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11장 1-45절 기도응답이 더딜 때

에반젤(복음) 2019. 8. 17. 14:50



기도응답이 더딜 때... 요11:1~45



▲퀴즈

제가 어떤 공주에 대해 말씀드리겠으니,

그 공주 이름이 무엇인지 한 번 맞춰 보시기 바란다.


옛날에 공주 한 명이 살았다. 신데렐라 얘기는 아니다.

그녀는 자기가 공주인줄 몰랐다.

그 공주는 매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자기 나라에 전쟁이 나서 적에게 침공을 당하고, 자기는 포로로 붙잡히고,

자기 가족의 유업은 모두 적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공주는 포로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종전 직후에 공주는 여전히 매우 가난한 상태였다.

공주는 그 후 몇 (십) 년 동안 아주 힘겹게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조금씩 그 공주와 가족들은 부유해져 갔다.


부가 늘어날수록, 공주도 예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 아름다워지고, 가업은 더욱 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자 주변 여러 나라의 왕자들이, 이제 점점 그 공주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공주 역시 왕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그 공주에게 말씀하신다.

“내 공주가 되어서, 나와 함께 가자!”


그런데 주변의 여러 왕자들도 동시에 이야기한다.

그들은 공주에게 안전을 보장하고, 자기를 따르면 존중받을 것을 약속했다.

그 중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왕자의 이름은 ‘맘몬’(物神)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공주에게 계속적으로,

그 맘몬을 따라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생명을 얻는 것 같지만, 결국 잃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면, 자기 생명을 잃는 것 같지만 얻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공주는 자기 과거의 전쟁과 모든 것이 무너진 비참한 상태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불과 얼마 전 과거의 일이었다.

그 공주는 지금 양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이 공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 바로 “코리아”이다.


이 이야기는 성경적이다.

구약에서 ‘나라’를 말할 때, 여성형 대명사 ‘그녀she'를 쓰고 있다. 겔16:46


앞으로 몇 년간 장래에 한국은 어느 쪽 길을 선택해서 갈 것인가?

더욱 예수님께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세상의 왕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갈 것인가?


이 대답은 이제 한국인 각자에게 달려있다.

제가 사는 유럽에서는, 많은 공주들이 맘몬 등 세상의 왕자들을 선택했다...



◑기도 응답이 더딜 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보내는 편지에, 나사로라는 이름 대신에

‘사랑하시는 자’라고 적었다.


나사로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떴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르다가 집을 소유했다. 마르다가 자기 집에 모셨다 눅10:38

예수님은 일찍 아버지를 여윈 나사로에게, ‘형’이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던 것이다.


두 자매는 나사로가 병들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나사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뭔가 하실 줄 확실히 믿었던 것이다.


▲편지에, 치유해주시도록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냥 ‘병들었다’고만 말했다.

왜 고쳐달라고 편지에 쓰지 않았을까?


예수님 사랑을 너무 확신했기 때문에,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만 들어도, 예수님이 뭔가를 즉시 행하실 것을

두 자매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하는 그 편지는,

정말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가득 찬 편지였다.



▲이 편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신가?

-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셨다.

답장도 없으시고, 움직이지도 않으셨고,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아무 설명도 없이 침묵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종종 이런 황당한 경험을 겪을 때가 있다.

주님을 너무나 확신하면서,

기도만 드리면 주님이 즉시 응답해 주실 것 같은 확신이 충만했는데,

정반대로, 주님이 아무 설명 없이, 우리 기도에 침묵하실 때가 꽤 있다.



▲예상보다 더딘 응답

그런데 나사로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두 자매의 참담한 심경...


두 자매는 속으로 상상했을 것이다.

이 편지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 한 나절,

예수님이 그 편지를 받으시고 아마 즉시 출발하실 거야..

그러면 여기까지 오시는데 걸리는 시간 한 나절,

다 합치면 얼마의 시간인데.., 그 때쯤이면 주님이 도착하실 거야!


그래서 계산하며 기다렸으나, 예수님은 예상된 시점에 오지 않으셨다.

나사로의 병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 계산을 새로 해 보았다.

만약 무슨 일 처리를 마치고 오실 경우, 내일 아침까지는 도착하실 거야!

그런데 주님은 그 때도 오시지 않았다.


그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저기서 멀리 오시는 분이 예수님이 아니신가?’ 해서.

(종종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응답은 내 예상시간보다 훨씬 더디다.)



▲실망한 마르다

그렇게 기다리는 와중에 그만 나사로가 죽어버렸다.

두 자매가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을까?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후에) 예수님이 마침내 도착하셨을 때,

두 자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잘 말해준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과 실망이 교차된 말이었다.


오늘날 이집트에서도, 사업상 대화를 나눌 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약 1시간 정도 주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그것이 전통 문화의 예절이다.

사람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자기 본론부터 꺼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무례한 언행이다. 그만큼 마르다가 충격과 실망을 받은 것이다.


마르다는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압니다.” 요11:22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 요11:23


마르다는 그 말씀이 별로 탐탁치 않았는지, 이렇게 이어갔다.

“예,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줄 믿습니다!” 요11:24

‘하지만 지금은 우리 나사로가 죽었고, 주님은 그 때 오시지 않았습니다!’

라는 뜻이 감춰져 있다.


그 때 예수님은 믿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주여 그러합니다. 믿나이다.”

정말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다.



▲실망한 마리아

그런 와중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왔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11:32

언니와 토씨하나 틀림없이 똑같이, 예수님께 원망과 책망이 섞인 말을 쏟아냈다.


왜 두 자매는 동일한 말(21절, 32절)을 똑같이 쏟아냈을까? 사전 공모한 것일까?

(제 생각인데) 나사로가 죽었을 때, 두 자매는 너무 실망해서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말을

서로 수차례 주고받으면서 계속 원망했다. 그래서 그 말이 입에 익숙해져 버렸다.


마리아는 딜레마에 빠졌다.

생전 알지 못하던 낯선 사람도 치료해 주시고, 이방인까지도 고쳐 주셨는데,

‘사랑한다던’ 오라비 나사로는 왜 죽게 내버려 두시는가? 요11:5



◑예수님이 더디게 지체하신 이유 - 그들을 신뢰했기 때문


▲예수님이 우신 이유

예수님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슬픔을 느끼셨다. 요11:33

“그(죽은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그 때 흐느껴 울기 시작하셨다. 요11:35


왜 여기서 예수님이 우셨을까?

(아래에 계속 설명 나옴)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유

주님은, 공생애 3년이 다 되어갈 무렵

이제 곧 체포되시고, 고문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장사되지만

사흘 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차츰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듣고 고개를 끄떡거렸지만, 제대로 실체를 이해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신 줄 믿었다.

메시아로서의 능력과 기적도 여러 차례 직접 목격했다.

그들 생각으로는, 능력의 메시아가 그렇게 잡히고 죽을 것이라곤 상상치 못했다.


이런 시점에, 예수님은 매우 근심하셨다.

제자들이 여전히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려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데,

그들이 십자가 사건 후에 부활을 경험 못 하면, 갈릴리로 뿔뿔이 다 도망칠 터인데,

그러면 성령의 불이 초대교회에 ‘다 함께 모인 자리에’ 임하실 수 없었다.


‘어떻게 제가 이들로 하여금 부활의 능력을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하시며 고민하시던 바로 그 때,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그래서 바로 그 기회를, 부활의 능력을 실제로 보여주는 기회로 삼기로 작정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나사로를 걱정하는 줄 아셨지만,

나흘이나 그 이상 동안 일부러 지체하신 것이다.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물론 그동안 예수님의 마음도 매우 불편하셨을 것이다.

나사로와 두 자매를 평소에 무척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당할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니, 지체하는 동안 예수님도 고생하셨던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고생과 슬픔은,

나사로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신 장면에서 잘 표출되어진다. (우신 이유①)



▲실망하신 예수님

어쩌면 예수님은, 두 자매가 예수님을 여전히 믿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비록 죽었지만 다시 살리시는 능력,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두 자매가 믿어주길 바라셨다.

그래서 앞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 요11:23


그런데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나 다시 살지, 현재 다시 살 것은 믿지 않았다.

마리아도 현재 다시 살 것을 믿지 않았다.

그 증거는, 마리아가 무덤 앞에서 목 놓아 펑펑 울고 있는 것이었다. 요11:33

그것도 늑장부리고 지체하신 예수님께 대한 원망과 아울러...


나사로 가족은 예수님과 정말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가친척보다도 가깝고, 어쩌면 12제자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함을 깨달으셨을 때,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우신 이유②)



▲신뢰하는 자에게... 더디게 응답하신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응답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해도 예수님이 신속히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있다. 응답이 더디고 지체된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러실 수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을 너무 사랑하고 신뢰하셨다.

또한 그들 가족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도 잘 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체하신 것이다.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응답을 더디 해도, 저들이 시험에 들지 않을 줄 아신 것이다.


혹시 여러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심으로,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거나, 응답을 지체하신 적을.. 경험하적이 있는가?


▲우리 기도를 보관하시는 하나님

저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은 그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고 믿는다.


종종 우리는, 자기가 기도하고도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모든 기도를 다 보관하고 계신다. He keeps them all!


시편에, 주님은 우리 눈물을 눈물 병에 담아 보관하신다는 구절이 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56:8


우리가 울면서 쏟아낸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위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천국에 눈물 병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고,

그 창고에 수많은 눈물 병이 있고, 그 병마다 성도들 각자의 이름이 적혀져 있고,

정말 하나님은 우리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서 보관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만큼 우리 눈물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우리 눈물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기도를 다 보관하실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기도를, 주님은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소망을 버리지 마시라!


▲1. 부활의 능력, 부활의 소망을 전하자!

이제 예수님은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신다.

마르다는 벌써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냄새가 난다고 만류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셨느냐?”


그리고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직접 선교사역에 종사하든지, 아니면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든지

선교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부활”을 굳게 믿어야 한다.


선교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 전하는 사역이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죽음을 정복한 복음’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그 모든 권세로 우리를 명하신다. “땅 끝까지 가라!”


단순히 우리가 ‘생명의 메시지, 생명의 말씀’을 가졌다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능력, 부활의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다.


▲2. 소망을 버리지 않는 것

우리 모두에게 마리아와 마르다와 같은 반응을 할 수 있다.

우리 기도가 예상한 시각에 응답되지 않을 때.., 기도를 파묻어버린다. 중단한다.

두 자매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소망과 기대까지 모두 다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큰 돌을 굴려서 막아버리고,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 좋은 어떤 사람도 병들었을 때, 계속 기도하다가 응답 안 되면,

기도를 중단해 버린다. 더 이상 그 문제로 기도하지 않는다.


가족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다가도,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다가도,

사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다가도,

자기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다가도,

몇 번 기도하다가, 응답 안 되면... 기도를 포기해 버린다. 더 이상 기도 안 한다.


미래를 위해서 걱정은 많이 하는데,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진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언에 이렇게 말한다.

소망이 더디 이뤄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병들게) 하나니.. 잠13:12


그래서 오늘날 마음에 병든 크리스천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이 계속 기도하고 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셨다.

죽은 나사로처럼, 여러분의 소망과 기도제목이 무덤에 굳게 갇혀 있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때가 되면, 주님이 정하신 목적을 이루는 계기가 될 때,

그 죽은 기도제목을 반드시 다시 부활시키실 것이다.

그 죽은 여러분의 소망을 반드시 다시 ‘일으켜 걸어 다니게’ 하실 것이다.


①소망은 영혼의 닻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이라고 하셨다. 히6:19

배를 정박시킬 때, 무거운 쇠로 된 닻을 바닥에 가라앉히면, 배가 정지된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리 저리 방황하는 이유는... 닻(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②소망은 우리 믿음의 바탕ground

‘믿음은 바라는 것에 실상’이라고 했다. 히11:1

'바라는 것 hope for' 은 곧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소망하는 것의 실상assurance'이다.


그러므로 소망을 잃어버린다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결과까지 된다.

소망을 되찾아야,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나가는 말

지금 우리가 소망을 잃고, 기도를 포기하고 중단한 분야가 어디인가?

기억하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신뢰하는 사람에게 기도응답을 지체하실 때가 있다.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 기도를 다 기억하시고, 우리 눈물을 그 병에 담으시고,

우리 탄식소리를 다 들으신다.

그러므로 결코 소망을 잃고 방황하지 마시라.


그 절망을 스스로 극복하고, 또한 절망 가운데 사는 세상을 향해

‘부활의 소망’을 갖고 나아가시라!


이 시간, 여러분이 소망을 잃어버린 분야가 어디인지 생각해 보시고,

다시 소망을 회복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린다.


<인터넷 설교 녹취, 07.08. 25. Dr. Bloomer, 열방대학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