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한복음 강해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 요한복음 20장 설교

에반젤(복음) 2019. 8. 17. 15:27



2006년 부활주일 필그림교회 설교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

[본문] 20:11-18

갈릴리 호수 북쪽 연안에 가버나움이란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습니다만 예수님 당시에는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바로 그 왼쪽에 동네가 하나 있는데 막달라입니다. 이 마을에는 옛날에 훈제공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이곳에서 훈제해서 예루살렘이나 먼 곳에 보내어 팔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동네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느 날 불행하게도 귀신이 들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일곱 귀신이 들렸습니다. 혼자서 히히닥거리며 웃다가, 밤이 되면 몰래 나가서 무덤가에서 놀고, 옷을 벗어 던지기도 하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동네 가버나움에 계시던 예수님이 오셔서 이 마리아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일곱 귀신이 다 물러나고 정신이 온전해졌습니다. 마리아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겼습니다.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리아는 예루살렘까지 따라왔습니다. 골고다 언덕에도 따라왔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그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장사 지낸 무덤에도 찾아 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었던 무덤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왜 울었을까요?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아서 울었습니다. 마리아가 한참 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천사들이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러자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13)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었어요. 이것을 보면, 마리아의 머릿속에는 오직 예수님의 시신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예수님의 모습만 들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된 예수님 밖에는 머릿속에 없었어요.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니기는 다녀도 늘 죽은 예수님만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신 예수님, 그리고는 끝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우울합니다. 마음이 무겁고 우울합니다. 영어로 센티멘탈(sentimental)하다, 멜랑콜리(melancholy)하다고 하는데, 이런 것은 사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생각이 늘 부정적입니다. 안 된다, 힘들다, 약하다, 상처받았다, 살기 힘들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닙니다. 이런 사람은, 말하자면, 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도울 수 없어. 현재 나의 삶과는 무관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죽은 예수님을 사랑했어요. 말하자면, 예수님의 시신을 사랑했습니다. 시신이 없다고 울었어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내 주라고 불렀어요.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나서 뒤로 돌이켜 보니 어떤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막 부활하셔서 무덤 밖으로 나가시다가 무덤 입구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도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다고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야간경비원인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밤이슬을 맞으면서 동산을 지키는 경비원인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15) 이것은 예수님을 시체 도둑으로 착각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의 머릿속에는 오직 예수님의 시신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머릿속에는 죽은 예수님, 불의의 세력에 희생된 예수님, 그래서 나에게 큰 슬픔을 안겨다 준 예수님, 나에게 상처를 준 예수님, 그런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야!

이런 마리아에 대해 예수님은 마리아야!”라고 불렀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을 불렀어요. 아마도 마리아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는데, 시체 도둑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고 부르다니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참 이상한 일입니다.

게다가 특별한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냥 마리아야!”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로는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원어(헬라어)마리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Maria)”가 아니라 마리암(Mariam)”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끝에 “m”이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뭐가 다른 것일까요?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뿌리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미리암입니다. 모세의 누나 이름이지요(15:20). 그런데 히브리어로 미리암이라고 하는 이름이 헬라어로 번역될 때 칠십인역에서는 마리암으로 옮겨졌고, 신약성경에서는 대개 마리아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서양 언어들에서는 대개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메리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것은 또한 강아지를 부르는 이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미리암또는 마리암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이 집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원래 이름, 집에서 부르는 이름은 참 친밀하고 좋습니다. 발음도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를 때 마리아!”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미리암!”이라고 부르셨어요. 이것은 너무나 친근한 이름, 갈릴리 지역에서 가족들끼리,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이름, 바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를 때 즐겨 부르시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자기를 다정하게 부르시던 예수님의 그 음성,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즉각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순간적인 변화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는 남자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에 마음이 끌린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남자는 여자의 외모, 색에 많이 끌립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여자를 부를 때, 특히 요망한 여자를 부를 때 색()이라고 불렀습니다. “색에 끌린다”, “색에 빠진다”, “색을 밝힌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 하얀 피부 색깔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예쁘게 화장하고 색칠을 하고 나가면 남자가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다릅니다. 여자는 남자의 외모보다 음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의 관심을 끌고 호감을 사려면, 화장하는 것보다 부드러운 음성, 따뜻한 말로 위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랍오니여!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본 것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가 아닙니다. 모습을 보고서는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왠 야간경비원이 여기 서 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것도 친밀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미리암!”이라고 부르실 때, 마리아의 영적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단지 알아본 정도가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러지면서 랍오니여!”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히브리말로 미리암!”이라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니, 마리아도 본능적으로 히브리말로 랍오니!”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랍오니란 말은 선생님이란 뜻입니다(16).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서기관을 부를 때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인데, 요즈음 같으면 목사에 해당되는 교역자였습니다. “랍비(Rabbi)”나의 큰 자라는 뜻으로 서기관에 대한 존칭이었습니다. 그런데 랍오니(Rabbouni)”는 랍비들 중에서도 위대한 랍비들 몇몇 분에게만 붙이는 호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대한 랍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관계의 회복

미리암!”랍오니!”, 이 짧은 두 마디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리암!”, 이 말은 마리아의 눈을 열어서 예수님을 깨닫게 하고 고백하게 한 말입니다. “랍오니!”, 이 말은 다시금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미리암!”랍오니!”, 이 두 마디 말은 무대를 예루살렘의 빈 무덤에서 갈릴리 바닷가로 옮기는 역할을 합니다. 일곱 귀신 들린 마리아를 고쳐주신 예수님과, 그 후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기던 마리아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을 넘어서서 사랑이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현재 진행형의 사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과거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사랑하였노라”, “내가 그 때 예수님을 무던히도 사랑하였었노라”, 이렇게 과거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은 과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현재 진행형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는 예수님을 잘 믿었었노라”, “예수님을 몹시도 사랑하였었노라”, “열심히 주님을 믿었었노라”, 이런 과거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은 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과 여러분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과거의 지나간 사랑을 노래하는 관계입니까? 그래서 지금은 탄식하며 울고 있는 그런 관계입니까?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와 같은 그런 모습입니까? 아니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붙들고 랍오니여!”라고 고백하는 마리아의 모습입니까? 과거에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현재도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는 현재 진행형의 사랑입니까?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기뻐하며 돌아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하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미리암!”이라고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찾아오셔서 여러분 개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o o !” 이렇게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친숙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우리 모두 랍오니!”,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이라고 부르면서, 다시금 현재 진행형의 사랑을 고백하고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과거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골고다 언덕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그 때 마리아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사랑스런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o o!”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 모두 나의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힘차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를 위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여러분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주의 종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06년 필그림교회 부활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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