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도행전 강해

쉰다섯 번째 구원드라마(행21:15-28:31)

에반젤(복음) 2019. 10. 5. 12:23




쉰다섯 번째 구원드라마(행21:15-28:31)

 

 

바울의 체포와 로마행(행 IV)

 

I. 배경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성도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투옥되고 환란을 겪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한 바울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바울 역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자신이 고초나 재난을 당할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예루살렘에 가기를 열망하고 있는 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설득시킨다. 가이사랴에 며칠 동안 머물면서 바울은 때를 기다리다 오순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게 된다.
  바울의 체포와 감금, 그리고 로마로의 행적에 관해 보고하는 기사는 사도행전 뿐이다. 바울의 체포, 그의 변증 연설, 로마에서의 행적들은 사도행전 내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로 선포하려는 자신의 이방인 선교자로서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바울이 당해야 했던 고초와 환란은 단지 역사 속에 한 개인의 사건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 사건 속에서 한 그리스도교 복음 전도자의 열정과 사명을 볼 수 있다. 이제 바울이 겪은 그의 삶의 마지막 일대기를 살펴보고 그가 세계 선교를 위해 갈망하던 로마로의 행적을 살펴보자.

 

II. 본문과 해석

1. 첫 번째 이야기 - 바울의 체포와 감금생활(21:15-26:32)
  1) 바울의 체포(21:15-22:30)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수리아 두로와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믿음의 형제들은 한사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투옥과 환란이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는 것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영적인 대세였다.
  예루살렘에 당도한 다음날 바울과 이방인 교회 대표자들은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만났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악감정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네 명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성전에서 나실인 결례의식을 거행할 터인데 바울이 여기에 참석하고 그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유대 관습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그 말을 따랐지만 유대인들의 증오심을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아시아에서 온 광신 유대인들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 드로비모를 이스라엘 구역 안으로 끌어들였다고 하여 소요를 선동했다. 성난 군중이 바울을 잡아 성 밖으로 끌고 나갔고 겨우 로마 파견대장의 개입으로 바울은 죽음을 면했다.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 병영 안으로 끌려 들어갈 무렵 군중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때 바울은 이방인에게 전도할 사명을 받았다고 말했고 또 다시 소란이 일어났다.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갔고 이 때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주장하자 정중히 대우하게 되었다.

  2) 공회 앞에 선 바울(23:1-11)
  바울이 체포된 다음날 파견대장은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공회를 열었다. 여기서 바울은 산헤드린 내의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이의 신학적 갈등이 있음을 알고 이를 활용한다. 자기가 바리새파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에 심문 받는다고 주장했다.(23:6) 바울이 예상했던 대로 두 파 사이에 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래서 바울은 또 한 차례 위기를 모면했다.

  3) 가아사랴에서 감금된 바울(23:12-26:32)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0명의 유대교 광신자들이 노상에 매복했다가 살해할 음모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조카가 이 음모를 사전에 알고 바울과 파견대장에게 알렸다.
  파견대장은 많은 호위병으로 엄호케하고 총독이 있던 가이사랴로 바울을 보냈다. 여기서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몇 차례 청문회를 가졌으며 그 밖에 여러 차례 불려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벨릭스가 판결을 신속히 처리하지 않음으로써 이 가이사랴에서 바울은 꼬박 2년을 감금생활을 해야 했다. 물론 비교적 자유로웠고 면회도 허락받았다.
  베스도가 벨릭스를 대신하여 새 총독으로 왔을 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유대인들이 청원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묻자 바울은 로마 시민이기에 로마로 가서 황제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탄원했다. 바울은 황제와 로마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지려 했던 것이다.
  로마로 이송을 준비할 때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새로 부임한 총독을 맞기 위해 가이사랴로 왔다. 이 때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한 것이 26:1-23이다. 이런 만남을 통해 총독과 왕은 바울이 석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합의했다. 그러나 가이사에게 상소하기 위해 바울은 자기의 길을 가려했다. 바울이 풀려날 수 있었음에도 로마로 가려한 이유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었다.(롬 1:15)

 

2. 두 번째 이야기 - 바울의 로마 호송(27:1-28:31)

  1) 가이사랴 출항과 항해(27:1-28:10)
   가이사랴에서는 로마로 직행하는 배가 없었다. 그래서 아시아 연안의 여러 항구로 가는 배를 탔다. 이 때 율리오라는 백부장이 바울과 다른 죄수 몇 명을 호송했다.
  가이사랴를 출항해서 해안선을 따라 시돈에 도착했다. 거기서 바울은 상륙하여 친구들의 영접을 받았다. 다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을 끼고 길리기아 앞 바다를 지나 루기아의 무라에 도착했다. 이곳은 곡물을 무역하는 중심지로서 피난 항으로도 이름난 도시였다. 여기서 백부장은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교섭하여 바울의 일행을 태우고 출항했다. 강한 바람을 맞으며 이 배는 가까스로 그레데 섬의 미항에 닿았다. 이곳도 월동할 만한 좋은 항구는 못되고 그 가까이에 이용할 도시도 없었다. 바울은 미항에서 월동하기를 권했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안전한 항구인 뵈닉스로 출항했다.
  처음에는 남풍으로 순조로웠으나 얼마 안가 유라굴로라를 광풍이 불어와 큰 위험에 빠졌다. 그래서 배는 폭풍에 휩쓸려 바람에 날려 여러 날을 표류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졌다. 이 때 바울은 저들에게 희망을 말했다.(27:22-23)
  바울이 탄 배는 14일 동안 표류하다 파선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널조각 같은 것을 잡고 육지로 올랐다. 몰타섬이다. 일행은 의외의 환영을 받았다. 바울은 마른 풀 속에 들어있던 뱀에게 물렸으나 무사했다.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고 바울에게 경의를 표했다. 여기서 바울은 추장의 아버지의 열병도 고쳐주었고 다른 병자들도 고쳤다. 이로써 바울은 융숭하게 대접을 받았고 일행은 떠날 때 필요한 것을 충분하게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2) 로마에서의 바울(28:11-31)
  몰타에서 3개월을 지난 후 바울 일행은 알렉산드리아의 곡물선을 타고 항해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무사하게 시라큐스에 도착했다. 여기서 3일을 체류한 후 레기움을 거쳐 루마의 항구인 보디올에 도착했다. 그 때 바울의 마음은 몹시 두근거렸다. 그곳 신자들은 바울 일행을 초청하고 또한 예배도 함께 드렸다. 보디울을 떠나 로마로 올라갔는데 로마 교회의 대표들이 바울을 환영하며 압비오와 삼관까지 와서 맞아주었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교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큰 용기를 얻었다.
  바울은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다. 백부장은 바울의 신병을 로마 수비대장에게 인계했다. 그러나 관계 서류 모두 해난으로 없어졌기 때문에 바울은 투옥되지 않고 셋집에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다만 호위병 하나가 배치되었을 뿐이다.
  바울을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만났다. 그가 로마에 온 이유를 말하고 예수가 메시야임을 전했다. 몇 사람은 믿었으나 다수는 믿지 않았다. 저들은 자기들에게 온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 후 바울은 2년간 재판을 기다리면서 연금생활을 했다. 이것이 사도행전 기록의 전부이다.
  그 후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바울은 무죄로 석방되어 스페인으로 가서 전도했고 거기서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악명 높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결국 사형 판결을 받고 네로 황제 박해 때 순교했다고 한다. 그가 처형된 장소는 로마 교외에 있는 작은 소나무 숲인데 오늘날 트레 폰타네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서있다. 그의 목은 세 번 튕겨 올랐는데 이상하게도 그 장소에서 세 개의 샘이 솟아났다고 한다. 후일 그곳에 폰타네(세 샘) 교회를 세워 그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다.

 

III. 신학적 의미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선교의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의 결과 복음은 유다와 사마리아 지경을 넘어 땅 끝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울은 자심의 삶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중 에베소에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비장한 심정으로 이렇게 설교했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그곳에서는 “투옥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행 20:23)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예루살렘 여행을 떠나시며 제자들에게 “장로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과 같다.(마 16:21)
  이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한 그리스도 모방자(imitator)였다. 특히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총독에게 심문 받게 되는 과정에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석방되지 못한 채 수난 받는 모습 등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 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꿈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롬 6:5) 그러했기에 그는 유대고 지도자들이나 로마 정권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과 양심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선교의 사명에 충성하려 노력했다. 이것은 어떻게든 로마행을 성취시키려는 의지에서도 확인된다. 지역적 정치범으로 팔레스틴에서 처형당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재판을 로마 법정에 까지 확대시킴으로 로마행이 가능케 되었다. 그의 로마 입성은 복음의 세계 정복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