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도행전 강해

[스크랩]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다(행 17:16~23)

에반젤(복음) 2019. 10. 4. 21:40




* 오늘의 말씀 :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다(사도행전 17:16~23)

 

* 본문요약

 

 바울은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해합니다. 그는 날마다 회당과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변론합니다. 그러자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과 변론하다가 그를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알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찬 양 : 253(521) 구원으로 인도하는

           48(32) 만유의 주재

 

 

* 본문해설

 

1. 회당과 광장에서의 전도(16~18)

 

16)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도시가 온통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17)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하였고,

또 저자(광장, 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하였습니다.

18) 그리고 어떤 에비구레오(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논쟁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몇 사람이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외국의 다른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과 그의 부활에 대하여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아테네(16) :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이교도의 사원과 우상의 조각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3만 개). 바울은 이를 예술이 아닌 우상으로 보고 격분합니다.


- 에피쿠로스(18) :

쾌락을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이 가장 중요합니다.


- 스토아(18) :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자족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사람들. 이들은 인간의 행복은 본능을 벗어날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 아레오바고 광장에 선 바울(19~23)

 

19) 그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20) 당신이 우리 귀에 생소한 것을 소개하고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그 설명이나 좀 들어봅시다.”

21) 모든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에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아덴(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니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23) 내가 두루 다니면서 여러분이 섬기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 아레오바고 광장(19) :

아레오바고 광장은 공적인 재판소이면서 공적인 집회소입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 법정이라고도 부르고, 마르스 언덕(Mars’Hill)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레오바고 광장(마르스 언덕)에서 설교하는 바울

 

* 묵상 point

 

1. 아테네의 우상들을 보고 격분하는 바울

 

1) 아테네의 우상들을 보고 격분하는 바울(16)

 

 아테네에 먼저 온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까지 아테네 시를 두루 다니다가 도시 전체에 우상의 형상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크게 격분합니다. 아테네 시에 그리이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각종 신들의 형상이 약 3만 개가 있었다고 하니, 복음 증거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바울의 눈에는 온통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우상단지들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그러나 바울은 우상을 파괴하는 대신 복음을 전하기로 합니다(17)

 

 그러나 바울은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처럼 그 우상들을 부수지는 않았습니다. 그 도시의 사람들이 온통 우상을 섬기고 있는 상황에서 우상 몇 개 부수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을 변화시키면 자연스럽게 우상을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서 2년간 말씀을 가르쳤을 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에 있는 우상들을 꺼내어 파괴시켰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을 파괴시키는 대신에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바울은 우선 그가 하던 방법대로 안식일에는 회당에 나가 유대인과 경건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른 날에는 광장에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묵상 :

 

 우리는 우상을 부는 일과 같은 일로 타종교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통해 다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마음을 열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에게 다가온 두 철학자들

 

바울에게 당시 가장 유명했던 두 학파의 철학자들이 다가옵니다.

바울에게 다가온 철학자들의 두 학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에피쿠로스 학파(18)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쾌락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쾌락이란 모든 육체적 정신적 불안에서 해방된 상태라고 주장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경험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만이 진리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도 처음에는 전원생활을 하며 자연을 바라보며 육체의 본능에서 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는 데서 오는 소박한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도 초기에는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여 보다 윤리적인 모습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점점 변하더니 바울 시대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쾌락만 추구하는 자들이 퇴패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에는 죽음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죽었을 때에는 이미 우리는 죽음에서 떠나 있다고 말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 확실한 것은 오직 지금 뿐이라면서, 지금 이 시간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자고 말합니다.

 

2) 스토아 학파(18)

 

 스토아 학파는 모든 물질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 그 자체가 신이고,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범신론). 그러므로 특정한 신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능을 억제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될 때 자연에 있는 그 신과 하나가 되고, 바로 거기에서 인간은 참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자족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여깁니다.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오직 사람이 자연 속에서 경험하여 알게 된 지식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사람이 경험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스토아 학파는 사람의 죽음 이후의 세계도 심판도 모두 부정합니다.

 

3) 두 학파의 공통점

 

 사람의 행복이나 즐거움을 말할 때에는 두 학파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하여 쾌락을 느낄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반면에, 스토아는 욕망을 완전히 눌러서 자연과 하나가 된 상태가 될 때 행복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세와 심판을 부정하는 것은 두 학파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나 내세를 생각하면 지금 쾌락을 즐길 수 없으니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스토아는 죽음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따지지 않기로 하는 것입니다.

 

묵상 :

 

오늘 오늘의 즐거움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허망함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쾌락입니다. 또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고 해서 죽음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오직 이 땅의 즐거움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인생의 마지막이 오는 날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엄청난 파멸을 가져오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래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스토아 학파처럼 죽음 이후의 것을 오늘날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니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죽음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죽음이 오기 전에 준비되어야 합니다. 일단 죽고 나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것이 경험되지 않은 것이니 주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그 날을 미리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아레오바고 광장에서의 바울의 설교 : 알지 못하는 신을 알게 하겠다

 

1) 아레오바고 광장에서의 바울의 설교(19~23)

 

 바울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음을 전하니, 두 학파의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잡고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레오바고 광장은 소크라테스도 연설을 했던 광장입니다. 바울은 그 유서 깊은 아테네의 유명한 광장에 올라서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바울은 먼저 그가 아테네를 두루 다니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적힌 제단을 본 일이 있다고 말한 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신을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2)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사실 우리들 모두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신 주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할까봐 부활하신 몸을 친히 제자들에게 보이셔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음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묵상 :

 

우리에게 오셔서 복음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힘과 능력이 될 수 있도록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4. 신앙의 두 주제 : 기다림과 반복

 

1) 항상 새로운 것을 말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내는 아테네 사람들(21)

 

 아테네 시민들의 특징은 항상 새로운 것만 들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광장에 나와서 무슨 새로운 것이 없는지를 찾는 것에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21). 그러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 복음의 말씀이 그들이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으니 관심을 갖고 들어 보았지만, 듣는 순간 이미 이전 것이 되었으니 그들은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자들이 됩니다.

 

2) 계속 새로운 것만 찾는 현대인들

 

 늘날 우리 시대가 아테네 시민들과 같은 모습이 아닙니까? 스마트폰이 날마다 새로운 것이 나옵니다. 그 스마트폰에서 항상 새로운 노래와 새로운 이야기 거리들이 나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옛 것은 낡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3) 항상 새로운 찬양곡만 찾는 젊은 그리스도인들

 

 문제는 이런 것이 신앙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항상 새로운 찬양만을 찾습니다. 전부터 부르던 것은 진부하다는 것입니다. 말씀도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전부터 듣던 것은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언제나 듣던 것이지만 듣고 또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까지 진부한 말씀 취급한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놓고 무슨 새로운 것을 찾겠다는 것입니까?

 

신앙의 중요한 두 주제 : 기다림과 반복

 

 신앙에서 중요한 두 주제는 기다림과 반복입니다. 우리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기다리면서 주께서 명하신 일들을 날마다, 혹은 매 주일 반복합니다. 예배를 반복하고, 기도와 말씀 묵상을 반복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일들을 반복합니다. 우리를 구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말씀, 이미 우리가 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들어야 할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매일 반복해서 밥을 먹듯이, 말씀도 반복해서 듣고 묵상합니다.

과거에 들었던 말씀이라고 진부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듣고 또 듣고 주님 오실 때까지 이렇게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 기도제목

 

1.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말씀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3. 주님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