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무엘상 강해

[스크랩] 다윗 앞에 울며 고백하는 사울(삼상 24:16~22)

에반젤(복음) 2019. 11. 12. 16:48

* 오늘의 말씀 : 다윗 앞에 울며 고백하는 사울(사무엘상 24:16~22)

 

* 본문요약

 

  다윗이 사울의 겉옷자락만 자르고 그를 죽이지 않은 사실을 알리자, 사울이 다윗의 그 말을 듣고 소리 높여 울며 다윗이 자기보다 의롭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내 아들아!”라고 부르며 자기는 다윗을 악하게 대하였으나 다윗은 자기에게 선하게 대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또 다윗이 장차 왕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견고히 세우게 될 것임을 자기도 안다면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자기의 후손을 끊거나 자기 이름을 멸하지 말아줄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합니다. 다윗이 맹세하니 사울은 자기 집으로, 다윗은 요새로 각자 돌아갑니다.

 

찬 양 : 507(455)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502(445)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 본문해설

 

1. 다윗 앞에 울며 고백하는 사울(16~19)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자,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하고 말하면서 큰 소리로 울며

17)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였는데 너는 나를 선대하니(나는 너를 악하게

대하였으나 너는 나를 선하게 대하였으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음에도 네가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나를 선대한 것을(네가 나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지를) 오늘 내게 보여주었다.

19)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기 원수를 만나고도(붙잡고서도) 그를 해치지 않고 평안히 가게

할 자가 어디에 있겠느냐? 오늘 네가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 사울이 다윗에게 맹세를 요청함(20~22)

 

20) 보라, 나는 네가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세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어버리지 아니하고,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지워

버리지) 않을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라.”

22) 다윗이 사울에게 그대로 맹세하니, 사울은 집으로(자기의 왕궁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갔습니다.

 

- 내 후손을 끊어버리지 아니하고(21) :

고대 근동에서는 새 왕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전임 왕의 자손들을 멸족시키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베냐민 지파이고 다윗은 유다 지파이며, 더구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돼있었으니 다윗이 왕이 되면 자기 후손을 멸족시킬 것이 두려워 다윗이 두려워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합니다.

 

 

* 묵상 point

 

1. 사울의 감동적인 고백 그러나 아무런 의미 없는 공허한 고백

 

1) 사울의 고백 자체는 진실이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다윗이 사울의 겉옷자락만 자르고 그를 죽이지 않은 사실을 알리자 사울이 그 옷자락을 보고는 다윗에게 통곡을 하면서내 아들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하고 말합니다. 그동안 사울은 다윗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새의 아들놈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인이나 노예를 대하듯 한 것입니다. 감정에 복받쳐서, 마치 지금까지 왜 내가 너를 그렇게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는 투로 그렇게 몇 십 년 만에 가족을 만난 것처럼 감격스럽게 그 이름을 부릅니다.

 

 사울은 자기가 다윗에게 악하게 대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다윗이 의롭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도 의로운데 다윗이 더 의롭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는 악하고 다윗은 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세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하고 말했습니다.

 

2) 그러나 저주의 습관은 곧 다시 발동을 하고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감동적인 고백은 며칠이 가지 않아 다시 다윗을 죽이려는 증오심으로 바뀝니다. 그의 고백은 진실이었으나, 그 진실이 오래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고백할 때는 마음에는 다른 것을 품고 거짓으로 연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짜로 자기가 악한 일을 했다고 고백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마음까지 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며칠이 가지 않았습니다.

 

3) 그가 울며 고백한 것은 종교적 감정놀음에 불과했다.

 

  사울의 고백이 진정한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그가 그저 울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울며 고백한 내용까지는 진실했고 감동적이었지만 그저 그뿐입니다. 그 순간 마음이 울컥하여 눈물이 났을 뿐입니다. 그야말로 악어의 눈물인 것입니다. 한참 울어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해소되어 마음에 평안이 오면 다시 그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그 저주받은 죽음의 광란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울이 울며 고백한 것은 말 그대로 종교적인 감정놀음에 불과했습니다. 회개의 모습을 닮기는 했으나 한바탕 울고 나니 시원하다고 하는 정도에 그친 것입니다.

 

적어도 이 순간은 진실했다. 그러므로 사울은 이 기회를 꼭 붙잡았어야 했다.

 

  그의 눈물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거짓으로 연기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진짜로 다윗의 태도에 감동했고, 그의 이름을 울면서 불렀으며, 진짜로 앞으로 선하게 살겠다는 마음을 품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의 진실이 며칠이 가지 않아 바뀐 것일까요?

 

  그가 그의 잘못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고쳐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의 영의 상태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른 정신이 돌아왔고 자기의 영의 상태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바로 그 때 주께 자신의 잘못된 영의 상태를 바로잡아 주실 것을 간구했어야 했습니다. 나를 살릴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 자신의 몸과 영을 맡겼어야 했습니다.

 

  사울은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만난 것입니다. 마귀에게 시달리는 사람이 제 정신 돌아오기가 쉽지 않은데, 지금 자신의 상태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정상적인 상태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상쾌해지고, 자신의 영의 상태가 어떤지 알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주께 구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냥 눈물만 흘리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기회를 붙잡지 않은 것입니다. 아쉬운 시간이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2.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영적인 무기력자 사울

 

  사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도 참여하고 예물도 꼬박꼬박 드립니다. 그의 언어 습관도 신앙적입니다. 그는 말끝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원한다든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든지 하면서 신앙적인 말도 자주 합니다. 특히 이번 고백은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사울은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인처럼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은 자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아 지옥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울은 일상에서 말씀을 말씀에 의지하여 살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감정에 따라 살아갑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으나 말씀에 의지하여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저 자기 마음 가는대로 그를 죽이려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정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고, 여호와께서 자기를 다윗의 손에 넘기셨다는 것도 압니다. 자신이 다윗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이 왕이 되어야 나라가 바로 서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잘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있습니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 :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됐으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만 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까? 사울처럼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결국 그것이 나를 집어 삼켜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말씀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실 때 그 기회를 붙잡고 주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를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3. 사울의 부탁

 

  다윗에게 감동적인 눈물의 고백을 한 후에 사울이 다윗에게 부탁합니다. 자기의 삶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낌으로 아는 사울은 이제 곧 왕이 될 다윗에게 그의 집안과 후손, 그리고 자기 이름에 대한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사울이 부탁하는 내용은 그저 자기와 집안일뿐 자기 영에 대한 부탁은 없습니다. 지금 집안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자기 영이 완전히 파멸되어 이 땅에서부터 이미 지옥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문제를 먼저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 :

 

 우리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나의 영의 상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늘 주님 보시기에 나의 영의 상태가 어떤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샤워를 하고 자듯, 내 영의 더러운 때를 씻고 자야 하는 것입니다.

 

 

4. 사울과 같은 신앙인의 위험성

 

1) 사울에게 신앙은 왕권 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위의 2번에서 보았듯 사울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담긴 것이 말씀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왕권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을 갖는 것도 왕권 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2) 문제는 관심에 있다. 사울의 관심은 오직 왕권 유지에 대한 것뿐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관심에 있습니다. 다윗의 관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에 있는데, 사울의 관심은 오직 어떻게 하면 자기 왕권을 오래 가질 것인가에 대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예배를 드려도 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드리는 것이고, 예물을 바쳐도 자기의 왕권이 오래 유지되는 복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물을 바칩니다. 그러니 사울에게 은혜 받을 만한 좋은 기회가 와도 그 시간마저 왕권에 대한 생각으로 이렇게 속절없이 흘려보내고 마는 것입니다.

 

 다윗은 삶과 신앙이 하나인 사람입니다. 다윗의 삶 속에 신앙인의 향기가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고 있는지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신앙의 형식만 있을 뿐입니다. 예배 때에만 신앙인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말씀이 뭐라고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원하고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그러다 주일이 되면 또 예배에는 참여합니다. 그거 그뿐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썬데이 크리스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교인에 불과한 자입니다.

 

 

* 기도제목

 

1. 주께서 주시는 신앙의 때, 은혜의 때를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2. 사울처럼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내 감정대로 살지 말게 하옵소서.

 

3. 다윗처럼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