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가 가르치는 ‘경건’ 약1:27
(여기서는 '경건'과 '성결'을 같은 의미로 썼습니다. 실제로 같은 의미입니다.)
▲기독교 고행, 금욕주의자들
교회 역사에도, 고행과 금욕을 통해 성결해지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과거 역사에 이집트의 시므온은, 18미터 높이의 좁은 기둥 위에 올라가서
무려 30년 동안 그 좁은 꼭대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 조달해 주던 사람이 힘들었을 것이다.)
시야라는 분은, 빵을 먹을 때, 꼭 모래를 발라 먹었다고 한다.
케빈이란 분은, 7년 동안 서서 살았다고 한다. 잠 잘 때도 서서 기대어 잤다.
모두 자기 육체의 소욕을 끊기 위한 고행이었다.
그런 분들의 성결과 경건을 향한 열정은 놀랍다.
어느 정도의 고행과 금욕이 ‘성결’에 도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만 깨끗하고, ‘육’(몸)은 더럽다고 생각해서 자기 육체를 학대하는 것은
소위 ‘금욕주의, 고행주의’에 빠지는 것이요, 잘못된 신앙이다.
(한 때, 육체가 쇠잔해 지는 것이 영성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1. 야고보는 <근원이 성결케 되는 것>이
성결의 출발점이라고 가르친다.
샘이 한 구멍에서 쓴 물과 단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 짠 샘은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 약3:11~12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샘’의 예를 들고 있다.
샘이 한 구멍에서, 쓴 물도 내고, 단 물도 내지 못 한다.
좋은 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좋은 샘이다.
좋은 물과 쓴 물을 교대로 내는 그런 샘은 없다.
▲야고보는 행위보다, 행함의 근원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흔히 야고보서를 ‘행함을 강조하는 책’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반쪽만 아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함을 강조하면서도,
사실 야고보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행함의 근원’이다.
즉, ‘샘의 근원’이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경건, 성결’은 외적 행동이 아니라,
사람의 속 근원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근원 자체가 ‘단물을 내는 근원’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 진리를, 야고보 사도는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적으로 깨달았다.
야고보 사도는 원래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다.
(12사도였던,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해야 한다.)
막3장에 보면,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 때 예수님의 형제들(어릴 적 야고보 사도 아마 포함)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집안 경제를 책임지고 보탬을 주어야 할 장남(예수)이
(더군다나 아버지 요셉은 일찍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이 없음)
가계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면, 존경이라도 받았으면 견디겠는데,
도리어 동네 사람들에게 욕만 얻어먹고 다니니까
그 당시 동생 야고보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그리고 사실 어릴 적부터 자기랑 같이 장난치며 놀던 형이
나이 30세가 되자 갑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행세를 자처하니까
동생 야고보는 상당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지만,
친동생 야고보는 그 자리에 끼지 못했다.
▲야고보의 근원적 변화
이 ‘동생 야고보’가 <처음으로>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기록은
예수님 부활 후에... 행1:14절에 나온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할 때,
거기에 ‘예수의 동생’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야고보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른 동생들도 있었을 터인데,
왜 하필 ‘야고보’만 사도가 되고, 제자가 되었을까? ↙
고전15:7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다고
성경에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이다.
그 때 그는 삶의 근본이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추정한다.)
그리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왔고, 사도가 되고, 나중에 순교했다.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자기 삶의 근본이 변화되는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참된 경건, 성결이란... 샘의 근원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단 물을 내는 샘이 되면, 단 물을 낼 수밖에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안타깝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나 자신의 근원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내가 나쁜 짓 안 해야지,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 결심하는데,
이런 방향으로 ‘경건, 성결’의 방향을 잡으면... 겉핥기식이 된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근원적으로 쓴 물을 내는 자’들이다.
‘단물을 내려면’ 생명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쓴 물을 내던 근원인 ‘옛 자아’가 죽어버리고, 잘라버려질 때
진정한 의미의 성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뭐라고 할까? ‘어떤 내적인 강력한 변화’ - 이것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참된 경건과 성결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본 바탕을 (성령의 능력으로, 위에서 주시는 은혜로) 바꾸라는 것이다.
▲근원이 변하면... 내공이 길러진다.
내가 하나님과 연합하는데 등한시 하고
자꾸 내 몸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되면
(당연히 열심히 일 해야 하지만) 자꾸 지치게 된다.
내가 열(10)만큼 애를 쓰고 수고를 했는데, 열만큼 결과가 돌아오면 좋지만,
오히려 아무런 결과가 돌아오지 않기도 하고,
심지어는 도리어 욕이 내게 돌아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근원이 변한 사람에게는, 신앙의 내공 때문에
그런 외적 결과에 하등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경건
▲균형을 잃은 과거의 영성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과부들과 고아들을 돌보아주며,
자신을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약1:27
세속에서 자기를 지킴으로 성결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반쪽 경건’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실제적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나머지 반쪽’이며,
그 둘이 어우러져 ‘온전한 경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잘못된 경건
성경도 많이 알고, 기도생활도 충실하며, 예배도 빠지지 않는데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이기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그런 연약한 자들에게,
그들은 집도 없고 성공도 못했다며, 자기들이 잘 못 살아서 그랬다며
도움은커녕, 차가운 질시와 냉대의 화살을 보낼 수도 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런 잘못을 행할 수 있다.
(자기 과실로 인한 불행 -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물론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성경적 경건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쨌거나 사회적 약자를 품고 위로한다.
근본이 변화된 사람은... 결국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섬기는 자로 나아가는 것이 경건, 성결이다.
골방에 앉아서 기도만 하는 경건... 그것도 귀하지만,
산 속에서, 사람도 없는 곳에서, 자기 혼자 도사가 되는 것이 경건이 아니다.
경건과 성결은 반드시 일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섬기는 자가... 바로 성결, 경건한 자인 것이다.
오늘날 그가 고통 받고 있는 이웃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는 -경건, 성결-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라구아디아 시장의 경건
http://blog.daum.net/weddingkgm/11760600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경건’의 실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비정규직 사원’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경영을 위해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는 회사측 입장이 있고,
정규직과 똑같이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이라고 천대를 받는 아픔이 있다.
그런데 어제 뉴스에 보니
의료 보건 노조에서 임금 협상을 했는데,
정규직의 내년 임금 인상분 중에 30%를,
자기 회사 내 비정규직을 위해서 쓰겠다고 한다.
놀라운 결정이다.
우리 사회에 돌파구를 여는 결정이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정규직’들이
처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비정규직’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권리를 희생하고 나누었다는 것은
... 오늘날 ‘참된 경건’의 예를 여기서 찾게 된다.
◑3. 자신을 지키는 성결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성결)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과부들과 고아들을 돌보아주며,
자신을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약1:27
자신을 지키는 것 중에, 돈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돈은 섬김의 대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돈은 써야 하는 대상이다. 그것을 써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찬송가 -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베벌리 쉐어는 원래 잘 나가던 세상 가수였다.
그가 예수를 진실되게 만나고 나서 자기 삶이 완전히 변했다.
이전에는 사람들의 인기와 박수, 돈벌이에 온 목적을 두고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느 날 그가 기도하던 중에 놀라운 은혜가 위로부터 부어졌다.
그는 자기의 남다른 노래하는 은사를...
앞으로 오직 주님만 위해서 쓰겠다고 결심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복음성가 가수가 되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가수 생활을 계속 하면서도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분은 특별한 감동이 와서, 그 날 특별한 결심을 한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그래도... 세상 노래를 부르지 않기로 결단한 것이다.
찬양만 부르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런데 자기 마음으로 서약한 바로 그 날,
큰 방송국에서 전속 계약을 맺자는 연락이 왔다.
보통 사람이 만지기 힘든 상당한 액수의 계약금이 제시되었다.
“조금 늦었습니다. 제가 몇 시간 전에, 어떤 분께 제 목소리를
완전히 바치기로(전속) 결정을 했기 때문에
당신네 회사랑 전속 계약을 맺지 못합니다!”
그 돈을 받아서 고아를 돕는 일에 써도 좋았지만,
그 돈을 (주님께 헌신을 위해) 거절했을 때,
위에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를 받고는 어쩔 줄 몰라 하던 중에
어떤 선율이 떠올랐는데, 그것이 바로 ‘주 예수 보다는 귀한 것이 없네’였다.
모든 가수들에게 똑같은 방식이 적용될 수는 없지만,
베벌리 쉐어에게는
수 십 억의 돈을 거절했지만,
대신에 수 십 억의 사람들이 부르면서 영감을 얻는 찬송을 받게 되었다.
수 십 억의 돈은 얼마 못 가서 사라졌겠지만,
그가 남긴 찬송은, 수 십 억의 사람들에게 영원토록 기억되고 애창될 것이다.
정말 탁월하고 후회 없는 결정이었던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했던 베벌리 쉐어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값진 유산을 남겼던 것이다.
▲마치는 말
야고보는 처음에 자기 형님이 누구인지 몰랐다.
3년 동안 형님을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자기는 형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고, 미친 사람을 집에 붙들어가려고 했었다.
집에서 목수 일이나 열심히 하면서 잘 먹고 잘 살려고만 했다.
바로 그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쓴 물에서 단 물로, 샘 자체가 변화가 되고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로 섬기기까지 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야고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으면,
‘그의 무릎이 낙타무릎처럼 되었다’고 전하고 있는가....
한 가지 더 특이한 것은,
그가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했을 때, 그 기도내용이 무엇이었을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전한다.
‘야고보는 성전에 들어가 기도할 때,
특별히 사람들이 용서받도록 기도했다.’
<07.07.08.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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