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벧전,후서 강해

벧후강해(3)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1:3)

에반젤(복음) 2019. 11. 28. 11:08



    

이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죽기 직전에 유언처럼 남긴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죽기 전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었습니까? 이미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죽고 난 다음에 거짓선생들이 나와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부인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에 더 굳게 서 있게 하기 위해서 이 베드로후서를 기록했습니다.

/특별히 이 베드로후서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쓰여 진 책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1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보배로운가에 대해서 사도베드로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앎이란 하나님과 예수님을 체험적으로는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더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3절과 4절에는 예수님을 주로 믿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시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에 우리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3절에 보시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육신적인 생명은 있지만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육신의 생명과 함께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육신적인 생명만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3:16)”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영생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영생이라는 말은 우리 육신의 생명이 영원히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우리가 죽어도 우리 영혼이 살아서 주님과 함께 저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뜻이 있습니다. 계란에서는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습니다. 모양은 같습니다. 그런데 유정란은 생명이 있고, 무정란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정란은 20일 뒤가 되면 병아리가 나오지만, 무정란은 썩은 계란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어서 그 속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죽어도 그 영혼이 살아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 속에 영생이 없는 자는 죽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기에 죽어도 우리 영혼이 살아서 주님과 함께 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영생이 우리가 죽어서만 누리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생은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5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현재에 이미)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영생을 현재에 이미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어도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서 생명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 가운데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내 속에 영생 즉 영적인 생명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15:12, 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적인)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적인)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육신적으로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세상입니다.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가운데서 우리가 영적으로 생명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영적인 생명이 있는 자의 삶은 어떠합니까?

영적인 생명이 있는 자의 삶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또 둘째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세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앎이 아닙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아는 앎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여기서 앎이라는 것도 에피그노시스 즉 하나님과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아는 앎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요일1:3 --우리의 사귐(교제)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더불어 교제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하나님과 교제함으로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제를 나눌 때 우리 안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여기서 충만이라는 말은 가득 찬 상태를 말하지 않고, 흘러넘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생명이 있는 자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함으로 흘러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 이 기쁨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벧전1:8).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16편에서는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할 때 그 주님 안에 있는 흘러넘치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사람은 날마다 새 힘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가운데 장정이라도 피곤하여 넘어질 수 있습니다. 청년이라도 힘이 들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는 새 힘을 얻습니다. 달려가도 곤비하지 않는 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를 수 있는 새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른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오해하기를 독수리가 수많은 날개 짓을 통해서 하늘을 나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절대 날개 짓을 하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날개 속에 작은 털어 나와서 상승기류를 탑니다. 그래서 그 상승기류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라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성령의 상승기류를 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인간적인 힘으로 하늘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에 의해서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서나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누리는 영생의 삶입니다. 생명 있는 자로서 날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함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 사랑, 또 새 힘을 얻으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두 번째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명 있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고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럽고 존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체로서 명품입니다. 따라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체로서 명품입니다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예수님의 생명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봅니까? 자기 자신이 명품을 입어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좋은 집에 살아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좋은 차를 타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신발이라도 명품신발을 신어야 존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내가 많은 돈을 소유해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또 내가 어떤 지위에 올라가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없는 자의 죽은 삶입니다. 생명 없는 자의 죽은 삶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사람이 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소유 속에 자기 자신을 봅니다. 환경 속에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래서 나는 비참하다 아무 것도 아니라 나는 살 가치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가 되었습니까?

이제 나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마임아 새 생명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사람이 세상이 사탄이 뭐라고 하든 나는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존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3)영적 생명이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13:14,15절에요일4: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14절에 보시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 속에 영적 생명이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속에 영생-즉 영적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내가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삶을 산다면 내 속에 영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속에 영적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현제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속에 영적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도 형제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그 속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절대 계속해서 죽도록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살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어떤 사람을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미워하는 마음을 계속해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까? 미워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까?

내 안에 진정으로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미워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또 그 안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수 없습니다. 또 절대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요일4:18“--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형제를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주 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정신없이 살다보면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토요일 주일을 준비하다보면 절대 사람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사람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워했다가도 회개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생명이 있는 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공급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절대 인간적인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셨듯이, 이 사랑을 매일 받는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조차도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이라고 해 놓고 나만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성경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일서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어)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제 이렇게만 말씀을 드리면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이 세상이 천국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미워해서 죽인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미움의 영인 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를 미워하게 하고 죽이게 만듭니다.

지금 세상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싸움입니다. 예수의 영과 사탄의 영의 싸움입니다. 이런 세상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믿는 사람들입니까?

사랑이 미움을 이길 수 있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길 수 있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사탄을 이미 이기셨고, 또 이기실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을 이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인간적인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안 되면 사랑의 수원지인 하나님에게 날마다 가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매일 사랑을 공급받으시기 바랍니다. 그서 생명이 있는 자로 서로 사랑하면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