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인가?

에반젤(복음) 2019. 8. 17. 10:10



마태복음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5-9)


신앙이란 관념의 세계가 아니다. 나로서는 이 명제를 달리 강조할 길이 없어서 자꾸만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신앙은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그것이어야지 우리의 머리만 하나님을 믿어서는 곤란한 일이다.

지금 마태복음 3장 5절 이하를 살펴보면 한 가지 이해 못할 사실이 있다. 세례요한은 지금 누구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있으며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의 거민 즉,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세례요한은 지금 로마 병정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며 헬라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이방인들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점을 지나치면 소위 회개의 메시지를 들고 이방으로 가기 쉽다. 그렇다고 이방족속(오늘날로 말하면 불신자나 다른 신을 섬기는 족속)은 회개가 필요 없는, 괜찮은 인간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이, 지금 세례 요한을 통하여 선포하고자 하는 그 회개의 대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회개를 부르짖는 요한의 눈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정작 회개해야 하고 세례 받아야 하는 백성은 이미 율법 아래서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세례요한은 왜 이미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외친 것일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했던 것일까?


'회개하라'는 말 속에는 이미 현재 상태에 대한 책망과 부정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현재 상태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밖에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세례요한이 하나님 잘 믿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로 만들겠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그렇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머리 속으로, 표면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믿지만 삶으로는 못 믿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던 셈이다.

겉으로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롬2:28)'고 했다. 세례요한에게 나온 유대인들이 표면적으로 유대인(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면적 유대인들이 못 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에도 회개를 외치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려면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외칠 일이 아니라, 큰 교회 앞마당에서 외쳐야 한다. 왜냐하면 정작 회개해야 할 사람들은 비기독교인(표면적 이방인)들이 아니라 기독교인(표면적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들이 회개해야 될 사람들인데 도대체 누구보고 회개하라고 떠들고 있는가! 오히려 자기들이 돈을 더 좋아하면서 어째서 세상더러 금전만능이니 불신풍조의 만연이니 하면서 혀들을 차고 있는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며, 아파트 평수도 줄이자며, 승용차도 함께 타자며, 말로만 떠들지 말고, 교회 크기부터 평수를 줄이고, 교회 차부터 사지 말일이다.


세상은 원래 돈밖에 없고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곳이니까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한다 해서 그게 어찌 '회개' 할 일이며 '잘못된' 일인가. 그것은 회개할 일도 아니고 잘못된 일도 아니다. 당연한 일이요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돈보다도 하나님이 행세해야 하는 교회라는 곳에서 돈들이 행세하고 있는 점이다. 돈으로 신앙이 채점되고, 돈으로 충성이 나타나고, 돈으로 천국이 거래되고 있는 이 엄연한 현실에 문제가 있다. 물론 신앙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이 말에 열 받을 필요 없다. 하나님의 일에 필요하다고 사기 쳐서 헌금 긁어내지 않고, 교회 직분을 맡기는 일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헌금액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교회는 오히려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머리로만 믿고 삶으로는 돈을 믿으면서 세상의 퇴폐를 나무라고 세상의 부정을 비판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메시지를 들고 로마나 헬라로 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례 요한이 바라본 유대인 역시 사도 바울이 지적한 바대로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 행하는 자를 옳다하는(롬1:32)'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교회를 안 나오던 사람이 교회 나와서 한 일년 지난 다음에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세례이며 유대인들이 돌이켜야 할 회개이다. 그들의 껍질적인 신앙이 내면화 되고 입술만의 경배가 마음의 경배로 바뀌는 삶의 실질적인 전환이어야 한다. 세례 요한의 회개 촉구는 지금 유대인들의 신앙이 본질을 외면한 껍데기라는 데, 성소와 지성소는 모른 채 성전 마당만 밟고 있다는 데(사1:12)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은 7절에서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극언을 퍼부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자. 아무리 자기가 잘 났기로서니 어떻게 당대의 저명인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설은 예수께서도 가끔 이용하시는데 요한이나 예수의 이러한 언행은 인간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문제를 '예수님이야 우리 주님이시니까, 우리 주님께서 그까짓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대수인가'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우리의 주로 보기 이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 공기를 호흡하며 그 물을 마시고 살아갔던 '한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예수와 동시대를 살 수 있고, 예수와 같은 시공을 점유해야만 비로소 우리는 예수의 예수됨을 알 수 있다.

목수의 아들로서 '오십도 안 된(요8:57)' 주제에 당대의 석학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극단적인 망언(?)을 퍼붓는 예수를 이해한 다음에 그의 '겸손'을 따져야 한다. 예수가 우리의 주이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언행이 아무래도 괜찮을 수는 없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설은 우리나라의 '개자식'같은 말과는 상당히 다른 성경의 문화적 배경을 지닌다. 독사, 뱀, 용 같은 짐승은 성경에서 언제나 사탄이나 마귀를 상징하는 언어였다. 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을 지닌다면, '독사의 자식'은 곧 '사탄의 자식'과도 같은 말이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이런 믿음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폭탄선언과도 같은 말이 '독사의 자식'이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도대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무엇을' 보고 그들을 '독사의 자식'으로 단정 지어 말했을까? 만약 그들이 정말로 '독사의 자식' 이 아니라면 그 때는 이 엄청난 '비판'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예수의 다음 말씀을 생각해 보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 이어늘…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요 8:39-44)

이 정도면 폭탄선언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천지가 개벽하는 선언이고 그야말로 까무러치고도 남을 욕설이다. 설령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했고 다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을 했기로서니, 어디 그런 일들이 그네들의 진심이었겠는가. 어찌 어찌 하다보니까 자기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다소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적도 있었을 것이고, 육신이 약하여 여의치 못한 적도 있었을 텐데 불문곡직하고'마귀의 자식'이라니! 이건 예수의 언행이 지나친 것 아니겠는가.

어디 그것뿐인가. 예수는 이 땅위에 무엇 하러 오셨던가. 바로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오셨음이 분명할진대 이렇게 충격적인 욕설로 -아무리 그 사실이 옳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감정을 건드리고 그들과 적대적이 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안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던만큼 그들의 신앙도 어느 만큼은 인정해 주고 현재의 상태에서 좀 더 나은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지도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예수는 그에게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니 그 아비가 마귀라느니 하는 극언을 참지 못하여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던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같으면 하나님을 잘못 믿는다고 마귀의 자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교회도 안나오고 하나님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야, 그것도 그들이 듣지 않는데서 '독사의 자식'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어 보겠다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금식하고 헌금 드리는 (옛날 유대인들이 그랬다) 신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무얼 얼마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다짜고짜 '독사의 자식'이라고 욕을 한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전후 사정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예수를 객관화하여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그냥 무조건 主일 수는 없다. 이런 예수가 그의 주인 사람은 그 역시 예수가 '독사의 자식'이라고 비난한 대상을 향해서는 당연히 '독사의 자식'이라고 욕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비판하는 대상을 향하여 오히려 긍정하고 칭찬하는 말을 한다면 이 사람의 주는 예수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돌을 던지면 따라서 돌을 던지고 예수가 돌에 맞으면 옆에서 같이 맞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머리로만 예수가 옳고, 삶으로는 바리새인들이 옳은 사람들이다. 머리로는 예수의 욕설을 이해하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그런 욕설에 부딪히면 펄쩍뛰고도 남는 사람들이다. 요한복음 8장에 나타난 예수의 논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 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이 친구들아, 너희들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고 주장한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겠느냐.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것은 주장할 문제가 아니라, 하는 일이 아브라함의 그것과 동일할 때 비로소 입증되는 문제이다. 너희들은 말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말로만 하나님의 백성이지 실제 하는 일들을 볼 것 같으면 순전히 마귀의 일이고 세상의 염려에 묶여 있는데 어떻게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겠느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이다. 아브라함이 심겨졌다면 아브라함의 삶이 나와야지, 삶은 순 엉터리인데 너희들이 아브라함을 너희 조상으로 '믿는다고'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 될 것 같으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믿게 하는 사람이 곧 사기꾼이다. 이런 사람들의 조상이 사탄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세례요한이 마태복음에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을 향하여,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 같은 삶을 살면 그 삶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회개와 세례 역시 마찬가지이다.

회개했다고 아니면 회개한다고 주장할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삶이 바뀌어야 한다. 삶이 바뀌고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어야 참다운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며 회개가 이루어져야 세례 받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불법을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의 기도를 했다. '하나님, 마음에는 그게 아니었는데 견물생심이라고 그저 육신이 약해서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의 기도를 하고 며칠 있다가 또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랬다면 이 도둑놈이 하나님 앞에서 통회자복 한 '회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삶이 바뀌지 않는 입술의 고백은 오히려 없는 게 낫지 않겠는가? 우리 말에도 있듯이 참으로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베드로 사도가 지적한대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울 것 같으면 (벧후2:22)' 그들의 회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옛날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훨씬 더 그러하다. 신자라고 떠들 일이 아니다. 주일날 성경 옆에 끼고, 식당에서 식사기도 하는 것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함인 줄 알면 크게 착각함이다.

자신의 삶이 자신을 증거 해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자신이 회개한 사람임을 나타내야 한다. 세례 받은 삶을 살아서 세례 받은 사람이 되어야지,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세례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나를 포함해서) 모두 헛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겠는가? 이 사실을 모르면 또 착각이다. 아무 열매나 맺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회개에 합당한 열매」여야 한다. 이제 그 열매가 무엇인지 같이 찾아가 보기로 하자.

마 3:8-10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우리는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참으로 저기 길가의 돌들을 가지고도 크리스천을 만들 수 있으시다. 교회 좀 다니고 헌금 좀 드렸다고 크리스천이 된 줄로 생각하면 크게 오해한 것이다. 금식기도하고 예배드렸다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줄로 믿는다면 어서 속히 꿈을 깨실 일이다. 그날이 오면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터이지만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마8:11-12)'이다.

여기 나오는 '나라의 본 자손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아도 오늘날 '기독교인'도 이 말씀에 해당되는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쫓겨난 그 자리에 자기들이 동에서 서에서 몰려들어 앉을 것으로 믿고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성경말씀은 이 천년 전의 유대인들에게만 외치는 메시지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땅에 유대인들이 어디 있는가? 오늘날 이 땅에는 동이나 서로부터 몰려들 사람들은 있어도 유대인은 없다. 이래가지고서야 성경이 어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겠는가? 성경은 오직 이 천년 전에 죽어버린 하나님의 넋두리일 뿐이다. 이 천년 전에 예수께서 생각하시던 '나라의 본 자손'이 유대인이었다면 오늘날의 그 본 자손은 기독교인들이어야 한다.

동이나 서에서 몰려와 하나님의 나라에 앉을 사람들도, 이 천년 전에는 이방인들을 지칭한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이교도 아니면 무신론자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초림 예수는 유대인들 손에 죽었고 재림 예수는 기독교인들 손에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돌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치는 니체 같은 사람도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천년 전에 율법적인 신앙생활에 푹 젖어 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셨듯이 오늘날 은혜도 아니고 율법도 아닌 요상한 신앙생활에 빠져있는 '크리스천'을 향해서도 '독사의 자식'이라 힐책할 것이다.

문제는 표면이 아니라 이면이며 관념이 아니라 삶이다. 내가 세례 받고 회개했다는 주장을 할 일이 아니라 실제로 세례 받은 자의 삶, 회개한 자의 모습이 나와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그에게 세례 받으러 나오는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외쳤다. 세례 받으러 나오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환영할 일도 아니고 칭찬할 일도 아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회개했다는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대체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을 말함인가?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오해는 비단 어려운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용이 쉬우면(?) 쉬울수록 오해의 여지가 많고 착각의 정도가 깊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만 해도 그렇다. 물론 회개에 대한 오해가 열매에 대한 오해까지 이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흔히 불신자의 삶이 신자의 삶으로 바뀌는 것 - 주일을 지키며,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 드리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등 - 그리고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사는 것 등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그때부터 치열한 자기투쟁의 길목으로 들어서는데, 여기서의 자기투쟁이란 다시금 율법을 지키고 선하며 깨끗한 생을 영위하고자 하는 힘겨운 싸움을 말한다. 물론 대다수의 신자들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아니 애초부터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다. 그러면 다시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눈물과 통곡으로 회개한다. 이러한 눈물과 통곡은 자신을 정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는데 이 때 신자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은 이러한 후련함과 평안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 줄 아는 점이다.

어쨌거나 이런 정화의 의식(儀式)을 거친 신자는 또 다시 세상의 삶으로 돌아오고, 세상의 삶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법을 지켜보고자 하는 힘겨운 투쟁 가운데 서게 된다. 그 다음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나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고 살아본 사람만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이렇게 범죄, 회개, 기쁨과 평안, 또 다시 범죄, 또 다시 회개, 또 다시 기쁨으로 도전하는 다람쥐 쳇바퀴를 돌면서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려니, 그래서 우리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려니, 그래도 하는데 까지 노력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려니 하면서 살아간다. 이 얼마나 자가당착이고 모순투성이의 빈약한 기독교인가!

그러나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오늘날 이 땅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생각과는 판이하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분명히 찍혀 불에 던지울 것이라는 선언이다. 여기에 예외가 없다.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실제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앞에서 얘기한 기독교인들의 삶은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니라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삶이다. 열매를 맺은 것과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과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했기로서니 실제로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생각해 보자.

오대 독자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가 아무리 불공을 드리고 산신령을 찾아가고 적선을 하고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아기 낳는 꿈을 꾸고 별짓을 다 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아기를 낳지 못하면 이 따위 일들이 모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들과 아기를 낳는 일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불공을 드리면 없던 아기가 저절로 생기는가. 40일 금식기도를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듯이, 우리도 아기를 가질 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때로 대를 이을 아기가 없던 차에 불공을 드려서, 혹은 산신령께 치성을 드려서 아기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모두 그들의 마음이 그만큼 아이 갖는 일에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아이는 부처님이 주는 것도 아니고?삼신 할매가 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있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천하없어도 아이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생겨난다. 아이가 없는 것은 남자나 여자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지 그들의 정성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돈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신자들의 오해 가운데 큰 문제 중 하나는 '열매'이다.

열매란 우리의 모습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활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만물을 보자. 열매란 무엇인가? 열매는 결국 맨 처음에 뿌려진 '씨'이다. 콩의 열매는 콩이고 팥의 열매는 팥이다. 사과 씨를 심으면 사과가 열리고 대추씨를 심으면 대추가 달린다. 소는 송아지를 낳고 말은 망아지를 낳는다. 소의 열매는 송아지이고 말의 열매는 망아지이지, 그들이 농사일을 거들고 달구지를 끈다는 부수적인 선악의 일이 아니다.

우리들의 오해는 콩의 열매를 콩으로 생각하지 않고 콩깍지로 불쏘시개를 하는 것이라거나, 소의 열매를 송아지로 생각하지 않고 소가 일굴 수 있는 논밭의 평수를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나 송아지를 낳지 못하는 소도 일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열매가 아니다. 물론 소가 송아지를 낳는 것도 일이요 콩이 콩을 맺는 것도 일이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일은 힘이 들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오히려 즐거움이기도 하다. 건강한 어른은 누구나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사람의 열매는 사람일 뿐, 그 사람의 선행이나 의로움이나 깨끗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는 그들이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아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아이가 생길까봐 염려하는 세상 아닌가.

열매는 맺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맺히는 것이다.

자신은 스스로의 삶을 살았을 뿐인데 어느 날 보니 열매가 맺혀 있더라는 고백이 나와야 진짜 열매이다. 콩도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고 말도 망아지를 낳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때가 되면''저절로' 그렇게 맺히고 열릴 뿐이다. 이런 것이 아니면 '열매'가 아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역시 마찬가지이다.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맺힐 수밖에 없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나 자신이 스스로 성결한 삶을 살아 보겠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켜보겠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노력을 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삶이란 무엇이고 왜 열매를 맺는 노력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예를 들어보자.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이 어린아이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면 열매가 맺혀지는가? 만일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열매를 맺겠다고 고민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열매 없음에 대하여 자책하고 자괴한다면 여러분들은 무어라고 얘기할 것인가? 이건 대체 울 일인가, 웃을 일인가? 어린아이가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자라가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어느 때가 될 때까지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어른을 향하여 자라가는 삶이 없는 어린 아이에게 열매는 언어도단이다. 열매 없음을 회개할 일이 아니라 자라가야 한다. 도덕적인 선악을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 생명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요즘교인들은 영이 자라야 할 시간에 애를 낳으려고 한다.

어른이 되면, 그래서 결혼을 하면 열매는 저절로 생기게 되어 있다. 열매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좋아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맺은 열매를 좋아하기 보다는 그렇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정도로 자란 우리가 좋으신 것이다. 회개라는 말의 의미가 돌이키는 것이고, 그 돌이킴이 세상에서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당연히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이런 삶의 축적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란 단순히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더구나 교회 출석하는 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을 빌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삶이란 '육신을 좇아 살지 아니하고 영을 좇아 사는 삶(롬 8:1,4)'을 뜻한다.

그러므로 회개란 '육신을 좇아 사는 삶에서 영을 좇아 사는 삶으로의 돌이킴이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영을 좇아 살아간 사람이 맺게 되는 열매'이다. 그러면 또 다시 제기되는 문제가 있는데 '육신을 좇아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며 영을 좇아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여기서 이 질문을 설명해 갈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영을 좇아 사는 삶은 이미 육신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선행도 악행도 구제도 자비도 육신적인 일이 있고 영적인 일이 있다. 선행이라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선행이 '육신적'일 경우에는 그것은 '육신을 좇아 사는 삶'일 뿐이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다음 메시지를 주의 깊게 묵상해 보자.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A good man out of the good treasure of his heart brings forth good things, and an evil man out of the evil treasure brings forth evil things, NKJV).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3-37)

이 말씀도 앞으로 강해하겠지만 먼저 간단히 언급하자면 예수는 여기서 나무를 사람에 비유하고, 나무의 열매와 사람의 말을 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사람의 '열매'는 '그의 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가시나무가 포도를 맺을 수 없듯이 악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하며, 선한 말을 했느냐 악한 말을 했느냐가 심판 날에 초점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논리 - 악한 자는 선한 말을 할 수 없다 - 가 우리의 것이 될 때 우리도 선한 말이라는 "입술의 열매"(히 13:15)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