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에 나타나는 비유들의 핵심은 무엇인가?
양용의(개혁신학교 신약학 교수)
서론
마태복음 전체 분량의 1/4 정도가 비유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르침 가운데 비유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였는가를 잘 보여 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 심오한 진리들을 딱딱한 논리적 철학적 진술들로 제시해 나가기보다는, 오히려 일반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농업, 상업, 어업, 목축업, 자연 현상, 가족 관계, 잔치, 재판, 등)에 빗대어 일상적 언어로 제시해 나가기를 선호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비유 이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50여개에 달하는 마태복음의 비유들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 나타나지만, 특히 13장, 21-22장, 24-25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위의 장들에 나타나는 비유들의 핵심적 메시지들을 그 문맥에 비추어 집중적으로 살펴 볼 것이며, 나머지 비유들은 몇 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간략히 살펴 보려 한다.
1. 13장: 하늘 나라의 비밀
13장에는 하늘 나라(天國)에 관한 8개의 비유들이 나타난다. 이 비유들은 매우 조직적인 구성을 통해 하늘 나라의 속성의 다양한 측면들을 아주 인상적으로 제시해 준다. 그 핵심적인 메시지들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1. 성장하는 하늘 나라
겨자씨(31-32절)와 누룩(33절) 그리고 아마도 씨뿌리는 자(1-9절, 18-23절)와 가라지(24-30절, 36-43절) 비유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비밀스런 시작과 승리적 결과의 절정 사이의 대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님 사역 당시 이는 실질적인 문제였다. 제자 집단 밖에 있던 외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선포를 입증할 획기적인 현상들을 제시해 보라고 도전하였을 것이다(참조. 12:38; 16:1). 한편 제자들 입장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그 온전한 영광 중에 도래함으로써 이를 대적하던 모든 세력을 완전히 멸절시킬 사건을 조급하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위의 비유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제공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형태라 할지라도 그 씨앗이 일단 뿌려진 때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이후 결실할 때까지는 성장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 성장 과정에 있어서 그 반대 세력이 아무리 강해 보인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 나라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일순간에 완결되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성장의 과정을 통해 결실해 가는 방법이며, 겉으로 과시하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오는 방법이다.
1.2. 철저한 요구를 수반하는 하늘 나라
보화(44절)와 진주(45-46절) 비유들은 하늘 나라를 소유한다는 것(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자기 소유를 전적으로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함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전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에서 발견될 수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참조. 10:37-39; 19:27). 즉, 하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 한 그의 주인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서 그의 주인으로서 그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참조. 갈 2:20). 사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이(6:24), 모든 사람은 자기가 그 자신의 주인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그 둘 사이의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자신의 소유를 다 포기할 때 마지못해서 하거나 슬퍼하며 한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하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44절). 이는 그 농부에게 있어서 그 보화를 얻는 것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보다 훨씬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외면적인 표시나 가시적 영광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른 모든 소유보다 값진 보화이며, 가치에 있어서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진주인 것이다. 따라서 이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고 오직 그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소유하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하늘 나라
씨뿌리는 자(1-9절, 18-23절), 가라지(24-30절, 36-43절), 그물(47-50절) 비유들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누이게 될 것을 가르쳐 준다. 하늘 나라의 그 놀라운 가치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인 반응만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충분히 모르거나(가시떨기, 돌밭) 아예 관심이 없거나(길가) 심지어 배척 혹은 대적하기까지 한다(가라지). 결국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마지막 날 풀무불에 던져져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41-42절). 실제로 11-12장에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관한 언급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가 하면 19장의 부자 청년은 하늘 나라의 가치를 충분히 몰랐기에 재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철저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분명 좋은 반응을 보일 것이며(좋은 밭, 10장의 제자들, 19:27의 베드로의 고백),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결국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됨으로써 마지막 날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43절).
2. 21:28-22:14: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
21-22장에서 연이어 나타나는 3개의 비유들은 각각 독특한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본 문맥에 함께 위치해 있음으로써 막강한 메시지를 제공한다. 그 문맥으로 보아 이 세 비유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참조. 21:23-27). 그러면서도 이 비유들 모두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2.1. 실제로 행하는 자(21:28-32)
두 아들 비유(21:28-32)는 우리가 실제로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참조. 7:15-27). 이 비유의 요점은 31절에 요약되고 있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즉,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결론이다. 그들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하나님에게 가장 합당치 못한 자들로 여겨 멸시하였다(참조. 9:9-13).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전혀 반대라는 것이다. 21:23-27의 대화에 비추어 볼 때, 지도자들의 실패는 도덕적 종교적 진실성의 문제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인식하고 환영하는데 있어서도 그러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멸시받던 자들은 그에게 열렬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자들(둘째 아들)은 영접함을 받게 되는데 반해 종교적인 지도자들(맏아들)은 오히려 배척을 당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참조. 8:11-12).
2.2. 열매를 맺는 자(21:33-43)
포도원 농부들 비유(21:33-43) 역시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강력한 정죄를 포함하고 있다(41, 43절). 이사야 5:1-17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비유는 메시아에 대해 반응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원에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잘못 이끄는 지도자들을 반역하는 농부들에 비유하고 있다(참조. 시 80:8ff.; 렘 2:21; 겔 19:10ff.). 41절은 '다른 농부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소작권은 그들이 맺는 '열매들'에 달려 있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이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있어서도 방심의 여지는 전혀 없음을 명백히 해 준다(참조. 롬 11:20-22).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43절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대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한 마태복음 내의 가장 명백한 언급이다.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의 백성은 혈통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그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는' 자들이면 누구든지 그리고 오직 그러한 자들만이 그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는 새로운 원칙이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2.3. 초청에 응하는 자, 그리고 예복을 입은 자(22:1-14)
혼인 잔치 비유(22:1-14)에서 잔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상징한다(참조. 8:11; 25:1ff.). 청함을 받은 자들이 종들을 다루는 비상식적인 태도(6절)는 21:35-36에서 이미 언급된바 있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절의 태도를 인상적으로 부각시킨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태도의 결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되고 있는데, 이 경고는 주후 70년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7절).
9-10절에서는 앞의 두 비유들의 공통된 결론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즉, 이와 같이 반응에 실패한 자들은 전혀 예상치 않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대체되리라는 주제이다. 하지만 복음이 보다 넓은 영역의 사람들에게 전파됨에 따라 그 복음은 합당한자 뿐 아니라 합당치 않은 자들에게도 호감을 끌게 될 것인데, 바로 이러한 주제가 11-13절에서 다루어진다. 이 후반부의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에게 자유로이 열려진 가능성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원칙도 없는 자유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는 거기에 어울리는 예복, 즉,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삶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참조. 21:41, 43; 7:13-27).
14절은 이 비유의 두 가지 메시지를 간결하게 요약해 준다. 많은 사람이 초대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오기를 거절하였다(5, 6절).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초대에는 응했으나 연회장에서의 규범, 즉,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11, 12절). 이들 두 대상자들 모두가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은 입지 못한 자들로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택함을 입지 못한 이유는 모두 그들 자신의 거절에 있었다. 한편 끝까지 남은 자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ejklektoiv)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운명이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주체, 즉, 하나님의 선택에 의존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즉, 그들이 구원을 입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속한 일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세 비유들 모두는 처음 시작보다는 마지막 결과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공히 보여 준다.
3. 24:37-25:46: 하나님 나라의 완성 - 마지막 때
24-25장에 연이어 나타나는 6개의 비유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로서, 특히 그 나라의 완성 시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 때가 임하는 상황을 세 가지 각도에서 적절히 묘사해 준다.
3.1. 마지막 때가 임하는 시기 (24:37-25:13)
노아의 때(24:37-39), 도둑(24:42-44), 지혜 있는 종과 미련한 종(24:45-51), 열 처녀(25:1-13) 비유들은 24:3의 제자들의 질문 중 파루시아, 즉, 세상 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지고 있다. 이 비유들에 나타난 강조점은 파루시아의 때가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과 그 때는 가장 예기치 않은 때에 임하리라는 점이다. 그 때에 대해서는 (징조가 주어지고 있는 성전 파괴의 때와는 달리<참조. 4-35절>) 미리 경고로서 인식 될 만한 징조가 없을 것이며,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시에 심판의 때를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끊임없이 경성함으로써 그 때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25:13은 24:36을 반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 두절 사이의 모든 비유들이 알려져 있지 않은 '날'과 '시각'의 주제에 관한 확장된 논의임을 보여 준다.
노아의 때 비유(24:37-39)의 주된 초점은 노아 당대 사람들의 준비되지 못한 모습에 맞추어져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홍수의 때를 예측하여 셈하였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에 항상 준비된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이었음을 보여 준다.
도적 비유(24:42-44)는 재림의 때를 계산하려는 시도의 무익함을 확실히 하고 있다. 제자는 재림의 때를 계산하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너무도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지혜 있는 종과 미련한 종 비유(24:45-51) 역시 문제의 초점은 동일하지만, 준비된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다 실제적으로 설명해 준다. 준비된 모습이란 단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때를 위해 열심히, 활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 처녀 비유(25:1-12)에서는 도둑 비유에 인상적으로 나타난 '준비성'(44절) 주제와 나머지 비유들에 나타난 '두 종류의 운명'(24:40-41, 45-51) 주제가 함께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인자의 재림을 내다보는 자들은 기름을 준비함으로써, 즉,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신의 본분에 합당한 행동을 행함으로써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준비란 그 날이 오기 전까지만 가능하며, 일단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준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문이 닫힐 것'이기 때문이다.
3.2. 마지막 때를 위한 준비 (25:14-30)
위의 네 비유들에 뒤이어 나타나는 달란트 비유(25:14-30)에서도 준비성의 주제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준비함'이 무엇인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해 준다. 그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이 와서 보고 인정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는 책임 있는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기다림의 기간은 무의미하고 공허한 '지연'의 기간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종들에게 맡겨진 달란트들을 선히 사용할 수 있는 기회의 기간으로 의도된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종들에게 맡겨진 일정액의 돈(달란트, 헬. tavlanton)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연적 재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권들과 기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들은 그 특성과 크기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주인이 돌아오기에 앞서 그 기회들을 충실히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준비성'이란, 그 크고 작음을 떠나서, 제자들로서의 우리들의 책임들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임의 크기를 조정하시는 분은 주인이시다. 종의 의무는 그 크기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한편, 셋째 종의 실수는 단순히 게으름에 있었다기 보다는 그의 주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있었다. 그는 주인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그릇된 운명론적 사고(思考)에 빠졌던 것이다. 이 비유는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데 만 온 마음을 쏟는 소극적인 종교적 성향의 위험성을 적절히 지적해 준다. 주인의 기대는 자신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활동적이고 책임성 있는 충실한 봉사를 통한 결실들에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
3.3. 마지막 심판의 기준 (25:31-46)
24:36로부터 시작된 마지막 때에 관한 주제의 절정을 제공하는 양과 염소 비유(25:31-46)는 구분의 최종성을 강조한다(32-33절; 참조. 13장의 비유들; 24:38).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은 구약에서 자주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한편 34절의 '임금', '나라', '상속' 등의 언어는 다니엘 7:14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본 절은 다니엘 7:14의 성취의 궁극적 완성의 단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비교. 16:27-28; 24:30-31, 34).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이 받게 되는 '나라'는 아마도 왕적 권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19:28).
그런데 최종적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는 선행은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한 선행인가? 여기서 '내 형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며(참조. 12:48-50; 28:10), '지극히 작은 자' 역시 어려움에 처한 모든 자들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마태복음의 특징적인 용법으로서의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10:42; 18:6. 10, 14). 그렇다면 여기서 최종적 판단의 기준은 단순한 인간애적 봉사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선행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나라'(40절; 참조. 45절)는 예수님의 선언은 그 판단의 궁극적 기준이 그 선행 자체라기보다는 그 선행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인 것을 보여 준다(참조. 10:40-42). 마태복음의 구조상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 단락의 마지막 가르침으로 주어지고 있는 이 비유의 분명한 강조점은 열매 맺지 못하는 (즉, 선행으로 표현되지 않는) 관계는 진정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관계에 근거해서는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참조. 7:21-23).
4. 그 밖의 비유들
위의 비유들 이외에도 마태복음 안에는 대단히 많은 길고 짧은 비유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들 가운데 산재해 있는데, 그들 중 보다 중요한 것들은 다음 몇 가지 주제들로 분류될 수 있다. 1) 하나님 나라에서 제자들의 현재적 삶의 속성과 중요성: 등불(5:14-15); 좋은 열매(7:16-20); 집짓는 자(7:24-27); 은혜를 모르는 종(18:23-34) 비유들. 2) 하나님의 성품과 주권: 길 잃은 양(18:12-14); 포도원 일군(20:1-16) 비유들. 3) 메시아 시대의 도래: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9:16-17); 장터 아이들(11:16-19;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12:25-26; 참조. 28절) 비유들. 4) 메시아에 대한 반응에 실패한 자들: 장터 아이들(11:16-19); 심지 않은 나무(15:13); 소경(15:14) 비유들.
결론
지금까지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비유들의 주된 초점은 '하나님 나라'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그 나라 백성의 삶, 그 나라의 왕되신 하나님의 성품과 주권, 그리고 그 나라의 완성의 시기와 그 때를 위한 준비 및 마지막 심판의 기준 등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실질적인 질문들에 직면해 있던 제자들에게 이 비유들은 지극히 필수적인 메시지들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한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그 주대상으로 쓰여졌던 것으로 보이는 마태복음의 경우,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면 그것은 왜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 세상 가운데 아직 실현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대답은 13장의 비유들이 적절히 설명해 주고 있으며, 자신들의 동족 대부분이 왜 하나님 나라로부터 제외되어야만 하였는지에 대한 대답은 21-22장의 세 비유들이 적절히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위기 상황을 누구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 들였을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마태는 그 사건이 마지막 때가 아니라 마지막 때는 아무도 모르는 미래적 사건,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최종적 심판이 있게될 사건임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는 24-25장의 일련의 비유들을 그처럼 인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마태의 독자들의 그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한국 교회 독자들에게도 그 형태는 달라도 유사한 각도에서 제기되는 (혹은 제기되어야 하는) 경우들이 많으며(예. 하나님 나라의 속성 - 장소적, 미래 지향적 사고로 인한 오해들; 하나님 나라<영생, 구원>와 제자의 삶 사이의 관계; 예루살렘 파괴에 대한 징조와 마지막 때 도래의 무징조적 성격 사이의 대조), 따라서 한국 교회 성도들이 마태복음에 나타난 비유들의 이와 같은 핵심적 메시지들을 적절히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신구약 성경강해*** > -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기도문에 나타난 공동체 갈등해결 비법 (0) | 2019.08.17 |
---|---|
복음서 주해 - 조나단 에드워즈 (0) | 2019.08.17 |
마태복음 11장 12절,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생명, 리처드 포스트 설교 녹취 요약, 2009년 10월 18일 설교요약 (0) | 2019.08.17 |
마태복음 13장 좋은 땅에 뿌려 졌다는 것의 의미, 존 칼빈 주석에서 발췌한 내용 (0) | 2019.08.17 |
심판과 구원, 타작마당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 공관복음 주석에서(놀라운 심판의 말씀) (0) | 2019.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