다. 주님께서는 복음전하는 자들을 사도를 돕는 자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사도들보다는 좀 못한 다음가는 지위로 본 것이다.

이 두가지 부류에 바울은 ‘선지자’를 덧붙이고 있다. 이 이름은 아가보의 경우와 같이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을 가리킨다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구절은 가르치는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전서 14장의 경우와 같이 자기들의 손에 쥐어진 것들, 즉 주어진 예언들을 계시의 독특한 은사로 두드러지게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예언하는 은사가 가르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한, 예언하는 은사를 제외할 수는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는 하나의 직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다른 구절에는 다른 구절처럼 이 두가지를 구별하는 이접 접속분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이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는 바울 사도가 목사와 교사를 하나로, 그리고 같은 순서로 차등이 없이 말했다면 이 해석에 부분적으로 찬동한다. 나는 또 교사라는 (p.339)이름이 다른 어떤 구절에서는 모든 목사에게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직분이 하나라고는 보고 싶지 않으며, 서로 다르다고 본다. 가르치는 것은 모든 목사들의 의무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데는 성경을 해석하는 특별한 은사가 있기 때문에 바른 교리가 유지될 수 있는데, 교사 중에는 복음 전파에 부적합한 교사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목사특별히 양 무리를 돌보는 일이 맡겨진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목사를 교육하고 온 교회를 교훈하는 이 두가지 일을 모두 관장하는 또 다른 교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나는 목사들이 교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반대할 의사가 없다. 때로는 목사가 교사일 수도 있지만 그 직책은 서로 다르다.

또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직책들 중에 마지막 두 직책은 영구적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교황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자랑하고 있는 대감독직이 여기에서 논박을 받고 모욕을 당하는 데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문제는 하나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의 초점인 것이다. 바울은 이 직책을 우리 가운데 세운 이유뿐만 아니라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까지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의 통치에 대해서 길게 말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대감독직을 하나의 자리로 알고 있었다면, 마땅히 모든 지체들을 주관하는 한 목회자의 지위를 밝혀줌으로써 우리들을 기꺼이 그 직책 아래서 하나가 되도록 불러모으지 않을 수 없잖은가? 분명히 바울의 통찰력이 가장 타당성이 있고 힘있는 논증에 벗어난 것이 있든지, 아니면 우리가 대감독직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이 아닌 것으로 알든지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위에 계시는 분이요, 모든 사도들과 목사가 오직 그리스도께만 예속되어 있다고

말할 때 사실상 이 가상적인 대감독직을 분명하게 타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직분들은 서로서로 동료요, 친구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의 머리를 주장하고 있는 포악한 전제주의를 배척하고 있는 성경귀절이 여기서보다 더 강력하게 배척하고 있는 곳은 없다. 키프리안은 바울을 본받아 교회의 합법적인 군주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고 (p.340) 명확하게 정의했다. 그는 개개인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것을 총괄한 하나의 감독직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감독직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 직책을 개개인들에게 분담시켰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더 높이지 못하도록 천거하도록 했다.

12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만일 하시려고만 한다면 자신이 직접 이 일을 하실 수가 있음에도 이 일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면 ‘사람의 역사가 없이는 교회가 조직될 수도 없고 잘 다스려질 수도 없는가?’라는 반론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바울은 봉사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제 ‘성도들의 조직체’라고 말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우리의 참된 완성과 완전은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어지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사역자들을 명하실 때 그 사역의 결과를 말씀하심으로써 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올바르고 완전한 기초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매우 고귀한 하나님의 일이기에 말씀의 외적인 봉사에 의해서 성취되어진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보게 될 때 이러한 방법을 게을리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지기를 아직도 기대하고 있는 자들은 미친 사람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해진다. 광신자들은 자신을 위한 성령의 은밀한 계시를 추구하고, 교만한 자들은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p.341)생각하면서 교회의 일반적인 봉사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있다.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세워진다고 한다면 교회는 역시 그가 예언하는 방법대로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우리가 사도들에게 다스림을 받고 가르침을 받을 때 외부적인 복음 전파가 없이는 전혀 하나가 되어지거나 완전해질 수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높거나 낮거나 어떤 사람에게든지 미치는 보편적인 법칙이다. 교회는 왕이든 평민이든 주님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다스리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공통된 신앙의 모체이다. 이 질서를 게을리하거나 멸시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보다도 더 현명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그들의 교만함이여! 꺽어질지어다! 우리는 인간의 도움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완전하게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영광이다. 그리고 하나 되게 하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반적인 교훈대로 우리를 불러모아 한 지도자의 표준을 따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13절. 우리가 다

바울은 이제 처음에 말했던 봉사의 칭찬으로 되돌아 간다. 바울은 이미 사람들의 봉사로 인해서 교회가 다스려지며 질서가 유지되고, 다라서 모든 면에서 완전해지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것이 그 시대에만 필요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것이 끝날까지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바울은 봉사의 필요성이 마치 예비 교육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영구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광신자들은 봉사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는 그 즉시로 무익하게 되어진다고 꿈꾸고 있다. 교만한 사람들은 우리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적당한 수준을 유치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멸시하면서 그 이상의 것을 알려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모든 부족함이 다 채워질 때가지는 이 봉사하는 과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만 주로 섬기면서 살아가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봉사의 책임을 교회에 맡기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p.342.

그러면 믿음에 하나가 되는 것이 마땅히 우리의 모든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하나가 되게 할 정도까지 완전하지는 못하다. 우리의 본성은 연약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서로 가까워지도록 힘써야 하고, 또 모든 사람은 함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해야만 된다. ‘하나가 되어’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도 바라고 있으나, 이 육신을 가지고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리의 가장 밀접한 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들의 이 육신 속에는 항상 무지와 불신앙이 수없이 포함되어 있어서 완전에 도달할 수가 없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바울은 우리들이 우리의 생활 전 과정의 일관된 목표를 온전히 장성한 세대까지 삼아야 한다고 (p.343)언급함으로써 지금부터 우리가 이 진보 과정 가운데 있으므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린아이와 성숙한 어른과의 사이에 시대적인 간격을 두고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은 아직도 주의 길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여전히 주저앉아서 자기들이 어떠한 길을 택해야 할는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요, 한때는 어떤 방향을 택했다가도 때때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항상 의심이 가득차 있어 요동하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들은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가장 좋은 분으로 선택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에 철저하게 기초를 잡고 계속해서 옳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 항상 자기들에게 맡겨진 상태를 기대하고 있는 신자들의 생활은 청년과 같이 왕성하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결코 사람(어른)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어린아이의 상태를 넘어서 자라나지 아니하고서는 다른 한쪽 끝에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난 후에는 장성하여야 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이해력을 가져가서는 안된다. 따라서 사제들이 평신도들을 완전히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을 볼 때 이 교권자들이 가르치는 기독교가 어떠한 류의 것인지 밝히 드러나게 된다.

모든 교훈의 풍조.

바울은 멋진 비유를 사용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의 단순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인간들의 모든 교훈들을 ‘풍조’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셨다. 우리가 이 말씀 속에 뿌리를 굳게 내리면 요동치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고안해 낸 모든 교훈의 풍조로 우리를 곁길로 가게 하려 하고 있다.

바울은 ‘사람의 궤술’이라는 말을 덧붙였을 때,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불의한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을 하게 되면 결코 그들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이단이나 불의한 무리들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은 경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단자기의 거짓으로 그리스도의 순전한 교훈과 이러한 싸움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해야 할 바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훼방하여 어둡게 하기를 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모든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손쉬운 치료약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서 배운 바 그 교훈으로 전진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데, 이것은 결코 아무에게나 주는 위로가 아니다.

이 구절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에서 모든 확실성을 제거해 버리고 (p.344)사람의 권위에 의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믿음의 확고함을 부정하게 만드는 교황주의자들의 사악함이 얼마나 큰 것이고 잘못된 것인가는 분명해진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의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상의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자기들의 정한 규범만을 따라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과 선지자와 복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바울이 선포한 바, 즉 사람의 모든 궤술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실로 그들은 우리를 공격해 오지만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교회에서 건전한 교훈을 구해야 한다는 점을 나는 시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건전한 교훈을 지키도록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 교회라는 구실 아래 참된 그리스도의 교훈을 매장시키려 한다면 이것은 그들이 마귀와 같은 회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4:15-5:21).

18절. 무지함......말미암아.

p.349.

우리는 여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혼의 참된 생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영혼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또 무지가 우발적인 죄라고 믿어서는 안된다(철학자들은 실수란 다른 곳에서부터 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바울은 무지의 근원이 자기들 마음의 눈이 멀었기 때문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또 바울은 이것이 인간들의 본성이라고 한다. 첫째로 사람의 마음의 눈이 먼 것은 원죄에 대한 형벌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한 이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진정한 빛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진정한 빛이 없는 곳에는 오직 두려움에 찬 암흑만이 있을 뿐이다.

23절.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p.353.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 규범의 두 번째 부분은 자기 자신의 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으로’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나는 이 말씀을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분명하게 죄가 되는 야비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가장 고상하고 탁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영혼의 욕망에서도 새로워지라는 것이다. 바울은 또 여기에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칭송하고 있는 마음의 여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의 심령과 우리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마음을 낳게 해주는 하나님의 영 혹은 하늘의 영과의 대조가 함축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듯이 건전하고 부패되지 않은 마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을까? 우리의 이성이 새롭게 되어야만 마음이 현저하게 변화될 수가 있고,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라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24절.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p.354.

만약 의를 일반적으로 정직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거룩은 이보다 더 우월한 의일 것이다. 우리는 순결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나는 거룩은 율법의 첫째 부분에 해당되고, 의는 둘째 부분에 해당된다고 구분하고 싶다. 사가랴는 이렇게 노래했다.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그를)섬기게 하리라”(눅1:74,75-한글 개역 성경에는 75절뿐이다-역자 주).

새 사람을 입으라.

아담은 처음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지워져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지지 아니하면 안된다. 경건한 사람의 중생이란 실로 고린도 후서 3장 18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들 속에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능력은 첫 번째보다 훨씬 능가한다. 성경은 우리들의 최고의 완전함이 오직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를 닮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담은 그가 본래 받았었던 형상을 잃어버렸으므로 그 형상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중생 안에 들어 있는 섭리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우리가 창조된 본래의 하나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수고하여.

p.357.

이 말씀은 법에 의해 형벌을 받아야 할 큰 도적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으로 정죄할 수 없는 사소한 도적질까지 의미하고 있다. 즉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는 온갖 종류의 약탈을 가리킨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부당하고 부정하게 물건을 빼앗는 행위만을 금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고 가능한 한 우리의 성품 속에 형제 우애를 가지라고 한다.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사람은 합법적으로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수고를 들여 자기 생활의 필요한 것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라.’ 바울은 먼저 이 규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구걸하지 말고 정직한 노력을 하여 생활을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가져다 준다. 모든 사람은 자기 혼자만 살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게을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p.358.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들은 그에게 드려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부정한 일을 행한다면 성령을 그 거하시는 곳에서 내어쫓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된다. 바울은 이것을 좀더 친밀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성령에게 인간적인 감정인 기쁨과 슬픔이란 말을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은 ‘성령께서 너희 안에서 편안하고 즐거운 거처를 삼아 기쁘게 거하시도록 하고 그가 근심을 일으키시지 않도록 힘쓰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달리 해석하기를, 우리가 더러운 말이나 기타 방법으로 하나님의 (p.359)영으로 인도를 받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할 때 그 사람 속에 있는 성령이 근심하신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건한 사람의 귀는 경건한 것과 반대되는 것을 듣기 싫어할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을 들으면 깊은 슬픔으로 상처를 입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말씀들은 이 해석이 바울이 말하는 의미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안에서......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 안에서 너희가......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은 인치심과 같으시다. 그래서 우리를 버림받은 자들과 구분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인을 쳐서 우리가 택함의 은총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구속의 날까지”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된 기업을 주실 때까지란 의미이다. 이 때를 흔히 구속의 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때가 되면 마침내 우리가 우리의 모든 고난에서 벗어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6절. 누구든지......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p.364.

선지자들의 경고를 거절하고 조롱하는 악한 개와 같은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실로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과 같은 마술사들을 고용해서 어느 시대에든 사악한 조롱을 일삼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치닫게 하고 있으며, 마치 평안한 양심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과 같이 행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런 것은 하찮은 실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음행은 단순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놀이이며, (p.365)은혜의 법 아래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을 죽이는 사형 집행자로 만드시지는 않으셨다. 본성의 연약함이 우리를 변호해 주고 있다’는 등의 말로 합리화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는 반대로 파멸로 빠뜨리는 어긋난 양심에 의한 그들의 궤변을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인하여......

이 말씀을 히브리어의 관용구 형식처럼 현재 시제를 미래로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최후 심판에 관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임하나니’ 말씀을 ‘임하는 것에 익숙한’이란 의미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즉 그들의 눈앞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일상적인 심판을 기억하게 해주고 있다. 또 분명한 것은 만일 우리가 소경이나 나태한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범죄에 대해서 마땅한 보응의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수많은 실례들을 개개인들에게 사사로이 보여주셨고, 공개적으로는 어떤 도성이나 나라나 민족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불순종의 아들들에게”라는 말씀을 주의해 보자. 바울은 이제 신자들에게 위험으로 많은 두려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림을 받은 자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마치 거울을 통해서 보듯이 배우도록 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그의 자녀들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도록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피하려 한다 할지라도 할 수 있는 한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사람들을 돌보아주신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결론내리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은 스스로 멸망할 것이 내다보이는 악한 사람들과의 해로운 교제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p.366.

바울은 훈계를 명확히 하여 그 비중을 무겁게 한다. 불신자들과 또 그들의 범죄와 파멸에 에베소 교인들이 가담하지 말 것을 말함으로써 바울은 교인들의 생활이나 행위면에서 불신자들과 크게 차이가 있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자기들의 과거 생활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너희는 지난날과는 아주 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중생하기 이전 사람의 모든 성품을 가리켜 ‘어두움’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지 아니한 곳에는 단지 공포에 싸인 어두움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빛이란 성령으로 조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바울은 이들을 ‘빛의 자녀’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어두움에서 건짐을 받았으므로 빛 가운데서 걸어가야 할 것을 생각해 내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가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자.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어두움의 권세를 잡은 자로 알고 있는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11절. 너희는 ......참예하지 말고.

p.367.

우리는 그릇된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일이나 도와주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모든 우정관계나, 동의나, 충고나, 찬동이나, 어떤 종류의 도움이라 할지라도 거절할 것은 거절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방법들은 우리를 어두움에 참여토록 하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의 의무를 간과하지 않고 다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명하고 있다. 이것이 모든 위선을 대적하는 길이다.

13절.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p.368.

여기서 중간태로 사용된 분사는 수동형으로 해석될 수 있고, 능동형으로도 해석될 수가 있다. 벌게이트 역본은 수동적인 의미를 택했다. 이처럼 수동적인 의미로 본다면, 빛이라는 말은 앞에서처럼 ‘빛의 충만’과 같은 의미가 되며,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악한 행위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나게 될 때에 백일하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또 능동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는 역시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무엇이든지 나타난 것은 빛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무엇이든지 혹은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빛이라는 뜻이 된다. 이때는 복수 대신 단수를 취한다. 관사에 대해서는 에라스무스가 (p.369) 겁냈던 것 같은 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모든 관사들을 아주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세련된 작가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용법을 허용하고 있다. 나는 이 문맥을 따라서 이 의미가 바울의 말하는 바라고 판단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불신자의 악한 행위들을 꾸짖으라고 권면하면서, 이것이 그들을 어두움에서 건지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이 이제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은 빛의 고유한 사명은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모든 것들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빛으로 나오지 않고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는 신자들은 그 이름에 합당치가 못하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22-33).

22절. 아내들이여......

p.373.

바울은 아내들에게부터 시작하기를, 자기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복종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권위가 같다는 것이 아니고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분명히 밝혀져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질서와 똑같은 질서를 자기와 자기의 교회를 주장하는 것으로 정하셨다. 이러한 비교는 단순히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주관하도록 하셨고, (p.374)이 머리 됨의 형상을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 속에 반영시키셨다.

23절. 이는......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대명사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남편을 가리킨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지금 말하고 있는 주제와 더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주관하고 계시는 것인 만큼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이상으로 더 유익하고 좋은 것은 없다는 유사점이 강조되고 있다. 자기들이 구원받는 것에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곧 멸망을 택하는 것과 같다.

뒤따라 나오는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분명하게 아내들은 자기 남편이 그리스도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실례대로 자기들을 주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자.

25절.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p.374.

나는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을 취한다. 이것은 죄의 용서와 성령의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6절. 물로 씻어......깨끗하게 하사......

p.375.

바울은 이제 내적이고 은밀한 성화를 외부적 상징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성화의 가시적인 확증이기 때문에 성화의 보증은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의 왜곡된 생각으로 성례를 우상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올바른 해석이 있어야 하겠다. 바울은 우리가 세례로 씻음을 받는다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씻음을 받았다고 선언하신 곳에는 그와 동시에 세례의 표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실체 혹은 동일한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 세례와 연관되어 있지 아니하면 세례를 영혼을 씻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동시에 우리는 세례의 의식 혹은 목사를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것과 대치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씻음의 주인이 된다든가 혹은 물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씻을 수 있는 영혼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조심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성례에 사용되는 물건이나 사람에게 우리의 신뢰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성례의 참되고 올바른 사용이라야 우리를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세례의 찬사를 약화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영혼을 씻는 것이라고 불려지는 의식에다가 너무 많은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사도 바울이 세례라는 의식이 깨끗하게 해준다고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만이 깨끗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끗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에 대한 찬송이나 의식, 심지어는 세례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것과도 대치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세례의식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말속에는 조금도 애매한 점이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례의식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능력이 연약하기 때문에 이것을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견해를 반대하면서 세례는 특별히 성령께만 속한 것이며, 다른 성경 구절들도 세례의 의식은 모두 성령께 돌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의식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것의 모든 효험성령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세례의 의식은 (p.376)그 힘을 다른 곳에서부터 이끌어내지 않는 한 그 자체만으로는 무익하기 때문에 내적인 도구 이상의 것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상도 역시 근거가 없는 말이다. 하나님의 권세 있는 은혜는 세례의 의식을 제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하시고자 하시기만 하면 세례의식의 도움 없이도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실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세례의식을 은혜에 참여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의식은 누구에게나, 즉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공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만 부여되어지고,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이 없는 사람에게는 세례의 의식이 효험을 가지지 못한다. 헬라어 분사 (카다리사스)는 과거시제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씻어진 후에’라는 뜻이다. 그러나 라틴어에서는 과거시제로 된 능동형의 분사가 없기 때문에 나는 시제를 무시하고 ‘씻기어짐으로써’라고 번역하지 않겠다. 이것은 보다 더 중요한 것, 즉 깨끗하게 해주는 직분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수식해 주고자 한 것이다.

말씀으로

이 말씀은 공연히 불필요하게 덧붙여 놓은 것이 아니다. 만약 말씀이 떠난다면 모든 성례의 능력은 상실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성례가 말씀을 인쳐 주는 것 이외에 또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단순한 생각은 많은 사색들을 멀리하게 해 줄 것이다. 세례의 의식에 정신이 팔려버린 미신적인 사람은 왜 생기는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말씀에 향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게 된다면 거기에는 건전하고 순전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미친 사람들은 마침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권위가 집중되어진 세례의 의식들을 모독하고 하찮은 우상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의 성례와 불신자들의 생각 사이에 있는 유일한 차이점은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말씀이 의식의 능력과 사용을 설명하고 있는 약속들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교황주의자에게는 의식들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실제로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일종의 주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죽은 물건을 말하는 것처럼 말씀을 알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며 사람에게 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에게는 그 신비적인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성례를 마치 죽은 질료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말씀으로’는 ‘말씀에 의해서’라는 의미와 같다.

27절. 자기 앞에......세우사.

p.377.

바울은 세례, 즉 우리의 씻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하고 흠이 없이 살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죄악으로 다시 물들지 않고 한 번 받은 순결함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지탱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바울의 논조와 잘 어울리는 비유적인 말로 묘사되고 있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랑을 받는 요인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신부인 교회를 거룩하게 하여 자기의 선한 뜻의 증거로 삼으신다. 이 비유는 결혼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곧 비유를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교회와 화목하게 하여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교회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러한 부부간의 미덕, 즉 거룩함과 순결함에 있다.

바울은 ‘세우사’라는 말을 사용해서 교회는 사람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시기에 거룩하게 되어야 할 것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가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라고 말한 것이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교회를 나타내 보이사’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밀한 성결의 열매들외부적인 행위로 나타나게 되어진다. 펠라기우스파들은 이 구절을 사용해서 이 세상에서의 의의 완전함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이들은 어거스틴에 의해서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 이유는 바울이 무엇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또 다른 일이 뒤따라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할 때 이미 행해지기 전에 어떤 일이 뒤따라 일어난다고 급히 추론하는 것은 공연히 실수만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거룩함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매일매일 진보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 완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28절. 이와 같이......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p.378.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괴물과 같다.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p.381.

그는 ‘비밀’이라는 글로 말미암아 결혼을 일곱 성례 중의 하나로 결론지으면서 마치 자기들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둘만을 제정해 놓으셨음에도 성례를 일곱 가지로 보고, 그 중의 하나로 열거하고 있는 결혼 성사에 대한 증거를 이 구절에서 찾고 있다. 그들이 제시한 그 근거는 무엇인가? 벌게이트는 ‘성화(sacramentum)말을 사용해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비밀’이라는 말을 번역했다. 그들은 이 말이 라틴어 저작에서 ‘비밀’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혹은 바울이 동일한 서신에서 이 말을 이방인의 말을 자주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혹은 바울이 동일한 서신에서 이 말을 이방인의 소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려고 나타내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 단어의 애매한 의미로 기만을 당하였거나 헬라어에 무식하지 아니하고서는 이러한 주장을 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혹 사도 바울이 사용한 단어가 주장을 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혹 사도 바울이 사용한 단어가 ‘비밀’이라고 할지라도 실수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러한 성례를 애써서 꾸며내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곧이어 나오는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자기가 결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에 특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예외 없이 자기의 논조를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예외 없이 자기의 논조를 더욱 생명과 권세를 넣어주신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 이 구절에서 성례를 만들어 냈는가? 우리는 이 실수가 가장 큰 무지가 나왔음을 알고 있다.

제 6 장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1-9).

5절. 종들아......순종하기를......

p.385.

바울은 지금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돈을 받고 종의 생활을 하는 경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노예, 즉 그들의 생과 사를 주관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이 자기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명한 것은 바로 이런 종들에게 한 것이었다. 이것은 복음에 의해서 자기들의 육체적인 자유가 얻어질 수 있는지 염려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p.386)그러나 이 교훈은 오늘날의 종들과 하녀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사회를 설립하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오늘날의 종들의 형편은 옛날보다는 훨씬 더 잘 참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명하고 있는 말씀을 모든 면에서 노력하지 않는 자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9절. 상전들아 너희도.

p.387.

바울은 여기서 매우 다른 원칙을 취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는 상전들이 종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첫째로, 바울은 ‘같은 것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말씀을 ‘너희 상호간의 의무를 다하라’고 번역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토 디카이온 카이 텐 히소테-타)라고 말한 것을 이 구절에서는 ‘같은 것’(타 아우타;저희에게)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을 논리적 유추라고 할 수 있을까? 상전과 종의 신분은 실제상으로는 동일하지가 않으나 이들 사이에는 피차간에 어떠한 의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종은 자기들의 상전에게 매여 있는 반면 상전들은 종들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는 데 차이점이 있다. 이 유추는 유일한 참된 표준이 되는 사랑의 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 평가되어지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이 하고’라는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미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할 바를 모두 충분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하나 우리는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경우에도 모든 사람이 자신을 예외로 고려해 주기를 힘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불의한 지배는 권세 있는 자나 귀족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찌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10-24).

14절. 그런즉 서서......

p.392.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인들에게 입으라고 명했던 무기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단어들의 의미를 너무 간략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들이 군인들의 장비에서 의도적으로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의를 허리띠 대신에 흉배로 취했는가 하는 이유를 찾아보려고 많은 수고를 기울이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요구되는 것에 대해서 간략하게 (p.393)취급하면서 이 의의 흉배를 이미 거기가 말한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진리’라는 말로 신실한 마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허리띠에다 이것을 비유한다. 옛날에는 허리띠가 군인들의 가장 중요한 무기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것을 신실함의 근원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수성은 우리를 모든 간사함에서 깨끗하게 해주며, 모든 위선에서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해주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울은 ‘의’를 천거하며 이것으로 가슴을 보호하는 흉배로 삼기를 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죄의 용서를 이루고 있는 값없는 의, 혹은 의의 전가를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생각은 이 구절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바울은 여기서 생활의 결백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먼저 우리들이 순결함으로 영광스럽게 되고, 그 다음에는 거룩하게 헌신하는 생활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15절.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내가 실수를 범하는 것 모르나, 바울은 군인들의 구두를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인든은 항상 이것을 바울이 말한 무기 가운데 하나로 알고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것으로는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다. 군인들이 추위나 다른 해를 입지 않도록 그들의 발과 다리를 감쌌던 것처럼 우리도 해를 입지 않고 이 세상을 지나가려면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평안의 복음”이라고 부른 것은 그 결과를 가리킨 것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임무를 띠고 있으며, 오직 이 복음만이 우리의 양심을 평안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비’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복음을 위해서 준비한 금지 사항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복음의 결과라고 본다. 우리는 복음으로 모든 여행의 방해물들을 물리치고 생의 싸움을 싸울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느리고 게으르다. 더욱이 험한 길과 많은 방해물들은 우리를 더욱 지연시킴으로써 별 것 아닌 조그만 대적 하나만 만나도 낙심케 된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먼 길을 떠나는 데 복음이 가장 좋은 도구를 지적하고 있다. ‘마땅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 에라스무스의 의역은 사실상 적합하지 못한 말이다.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p.394.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상 하나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두 가지 역할로 나누고 있다. 나는 이것이 하나라고 본다. 왜냐하면 말씀은 믿음의 대상이요, 따라서 믿음이 없이는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말씀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 차이점을 분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군인들의 무기에 자연스럽게 적용시켜 말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믿음과 사랑을 모두 흉배라는 이름에다 적용시키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은 여기에서 다만 모든 손에 균형 잡힌 무장을 한 사람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또 바울이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두드러진 전쟁 무기인 칼이나 방패에다 비교한 데는 이유가 있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마귀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원수 자체를 완전히 쳐부순다. 다시 말해서,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믿음으로 그 효력을 발생한다면 우리는 원수를 막아내고 또 도망가게 할 수 있는 가장 충분한 무장을 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으려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필수적인 무기를 약탈하여 싸우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망하게 하려는 자들의 책동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싸움에 나설 자가 아무도 없다. 어느 누가 무장도 없이, 그리고 칼을 쥐지 않고 싸울 수가 있겠는가?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고.

바울은 여기서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붙잡다’ 혹은 ‘떨쳐버리다’ 혹은 이와 비슷한 말을 사용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멸하다’는 말은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바울은 이 말을 형용사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사단의 화전은 날카롭고 관통력이 있을 뿐 아니라 보다 치명적이고 맹렬한 위력이 있다. 믿음은 그들의 예리함을 무디게 만들뿐 아니라 그들의 열을 식혀준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고 말씀하셨다.

17절. 구원의 투구......말씀을 가지라.

내가 인용했던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구원의’ 혹은 ‘소망의’ 투구라고 했는데, 나는 둘 다 같은 의미로 본다. 우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을 향해 하늘을 바라볼 때 머리는 가장 좋은 투구로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이 투구가 되는 것은 오직 소망이라는 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