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으로 이해 안 될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11:4
◑1. 내 상식으로 이해 안 되는 신앙생활
저는 목사로서 홈페이지 또는 이메일을 통해 많은 질문을 받는데,
그 중 어떤 질문들은, 인생의 깊은 고뇌와 아픔이 배여 있다.
그래서 선뜻 해답을 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이 많다.
이런 쉽게 풀 수 없는 인생 상담을 접하면서
‘어차피 인생이라는 것은 수수께끼와 같은, 풀 수 없는
질문을 갖고 사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종종 해 본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쉽게 이해되지 않는 질문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질문1. 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고통 이 찾아오는가?
베다니 마을에 사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유난히 아끼셨다.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긴 적이 있었다. 요 11:2
예수님도 본래부터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요 11:5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인생과 신앙의 수수께끼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성도였고(또는 그 성도의 가족이었고)
또한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신앙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그들이 만약 농땡이들이었다면 나사로의 죽음이 이해될 수도 있다.)
나사로가 병드니까,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 그 사실을 주님께 알렸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11:3
이 전갈이 풍기는 뉘앙스는,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우리 오빠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또는
‘주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우리 가정에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라는 식의 상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질문2. 왜 주님은, 성도의 고통을 방관 하시는가?
예수님을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도
쉽게 이해 안 되는데, 그보다 더 이해 안 되는 것은
그런 전갈을 듣고도 늑장대처하시는 주님의 태도는 더 이해 안 된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다. :6
우리 생각에는, 전갈을 받자마자 즉시 나사로를 찾아가서
기도를 해 주시는 등, 빨리 손을 쓰셔야 했었는데...
전갈을 보내는데 하루가 걸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틀을 더 머무셨다.
주님이 가시는데 또 하루가 걸렸다. 그러니까 전갈을 보낸 지 나흘 만에
비로소 주님이 베다니에 나타나신 것이다.
방관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7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 마중도 안 나가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고
마르다는 마중을 나갔지만, 주님을 뵙자마자 섭섭함을 토로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
▲예. 오늘 날 교회에 무척 충성하며 섬기시는 여 집사님의 남편이
하루는 갑자기 쓰러지셔서 응급실에 실려 가신 경황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급하게 전화로 목사님께 이 사실을 알려서, 오셔서 기도해 주시도록
부탁했는데, 목사님은 병원에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더 급하신 일이 있으신가 보다...’ 라며 억지로 좋게 생각하면서
여 집사님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기도하려고 교회에 왔다.
그런데 안 보이던 목사님이 거기서 태평스럽게 내기바둑을 두고 계셨다.
만약에 이런 일이 있다면, 이런 목회자가 지탄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보여주신 방관자적 태도가 바로 이랬다.
▲불행한 것은, 오늘 우리 삶에서도 이런 방관자적 예수님을 가끔 접한다.
없는 돈 쪼개서 십일조 드리고, 없는 시간 쪼개서 헌신 봉사했는데
세상에!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당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무슨 깊은 주님의 뜻이 있겠지...’ 하며 억지로 좋게 해석하려고 하면서
불철주야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매달리며 기도하는데
도대체 주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신지/아닌지...
무슨 바쁜 일 때문에 내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인지...
하나님이 내 문제를 방관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가끔씩 있다.
▲예수 잘 믿는 성도의 현실
아니, 가끔씩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빈번하게 있는 것 같다.
내가 기도하자마자 즉시 급하게 응답해 주시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있고
대부분 내 기도에 방관하시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가끔씩은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고
섭섭한 마음을 누를 수 없어서 하나님께 원망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즉각적으로 죄책감이 찾아온다. ‘내가 감히 주님께 대들다니..’
▲부활신앙으로 인해 흔들림이 없음
그러나 이런 섭섭한 상황 속에서도 마르다는 계속 주님을 신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압니다.” :22
대단한 믿음 아닌가? 이런 대담한 믿음이 어디서 기인하였을까 보니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24
즉, 마르다가 가진 부활신앙 때문이었다. 그 부활신앙이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이 복된 부활절 날 아침, 마르다가 가졌던 이 부활신앙을
여러분도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 드린다.
그래서 어떤 역경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자.
◑2. 오늘날 성도의 신앙의 2가지 결함
그러나 마르다의 이런 부활신앙 속에도 약간의 결함이 있었는데...
오늘날 믿음 좋다는 성도들 속에도 같은 결함이 발견되는데...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
-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아픔과 회한이 그녀의 대화에 묻어있다.
여동생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
즉 주님께 대한 책임전가 였다.
①책임전가
이렇게 두 자매는 모두 오빠의 죽음에 대한 책임전가를 예수님께 돌렸다.
과거에 경험했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사람,
과거에 겪었던 상처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날에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책임전가를!
그 때 우리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더라면...
그 때 우리 ‘남편’이 나를 조금 더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더라면...
그 때 ‘목사님’, ‘순장님’이 나를 위해 좀 더 기도해주시기만 했더라도...
이렇게 시선이 타인에 머무는 사람은 책임전가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②과거 족쇄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동시에 모두 과거 탓을 하고 있다.
과거의 족쇄에 잡힌 사람은 결코 화창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난다.
②과거에 + ①누구 때문에, 오늘 내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다...고 믿는다.
▲과거 상처에 대한 위로설교가 유행하는 현실
제가 설교할 때, 과거의 상처를 만져주는 ‘내적치유’를 주제로 하면
인터넷 클릭 횟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많은 사람이 메일을 보내온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복음의 능력을
과거에 받았던 상처를 만져주는 어떤 ‘달콤한 치유 능력’ 정도로만 여긴다.
찬양도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내게 없네’
이런 감미로운 찬양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여러분, 복음의 능력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가?
◑3. 복음의 현재 적 능력
▲현재 가 빠진 마르다의 신앙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3
예수님은, 문제의 뿌리를 현재 해결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사실 나사로가 다시 살면, 현재 슬픔, 과거 상처 모두 해결된다.
그러나 마르다의 반응은 미래 로 간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24
마르다의 믿음에는 현재가 빠져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크리스천 신앙에도 현재가 매우 약화되어있다.
▲과거 또는 미래로 회피하지 말라.
현재 내 마음을 변화시키고 현재 우리 삶에 능력을 주는 기능보다는
그저 과거에 상한 내 마음을 어르고 달래는
이런 나약하기 그지없는 복음으로 우리가 전락시키고 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은
과거 에 받은 상처에 연련해서 상처를 핥고 있는 것도 아니요,
껑충 뛰어넘어서 미래 에 받을 막연한 보상심리,
죽고 나면 문제가 해결되고, 죽고 나면 천국 갈 것이라는
지금 써먹지도 못하는 무슨 ‘약속어음’ 같은 식으로
현재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 말씀이
무슨 막연한 미래 에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오늘 이 설교의 뼈대와 중심을 제공한 책은
데이빗 씨맨즈 박사가 쓴 「탓」 이다. 지금은 절판되었다.
이 책이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시제로 표현할 때 예수님은 언제나 현재 시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당신을 묘사할 때, 항상 현재 시제로 표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현재 이시다.
주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하신 것처럼
현재 일하시는 예수를 우리가 만나게 되기를 원하신다.
▲ 복음은 현재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다.
기독교는 과거 의 아픔이나 터치해주는 감성적 종교, 나약하지 않다.
막연히 미래 에 일어날 불투명한 약속이나 공수표를 남발하지도 않는다.
복음이란, 오늘 이 순간
죽음의 권세, 어둠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능력 있는 복음이다.
▲어제 한 자매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녀의 남편은 40대 가량의 한참 잘 나가던 의사(혹은 변호사) 였다.
그런데 하루는 졸지에 병원에서 ‘간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았다.
작년 11월, 제가 처음 만났을 때, 남편 얼굴은 이미 새카맣게 되어 있었다.
제가 기도해 드렸고, 타 교회 교우이신지라 그 뒤 소식은 못 들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이메일이 왔다. 기도 받은 후 며칠 뒤 남편은 죽었단다.
그 후로 너무 마음이 상하고 찢겨서 항상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는
그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난 주 인터넷 설교를 듣고는
이제 남은 세월을, 자기 자녀와 힘을 내서 잘 살아 보겠다는 결의와 결단을
다짐하는 편지를 제게 보내온 것이다.
저는 이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 우리 삶 가운데 우리 눈물을 닦아주시며
현재 우리 삶 가운데 능력을 주시는 복음을 누리며 살자.
▲그 이메일을 읽을 때, 내 입술에서 찬양이 터져 나왔다.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2천년 전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성도들 심령 속에 찾아가셔서
길이 다스리는 능력이 되신다.
부활 신앙이란
과거의 상처에 연련해 하는 신앙이 아니라
막연한 미래의 불투명한 상급과 보상심리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눈물 흘리게 하는 이 현실 속에서
상한 마음이 회복되어지고, 주먹에 힘이 주어지고
앞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될 줄 믿는다.
◑4. 상식으로 이해 안 되는 질문에 대한 해답
서두에 저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찾아오느냐의 질문과
왜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성도의 고통을 방관하시는가? 질문이었다.
▲1. 예수님은 방관자가 아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예수님과 우리는 관점이 틀린다.
내 생각에는, 지금 안 도와주시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예수님 생각은, 그러니까 관점이 달랐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1:4
예수님이 전갈을 받고 이틀을 더 머무신 것은
결코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결코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서가 아니었다.
7~8절에, 예수님이 “유대(베다니가 있는 곳)로 가자” 하시니까
제자들이 “방금도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라며
이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주님은 주저하지 않고 실제로 베다니로 가셨다.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나사로를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 위협가운데서도 주저하지 않고 현장으로 나아가셨다.
주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함이라면
필요하시다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달려드신다는 사실을 믿자.
우리 눈으로 보기에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이 너무 커서
나는 곧 망할 것 같고, 지금 내가 절벽 끝에서 버티고 있는데
주님은 전혀 도와주시지 않고 방관자처럼 계신 것으로 느껴지더라도...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이 방관자처럼 꼼짝하지 않고 계신다면,
주님의 시각으로는, 그것이 절대 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2. 주님은 우리를 강하게 연단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일하신다.
일하시되 하나님의 정확한 때에 일 하신다.
아직 밥이 덜 익었는데, 자녀가 밥 달라고 아무리 졸라대도,
엄마는 꿋꿋이 밥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다.
아무리 우리생각에 조급하게 보채도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유약한 육신의 부모 같은 분이 아니시다.
필요하면 피도 눈물도 없이 우리를 다루신다.
필요하면 절벽에서 우리를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버리신다.
급기야 나는 그 때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 이렇게 우리를 고통가운데로 몰고 가시는가?
왜 그렇게 우리를 연단하시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비가 담겨있다.
▲3. 무덤의 돌은 내가 옮겨야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요 11:39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는 분이
그까짓 돌 하나 못 옮기시겠는가?
그런데, 돌은 너희들이 옮기라는 것이다.
이 한 마디 안에 오늘 말씀의 핵심이 다 담겨있다.
왜 주님은 우리를 극심한 고통가운데로 몰고 가신다고?
유약한 강남부모처럼 다독거리지 않고, 왜 고통 가운데 방치하신다고?
→우리를 강하게 연단하셔서, 이 놀라운 하나님 사역에
우리를 동역자로 쓰시기 원하신다. 약해가지고서는 못 쓴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이다. 우리는 죽은 나사로는 못 살린다.
그러나 우리는 돌은 옮겨 놓을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 신앙을 살고 있는가?
모든 기도의 내용이 “주님, 돌도 옮겨 주세요!” 하고 있다.
“자갈, 모래 한 개도 저는 옮길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 다 해 주세요!”
이렇게 약해빠진 우리들을, 오늘 하나님은 탄식하며 바라보신다.
▲마르다의 반응
예수께서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납니다.” :39
마르다는 확실한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 문제에 부딪혀서는 도리어 주님 사역을 방해하고 있다.
‘주여, 저 집사는 안 돼요. 안 바뀐다니까요...’
부활(변화)을 믿지 않는 마르다 같은 성도들,
마지막 날 부활 때 다시 살 줄 믿는다며, 부활 신앙은 입술로 고백하지만(:24)
이런 마르다의 나약함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현재 가 빠져버린 신앙생활 때문이다.
유약한 과거와 막연한 미래 보상심리는 있는데
현재의 능력은 없다.
▲결단의 말
주님, 제 시각을 바꾸겠습니다.
나의 상처와 문제에 방관자적 태도를 가지신 주님을
원망하고 살았는데,
하나님 저를 강하게 연단하며 키우기 원하신다면
제가 힘들더라도 애써 보겠습니다.
무덤의 돌문은 제가 옮기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나약한 크리스천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신구약 성경강해*** > - 요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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