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열왕기상,하 강해

왕하6장

에반젤(복음) 2019. 8. 19. 18:58



왕하 6:24-7:2

24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27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하니라
28 또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의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31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32 그 때에 엘리사가 그의 집에 앉아 있고 장로들이 그와 함께 앉아 있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33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7장
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북왕조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아람이 둘러싸서 공격이 엄중해서 성중이 주리게 되었습니다.
나귀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이요 비둘기배설물 4분의 1갑에 은 5세겔이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개역개정판)
얼마나 주렸는지 짐작이 가죠. 그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더합니다.

자기 아들을 삶아 먹었다 그런 표현까지 나오는 대단히 참혹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곤경에 대하여 이스라엘 왕의 태도가 대단히 괴이 합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26절을 보면 이스라엘 왕이 성위로 지나갈 때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이게 하나님 탓이다 나에게 뭐라 그러지 마라 이런 말을 하고, 30절에, 아이를 잡아먹은 그 소송에 대하여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위를 지나갈 때 백성이 본 즉 왕이 속살에 굵은 베을 입었더라,

그 참혹한 현실을 그가 공감하고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만, 책임을 이렇게 전가합니다.
31절,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위에 벌을 내실 지로다.


그러니까 `엘리사를 저주하는 것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고 이 모든 참혹한 현실은 하나님 탓입니다` 라는 그 분노와 저항을 명백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나중에 이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셔서 내일 이맘때가 되면 24시간내에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고, 좋은 스테이크 10인분에 200원 하고, 햄버거 같은 것들은 공짜로 먹게 됩니다` 라는 식의 얘기를 하자, 7장 2절에 보면, 그 때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나님이 하늘의 창을 열어도 하늘에 있는 것을 쏟아부어도 그렇게까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주려있는 것을 채우고 넘치게 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은 의미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있었다면 여태껏 무얼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라는 얘기까지 포함된 부정적인 답을 냅니다.
엘리사가 뭐라 그랬다고요?

'네 눈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먹지는 못한다' 실제로 적군이 물러가고 그 군량미랑 적군이 남겨 놓은 것을 서로 가질려고 백성들이 성문으로 뛰어 나갈 때, 밟혀서 죽고 맙니다.
이 일들은 열왕기서가 기록될 때, 그 최초의 독자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로된 백성들이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입니다.

경험을 한 세대로부터는 한참 떨어졌지만, 이 워낙 큰 사건아닙니까?
아이를 잡아먹을 만큼 굶주렸던 곤경과 그 곤경을 단번에 바꾸어 모든 물건이 넉넉해지는 그런 기적같은 것을 보았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우리 보통 얘기하는 '살수대첩''귀주대첩' '한산대첩' 하는 식으로, 후손들에게 전달된 내용이요, 다 알고 있는 내용 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실이죠.
참으로 무섭고 공포스럽고 참혹한 사실이었으며, 또 놀랍고 기이하고 정말 이해할 수없는 하나님의 반전이죠.
우리는 우리의 인생속에서도 바로 이런 현실을 만납니다.

우리가 세상속에 살면서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하며 삽니다.
이런 세상속에서 살아 남는다는게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겸손하고 양보하고는 살아남을 수없을 만큼 세상은 무섭습니다.
자기 아이를 잡아먹어야 될 만큼의 참혹한 요구를 하는 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아이를 키우는 것도 어렵습니다. 옳바로 아이가 클 수있는 환경은 없고, 무시무시한 환경만 있습니다.
교육도 사회 분위기도 질서도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는 것보다, 사람으로 하여금 못할 짓을 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와 혼란속에서 이 아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하루 종일 시켜야되는지 이해가 안가고, 그렇게 하루종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대학 졸업하고 대학원 보내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시켰는데도 왜 그렇게 하나도 안 훌륭해지는지, 그것도 참 기이한..., 그러나 뭐 한마디로 이건 아닙니다 이래야 됩니다 답할만큼 간단하지 않은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더욱 공포스럽습니다.
부정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타협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고 매일매일 정말 무섭도록 엄정하게 엄중하게 문을 두드립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야하고 하루를 살아야하고 피곤한 몸을 눕혀야합니다.
그러나 우린 여기서 이런 기록을 기록한 성경이 가지는 중요한 조금 깊은 답을 만납니다.
그 답이 뭐냐하면 우리가 살면서 오는 세상이 우리에게 펼쳐보이는 것이 현실이 전부가 다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9절에 찾아가 보겠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밧모라는 섬에 유배된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시작이고 나중이며, 처음이고 마지막이라,
나는 창조주요 심판자이며, 이 모든 세상과 역사를 시작한 이요, 그것을 마칠 완성할 자라,
그리고 나는 죽었다가 살아 난 자라 지금 살아있는 자라, 지금 역사하는 통치자니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까 본 사마리아성의 기근, 적군에 포위되어 참으로 실낱같은 생명을 연장해야되는 곤경한 처지에 있는 그 모습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은 우리의 현실이 그것보다 더 큰 현실이 그것보다 더 웅장하고 깊은 현실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 현실이 뭐냐, 하나님이 역사와 세계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지금 다스리고 있는 이 사실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며 펼쳐놓는 현실이 우리를 공포스럽게하며 당황하게하며 쩔쩔매게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펼쳐놓는 현실은, 우리를 위로하며 힘을 줍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인이다. 내가 너희에게 생명을 주고 영생을 주려 하노라. 그러기에 내가 죽었었노라.

내가 내 교회를 지키고 있노라. 금 촛대사이를 다니며 일곱 별을 그 오른손에 들고 그 입에서 좌우로 날쎈 검으로 말씀하시는 주께서,

'이 세상은 교회와 교회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인공 이니라. 목적이니라. 그것이 역사의 내용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이죠.
그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위협아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이 통치와 이 약속속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말도 안되게 큽니다.

우리는 이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에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가를 요약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각 나라 왕에게 편지를 하지않습니다.

교회와 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를 합니다.

나는 세상 나라를 역사를 이렇게 인도하려하고 내가 주인이며 내가 그 결국을 만들어 낼 심판자이니 너희는 내 말을 들어라 이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권세를 갖고 말씀하시는가, 계시록 2장 1절 이런 권세로 말씀하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입니다.
교회를 지키시는 교회안에 거하시는 이입니다. 교회는 뭐라고요? 이 세상 나라의 역사와 내용의 주인입니다.
세상의 나라들이 서고, 정권들이 서는 것은 하나님의 이 큰 일에 조역에 불과합니다.

그 주역은 교회입니다.
이 나라와 이 시대가 누구손에 있느냐하면 물론 하나님 손에 있고 그 하나님의 손길은 교회에 있습니다.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십니까? 이 나라의 현실을 걱정하십니까?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 손길로써 여러분의 인생과 현실을 하나님앞에 바치십시요.
여러분이 신자로써 약속의 사람으로 존재하십시요. 하나님이 이 나라와 이 시대와 역사를 지키실 것입니다.
2장 8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하십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뭐죠? 부활하신 이입니다.

죽음을 이기시는 이요, 죽은자를 살리시는 이가 말씀하시기를, 오늘 우리가 열왕기에서 본 본문이었죠.

합푼태 4분의 1갑에, 비둘기 배설물 4분의 1갑에 은 5세겔입니다.

그러나 이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 할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실수는 무엇이었죠? "여호와께서 잠잠하신데 난들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 왕의 시종은 뭐라고 말했죠?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낸들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실제로 하늘에 창을 내고 어떻게 했죠?
좋은 고기들을 쏟아부어서 깔려 죽었죠. 고기를 보기는 하고 먹지는 못하는 결과를 보았습니다.

죽었다가 살아 나신이가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현실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안다면, 여러분을 걱정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3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그 분만이 역사의 진로를 정하십니다.
참다운 역사의 목표를 정하시고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에게 주어졌느냐?
8절에 있는 바와같이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주어졌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이게 성도들의 현실입니다.
성도된 신자, 신앙의 특권이죠. 책임이죠. 기적이죠.

이걸 놓고 산다면 우리는 신앙인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신앙을 어디다 쓸 것입니까? 3장 14절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그는 창조자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이 명령을 내리십니다.
뭐에 관심을 갖고 있냐 보시겠습니까? 2장 13절 '네가 어디에 사는지 내가 안다..' 19절 '내가 제 사업과 사랑과 ?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

여기서 사업은 봉사를 의미합니다. 내가 네 봉사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 ..
우리의 관심은 뭐죠? 고통과 형통과 자랑이죠. 우리의 관심은,, 그렇죠?

주께서는 그기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정치과 경제와 사회와 교육에 관심이 있지않고 신앙생활에 하는 가에만 전혀 관심이 있습니다.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하셨으니까 네가 가진 것은 면류관을 받을 일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전혀 신앙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신자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매일이라는 일상을, 오늘이라는 하루를 신앙인으로 살 것이냐 말 것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닥친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2차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신자의 인생은 신앙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 것이냐 하나님없이 살 것이냐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면하기위하여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여 편하기 위하여 세상의 위협과 세상이 요구하는 시험에 타협할 것이냐, 믿음으로 버틸 것이냐 인데, 여기서 믿음으로 버틴다는 것은 외면하고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큰소리를 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은 신자에게도 동일한 권세를 가지고 옵니다.

고통은 견디기 어렵고 위기는 해결하지않고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얘기하는 것은 고통과 위기를 면하라는 것이 답이냐? 이렇게 묻습니다.
고통과 위기가 어떤 의미에서 신앙과 연결되느냐 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실패와 절망으로 하나님을 찾아 간다면 그 실패와 절망은 결코 불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넉넉하고 승리해서 하나님을 잊는다면, 찾아갈 필요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성공이 아닙니다.

이 얘기를 하자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이상하게 이 현실속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속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시대의 풍조와 흐름과 그리고 우리가 사는 나라와 그 사회속에서의 요구들과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이나라 이땅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향과 분리될 수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신앙을 주거나 신앙을 빼앗지 않습니다. 우리를 신앙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시험이 될 수있죠.
우리가 그 문제들 고통들을 위기들을 고난들을 생각하여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앞에 그 문제들을 끌고 간다면, 우리를 넘어뜨릴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마져도 실패마져도 우리가 해결하지못하고 지고있는 버거운 어떤 현실적인 짐들일지라도 그것이 나를 하나님을 찾아가게한다면 그건 다 복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찾아 갈 필요가 없는 조건속에 있어서 아무 생각을 하지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현실입니다.
3장 18절에는 이런 권면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건 왜 나오죠?
앞에 있는 17절 때문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우리는 성경의 이 지적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분석은 고통을 기준하고 세상적 자존심에 근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랑할 것과 여유있을 것 이외엔 우리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더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신앙인인가? 매일매일 시작되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가?
그 고통과 실패와 생각해야되는 모든 걱정들을 끌어안고 하나님을 불러 현실을 하나님앞에 바치고 있는가? 이렇게 물어봐야 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쉽게 세상적인 현실의 어려움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떠넘길 수있다고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현실적인 어려움이 다 해결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우린 그걸 끌어안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써 우리의 현실을 끌어안으셔야 됩니다. 그러면 그 죽음이 우리에게 부활 생명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이 우리를 불로 연단하여 금이 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고 약속하는 것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신자의 신앙현실을 놓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우리의 신앙고백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 되고 맙니다.
현실에 우리의 신앙을 도입하고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앞에 끌고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믿음으로 내가 사는 현실을 통치하겠끔 맡길 수 없다면, 우리는 역사를 중지하고, 하루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건너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하지않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을 하나님이 내편을 드시느냐 아니냐, 내 기도에 응답하시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그 능력과 신실하심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잘못 느끼고 있다는 사실일 뿐입니다.

하나님앞에 여러분의 매일을 바치십시요.
만일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공허해지겠죠.
그것은 금욕주의로 가거나 도덕주의로 가거나 종교적 미덕에 불과해 집니다.
구호가 되고 명분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한 생명을 현실에서 살아움직이게 하지 못합니다.
이 싸움을 하십시요. 이 싸움 쉽지 않습니다.

이 싸움을 하십시요. 다른 사람이 한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요.
여러분 스스로가 이 싸움을 싸우십시요. 매일의 싸움이 하나님을 모신 기적의 인생이 되게 하십시요.
그리하여 하나님이 지금 세계와 역사에 주인인 것을 보십시요! 누리십시요!
계시록 2장 10절은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

이 권면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고난을 약속받고 있습니다!
환란을 약속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면류관을 얻는 유일한 과정입니다.
여러분의 신자된 인생과 현실을 믿음으로 깨우치시는 오늘의 말씀이고,
그 믿음으로 살아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분의 인생에 쓰가는 귀한 인생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와 세상에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역사를 움직이며 우리야말로 역사의 주인입니다. 세상이 주는 미혹과 시험과 위협에 지지말게 하옵소서.

저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유의 주시며, 시작이요 나중이시며, 창조주시요 심판주시며, 부활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와 함께 기적을 이루시는 우리의 오늘 아버지십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바치고 더욱 중요하게 매일매일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믿음의 순종과 기적의 하루를 또한 주시는 우리하나님임을 믿게하시고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중에 아무도 세상을 바꿔 하나님을 확인하려하지말고 나 자신을 드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확인하는 인생을 사는 복된 오늘의 말씀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