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5-7장 산상수훈 연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정훈택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정훈택 교수

에반젤(복음) 2019. 8. 17. 10:17



마태복음 5-7장 산상수훈 연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정훈택 교수)


마 태복음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현대 한국교회에 설교하는 일반적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말씀들을 주셨을 때, 즉 이천여 년 전의 의미를 찾아 설교하는 것과 이 말씀들을 오늘날 교회에서 읽을 때 그 현대적 의미를 찾아 설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설교로서는 적당하지 않다. 전자는 역사적 의미를 추출하는 것일 뿐 설교를 듣는 오늘의 청중을 예수님의 설교 앞에 불러 모으는데 실패하기 쉽다. 후자는 청중을 예수님 앞에 불러 모으는 데는 성공하지만 자칫 설교자 자신의 생각을 예수님의 설교로 둔갑시키기 쉽다.

성경의 어느 본문과 마찬가지로 산상 설교에서도 그 때의 의미와 지금의 효과 사이에 최적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원문의 뜻을 그 당시의 세계에서 찾아 현대에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새 그릇에 담아 나르는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산상설교의 처음 의미와 이에 대한 당시 청중들의 느낌이나 반응에 최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이 말씀들을 현대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옮길 수 있는지 그 적응면에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1.문맥과 구조

예 수님의 활동은천국이 가까웠다는 외침으로 시작되었다(4:17). 네 제자가 부름을 받은 기사 다음에 마태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4:23). 이 첫 활동의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았다(4:25). 이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셨다. 사람들을 더 잘 가르치실 적당한 장소로 향하신 것이다. 앞서 오르시던 예수님이 위쪽에 자리를 골라 아래를 향해 앉으시자 무리 중에서 제자들이 가짜이 왔다(5:1~2). 사람들은 아래쪽에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시작되었다.

설교가 끝났을 때 이 설교를 서서 듣던 사람들이 놀랐다고 마태는 적어 놓았다(7:28).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는 달리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시고 무리도 곧 뒤따른다. 마태는 이어 예수님의 이적 사건 몇 가지를 기록하고 다시 예수님이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시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적어 놓았다

마태는 천국의 복음이란 단어는 소개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산상설교 외에 달리 적어 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문맥에서는 산상설교가 하늘나라의 복된 소식이다. 이 설교는 따라서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구약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여시는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그의 권위는 설교와 이적에 그대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당했고 그를 따랐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천국의 성격과 자신의 정체를 은근히 밝히셨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천국의 백성인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기본적으로 가르치셨다.

산상설교를 이해하는 열쇠는 천국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바로 이 설교를 하셨다는 사실이다. 즉 산상설교는 예수님을 천국의 왕으로 전제하고 있다. 예수님에 관하여 마태는 앞 장에 명백하게 밝혔기 때문에 산상설교를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천국의 왕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믿음 위에서 산상설교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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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는 크게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1)서론부: 복 있는 사람들(5:3~16)

2)본론부: 천국의 규범(5:17~7:20)

3)결론부: 하나님의 뜻을 따름(7: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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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론부: 복 있는 사람들(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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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부에는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다. 마태복음 53~10: 복 있는 사람들 즉 천국 백성의 일반적 성격을 규정하심. ‘팔복이란 이름으로 통용된다.

마태복음 511~12: 특수한 성격을 규정하심. 제자들의 성격 규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마태복음 513~16: 천국 백성(즉 제자들)의 역할을 규정하신 소금과 빛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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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팔복’:복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 성격(5:3~10)

예 수님은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최초로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를 선언 하셨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이시므로 이 선언은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고 보아야 한다. ‘팔복을 설교할 때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요소는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선언하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동시에 설교를 듣는 상황, 즉 부름 받은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님을 - 잘 모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 실제로 따르고 있었고 설교하실 때 내내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팔복의 조건으로 제시된 요소, 예를 들어 마음의 가난등을 축복 받은 이유로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한 해석일 뿐 아니라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삼인칭 표현법으로 선포된 팔복은 예수님을 청중들 중에서 복 있는 사람들, 즉 그 적용대상을 추려내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너희 모두가 복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만이 복 있는 사람들이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각 절을 분석해 보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복 있는 사람들로 규정하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본문은 "왜냐하면" 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로 이끌리는 절이다. "호티"절에는 예수님의 출현과 활동으로 지상에 시작될 천국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다. 예수님 자신이 이런 사람들에게 천국을 경험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조건과 축복은 별 의미가 없다.

나중 에 자세하게 드러난 신약적 축복의 조건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믿음과 비교할 때 팔복에서 긍정적으로 다루어지는 요소들은 이것이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오게 한’, 혹은 예수님이 사람들 중에서 그들을 받아들인이유였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천국 백성의 일반적 성격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복 있는 사람들의 수가 몇 인지, 또 모두 어떤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신요소들을 절대시할 때 발생하는 토론이다. 위에 제시한 것처럼 예수님을 따름과 함께 이 요소를 다룬다면 의 수와 그 관계는 별로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가장 일반화된 방법을 따라 앞의 네 가지와 뒤의 네 가지를 구분하고, 아홉 번째를 별도로 다룰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자세로, 후자는 사람들을 향한 윤리적 자세로 설명할 것이다.

예수님은 모인 사람들 중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다고 선언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의 사람들로 모을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니, 산상설교가 선포되는 바로 이 시점에 그들은 왕과 함께 있었으므로 천국은 이미 그들의 것으로 그들 가운데 실현되고 있었다.

가난이란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이 단어를 좁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죄를 깨닫고 절망한 상태, 구약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가난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들로 해석한다. 무엇의 결핍인지를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으므로 우리도 더 이상세밀하게 설명하지 않고 그냥 심령이 결핍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 설명한다면, 이 말씀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가난 때문에 자신에게 온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잘 왔다고 선언하신 것이 된다. 초점은 심령의 가난이 아니라 그것이 동기가 되어 그들이 예수님에게 왔다는데 맞추어진다. 구원의 새 시대에는 예수님과 연관되지 않는 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애통하는 자들도 울음의 이유 없이 말씀하셨다. 이것을 죄로 인한 영적 애통으로 설명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좁히는 것이다. 주님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하나님 앞에서 슬피 우는 사람들을 축복하셨다. 그런 동기로 모인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 자신이 저희를 위로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5절의 온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태도라면 - 하나남의 처분을 겸손히 기다리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섰다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제대로 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땅을 기업으로주러 오셨기 때문이다. 땅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될 천국에 대한 다른 비유이다.

6절의 란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어 주실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에 주리고 목마른 것 때문에 행여나 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제 그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 곧 배부르게 될 것이다.

이상의 네 종류의 사람들을 굳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이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 즉 대 제국 로마의 강압적 지배와 헤롯 가문의 폭력적 왕권 아래서 서로가 자기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극도로 분리된 사회에서 그래도 모든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예수님에게 왔던 그런 사람들로 그려야 할 것이다.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위로와 축복의 시작을 선포하신 것이다.

7절부터 시작되는 사람과의 관계, 즉 윤리적 요소들도 이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 앞에서 있다는 사실 혹은 근거 위에서 이해해야한다. 예수님은 도덕심, 인간의 마음 자체를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유가 되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며 이제 천국의 사람들로 부름을 받는 것을 축복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마음이 청결한 사람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들을 복 있는 사람들로 선언 하셨다. 이 중 마음의 청결이란 사심이 없이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진실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다. 10절의 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뜻한다. 정당하게 하나님의 말씀 대로 살고 그런 것 때문에 - 이방인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 불이익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청중 가운데 있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축복하신 것이다.

예 수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적하신 네 가지 태도는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 땅에서 시작된 천국의 성격과 일치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의 네 가지 만이 아니라 뒤의 네 가지도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사역과 하늘나라의 특성을 규정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호티절에 포함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을 보게 될 것”,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것”, “천국을 소유할 것이 이 사람들을 축복하신 진짜 이유이다. 이것은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제 실현되기 시작할 바로 그 일들이다.

팔복은 특출하게 취급해야 할 영적, 도덕적 덕성을 규정하신 말씀이 아니다. 덕목의 나열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 덕목들을 다른 종교와 비교하며 그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신약 시대에 복 있다고 인정될 그런 인간의 덕은 어디에도 없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는 동기를 파악하시고 자신의 활동으로 시작되는 천국에 적절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선포하신 것이다.

21 세기의 문턱에 서있는 우리들의 상황은 이 때의 사람들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좋은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상황은 - 영적 만남이란 주제를 가지고 - 지금도 그와 다름없이 설교할 수 있다.

앞의 네 조건을 좁게 설명한다면 - 초대교회 시절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 인간의 죄, 후회, 버림, 눈물, 하나님의 처분만 바람 등 믿음에 이르는 길로 설교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만약 넓게 설명한다면 특별한 이유를 언급함이 없이 영적 결핍, 영적 슬픔, 영적 온유, 영적 의존 등으로 설명하며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을 강조하는 것이 설교의 힘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다면 지금도 그대로 충족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도 바로 그 왕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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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복 있는 사람들의 특수한 성격(5:11~12)

이 구절에서부터 예수님은 삼인칭 표현법을 이인칭 표현법으로 바꾸어 너희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무조건 청중 모두가 이 복 있다고 선언된 너희의 범주 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너희에 특수한 조건을 붙이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온갖 악한 말을 들어야 하는 그런 경우가 오면 그 너희에게 예수님의 축복이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조건들은 나를 믿음대신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적대적 사회에서 예수님을 믿음이 생생하게 나타나는 삶의 현장을 그리는 단어들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온갖 악한 말을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냥 욕을 얻어먹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복된 이유로 예수님은 하늘에서 너희의 삯(미스토스, as)이 크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하늘나라가 예수님의 출현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이 삯을 죽은 후에 저 세상에서 약속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 삯은 이 땅에서 주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 때문에 허위의 모독과 핍박이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약시대의 고난 받던 선지자들과 비교하셨다는 것도 이 점을 부각 시킨다. 예수님은 자신과 관계된 상태 자체가 축복의 이유가 되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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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금과 빛의 비유: 천국의 백성들(제자들)의 역할(5:13~16)

너 희라 불리는 사람들을 - 표현만으로는 - 예수님을 따라 올라와 설교를 들은 청중 모두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그들이 인간으로 오신 영광의 왕 예수님을 보고 들었다는 것이 축복이요, 빛과 소금으로 비유된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초기의 일일 뿐이다. 듣고 보고도 믿지 않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활동이 계속되면서 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가름 나고 말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적대자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결과까지 주석에 반영시켜야할 것이다. 11~12절에서 예수님이 자신과의 관계를 근거로 하여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규정하셨다는 점을 감안하면 11절 이하의 모든 너희- 문맥 상 -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너희는 긍정적 명칭 제자들로 바꿀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복 있다고 규정하신 사람들, 즉 제자들을 땅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비유하셨다. 소금은 세상의 악을 막고 세상의 존재 의미를 보존하는 방부제의 역할에 대한 비유어다. 빛은 세상의 어둠을 깨우치고 선도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알려주신 비유어다.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빛이다. 소금이다라고 진술하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세상의 빛이나 소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부터 세상의 악을 방지하고 세상을 보존하며 세상에 맛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된다. 결국 천국의 백성들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부터 거추장스러운 요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죄를 알리고 심판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사람들이 알게 될 이 일들을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빛으로 소금으로 부르신 것이다.

무엇으로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예수님은 착한 행실을 언급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선한 행동이란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할 특성이자 본질이다. 만약 선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제자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짓밟힐 수밖에 없는 맛을 잃은 소금, 빛을 빼앗긴 빛이 되고 만다. 예수님을 믿음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한 행위를 함은 늘 함께 붙어 다니는 두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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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론부: 천국의 규범(5:17~7:20)

소 금, 빛으로 비유된 천국의 사람들이 선한 행실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앞의 말씀은 이제 선행 행위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규범의 문제로 진행한다. 선한 행실의 기준, 즉 하늘나라의 규범에 대한 말씀이 산상설교의 중간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규범에 대한 말씀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1) 서론: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5:17~20)

2) 여섯 반제: 완성의 실례들(5:2~-48)

3) 의를 행하는 방법(6:1~18)

4) 재물과 염려에 관하여(6:19~34)

5) 먼저 할 것(7:1~12)

6) 요약 및 결론(7: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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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5:17~20)

이 부분은 초대 교회 시절 가장 주목을 받았던 말씀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특권과 위치를 이어간다고 보았기 때문에 구약 시대의 핵심인 율법”, 넓게 말하면 구약성경에 대해서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규명해야만 했고 여기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주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 부분은 구약성경을 어떻게 읽고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 연결된다.

설교의 문을 여시며 하신 말씀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늘 하던 것처럼 -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 반응,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지하신다는 말씀인가?’를 예상하시며 그렇지 않다고 선언하셨다. 우리가 아는 바 대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시다.

여러 종류의 내용들이 구약성경을 구성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규범, 예언, 역사의 세 가지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약성경의 규범적 부분, 특히 계명들이다. 모든 계명들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신 것이므로 절대로 폐지될 수 없다. 없어질 수도 없다. 예수님도 이것을 폐지하러 오지 않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 지켜야하고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선언이다.

이미 완성에 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계명들을 구약 시대에서처럼 문자 그대로 지키고 그렇게 가르쳐야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완성된 계명들의 형태를 지적하셨다고 해야 한다. 완성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구체적인 예를 예수님은 21절에서부터 여섯 번에 걸쳐 설명하셨다.

그 완성된 형태의 규범을 지키고 가르침에 있어서 천국의 사람들은 적어도 그 당시 가장 모범적이라고 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능가해야 한다는 말씀이 20절에 수록되어 있다. 그렇지 못할 때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문을 붙여 놓으셨다.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일 뿐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탄생과 활동으로 이 땅에서 시작되고 산상설교의 선포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천국에서 크다혹은 작략고 불리는 것은 천국에서 배제되느냐, 천국에 포함되느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완 성이란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된 개법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민족적 울타리 안에서 주어졌다. 예수님께서 예언된 메시아, 사람들이 기다리던 그 그리스도로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이제 모든 민족, 모든 나라로 확대하시는 이 시점에서 율법은 - 하나님의 새 구원시대에 어울리는 - 범 사회적, 범 정치적, 범 민족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들에 새겨져 있었던 사회적, 정치적, 민족적 색채는 이제 세계적 색채로 탈바꿈해야한다. 이것을 완성이란 용어로 표현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론은 완성의 예들로 제시된 예수님의 말씀과 당시의 가르침, 그리고 구약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비교함으로써 찾아낸 것이다. 예수니은 모든 계명들의 완성된 형태를 일일이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으시고 여섯 가지를 예로 주셨다. 일부 계명들의 새로운 형태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 혹은 신약성경의 다른 책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고, 교회의 역사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혼에 대한 계명이나 히브리서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혹은 안식일 규례를 주일로 지키게 된 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읽고 사용하는 한 그곳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 모두를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과 관련지어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응하기 위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그렇게 되어지는 일도 아니다. 만약 교회가 연합된 힘으로 이 일에 착수한다면 우리는 현대에 필요한 규범 혹은 삶의 원칙을 구약성경의 계명으로부터 더욱 더 풍성하게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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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섯 반제들(5:21~48)

여 섯 반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훈만을 주시지 않고 이것을 옛 사람들에게 말해졌다고 너희는 들었다는 규범에 대한 반제(“그러나 나는”)로 제시하셨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모두 여섯 가지인데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사랑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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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인에 관하여(5:21~26)

살인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런 행동을 금하셨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살인을 가장 큰 범죄로 취급한다. 그러나 살인을 하지 않으면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법의 정신을 무시할 수 있다. 처벌이 두려워서 살인을 피하다 보면 살인이란 행동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생기고 기회가 있으면 언제라도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배운 것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였다. 무게의 중심이 살인을 죄로 보는 것에서 이에 따르는 처벌로 이동한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고 형태만 따르는 것을 비판하시며 살인을 일으키는 원인과 살인에 이르는 모든 정신적 과정을 아예 죄로 규정하셨다. 점점 악한 행위를 언급하시면서도(분노-욕설-경멸) 점점 큰 대가를 결합하심으로(심판-공회 -지옥 불)잘못된 행위와 처별의 대조를 극대화하셨다. 살인에 관한 하나님의 계명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에까지 적용될 수 있도록 더 확대되었다.

덧붙여진 두 예화는 앞의 말씀들을 보충하며 강조한다. 무의식적인 실수든 명백한 잘못이든 용서가 필요하다. 화해의 길을 밟아야 한다. 그것은 예배를 멈추더라도 우선해야 할 일이며 , 죽기 전에 즉 기회가 남아 있을 때 기필코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이 부분을 설교한다면 사회법의 준수, 형법, 민법 등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범적 기독교인의 삶인 것처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의 경박한 태도를 지적, 경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기준은 사회법을 훨씬 뛰어넘는 더 높고 더 고귀한 것이다. 도덕적 선이 아니라 우리는 신앙적 규범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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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음에 관하여(5:27~30)

간음이란 이성과 허용되지 않는 육체 관계를 갖는 일이다. 현대의 성 개방 풍조와는 달리 예수님 당시에는 성에 대한 규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간음은 유대사회에서는 공개처형에 해당한다.

예 수님은 이 조항에서도 간음의 동기를 제공하는 마음의 문제로까지 간음의 적용범위를 확대하셨다. 간음이란 육체의 행위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음탕한 마음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이성을 보는 것도 마음의 간음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해 보면 음욕을 일으키기 위해 이성을 보는 것을 간음으로 규정하셨다.

겉으로 나타나는 범죄는 결과일 뿐이다. 그 원인은 마음에 따로 있다. 마음을 자극하는 눈에, 육체의 느낌을 달콤해 하는 손에 있다. 예수님은 이런 원인에도 하나님의 처벌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시며, 차라리 눈을 빼 내버리라”, “손을 적어 내버리라고 하셨다. 물론 이것은 과장법이다. 눈을 뽑고 손을 자른다고 마음의 죄, 죄의 동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눈을 파고들고 손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음욕의 원인, 간음의 동기를 제거하지 않는 한 누구나 간음죄를 피하기 어렵다.

천국의 사람들은 선한 행위로부터 자유로와 진 것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천국은 어디에도 없다. 예수님은 깨끗한 천국을 이 세상에 시작케 하셨다. 성령의 법, 사랑의 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따라서 눈의 정욕과 손의 자극을 뽑아내고 잘라 던지는 아픔이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행동만이 아니라 내면적 생각까지 예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이 부분을 설교한다면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관습적, 도덕적 행위에 만족해하는 기독교인의 얄팍한 생각을 지적해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성 개방 풍조에 감염되고 도취되지 않도록 보는 것 만지는 것에 대한 경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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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혼에 관하여(5:31~32)

구 약성경에 이혼증서를 명령하신 것은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부관계를 지속해 갈수 없는 특별한 - 아마도 육체적 - 결함이 있을 때 이 사유를 기록함으로써 결함이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조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계명은 악용되어 이혼증서를 이혼의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이러한 당시의 관행을 비판하시며 이혼을 철저하게 금하셨다. 이혼으로 끝날 수 있는 사태는 간음이라는 범죄 행위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이혼의 정당화로 볼 수 있을까? 범죄행위가 없는 이혼은 그 자체가 죄요 또 다른 죄를 낳게 하는 원인이다. 물론 교회는 특별한 경우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허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피한 허용을 누구도 악용해서는 안 된다. 악용하도록 방치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천국사람들의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욕구까지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결혼은 두 사람의 약속이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오더라도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인내와 기도를 통해 더 좋은 길을 모색해 가야한다. 갈라서기보다는 더 큰 하나를 이루어 가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다. 현대 교회는 이 부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거의 외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치는 실정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기를 계속하는 한 이혼의 파국보다는 더 나은 길을 선택하는 성실한 인내와 노력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의 삶속에 나타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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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맹세에 관하여(5:35~37)

한국 사람처럼 말을 마구 하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자녀에게도 욕설과 쌍소리와 저주를 토해 내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정도는 훨씬 약하지만 말을 함부로 하는 풍조는 구약시대에도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함으로 말을 신중히 할 것을 명령하셨다. 맹세의 정신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 한 마디를 지키라는 데 있다.

예수님 당시 맹세의 법이 악용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명령은 이 때 헛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를 주께 지키라로 변질되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는 사람들 사이의 맹세에 관한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맹세 즉 서원 조항에 나온다. 이것이 사람사이의 맹세에 관한 규정으로 둔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지키든 지키지 않든 자신을 믿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지킬 수도 없는 맹세가 등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지 않는 맹세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이름은 모독을 당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맹세를 금하심으로써 구약의 정신을 더 분명하게 밝혀 놓으셨다. 어떤 맹세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는 맹세가 없다. 따라서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맹세함으로 오히려 사람을 속이고 자신을 믿게 한다면, 그렇게 하기 위하여 점점 더 강한 맹세를 고안하고 불가능한 것까지 동원한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맹세는 불필요하다. 진실한 말 한 마디면 충분한 사회를 만들라. 천국의 사람들의 말 한 마디도 신앙과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성실한 자세를 요구하셨다.

예수님의 정신이 이러하다면 한국식 농담, 비웃음이 들어 있는 우스개, 체면치레, 빈 말, 욕설, 비속어, 인사치레, 거짓말, 허풍, 허세 등 에서 더 나가고 아니오를 훨씬 넘는 말들은 다 고쳐야 할 악습들이다. 예도 아니오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 글쎄요도 예수님의 정신에 분명 어긋남을 설교에서 지적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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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복수에 관하여(5:5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란 표어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문구가 되어버렸다. 준대로 돌려주고 받은 대로 갚는다는 복수의 표어가 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말은 복수의 법칙으로 약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의 계명으로 돌아가 보면 이 말씀은 재판관들에게 주신 공평한 판결의 기준이었다. 죄에는 적절한 판결이 따라야 하고, 가해자나 피해자 공평하게 다루어져 싸움을 종결시켜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구약시대에도 개인적 복수는 금지된 행동이었다.

예수님은 은총의 새 시대, 천국의 시작에 어울리는 명령을 주셨다. 악한 자를 대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천국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싸움에서는 악과 독이 이기기 마련이다. 선량한 사람은 악의 피해자가 되고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뻔하다. 악이 싸움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악이 예수님의 선한 말씀을 받아들일 리도 없다. 그렇다면 선한 사람이 멈추는 길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축복을 경험할 - 우리 시점에서는 이미 경험한 - 천국의 사람들에게는 싸우고 보복하는 방법보다 참음과 양보와 봉사와 희생이 더 어울리는 행동양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사람들이 선한 행동, 선한 마음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하신다. 내 자존심, 내 권리, 내 입지를 주장함으로 사람들과 맞서는 것보다 현대적 설교에서도 뺨을 돌려대는 참음의 삶, 겉옷도 가지게 하는 양보의 삶, 오리(2km)를 더 가 주는 봉사의 삶, 내 것도 거절하지 않는 희생의 삶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님은 보복금지나 무저항주의를 제창하시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적극적인 삶을 요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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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랑에 관하여(5:43~48)

유 대인들은 이웃이란 단어에 주로 동족만을 포함시켰다. 개종하는 이방인들도 이웃의 범위에 들었다. 그 이외에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 죄인, 원수들이었다. ‘이웃에게는 사랑을, 원수에게는 미움을!’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구호였다. 그러나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령은 구악성경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다. 하나님의 계명이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변질되었고 악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구호는 가르치거나 배울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하나님의 뜻이란 이름으로 가르치면 이웃 사랑과 원수 미움은 더 힘을 얻기 마련이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면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 된다. 모두에게 한 가지 행동 즉 사랑이 요구된다면, 이제 대상을 구별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구별해 보았자 보여야 할 마음과 태도는 사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생태적이고 본능적인 경계선을 넘어서는 이 시점에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구별을 실제로 철폐하셨다. 모두에게 공평한 태도, 선한 사랑을 명령하셨다. 이런 사랑을 사람들은 모른다. 가지고 있지 않다. 본능에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니다. 원수나 박해자에게는 사랑의 욕구도 선의나 친절의 욕구도 결코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분노와 적개심과 전투력 아니면 한과 억울함과 미움을 솟구치게 만드는 사람들이 원수와 박해자인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사랑은 시작되었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이다. 천국의 사람들은 이제 그 독생자 앞에 서있다. 아니 지금의 시점에서 말한다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배웠다. 이 미래를 알고 계신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미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며 주는 사랑. 내게 없는 사랑을 배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지만 이렇게 하면 결국 예수님이 가실 길을 그대로 밟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고 하셨다. 십자가가 세워진 후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의지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면,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이 인정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올 수 있다. 성령님께서 이런 확신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생명공학이 점점 발달하여 인간의 염색체와 유전자, 염기구조가 밝혀지고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점점 좁혀져 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 부분을 설교한다면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설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에게 진정한 사랑을 배워 마음으로 몸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동물과 비슷한 우리들이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하나님처럼 사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하늘 아버지처럼 완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대상의 구별은 사회생활에서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는 대상의 구별이 - 대상에 따라 어떤 마음가짐,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이냐 라는 관점에서는 - 더 이상은무의미하다. 구별해도 사랑해야 한다. 사랑에서 나오는 양보와 봉사와 희생을 만들어내야 한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만들어지는 믿음 이런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다. 욕구를 배반하고, 본능을 거스르고, 우리의 세포 하나 하나에 새겨져 있는 생존의 법칙을 어겨가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삯을 가슴속 깊이 새겨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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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를 행하는 방법(6:1~18)

무엇에대해서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이제 어떻게라는 주제로 전환하셨다. 이 부분에서 행동의 방법을 지시하시기 위하여 드신 예는 구제(2~4), 기도(5~15), 금식(16~18) 이 세 가지이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 주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9~15). 구제, 기도, 금식을 신앙생활의 규칙으로 제정하셨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하던 것을 예로 드시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을 실감나게 알려주신 것뿐이다. 그렇다고 이 세 가지를 예수님께서 불필요한 것으로 일축하셨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시기 때문에 예로 사용하신 것이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천국의 사람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삶의 아주 유익한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1절을 구제에 대한 서론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열 여덟 절 전체의 서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법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을 가지고 있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보일 목적에서 지속해 간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종교적 삶일 뿐이다. 종교적 본능의 발산 이의의 무엇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모든 신앙적 행동은 하나님께서 보시도록 해야 하고 그럴 때에만 삯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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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제에 관하여(6:2~4)

외 식자란 말의 원 의미는 연극인이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각본을 따라 시키는 대로표정 짓고 흉내내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당시에 빵이 필요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사람들은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다. 그러나 그런 필요한 행동에 사람들에게 보이고 영광을 얻으려는 숨은 의도가 개입됨을 예수님은 간파하시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런 구제는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과 존경으로 되돌아옴으로써 하나님께서 보답할 아무런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구제란 몰래 하는 것이다. 한 손이 하는 것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몰래의 다른 표현이다. 한 손으로 줄 수 있는 것만 구제품이 될 수 있다는 제한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밀히 하는 구제에 하나님의 보상을 약속해 주셨다.

오늘날에도 구제가 필요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교회 밖에 셀 수도 없이 있는데 그들을 향한 동정심, 배려, 도움과 봉사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 받는데 그런 뜻에서 구제란 받은 것을 - 이웃을 통해 하나님께 - 돌려드리는 것이 구제이다. 즉 구제는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몰래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악용될 수 있다. “왼 손도 모르게 하라는 말씀 때문에 오히려 구제의 기회가 줄어들고 구제 활동 자체가 위축된다면, 드러나는 것에 개의치 말고 구제는 언제라도 해야 한다고 설교할 필요가 있다. 구제의 대상의 입장에서는 당장 밥과 물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필요를 보면서도 몰래라는 말씀 때문에 도와줄 마음을 막는다면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이며 또 다른 위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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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도에 관하여(6:5~8)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말이며 소리이다. 마음을 알리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시간만 되면 어느 때건 그 자리에서기도를 시작했다. 그들은 소리 내어서 하지 않으면 기도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기도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기도한다는 좋은 동기와 경건한 습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인간의 마음 즉 사람에게 보이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종교적 지도력을 확보, 지속하려는 의도를 간파하시고 이것을 위선적 행동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에 의하면 기도란 시간이 중요하지 않고 장소도 물론 아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는 것, 그 마음, 그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골방은 몰래 기도할 수 있는 곳이란 의미를 심어주시기 위해 선택하신 한 예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기도 굴을 마련하는 것이 기도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이게 만든다면 차라리 골방을 없애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행동이다.

기도에 많은 말, 아름다운 표현과 화려한 수식어가 사용되는 것은 기도의 성격에 역행하는 현상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사실 말이 필요치 않다. 말은 입을 가진 사람이 만들며 귀를 가진 사람이 듣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아신다. 좋은 것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는 법. 기도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인 만큼 이 특권이 인간성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 이 부분을 설교함에 있어서 우리가 무관심하게 실행하고 습관화 되어 가는 기도의 여러 가지 위험을 분석하고 지적해 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의 기도를 드리는 것조차 막거나 금하자는 말이 아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가 함께 기도할 정당성을 보장하시고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도문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도 공동기도의 필요성을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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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기도문(6:9~15)

주기도문은 공동기도문으로 주어졌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 기도를 드리는 것이 잘못은 아니겠지만 천국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늘 아버지께 이 기도를 드릴 때 이 기도는 더 빛날 것이다. 함께 기도할 내용은 첫째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을 알리시기 위하여 인간의 소리를 빌려 만들어주신 이름, 그 이름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거룩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그 이름은 인간의 소리로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나 모든 사람이 거룩하게 사용해야 할 이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도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 그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리고 하신 것은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재림의 때가 남아 있으므로 이 기도는 우리 모두가 여전히 드려야할 기도이다. 비슷한 개념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인간의 욕구나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고 비아 돌로로사를 거처 골고다의 길을 걸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위한 기도도 일러주셨다. 먼저 매일 필요한 양식, 즉 밥을 달라 는 것이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고 세상이 없어지지 않는 한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제일 되는 임무이기 때문에 삶의 기도 그 첫 번째 줄에 밥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기록하신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시급한 것은 죄의 문제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더 이상 죄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없다. 죄도 의도 회개나 용서도 그들에게는 다 끝난 일이다. 그러나 숨을 쉬고 있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위한 기도는 항상 기도의 첫줄에 와야 한다. 기독교인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시험에 빠져 실수하고 죄를 짓고 좌절하는 일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깨끗이 흠 없이 시련도 좌절도 없이 평안하게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과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예수님은 세 번째 항목으로 넣어주셨다.

은혜 와 의무를 붙여 놓으신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용서를 비는 사람들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용서를 해 준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빌 수 있다. 신학적 난제를 만들어내는 이 표현을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 붙여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함께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지워주신 것이다. 용서에 있어서도 천국의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를 본받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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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식에 관하여(6:16~18)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독특한 관습을 따랐다. 얼굴을 씻지 않고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뿌렸다. 어떤 사람은 수염을 쥐어뜯기도 했다. 극도의 고통과 슬픔을 외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살았을 때 이런 행동은 흠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모두가 모이는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헤롯 가문이 왕좌에 앉아 있으며 예루살렘에도 이방인들이 득실거리는 시대에는 하나님께만 보여야 할 금식이 동질감보다는 이질감을 만들어내고 특히 이방인들에게 현실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더 경건한 사람들을 구별해 내는 외부적 표시로 사용될 수 있었다.

선한 동기와 선한 행동을 파고 들어오는 인간의 사악함, 그 간교함을 보신 예수님은 외부적 표시들을 모두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위선으로 단정하셨다. 금식은 하나님께 보이는 슬픔과 고통과 결단의 표시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절규요 몸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선한 도구가 오용되어서는 안 되기에 예수님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다. 금식의 표시를 지우고 표 나지 않게 하나님께만 슬픔을 표현하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머리에 기름을 마르는 것이 금식의 표시가 된다면 차라리 기름을 바르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부분을 설교한다면 과도한 금식 위주의 신앙생활을 경고할 필요가 있다. 또 살아계신 하나님께 혼자 보여야할 슬픔의 표시를 경멸하거나 비판하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의 슬픔과 고통을 하늘 아버지께 몸으로 호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양식인 밥을 사양하는 행동이다. 죽음을 각오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밥을 주소서기도하는 사람이 음식을 끊는 것은 별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에 혼선을 가져온다는 사실도 강조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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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재물과 염려에 관하여(6:19~34)

몸을 가진 사람들은 물질을 필요로 한다. 천국의 사람들도 계속 땅에서 살아가므로 왕이신 예수님은 천국의 사람들이 물질, 재물, 돈에 대해 가져야 할 바른 태도를 알려주셨다. 재물에 관한 말씀은 단순히 용도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숭배, 두 주인을 섬김이라는 신앙적 차원의 일이라는 사실이 이 부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소서기도하는 사람들은 모든 물질을 이 천국에 맞추어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 우선 예수님은 재물을 이 땅에 쌓는 것은 어리석다고 경고하셨다. 벌거숭이로 왔다가 그렇게 가는 인생의 재물에는 한계가 있다. 천국이 왔으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이 열렸다. 하늘나라에 재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는 인간의 마음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재물 즉 인간에게나 필요한 가치를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늘 아버지와 비교하셨을까? 용돈으로 주신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과 용돈을 주신 아버지는 비교 개념이 아닌 비등가 개념인 것이다. 하나님을 섬겨도 돈을 섬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어리석어서 돈과 하나님, 재물과 재물을 주신 분, 물질과 창조주 하나님을 천칭 양편에 올려놓고 수시로 저울질한다. 때로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재물을 포기한다. 더 자주 인간의 마음은 재물을 선택하며 하나님을 포기 내지 보류한다. 우상숭배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재물에 눈멀어 온 몸이 어둡게 되고 온 삶이 어둡게 된다는 예수님의 분석은 이천여 년 전의 어제나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이런 점 때문에 염려란 바로 우상숭배이다. 가장 귀중한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목숨의 가치를 망각하고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마음을 온통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런 것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이 모두를 주시고 목숨을 주셨으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더 귀하신 분이다. 염려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세상을 다스리심을 믿지 못할 때, 의심할 때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과 본능이 반죽하여 구워내는 것으로서 감히 마음에서 하나님을 밀어내므로 염려란 우상숭배가 된다. 예수님의 적극적 충고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도움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적인 활동과 노력을 중지하라고 주신 말씀은 아니다. 염려란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만 인간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맬 뿐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람들을 위해서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염려란 항상 믿음의 반대밀이 된다. 아버지를 향한 강한 확신을 나약한 작은 믿음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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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먼저 할 것(7:1~12)

7장에는 논리적으로 구분하기 어렵고 그 연관성을 읽어내기 어려운 몇 말씀이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한꺼번에 같이 다루며 그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예 수님은 자신의 것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며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향해 남을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처지를 먼저 깨달으라고 하셨다. 티와 대들보는 남의 약점은 크게 만들고 자신의 약점은 줄이는 인간의 심리를 지적하신 반어적 비유어이다. 천국의 사람들은 남의 눈에 있는 것은 티로 보고 자신의 눈에 있는 티는 대들보처럼 크게 느껴야한다. 비판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장점을 크게 말하고 자신의 장점을 감추는 지혜, 남의 허물을 작게 느끼고 자신의 허물을 크게 느끼는 지혜, 천국의 사람들은 이런 기준을 가져야한다.

7절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지금 다스리시는 분, 모든 것을 주신 분, 또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을 전제하고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므로 부족할 때 필요할 때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예수님은 아들의 비유를 들어가시며 주실 것을 보장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의 손보다는 사람들의 손을 쳐다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멀리 계시고 침묵을 지키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보다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손이 더 크게 더 무섭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그렇게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는 주라 하셨다. “그러므로가 바로 이 논리를 도입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그대로가 우리의 행동 원칙인 것이다. 이웃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무언가 주는 사람들로 사는 것, 이것이 천국의 백성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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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요약 및 결론(7:13~20)

산상설교의 몸통 부분을 요약하는 이 부분에도 아름답고 유명한 말씀이 수록되어 있다.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요약의 형태를 가진 적극적 권고이다.

좁 은 문, 좁은 길이란 - 이 문맥에서 보면 - 앞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신 비유어다. 예수님의 설명 즉 완성된 율법이 쉽지 않은 것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천국의 복음을 외면할 것을 안 것이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좁은 길을 겨우 걸어 좁은 문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만큼 외롭고 어려운 길이지만 그것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넓은 문 넓은 길은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쉽고 편함을 지적하신 비유어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선택하고 이 길로 걸어가겠지만 끝에는 멸망이 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산상설교에서 떼어내어 삶의 한 특수한 체험 내지 고난의 삶과 결합시키는 설교는 이 전체 문맥 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생명을 얻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판별하는 기준은 없을까? 믿음이라는 기준은 이론적으로는 쉽게 제시되지만 느끼고 확인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다. 제 삼자는 조금도 확인할 수가 없다. 때로는 자신이 믿는 사람인지조차도 모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도 당사자의 믿음과 표명만으로는 누구도 확인하기 어려운 표시이다. 외부적 은사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구성하는 근거로서의 표식으로 사용되기는 어렵다.

예수님은 좁은 길을 지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에 이어 나무와 열매의 상관관계에 관한 비유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생명을 얻을 사람이라는 뚜렷한 흔적을 제시하셨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면, 다음의 진술 즉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는 원리는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귀결이 된다. 이 보다 더 확실한 표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천국의 사람들을 판별하는 기준으로도, 지도자들을 판별하는 기준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좋은 나무이며 반대로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나쁜 나무다. 이 표식에는 중간도 없고 혼합도 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말만큼 분명하게 아니오를 사용하셔서 천국의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시를 이 곳에 정립하셨다. 열매는 나무의 정체를 보여주는 천국의 사람들의 표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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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부: 하나님의 뜻을 따름(7:21~27)

예 수님은 이 부분에서 다시 어조를 바꾸신다. 이인칭 표현법을 떠나 다시 삼인칭 표현법을사용하셨다. 이 삼인칭 표현법을 우리는 마태복음 53~10절에서 청중을 특별한 조건하에 구분하는 표현법이라고 설명했다. 조건에 맞는 대상에게만 말씀하시는 방법이다. 이 부분의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도 팔복에 연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분을 결론부라 이름지었다.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주여부른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또 이 문맥에서 형식적인 호칭으로 보기는 어렵다. 낯선 사람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른 것을 통째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다른 요소와 함께 거론하셨다는 것은 일단 이 용어가 긍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도 아직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이 상황에서 누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최적의 후보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게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자세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교회 안의 사람들이다.

즉 예수님은 주여란 칭호를 형식적으로 사용하거나 입에 발린 체면상의 칭호로 취급하시지 않으셨다. 또 예수님은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는 행위, 자신에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거절하시겠다고 하심으로 산상설교를 통해서 선포된 자신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요 천국의 복음임을 확인해 주셨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뜻, 즉 산상설교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이곳에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설교를 마감하시며 예수님은 사람들이 - 제자들이든 무리들이든 - 설교를 시작할 때 선포되었던 말씀(5:3~16)으로 돌아가 자신을 검토하고 설교를 하시는 분과 설교의 내용에 개인적 인격적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자극하신 것이다.

이어 나오는 두 가지 비유는 이 점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며 복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첫 번째 비유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냄, 예언을 하며 많은 권능을 행함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 불법을 행했다는 조건하에 예수님의 거부권에 부딪친다. 또한 두 번째 비유는 유명한 집을 짓는 비유로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홍수와 파괴 혹은 존립은 최후 심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