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아가서 강해

5:2-8 (문을두드리는 은혜)

에반젤(복음) 2019. 9. 22. 07:47




5장2-8(문을 두드리는 은혜)

성경본문: 5:2-8

2.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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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처| 이삼규목사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예배, 좋은 찬양, 좋은 설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다고 훌륭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좋은 예배, 좋은 찬양, 좋은 설교’ 때문에 여기에 모이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잘못 오신 것입니다. 잘못된 장소에 오신 것입니다. 날을 잘못 잡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찾아 이곳에 오셨다면 뜨거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성령님은 교회의 문 앞에서 서서 다윗과 같이 성령의 강한 임재를 위해 장소를 예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배자들이 손을 높이 들고 천국 문을 열기를 소망하는 장소, 그래서 주님의 영광이 임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찾고 계십니다.

 

성경은 언제나 주님을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분으로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다.

 

아 5:2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 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 구나”

 

 

잠겨 진 문

어찌하여 집에 문이 잠겨 져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열쇠를 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주님의 임재에 대한 열쇠가 우리 손에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문을 열고 지옥문을 닫을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열쇠는 우리 손에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신부는 빨리 문을 열어 주어야 하는데 신랑을 문밖에 세워 놓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을 봅니다.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1) ‘문을 두드리며’(2절) ―

애정의 간절한 표현입니다.

 

2) ‘나의 누이, 사랑, 비둘기, 완전한 자야’(2절) ―

"누이"는 이성과 지위에 있어서 자기와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함이고(막3:35), "사랑"은 '친구'를 의미하나니, 친밀히 교제할 수 있는 상대자임을 말하고(요15:4-5), "비둘기"는 순결한 자를 말함이고, "완전한 자"는 변심하거나 불순한 일이 없는 완전무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3) ‘머리에 밤이슬이 가득하다고’(2절) ―

지금 신랑이 문밖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이슬이 밤에 많이 내려 야간 여행자에게는 의복을 다 적시게 된다고 합니다.

삿 6: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시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삼하 17:12 “우리가 그 만날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두지 아니할 것이요.”

 

신랑은 신부를 애모하여 찾아가느라고 머리털에 밤이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신부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이 여인은 반쯤 잠들어 있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음성도 알고 그가 두드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그 마음속에는 그 문을 열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벗은 옷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런 옷을 다시 입는다는 것이 번거롭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이라고 말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우리와는 기후가 다릅니다. 항상 덥기 때문에 흔히 맨발로 다니다가 집에 들어갈 때와 특히 침소에 나아갈 때는 발을 씻는 풍습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나 열대 지방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거의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발을 씻은 것 보니 모든 일을 끝내고 쉬러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신부였던 술람미 여인의 태도에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직분과 책임과 예의’ 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좀 편안히 쉬고자 하다가 주님을 만나야 할 때 만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더 나아가 세상에서 주님의 사업에 더 헌신할 마음은 없고 밤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 평안히 지내겠다는 무사안일주의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문을 열고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신부들인 우리 교회가 너무나 안일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그토록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며 노크를 하건만 교회가 귀찮기 때문에 문 열기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혹시 냉랭하여 주님께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영적인 모습니다. 마치 다윗의 아내 미갈 처럼 열매를 맺고 있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슬픈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까?

 

문제는 미갈의 마음이 다윗을 향하여 닫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밀함도 기쁨도 열매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왜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만남을 위한 예배가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왕궁에서 왕을 모시지 않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노크를 하셔도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하며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아니요,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은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편안히 누워있는 거 모르시겠습니까? 좀 기다리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머리도 아프고 너무나 피곤합니다. 이미 신발도 벗었고 발도 씻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지금 꼭 문을 열어야 합니까?”

 

 

노크소리가 멈출 때

아 5: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우리가 놀라는 때는 하나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가 아니라 문을 두드리던 노크 소리가 멈출 때입니다. 솔로몬의 게으른 신부는 마지못해서 일어나 문을 엽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던 신랑은 종적을 감추고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향기를 맡을 뿐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노크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노크 소리가 멈추는 즉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안하고 게으른 삶의 방식에 대해서 후회하고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

 

게으른 신부는 신랑이 다녀가 흔적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분이 계셨던 자리의 향기뿐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이 노크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십니다. 두려운 것은 우리가 문을 열지 않을 때, 통회하는 예배를 통해서 천국의 창들을 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 마음이 없다면 우리들에게 남은 것은 그분이 계셨던 자리와 향기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향기만 맡고서도 만족하시겠습니까? 마치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떠나간 후에 베개를 끓어 안고 그 사람의 채취를 맡으면 흐느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그분의 향기를 맡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분의 능력과 생명과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내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안락의 상아 침상에서 기쁘게 일어나 주님의 부드러운 노크 소리에 즉시 반응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노크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어느 순간에 그 노크 소리가 멈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찬양했습니다.

눅 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눅 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責望하소서 하거늘

눅 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로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이 더 이상 노크하지 않으시는 때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눅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내가 너를 방문한 때를/NKJV)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연인의 상처와 아픔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눅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그 문을 두드리는 은혜가 항상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 은혜가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계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는 부자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몇 겹의 문을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잣집 대문 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서울에도 세검정이나 효창동 같은 부자들이 사는 집에는 아무도 얼씬 할 수 없습니다. 육중한 철문이 가로 막혀 있고 담장은 철조망에 뾰족한 쇠창살로 막혀 있고, 집에는 무서운 개들이 여기 저기 지키고 있습니다.

 

요즘은 CCTV로 안에서 누가 왔는지 확인하고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부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함께 교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정신

우리 모두는 소경 바디메오의 정신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자비를 구할 때 무리들의 비난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맹목적으로 믿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도 솔직히 모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곁에 있는 사람이 제게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알려주면 주님이 그냥 지나가도록 잠잠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바디메오는 비록 앞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사람들이 메시아가 지나가신다는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소리쳤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절박한 심령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었습니다. “잠잠 하라”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8)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체면이나 영적인 품위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더욱 심히 소리 질렀기 때문에 주님의 발걸음이 멈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디메오의 정신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12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사람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인이었지만 그는 주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병도 낫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주님이 지상 생애 가운데 수없이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을 만난 사

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방문(visitation)을 성령님의 거주(habitation)로 바꾸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을 지나고 계십니다.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기도하오니 바디메오의 마음이 우리 안에 충만케 하옵소서. 오만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소경됨을 고백하며 목소리 높여 주님을 부르게 하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가 통회함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경배하며 통회하며 부르짖나이다.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 ”

 

여러분 배고픈 아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금 목사님이 설교하고 계시니까 내가 참아야지 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게 뭐라도 주니 않으면 난 죽고 말 것입니다. 젖 주세요.” 이렇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냥 우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소리 질렀다고 했는데 이 말은 얌전하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비명을 지르다, 큰 소리로 외치다, 날카롭게 소리치다, 고함치다, 간절히 탄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디메오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배고픈 젖먹이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나아갑니다. 저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대면을 기다립니다.”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바디메오는 먼지 날리는 길가에서 자신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아무도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라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절박한 믿음을 가졌고 주님은 그 믿음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그런 절박함과 갈급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은혜스럽게도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아름다운 교제에 들어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