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유다서 강해

유다서 주석

에반젤(복음) 2019. 11. 27. 19:53



유다서


내용 목차

♣ ♣ ♣ ♣ ♣ ♣

 

1장
 진리를 위한 싸움 ․․․․․․․․․․․․
 97

    

본서신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이다. ‘야고보의 형제’라는 표현은 둘 중의 하나를 가리킬 것이다. 첫째는 열두 사도 중에 야고보와 친족 관계에 있는 유다를 가리킬지 모른다. 한글성경 누가복음 6:16은 그를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번역했다. ‘아들’이라는 말은 작은 글씨로 첨가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야고보의’라는 말만 있다. 옛날 영어성경은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번역했다. 둘째는 그 표현이 예수님의 동생들 중 한 사람인 유다를 가리킬지 모른다. 마가복음 6:3은 예수님의 동생들 중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 등을 언급한다. 유다는 17절에서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자신을 사도들과 구별시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사도가 아닌 유다일지 모른다. 또 그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야고보가 당시에 잘 알려진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이었으므로(행 15:13; 갈 1:19; 2:9) 그의 동생 유다가 본서신의 저자이었다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세기 경에 벌써 허마와 폴리갑은 본서신을 인용하였다. 초대 교회는 본서신을 영감된 책으로 받아들였다. 만일 본서신의 저자가 사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동생 유다이었다면, 본서신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도적 인물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그 인물이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가복음은 사도 베드로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그리고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본서신이 모세의 승천이나 에녹서 같은 가경서(假經書)를 인용했으므로 영감된 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지만, 본서신의 9절과 14절에 인용된 말들은 구전(口傳)에서 인용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므로 반드시 가경서를 인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과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3절). 유다는 또한 이단들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였다(4-19절). 본서신의 교훈은 말세를 당하여 배교와 타협과 혼란이 극심한 오늘날 매우 적절하고 요긴하다. 오늘날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진리를 위해 이단들을 대항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

1장: 진리를 위한 싸움

1, 2절, 문안 인사

[1, 2]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부른다. ‘야고보의 형제’라는 말은 그 야고보가 당시에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과 순종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하나의 좋은 모범 정도가 아니고 신앙의 대상이요 순종의 대상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주님’이셨다. 그에게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초대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그러하였고 그 후 시대에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앙과 순종의 대상이시다. 우리는 그를 하나님과 구주로 믿고 의지하며 그에게 절대적 순종과 헌신을 바친다.

유다는 편지를 받을 성도들을 세 마디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는 그들을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전도의 말씀에서 죄인을 부르시는 외적인 부르심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회개하고 주께로 나오게 하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는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얻고’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거룩해지고’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 셋째로, 그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원어(예수 크리스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다.

유다는 이런 성도들에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을 입은 자들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시는 평강을 소유하고 누리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약하고 세상은 너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은 우리에게 날마다 시간마다 더욱 많이 요구되는 것이다.

3, 4절, 편지를 쓰는 목적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에 대해 성도들에게 몇 마디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 절에 말한 대로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에 대해 도전하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단들이 도전하고 부정하는 우리의 구원은 몇몇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며 우리가 믿는 바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이다.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원어는 ‘우리의 공통적 구원’이라는 뜻이며, ‘믿음의 도’라는 원어는 단순히 ‘믿음’이라는 말로서 여기에서는 믿는 마음가짐보다는 믿음의 내용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내용은 단번에 확정된 것이며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갈 1:7-9).

기독교 진리는 확정되었고 고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의 십자가 속죄 사역도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의 부활도 단번에 이루어졌고 우리의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도 법적으로는 단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이 기독교 신앙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 외에 다른 예수가 없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성경적 예수와 성경적 복음을 믿고 고백하게 하는 영 외에 다른 성령이 없다.

그런데 이 불변적 진리를 부정하고 혼잡케 하는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다(빌 1:7; 딤전 1:18; 딤후 4:7).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우선, 우리는 이단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단을 포용하거나 이단과 협력하거나 이단과 연합하여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단을 분별하고 그것을 반박하고 비평하며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것을 조심하도록 경계하고 그것과 교제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롬 16:17; 고후 6:14-17; 엡 5:11; 딛 3:10; 요이 7-11).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 잘못 표현하거나 잘못 정죄하는 실수를 하지 않고 정확하고 정직한 말만 하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갈 6:1; 딤후 2:24-26).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본절은 이단에 대해 몇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이단은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온다. 이단은 ‘내가 이단이다’라고 말하면서 들어오지 않는다. 이단은 마치 자신이 이단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처신하면서 교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이단을 분별할 수 있다.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면 이단이 많이 들어올 것이다.

둘째로, 이단은 옛적부터 정죄를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되었다’는 말은 ‘정죄를 받기로 미리 작정되었다’는 뜻이다. 이단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다.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고 만세 전부터 정죄를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셋째로, 이단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이단은 불경건하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었더라면 이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이단은 정욕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방종에 떨어지는 교훈을 하면 그는 진리에 위배되며 이단적이다. 셋째, 이단은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홀로 하나이신 주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일부라도 부정하는 것이 이단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구원과 단번에 주신 믿음의 진리를 귀중하게 여기고 이단을 분별하여 힘써 싸워야 함을 배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여러 곳에서 보이는 대로 이단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단을 포용하거나 이단과 협력하거나 연합하여 활동하지 말고 이단을 분별하고 반박하고 비평하고 이단과 교제를 단절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단을 경계하게 하고 이단과 분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고 또 정확하고 정직한 말을 하고 잘못된 비평이나 정죄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5-10절, 이단들의 죄악과 심판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유다는 겸손하게 권면한다. 그는 자신의 권면의 말이 성도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이지만,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한다.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태도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5장에서 비슷하게 썼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유다는 거짓 교사들 곧 이단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역사상 몇 가지 사실들에 비교한다. 첫째로, 그는 이단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의 선조들에 비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을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항할 때 그들을 광야에서 다 멸망시키셨다. 이와 같이 교회에 속한 것 같은 이단자들도,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교회에 소속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둘째로, 유다는 이단자들을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에 비교한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은 사탄과 악령들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모든 악한 천사들이 다 지금 흑암에 결박되어 있지 않지만, 그 중 일부분이 그러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2:4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하였다. 사탄과 악령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위치, 즉 하나님을 섬기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교만함으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보인다(딤전 3:6). 하나님께서는 악한 천사들의 일부는 이 세상에서 현재 활동하도록 허락하셨으나, 그 나머지는 이미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도록 만드셨던 천사들이라도 타락할 때 이렇게 벌하셨듯이, 그는 이단자들도 지옥에 던지실 것이다.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셋째로, 유다는 이단자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과 심판에 비교한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은 심히 음란하므로 마침내 유황불비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였다.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라는 원어는 ‘이 사람들과 같은 모양으로’라는 뜻으로 이단자들을 가리킨다. ‘다른 색을 따라’라는 말은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벗어난 변태적 관계 즉 동성애를 가리킬 것이다. 성적인 타락의 극단적 형태가 동성애이다. 성경은 그것을 ‘가증한 일’이라고 표현하였다(레 18:22).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극도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비를 내려 완전히 멸망시키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은 같은 죄 때문에 같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이단자들의 죄악은 앞에서 언급한 세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것처럼 처신한다. ‘꿈꾸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은 그들이 꿈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고 선전함을 암시한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육체를 더럽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음란한 자들이다. 4절에서도 유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다고 지적하였다. 이단의 한 특징은 도덕적 부패이다. 참된 신앙과 도덕적 삶은 같이간다. 참된 신앙을 저버린 자가 도덕적으로 부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로 그들은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권위와 영광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합법적인 권위를 가리킬 것이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합법적인 교훈과 치리에 복종치 않는다. 물론 우리가 사람의 종이 될 필요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합법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성경이 밝히 가르친 바이다. 만일 교인들이 교회의 합법적인 교훈과 권위에 복종치 않는다면, 교회는 이단을 막아낼 수 없고 분파의 죄악과 혼란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교회의 교훈과 치리에 불복종하려 한다면 그는 그 이유를 성경에 근거하여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교훈과 치리의 권위에 대해 여러 곳에서 밝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9, 10]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다는 이단자들이 교회의 합법적 권위자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잘못에 대해 지적하면서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해 마귀와 변론한 일을 언급한다. 이것은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유다는 천사장 미가엘이라도 마귀에 대하여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였는데 저 이단자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비난한다고 지적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합법적 권위자들을 함부로 비난하였다. 그것은 매우 악한 일이었다.

또 그들은 육신적 죄악성으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고 있다. ‘본능으로 아는 그것’이라는 말은 인간의 육신이 가진 본능적 감정과 욕망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성 없는 짐승이 가진 것과 비슷하다. 인간이 단지 그런 것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것보다 고상한 영혼의 생각과 감정과 소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가치는 육신적 감정보다 이런 정신적 요소에 있다. 그렇지만, 저 이단자들은 결국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저들은 그 육신의 죄악된 감정과 욕망 때문에 마침내 멸망을 당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악한 예들만을 보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던 이스라엘의 선조들,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나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던지운 천사들, 간음을 행함과 동성애의 극한 죄악 때문에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등은 육체를 더럽히며 하나님이 교회에 합법적으로 주신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저 이단자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저들은 다 지옥의 형벌을 받을 자들이다. 우리는 이 악한 예들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위치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위자들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성경적 교훈과 치리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음란으로 육체를 더럽히지 말고 거룩함과 정결함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1-19절, 이단들의 죄악과 심판(계속)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는 이단자들을 역사상 세 명의 인물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화가 있을 것을 선포한다. 첫째로, 이단자들은 가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가인은 동생을 미워하여 마침내 그를 죽였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은 마음 속에 미움을 가득히 품고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둘째로, 이단자들은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가고 있었다. 발람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하다가 큰 책망을 받았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 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셋째로, 이단자들은 고라의 패역을 따르고 있었다. 고라는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인도자 모세를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큰 벌을 받았다.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산 채로 삼켰다. 저 악한 자들과 같이, 이단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가 있다.

[1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유다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단자들에 대해 평가한다. 첫째로, 이단자들은 애찬의 암초이다. 암초는 배를 파선시키는 무서운 원인이다. 배는 교회를 상징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사랑의 식탁 교제에 기탄 없이 참여하지만 실상 교회를 파괴시키는 무서운 요소이다. 둘째로, 이단자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다. 목자는 양을 기르는 자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지만(요 10:11), 이단자들은 양을 기르지 않고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다. 셋째로, 이단자들은 바람에 밀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다. 구름은 비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지만, 물 없는 구름은 그 기대를 무너뜨린다. 비는 생명의 은혜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단자들에게는 그런 비가 없다. 그들은 세상 풍조에 밀려다니는 물 없는 구름에 불과하다. 넷째로, 이단자들은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다. 열매는 의와 선과 영혼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므로 그들에게는 그런 열매가 없다.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다섯째로, 이단자들은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다. 그들은 거짓과 미움과 탐욕, 음란과 강포의 말과 행위로써 인격의 수치를 드러낸다. 여섯째로, 이단자들은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은 지옥을 가리킨다. 이단자들이 마지막으로 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 주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 23:33).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한 말씀이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이단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사람들’이라는 말은 원문에 ‘이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다. ‘수만의 거룩한 자’는 아마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재림의 주께서 죽은 성도들의 영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며 그들이 다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주의 재림의 목적은 악인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본절은 ‘경건치 않은’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불경건은 실제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불경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항하는 강퍅한 말들을 하게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오셔서 이런 불경건한 자들을 다 심판하고 정죄하실 것이다.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利)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유다는 이단자들의 죄악상을 다시 증거한다. 그들의 죄는 앞에서 언급한 그러한 불경건이며 하나님을 거스려 하는 모든 강퍅한 말들이다. 그래서 유다는 그들을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또 그들은 그 정욕대로 행하는 음란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는 교만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하는 삯꾼들이다.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이러한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익을 위해 아첨의 말을 하게 만든다.

[17-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유다는 사도의 말을 인용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들과 구별하는 듯하다. 유다가 인용한 내용은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두번째 서신에서 한 말씀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벧후 3:3). 유다서는 베드로후서가 사도의 글이라는 것을 증거한 가장 오래된 증거이다. ‘당을 짓는 것’은 교회를 분리하고 분열하는 행위이다. 이단은 교회의 일치와 화평을 깨뜨리는 자이다. ‘육에 속한 자’라는 원어(프쉬키코스)말은 ‘육욕적인 자, 호색적인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단의 음란한 특성을 증거한다. 그들 속에는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9절까지는 우리에게 이단자들의 죄악상과 그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증거한다. 이단자들의 죄악은 서너 가지이다. 첫째로, 그들은 교만하다. 이 교만은 미움과 분열로 나타난다. 그들은 가인과 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고라와 같이 하나님의 세우신 지도자를 대항하고 대적한다. 그들은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롱하는 자들이며 당을 지어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이다. 둘째로, 그들은 탐욕적이다. 그들은 불의의 삯을 위해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갔고 물질적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한다. 셋째로, 그들은 정욕적이다. 그들은 육욕적이며 호색적이며 음란하다.

또 이단자들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평가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물 없는 구름이요,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만 드러내는 자요, 영원한 흑암에 던지울 별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이단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영원한 흑암의 처소인 지옥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받을 것이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가 이단자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탐욕적이지 말고 자족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음란하지 말고 성결한 삶을 지켜야 한다.

 

20-23절, 권면

본문에서 유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일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에 대해 몇 가지 권면을 한다.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유다는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일에 대해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하라고 권면한다. 유다는 성도의 믿음을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참된 믿음의 성격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은 세상적인 일이 아니다. 성도의 믿음은 세상적 가치를 구하는 일이거나 세상적 욕심이나 목적을 가지는 일이 아니다. 성도의 믿음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죄를 버리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거룩한 일이다. 그것은 지옥에 들어갈 자들이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이다. 믿음은 지극히 거룩한 덕이다.

이 믿음은 성도에게 필수적인 덕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만일 성도인 우리가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없는 자일 것이다. 성도의 인격은 믿음 위에 건립된 인격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튼튼한 집을 짓듯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해야 한다.

둘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기도는 믿음의 증거이다. 믿는 자는 기도하게 된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기도하되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뜻이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은 보혜사 곧 우리의 위로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의 기도 생활도 도우신다. 그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입어 기도해야 한다.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셋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권면한다. 자기를 지키라는 말은 이단 사상과 부도덕한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라는 뜻이다. 유다는 이단들에 대해 많이 말했다. 그는 본서신의 초두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우리는 이단 사상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이 이단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도덕적인 죄들도 마찬가지다. 성도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불결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힙입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하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사탄과 악한 영들의 활동이 아무리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악과 싸워야 하며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로마서 8:31, 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넷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구원을 받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도, 진행도, 완성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되는 것밖에 없다. 우리의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도 주의 긍휼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성화(聖化)도 주의 긍휼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며, 우리의 영광의 구원의 완성도 주의 긍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면서 영생을 향해 달려가야 하고, 끝까지 그러해야 한다.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유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들에 대해서도 몇 가지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어떤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한다. 전통사본에는 ‘의심하는’이라는 말(디아크리노메노이)이 ‘구별하면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구별해야 함을 나타낸다. 우리는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구별해야 하고, 확고히 믿는 자들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하여 의심하거나 범죄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둘째로, 유다는 다른 자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보다 잘못이 심한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전통사본에는 ‘두려움으로 구원하라’고 되어 있고 또 본절의 후반부는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면서’라고 되어 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자신을 더럽힌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24, 25절, 송영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넘어지지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또 우리로 그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큰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진행과 완성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전통사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없고 또 ‘하나이신’이라는 말 다음에 ‘지혜로우신’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깨달은 모든 성도의 마땅한 일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다.

 

결론적으로, 20절부터 25절까지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행해야 할 일 몇 가지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해야 할 일 몇 가지를 권면한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해야 한다. 우리는 참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써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힘입어서 교리적 이단 사상과 윤리적 부패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도, 진행도, 완성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밖에 없다.

그 다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의심하는 자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부족과 연약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온전케 되기를 위해 권면하고 또 기다려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범죄한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듯이 구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더러운 옷이라도 싫어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을 교리적, 도덕적 오류로부터 지켜야 한다.

 

  

 

 

저자 김효성(金曉聲) 목사 소개

1973년,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1979년, 총신대학 신학연구원[현 신학대학원] 졸업

1983년,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Th.M.)

1988년, 미국 Bob Jones University(Ph.D.)

J. 그레셤 메이천, 신약개론 등 여러 권 번역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등 저술

계약신학대학원 전임강사

현재, 서울 합정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