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조병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온전한 사역을 이루는 인내
야고보서 1장 1~11절의 주해와 적용
Ⅰ.도입부 (약 1:1) Ⅱ.시험 (약 1:2~4) Ⅲ.지혜 (약 1:5~8)Ⅳ.빈부 (약 1:9~11)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도입부를 제외하면 야고보서의 첫째 단락(약 1:2~18)중의 전반부이다. 이 부분에는 야고보서 전체를 위한 전개방식과 내용요지가 들어있다. 야고보서의 전개방식은 마치 구약의 지혜서처럼 고리식 전개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머리 부분에서 이미 이 방식이 사용된다. 또한 앞으로 야고보서가 말하려 하는 내용의 중요한 요점들이 머리 부분에 들어있다. 그것은 시험과 지혜와 빈부에 관한 주제들이다. 이 부분은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분해할 수 있다.
Ⅰ. 도입부(약 1:1)
도입부는 세 마디의 인사문으로 되어 있다: 발신자, 수신자, 문안인사.
[1. 발신자]
발신자는 야고보이다. 아마도 이 사람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일 것이다. 야고보는 발신자인 자신에 관해서 간단하게 소개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고백적인 표현이다. 첫째로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에게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사회적인 지위는 물론이고 심지어 교회적인 위치까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에서 소개한다. 이것은 그가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예수에게 자신이 부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에 의하여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가 없이는 야고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하여만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로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급이라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가 되신다. 야고보는 자신이 믿는 예수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셋째로 야고보는 단지 종의 자세로 편지를 쓴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 뿐이다. 그가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과 예수의 생각을 드러내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늘날 설교자들의 오류가 여기에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의 지식과 사상을 전달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보여주기보다는 자신의 유식함이나 지식의 풍성함을 자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2. 수신자]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 야고보가 편지를 보내는 수신자는 첫째로 디아스포라이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상징적인 용어이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 해당하는 기독교인의 디아스포라이다. 마치 유대인이 사방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라고 불리듯이 기독교인도 사방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라고 불린다. 야고보는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기독교인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이것은 수신자가 넓은 대상이며 무명의 대상인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디아스포라가 상징적인 용어라고 해서 구체성을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야고보의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실의 삶과 구체적인 삶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허상이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벗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흩어짐이라는 아픔을 체험했고,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삶을 떠난 이야기는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는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
둘째 그들은 열두 지파라고 불린다. 열두 지파라는 용어도 상징적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연상시킨다. 이것을 기독교인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을 지시하는 용어이다. 마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듯이 기독교인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해당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것은 어느 한 지역이나 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메시지가 아니다. 진정한 설교는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
[3. 문안인사]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문안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Ⅱ. 시험(약 1:2~4)
이 부분은 호칭으로 시작한다. “내 형제들아”(v. 2). 다른 부분에서도 이러한 형제를 부르는 방식들이 있다 : “형제들아”(약 5:10 passim), “내 형제들아” (약 1:2, 2:1 passim),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약 1:16 passim). 이것은 다정한 부름이다. 발신자 쪽에서는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수신자 쪽에서는 친근감 있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 호칭은 상호신뢰를 전제로 한다. 야고보는 이 부분에서 하나의 논리적인 고리를 사용하고 있다. 시험은 연단으로 연결되고, 연단은 인내로 나아가며, 인내는 사역으로 이어지고, 사역은 온전함을 이룬다.
[1. 시험]
가장 먼저 야고보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v. 2)고 말한다. 이것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거든 모든 기쁨으로 여기라.” 야고보는 여기에서 고난으로서의 시험을 말하고 있다(이것은 후에 13절 이하에 나오는 욕심으로서의 시험과 구별된다). 성도에게 여러 가지 고난이 찾아오며,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야고보가 욥기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마치 이것은 욥에게 닥친 여러 가지 고난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난으로서의 시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온다. 때때로 시험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온다(벧전 1:6 참조).
그러면 성도는 이렇게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그것을 모든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성도의 위대함은 고난의 시험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그는 고난과 시험을 승화시킨다. 게다가 성도는 고난의 시험을 전적인 희락으로 변화시킨다. 성도에게는 심지어 고난까지도, 시험까지도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 이것이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모습이다. 세상사람들과 전적으로 다른 점이다.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완전히 질이 다른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의 초현실의 삶이며, 세상 속에서의 비세상(非世上)의 삶이며, 인간 속에서의 신자의 삶이다.
[2. 연단]
그러면 신자가 고난의 시험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너희의 믿음의 연단(개역: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v. 3). 여기에 하나의 논리적인 비약이 있다. 그것은 고난의 시험이 믿음의 연단을 이룬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롬 5:3이하와는 역순으로 설명됨). 시험은 연단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시험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고난의 시험은 그 시간에는 무척 힘든 것이지만 결국은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고난이 없다는 것은 연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고난이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축복이라기보다는 불행이다. 고난이 없는 것은 고난을 받을 만한 성숙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이 있다는 것은 고난을 받을 만한 성숙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3. 인내]
야고보는 고난의 시험이 믿음의 연단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의 연단이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믿음의 연단으로부터 인내가 나온다. 인내는 성도가 지녀야 할 중요한 성격 가운데 하나이다. 이 때문에 야고보는 그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인내에 관해서 다시 한번 강하게 설명한다. 이때 야고보는 농부의 오래 참음과 선지자들의 오래 참음을 말하면서 특히 욥의 인내를 말한다(약 5:11). 야고보는 인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약 5:11). 인내는 연단 받은 성도의 고귀한 성품이다.
[4. 사역]
인내로부터 온전한 사역(또는 행위)이 나온다. 그래서 야고보는 “인내가 온전한 사역을 얻게 하라”(개역성경의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오역이다)고 말한다(v. 4). 인내가 없이는 온전한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다. 온전한 사역은 인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후에 야고보가 행위의 중요성을 말하게 되는데(약 2:14~26), 이것은 행위의 중요성을 위한 서론적인 진술이 되는 셈이다. 온전한 사역은 인내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온전한 사역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5. 온전함]
야고보는 인내가 온전한 사역을 이룰 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너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v. 4). 한 마디로 말해서 인내로 인한 온전한 사역의 결과는 성도의 완벽이다. 야고보는 성도의 완벽을 세 가지 말로 설명한다. “온전하다”, “구비하다(= 완전하다)”, “아무것에도 부족함이 없다”. 아마도 야고보는 이 말들을 가지고 성도의 궁극적 완벽, 전체적인 완벽, 본질적 완벽을 설명하려는 것 같다. 결국 시험으로부터 시작한 신앙논리의 고리는 성도의 완벽에 도달하였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의 시험은 성도의 인격에 완벽함을 결과시킨다는 놀라운 메시지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하여 그의 편지 첫 단락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Ⅲ. 지혜(약 1:5~8)
이제 야고보서의 둘째 단락은 지혜를 다루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이 단락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v. 5).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다. 이후에 야고보는 지혜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하면서(약 3:13~18), 지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야고보에 의하면 첫째로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된 지혜가 있다. 이러한 지혜는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인데 이로부터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 요란함과 모든 악한 일이 발생한다(약 3:14 ~16). 둘째 지혜는 위로부터 난 것인데 그 지혜는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과 선한 열매를 가득히 담고 있다(약 3:17). 성도에게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어야 한다.
[1. 지혜를 간구]
그런데 위로부터 난 지혜가 부족할 때 하나님께 간구하여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v. 5)고 말한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조이다(마 7:7). 여기에서 야고보서와 복음서의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쨌든 야고보는 지혜에 관하여 간구할 것을 요청한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 내적인 지혜가 아니다. 사람의 내부에서는 이런 지혜가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이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 간구하여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야고보는 지혜를 간구하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세히 소개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v. 5)이시다.
야고보는 간구를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후히 주시는 분이다. “후히”라는 말 속에는 “순수히”, “기꺼이”, “지체하지 않고”라는 뜻들이 들어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들을 멸시하거나 책망하지 아니하신다. 성도들이 간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사실이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성도의 간구는 무의미해 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후에 간구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하여 권면을 주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물론 이때 정욕을 위한 간구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약 4:3).
[2. 간구의 자세]
여기에서 야고보는 간구의 자세를 일러준다. 그것은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이다(v. 6). 야고보는 그의 편지의 처음부터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믿음의 연단에 관해서 언급했는데(v. 3), 또 한번 믿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행위와 믿음의 관계를 말하는 단락에 근거하여(약 2:14~26)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하고 믿음을 경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야고보에게는 처음부터 믿음이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특히 간구에 있어서 믿음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야고보의 표현방식을 빌자면 믿음 없는 간구는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설명하기를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v. 6)고 했던 것이다. 의심하는 간구는 이미 간구가 아니다. 최소의 의심도 간구에 아무런 응답을 가져다 주지 않게 만든다. 이것은 마치 전화번호 한 자리만 잘못되어도 통화하기 원하는 상대방과 아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v. 7)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의 모습을 두 가지로 묘사한다. 의심하는 자의 모습이 한번은 비유적으로, 한번은 명제적으로 설명된다. 첫째로 야고보에 의하면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v. 6). 야고보는 의심을 바다 물결에 비유하고 있다. 이 말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의심이 액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의심은 불안정이다. 여기에 의심의 파괴적인 성격이 있다. 마치 바다가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성난 모습으로 바뀌어 선박을 깨뜨리고 해안을 망가뜨리듯이 의심은 결국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만다. 그런데 야고보가 구태여 의심을 바다의 물결에 비유하는 것은 의심의 규모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의심이란 것은 끝없는 것이다. 의심은 아무리 부어도 물이 차지 않는 밑 빠진 항아리와 같은 것이다. 의심은 아무리 내려가도 바닥에 닿을 수 없는 무저갱과도 같은 것이다. 의심에는 한이 없다. 야고보는 바다 물결의 불안정을 설명하면서 한 가지 요인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람이다. 바다는 스스로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다는 외부의 세력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 영향은 대단히 민감한 것이다. 바다는 엄청난 바람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약간의 바람에도 영향을 받는다. 의심이란 것은 대체적으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일어난다는 말이다. 야고보는 이런 설명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은 외부적인 영향을 경계하고 오직 하나님을 지향하며 확신해야 할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간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외부적인 세력에 흔들린다면 그는 마음이 갈라진 사람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의심하는 사람의 성격을 다시 한번 명제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야고보에 의하면 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직역: 길)에 정함이 없는 자”(v. 8)이다. 외부적인 영향은 반드시 내적인 충격을 일으킨다. 의심하는 자는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충격을 받으면서 심정적인 분열을 겪게 된다. 마음의 분열 가운데 의심하는 자는 모든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렇게 야고보는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빈부(약 1:9~11)]
야고보는 셋째 단락에서 또 다른 주제를 도입한다. 그것은 빈부의 문제이다. 이것은 앞으로 야고보가 몇 번 더 다루려고 하는 문제이다(약 2:1이하, 5:1이하).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선명하게 두 부류의 사람을 제시한다. 한 사람은 “낮은 형제”이며, 다른 사람은 “부한 형제”이다. 이것은 야고보와 관련된 교회의 사회경제적인 형편을 알려준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다같이 형제라는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낮은 사람도 경제적으로 부한 사람도 모두 형제이다. 야고보의 교회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형제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그렇지 않다면 야고보의 교회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형제 공동체는 진정한 교회의 표식들 가운데 중요한 표식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낮은 형제에게도 부한 형제에게도 동일한 형식으로 권면을 한다.
(1) 낮은 형제
야고보는 먼저 낮은 형제에게 권면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v. 9). 낮은 형제에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낮은 형제라고 해서 언제나 수치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낮은 형제가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야고보는 낮은 형제에게 자랑할 것은 높음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낮은 형제의 높음인가? 사실상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낮은 사람은 아무런 높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형제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약 2:1). 이렇게 하여 낮은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약 2:5). 낮은 사람의 신분이 일약 귀한 사람의 신분으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낮은 형제는 이러한 신분의 변화에 대하여 자랑해야 한다.
(2) 부한 형제
둘째로 야고보는 부한 형제에게 권면한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v. 10). 부한 형제에게도 자랑할 것이 있다. 야고보는 부한 형제는 낮아짐을 자랑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부한 형제의 낮아짐은 무엇인가? 그는 본래 사회경제적으로 고귀한 신분에 있어서 낮아짐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부한 사람이 철저하게 낮아짐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렇게 낮아짐으로써 그는 낮은 자를 향하여 오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알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낮아짐으로써 그에게는 인생의 진정한 모습을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부한 사람도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는 것이다. 부귀에 파묻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던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따라서 야고보는 부한 형제에게 다시 한번 인생의 의미에 관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해준다. 인생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이다(v. 10).
야고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는 것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서 말한다. 첫째로 풀 자체가 마른다. 풀을 마르게 하는 것은 돋는 해와 뜨거운 바람이다. 외부의 세력이 풀을 마르게 하는 것이다. 인생이 아무리 강하고 힘있다 하더라도 외부의 영향에 의하여 서서히 쇠하고 만다. 시간의 흐름과 시대의 변환을 막을 수 있는 인생이 없다. 하나님의 작정과 통치를 거스를 수 있는 인생이 없다. 인생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이다. 둘째로 꽃이 떨어진다. 풀에 맺힌 꽃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풀이 마르면 떨어지고 말듯이, 인생의 영광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인생이 쇠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것은 허무한 짓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한 형제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v. 11). 만일에 부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조병수/총신대와 합동신학교를 나와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염광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있다.
출처 :신약성경 각권 연구 글쓴이 : 배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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