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는 그를 ‘억세게 운 좋은 사람’으로 여깁니다만,
혹자는 나사로를 ‘억세게 운 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한 번 죽는 것이.. 자다가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죽는 사람을 제외하고,
사람에게는 큰 고통이라고 합니다. 병고를 치르든지, 통증가운데 죽든지..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어렵고 힘들게 죽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그런 죽음을 두 번이나 치러야 했으니..
‘억세게 운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나사로 선생님을 만나면 한 번 물어봐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두 번 죽은 것이, 스스로 행운의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불운의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요, 그냥 서론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흘리셨던 눈물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과연 주님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요?
영화 제목으로서 ‘레 미제라블’(Les Misrables)은 원래 추방자, 패배자, 버림 받은 자를 뜻하며,
원작에서는 불량자의 화신으로 나오는 여관집 주인 테나르디에와 그의 가족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비참한 인간들입니다.
장발장, 판틴(매춘부), 코제트(딸), 에포닌(마리우스를 짝사랑) 등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비참한 인물들을 대표합니다.
자신을 정의의 화신으로 자처하는 자베르도 그의 자의적이고 폐쇄적인 정의감 때문에
결국 자살로 인생을 마치는.. 레 미제라블(불쌍한 인간)입니다.
가장 반반한 인물인 마리우스(부잣집 혁명가)조차도
어린 시절은 부모 없이, 청년 시절은 그를 키워준 할아버지를 떠나서, 홀로 평생을 불화 가운데 삽니다.
사실 우리 인생 모두는, 예외 없이 다 레 미제라블(불쌍한 인간)인 것입니다. (이 단락 펀글)
저자 빅토르 위고는 ‘이런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이런 '레 미제라블'한 인생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1. 인생들의 무지와 불신과 원망에 대한... 비통의 눈물입니다 (33절)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요11:33).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여기서 ‘비통히 여기시고’ 라는 말은 ‘슬퍼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책망하다’, ‘분노하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눈물은,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과 원망에 대한 비통의 눈물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으며
감히 예수님을 원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 라며
나사로를 깨우러 오신 주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불신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구동성으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며 예수님께 원망까지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의 무지와 불신과 원망에 대해
비통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의 성 유대로 다시 가시기도 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그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기도 합니다.
그 결과 무지와 불신과 원망의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알고 믿으며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2. 인생의 한계와 불행과 절망에 대한... 연민의 눈물입니다.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5
예수님은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면서 그들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있는 곳은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은 굴로 되어 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벌써 냄새가 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람들의 한계와 불행과 절망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한계와 불행과 절망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고 불행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한 번 죽은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그 한계와 불행과 절망의 무덤에서 나사로를 깨어나게 하시고,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의 한계와 불행과 절망에 대해
연민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래서 썩어 냄새가 나는 무덤으로 가시기도 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그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기도 합니다.
그 결과 한계와 불행과 절망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잠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그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풀어 놓아 다니게도 하시는 줄 믿습니다.
▲로마서 12:15절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눈물이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셨던 주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셨던 주님이십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함께 울어야 친구가 된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한계와 불행과 절망을 보셨을 때, 예수님은 연민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우리 친구’ 라고 하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을 눈물짓게 하는 인간의 불가항력적인 한계와 불행과 절망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민의 눈물 그 이상의 사랑과 능력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꽉 가로막혀 있는 돌을 옮겨 놓게 하시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십니다.
그래서 초상집이 변하여 잔치집이 되게 하시고
믿음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친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도 친구를 위하여 연민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인간의 한계와 불행과 절망을 넘어 서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감사하며
찬송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3. 죄인을 향한... 긍휼의 눈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사실 예수님 자신에 관한 예고편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슬픔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슬픔의 일이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사건에 대한 예고편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이런 사역을 통해서,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시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원망의 볼멘소리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골고다를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조롱하고 핍박하고 채찍으로 때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도 묵묵히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드디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우리를 향해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41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며
슬피 우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죄악은
마치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의 심판의 때만 되면
그 도성은 산산조각이 되고 마는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예수님은 패역한 도성을 부둥켜 안고 우셨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슬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똑같이 그 주님은 오늘도
패역한 저와 여러분으로 인하여, 이런 우리가 사는 도시를 바라보시며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죄인 된 나를 위해, 죄인 된 나를 인하여 흘리신 주님의 눈물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눈물의 사람’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눈물-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눈물-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로다
물론 성경에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때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죄인>을 향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주님의 몸에서 흘리는 피가 되었습니다.
그 눈물이 저와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그 피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서양 속담에 “눈물은 인생을 살리고 땀은 가난을 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나사로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살리신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인간의 무지와 불신과 원망에 대한 비통의 눈물이며,
인간의 한계와 불행과 절망에 대한 연민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죄인된 자기 백성을 향한 구원의 눈물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의 은총 안에서
무지와 불신과 원망을 떨쳐 버리고, 한계와 불행과 절망을 벗어 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도자가 되시되, 예수님을 본받아
눈물의 지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눈물이 빠진 권면은..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지도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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