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5장두란노주석
사랑과 빛의 자녀, 그리고 지혜 있는 자가 되라
집필자
김상훈
조 회
195
에베소서 5장은 크게 네 개의 의미 단락(1~2절, 3~14절, 15~21절, 22~33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네 단락이 그 안에 각각 핵심이 되는 용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절은 ‘사랑을 입은 자녀’(또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 1절)라는 용어를 통해 그 주제가 드러난다. 반면에 3~14절은 빛과 어두움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세 번째 단락인 15~21절은 ‘지혜 없는 자’와 ‘지혜 있는 자’(15절) 또는 ‘술 취함’과 ‘성령 충만’(18절)이라는 말이 그 단락의 내용을 요약해 준다. 22~33절(부부 관계)과 6장 1~4절(부모隙楣?관계), 5~9절(주종 관계)은 21절에서 말씀한 서로에 대한 복종이라는 정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사랑 가운데 행하라 (5:1~2)
1~3장의 교회론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설 이후에 나타난 4~6장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앞서 하신 일(또는 계획하신 일)에 대해 믿는 자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이라는 면에서 말씀된 것이다.
5장의 1~2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장 이후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4장 1~6절까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한다. 7~10절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사역)에 대해 언급한 바울은 11~16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알려주고자 했다. 교회의 성장 목표에 대한 말씀이다. 목표는 서로 사랑으로 연계되어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에게까지 성장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4장 17절 이하에서 나온다. 특히 4장 17~32절은 ‘새 사람’과 ‘옛 사람’을 대조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은 존재로 살도록 권면한다. 새로운 윤리적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윤리적 삶은 31~32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용서와 사랑의 주제로 보완 확대된다. 31절까지의 윤리적인 삶은 32절과 그 이후 5장 1~2절의 사랑의 삶으로 연계된다(윤리적 주제는 후에 3~14절에 다시 조명을 받는다). ‘새 사람’의 특징은 의와 사랑인 것이다. 새 사람의 특징으로 윤리적 의가 사랑의 주제보다 더 많이 강조된 이유는 이미 형제 사랑의 주제가 2장에서 많이 다뤄졌고 또한 4장 앞 부분에서도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5장 1~2절은 앞서 강조한 ‘새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인 사랑의 삶과 관련이 있다(4장 32절~5장 2절의 사랑의 주제는 4장 17~31절과 5장 3~14절의 윤리의 주제 안에 위치한다). 4장의 ‘새 사람’의 이슈는 5장 1절에서 ‘사랑을 입은 자녀’, 또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이슈로 바뀐다. 1절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앞의 4장 32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라는 말씀의 연속선상에 있다.
아버지 하나님이 본이 되신다. 그분의 사랑과 용서는 그대로 그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tekna agapeta)이 따라야 할 본이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사랑 가운데 행해야 한다. 이것은 명령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본에 이어 그리스도의 본이 추가된다. 그리스도는 ‘너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paredooken, 내어 주셨다).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희생)으로 하나님께 내어드리셨다. ‘향기로운’은 ‘향기로운 향기’(osmee euoodias)를 말하는데 하나님께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a. 하라(ginesthe), 서로, 인자하게,
불쌍히 여기며,
b. 용서하면서(동사 분사), 서로,
c. 같이(kathoos),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셨다, 너희를
a. 되라(ginesthe), 그러므로, 본받는 자가,
하나님을, 같이(답게), 자녀, 사랑을 입은,
b. 너희도 행하라(동사 명령), 사랑 가운데서,
c. 같이(kathoos), 그리스도께서도,
사랑하셨다, 너희를, 또한 버리셨다,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이 두 문장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병행법(abab)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 두 문장은 서로 반복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앞의 것은 용서에 초점을, 뒤의 것은 사랑에 초점을 두었다.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각각 부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서로 인자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이다(그것은 사실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용서는 서로 인자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면,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용납을 배우는 데서 비롯되며, 사랑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배운다. 용납과 희생, 이 두 가지는 사랑의 두 얼굴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5:3~14)
이 부분에서 명령형 동사(동사구)는 모두 9개로 나타난다: ‘이름을 부르지 말라’(3절), ‘속이지 못하게 하라’(6절), ‘되지 말라’(7절), ‘행하라’(8절), ‘시험하라’(10절, 분사), ‘참여하지 말라’(11절), ‘책망하라’(11절), ‘깨어라’(14절), ‘일어나라’(14절). 바울의 권고와 명령이 매우 강조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들 명령형 동사를 중심으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한다.
(1)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3∼5절)
음행(porneia, 불법적인 성의 행위)과 온갖(모든) 더러운 것(akatharsia, 성과 관계된 도덕적 부정함)과 탐욕(pleoneksia,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강한 욕구)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했다. 앞의 두 가지는 성적인 부정함을 가리키는 것이고 세 번째의 것은 성격이 조금 다른 탐하는 욕심과 관련된 것이다. 이 세 가지 모두 육체의 욕심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이것들에 대해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 것을 명한 이유는 성도들이 그런 것들에 대해 관여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거룩한 존재인 성도의 마땅한 바(딱 맞는 일)라는 것이다(3절).
세 가지 외에 바울이 덧붙이는 것들이 4절에 나오는데, 이는 각각 누추함(aischrotees, 저속한 행동), 어리석은 말(moorologia, 어리석고 죄악된 말), 희롱의 말(eutrapelia, 저속하고 외설적인 말, 또는 천한 농담)들이다. 첫 번째 단어는 행동과 관련 있고, 뒤따르는 두 단어는 말과 관련 있다. 그런 행동과 말도 성도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감사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것(모두 여섯 가지)에 비해 긍정적인 것은 단 한 가지, 감사만이 언급된다. 감사(eucharistia)라는 이 단어는 어두움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한다.
그같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4절에 부연해 주고 있다. 성도(‘너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알다’라는 두 단어(oida와 ginooskoo)를 중복적으로 사용하여 ‘너희’가 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정녕히 안다’). 모든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사람을 가리키는 이 세 단어는 3절 앞부분의 세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하는 자로 규정했다는 점도 부각될 필요가 있다. 욕심을 따라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2:3 참조).
3절, 세 가지(음행, 더러운 것, 탐욕)는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4절, 또 세 가지(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도 적합하지 않다.
그 보다는 오히려 감사가
(적합하다).
5절, 그런 이들(음행, 더러운 것, 탐욕)은 그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이 3절과 5절의 내용이 주축을 이룬다. 4절은 3절의 세 가지에 유사한 것 세 가지를 첨가한 것이다. 3절의 세 가지 죄는 5절에 다시 행위자로 바뀌어서 나타난다.
(2) 속이지 못하게 하라(6절)
바울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6절에서 권한다. 그 이유는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6절의 말씀이 5절의 말씀과 연속되어 있다는 것은 이 내용에서 나타난다. 비록 ‘속이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새롭게 주었으나, 3~5절의 주제가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내용으로 볼 때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지 못하는 것이나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나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릇된 행동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를 반복해서 강조한 내용이다. 기업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그 형벌(죄의 대가)의 내용이 한층 강화된다.
물론 이 말씀은 2장 3절의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4:17~19 참조). 과거(옛 사람)의 상태에 다시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성도의 마땅한 바가 결코 아니다.
(3)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7절)
이들 죄와 관련된 세 번째 명령은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3~6절의 말씀에 대한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죄의 행위와 관련해서 파트너나 참예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3절), 이와 관련해서 ‘속이지 못하게 하라’(6절), 이제 ‘저희와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7절) 말씀하신다. 세 가지 명령 모두 부정어(meede, meedeis, mee)가 앞서 나온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하지 말라’는 말씀이 연속된 것이다. 경계의 목적을 뚜렷이 했다.
(4)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절)
3~7절의 세 가지 죄에 대한 경계(부정적인 내용)는 8~10절에서 긍정적인 톤의 권면으로 바뀐다. 3~7절의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체에서 ‘하라’(‘행하라’)는 긍정적인 톤의 명령체로 바뀌었다. ‘이전’과 ‘이제’의 차이를 다시 강조한다.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이다. ‘이전’과 ‘이제’의 차이는 에베소서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2:1~6, 11~13, 19; 4:17~24).
어두움이었던 ‘너희’는 이제 ‘주 안에서’ 빛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답게) 행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빛의 자녀’의 이슈는 5장 1절의 ‘사랑을 입은 자녀’에 이은 두 번째 자녀 이슈라는 점에 주목하자(빛과 사랑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4~6장에서 강조하는 주제이다). ‘행하라’(peripateite)는 명령도 2절과 9절에서 동일하게 주어졌다. 그 형식도 같다(같이, 자녀들, 사랑을 입은, 행하라, 2절; 같이, 자녀들, 빛의, 행하라, 8절).
9절은 8절의 말씀에 대한 부연이다. 어떻게 행하는 것이 빛의 자녀로서 행하는 것인가 라고 할 때 그 답변에 해당된다. 빛의 열매(빛을 행했을 때의 열매)는 모든 착함(선함, 관대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진리, 진실됨)에 있다. 착하고 의롭고 진실된 삶의 태도는 모든 빛의 자녀들이 나타내야 할 모습이다. 앞서 3절에서 어두움의 행위를 세 가지(음행, 더러운 것, 탐욕)로 지적했듯이 빛의 행위를 세 가지(착함, 의로움, 진실함)로 거론하여 이를 서로 대비했다.
(5) 시험하라(10절)
바울은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심지어는 그것을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까지 한다. 하나님께서 이 같은 빛의 열매를 기뻐하실지, 아니 하실지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당연히 답은 한 가지로 나올 것이다. 그분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3~7절),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8~9절)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그분이 받으실 만한 것임을 말씀한다.
(6) 참예하지 말고 책망하라(11절)
앞의 10절의 ‘시험하라’는 동사는 분사(명령형)인 반면, 11절의 ‘참예하지 말라’와 ‘책망하라’는 본동사(명령형)이다. ‘隙?시험하면서, 極?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는 말씀이다. ‘참예하지 말라’는 부정형과 ‘책망하라’는 긍정형이 대조를 이루며 말씀을 이끌고 있다. ‘어두움의 열매 없는 일들’은 ‘빛의 열매’(9절)와 반대된다. 이런 일들에 참예해선(함께 교제하며 참가해선) 안된다.
7절에서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가 11절에서 ‘참예하지 말라’로 재차 강조됐다(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하듯이[4절], 어두운 일들에 참예하지 말고 ‘돌이켜’ 책망해야 한다[11절]). 책망하는 것은 어두움의 일을 드러내고 꾸짖는 것이다. 단순히 참예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감춰진 것을 드러낼 것을 요구하신다(11절). 그들이 은밀히(비밀스럽게) 행하는(되어지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다(12절). 공개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두움의 부끄러운 일들이 비밀히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 같이 책망해야 하는 이유는 책망 받는 모든 것이 마침내 빛으로 나타나기(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3절). 나타나는 것은 모두 빛이라 했다(13b절). 그것은 빛이 비춤으로 어두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두운 것을 책망해야 하는 이유는 빛에 참예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빛으로 드러날 때 어두움(더러움)이 가시기 때문이다. 빛으로 드러내는 것도 빛의 자녀들이 해야 할 몫이다.
이렇게 보면, 빛의 자녀들은 첫째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아야 하며, 둘째 그 일을 책망해야 하며, 셋째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 부분이 요약될 수 있다.
(7) 깨어라, 일어나라(14절)
이 부분은 이사야에서 반복된 말씀, ‘깨어라’(사51:17, 52:1, 60:1)라는 말씀과 ‘일어나라’(사26:19)는 말씀을 함께 인용한 말씀으로 보인다.
‘잠자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다. 그 외형은 유사하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들은 깰 수 있고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깨어야 하고 일어나야 한다. 잠자는 자들은 죽은 것이 아니므로 깰 수 있다. 죽은 자들과 다르므로 그들 가운데서 그대로 남아 있어선 안 된다.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일으키려는 바울의 강력한 권고가 담긴 말씀이다.
깨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로 그리스도의 빛이 비취는 것을 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추시므로 일어나라는 것이다. 결단의 촉구를 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빛의 자녀들을 비추고, 그들의 빛이 어두운 세상을 비춘다. 3~14절의 강조점은 다음의 핵심 명령어에서 요약된다: ‘참예하지 말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오히려 ‘책망하라’, ‘깨어 일어나라’.
지혜 있는 자가 되라 (5:15∼21)
이 부분도 명령체로 쓰인 부분에 주목하여 살펴보자. ‘주의하라’(15절), ‘아끼라’(16절, 분사), ‘되지 말라’(17절), ‘이해하라’(17절), ‘취하지 말라’(18절), ‘충만을 받으라’(18절), ‘화답하라’(19절, 분사), ‘노래하라’(19절, 분사), ‘찬송하라’(19절, 분사), ‘감사하라’(20절, 분사), ‘복종하라’(21절) 등이다. 거의 각 절마다 명령형 동사들이 쓰였다.
(1) 주의하라(15절)
바울은 ‘그런즉’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15절 이하의 말씀이 5장 1~14절과 연관된다는 것을 밝혔다. 사랑을 입은 자녀와 빛의 자녀로서 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로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의 열매에 참예하는 것은 지혜 없는 자의 삶이다. ‘주의하라’(blepete)는 말씀은 어떻게 ‘자세히’(akriboos, 주의깊게 또는 철저히) 행할 것을 알고 조심하라는 명령이다(15절).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 자는 지혜 없는 자이다.
(2) 세월을 아끼라(16절)
지혜 있는 자로서 신중히 행하려고 할 때, 특히 세월을 아끼며(분사) 그리할 것을 명령한다. ‘구속하다’, ‘사다’의 뜻을 가진 ‘아끼다’(eksagorazoo)는 대가를 지불하여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월(시간)을 구속하다’는 ‘기회를 얻다’, 또는 ‘시간을 바른 방향으로 사용하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시간을 구속해야 하는 이유는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간에 대해 아무렇게나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날들이 대부분 악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간을 바른 목적(방향)으로 구속해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3)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이해하라
(17절)
때가 악하므로 더욱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17절). ‘어리석은 자’는 앞의 ‘지혜 없는 자’의 동의어로 쓰인다. ‘어리석은 자’는 실제적인 이해(지각)가 없는(senseless) 자이다. 이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이해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주의 깊게 행해져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이다.
(4) 취하지 말고 충만을 받으라(18절)
‘술’(oinos)은 포도주 등의 과실로 만든 숙성된 술을 본래 뜻한다. 술에 취하지 말 것을 명했다. 그것은 ‘방탕한’(asootia, 무절제하고, 무모하며 지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미 영역에 있어 공통적인 용어들 鬼?置?없는’(15절), ‘어리석은’(17절), ‘방탕한’(18절)隙?사용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성령의(성령 안에서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술 취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15절에서 ‘지혜 없는 자’와 ‘지혜 있는 자’의 대조가 18절에서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의 대조로 연결된 셈이다. 전자는 지혜 없는 자가 하는 일이고 반면에 후자는 지혜 있는 자가 취해야 할 것이다.
(5)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라(19절)
19~21절은 명령형 분사로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받을 때 있어야 할 내용(원인)들을 이 부분에서 기록했다고 할 수 있고, 또는 성령 충만으로 인해 나타나는 내용(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서로 화답하는(입으로 말하는) 일이 필요하다. 시(psalmos, 시편과 같은 찬양시)들와 찬미(hymnos, 찬송시)들과 신령한(영적인) 노래(oodee, 멜로디가 있는 또는 서정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할 것과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할 것을 명했다. 이렇게 찬양은 주님께 대한 것과 서로에 대한 것이 함께 어우러진다. 주님께 드려지는 찬송과 주님을 찬양하지만 서로 함께 불러야 할 찬양, 또한 서로가 함께 부르는 영적인 노래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입술로만 아니라, ‘너희 마음으로’ 불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성령 충만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함으로 성령 충만에 이를 수도 있고 또는 성령 충만함의 결과로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이 성령 충만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6) 감사하라(20절)
찬양하는 일이 첫 번째 성령 충만의 삶이라면, 감사하는 것은 그 두 번째가 된다. ‘항상’(늘), 그리고 ‘범사에’(모든 일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에 예외가 되는 때는 없다. 감사가 없는 삶은 성령으로 사는 삶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감사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가 되셔야 한다는 뜻이면서, 그 감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우리 주’께서 우리로 감사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신다. 그 이름 안에서 가능하다.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로 감사할 수 있게 하신다).
(7) 복종하라(21절)
성령 충만의 세 번째 특징은 서로 복종하는 것이다. ‘복종하다’(hypotassoo)는 자신을 그 밑에 두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행위이다. 서로에게 그 같이 (‘피차’), 쌍방간 그리할 것을 명하셨다. 그런데 그런 복종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이렇게 할 수 없다. 서로를 높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을 경외한다면 그의 말씀을 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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