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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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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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 책의 이름은 1-4장과 26-27장에서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목적으로 남자들의 수를 세었던 일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계수한 것은 그 민족이 애굽을 떠난지 2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고, 두번째 계수는 38년 후,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이 계수는 전민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싸울 수 있는 남자들만을 센 것이다. 처음 인구조사에서는 싸울 수 있는 남자가 603,550명이었고, 두번째는 601,73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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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민수기는 구약에서 광야의 책이다. 이 책에서는 그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실패한 일과, 불신적인 구세대가 죽기까지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것을 “역사상 가장 긴 장례 행렬“이라고 묘사하는 사람도 있다. 구 세대 중에서는 갈렙과 여호수아만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는데, 이들은 가데스 바네아에 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여, 돌아가자는 그 민족의 결정에 반대하였다. 모세조차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바위에게 말하는 대신 바위를 쳤을 때 범한 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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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인 교훈 : 민수기는 히브리서 3-4장과 고린도전서 10장 1-15절에서 설명된 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굉장한 영적인 교훈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믿음을 영예롭게 하시며 불신앙을 벌하신다. 광야에서 범한 이스라엘의 모든 죄의 뿌리에는 불신앙이 있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여 그들이 받을 유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믿음으로 가나안을 주장하지 못하고 불신앙 가운데서 광야를 방황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다. 어린 양의 피로써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들의 유업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 아니다. 가나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영적인 유업(엡 1:3) 곧 믿음으로 주장되어야 할 유업을 모형으로 보여 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하듯이 가나안은 전쟁과 축복의 땅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정의 장소(그들 자신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믿음으로 얻게 될 그들의 유업에 들어가는 데에 실패한다.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바와 같은 정복자가 되는 대신 민수기에서 설명된 방황자가 된다. 그렇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으나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거인들을 정복하시고 성벽을 무너뜨리시며, 그가 약속하신 유업을 그들에게 주실 것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요단강을 건너려 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장하기 위해 믿음으로 전진하려 하지도 않는다.
민족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동안 수가 증가하지 않은 것에 유의하는 일은 흥미있다. 사실상, 두번째 인구조사는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남자의 수가 1,820명이 줄어들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 민족은 불필요한 고난을 견디며 38년을 낭비했으면서도 수가 늘어나지 않았으며 “죽음의 행진“을 하는 동안 내내 하나님을 높이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불신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일이다. 시간도, 노력도 낭비하게 하며, 축복도 잃게 한다. 교회가 믿음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그 결과로서 영적으로나 수적으로, 물질적으로 퇴보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신뢰하도록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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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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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외된 구 세대/1-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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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됨/ 1-4장
권고됨/ 5-10장
징벌됨/ 11-12장
정죄됨/ 13-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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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리된 새 세대/ 21-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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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1-25, 33장
계수/ 26-27장
제사/ 28-30장
유업의 분배/ 31-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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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9-10
광야 생활-민수기 9-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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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겪는 경험들을 설명하며, 이 경험들을 통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경험들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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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9-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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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을때 지파를 주신다(9:1-14).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놀라운 구원을 얻은 2년째 되는 해에, 그들은 유월절을 맞고 있었다. 이 절기는 어린 양의 피로 구원되었음을 기억하게 하였다. 그들이 받은 축복마다 피를 통하여 받지 않은 것이 없으며, 오늘날 교회도 그러하다(엡 1:3-).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체를 만져서 의식상(儀式上) 더럽혀졌으며, 그들이 이 절기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자 하였다. 모세가 그 답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고 하나님께로 물으러 나아가는 태도는 참으로 호의적이다(약 1:5 참조). 여호와는 이들이 둘째 달에 이 절기를 지키도록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모세의 굳은 율법 아래서조차도 환경이 요구했을 때는 자유로움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대하 30:13-15 참조). 니고데모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내릴 때는 유월절의 금요일이었으며 자신을 더럽혔으므로 그 절기에 참여할 수 없었음을 유의하자(요 19:38-42).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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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 행위를 지시하신다(9:15-23).
우리는 전에 출애굽기 13장 21-22절에서 길을 안내하는 구름을 보았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켜 주시는 그 하나님이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의 길을 안내하심을 알게 되는 일은 큰 격려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은 그 민족을 그의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앙이 그를 방해하였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 현재의 생활에서 교사와 안내자이신 성령을 보여 준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인도하신다(16절). 사실 하나님으로부터의 지시없이 진이나 그 일부가 이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위험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순례의 백성들이어서 천막에서 살며 어떤 순간에도 지시가 있으면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22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의 계산을 초월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힌다. 어떤 때는 그 구름이 며칠, 또는 몇 달씩 지체했을 것이고 일년 내내 기다렸을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때로는 낮에, 또 어떤 때는 밤에 인도하셨을 것이다(2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계신 한, 낮이나 밤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필요한 경우에는 경고하신다(10:1-10).
이 두 개의 나팔은 구속을 의미하는 금속인 은으로 만들어져 진을 이동시키기 위하여 총회를 소집할 때 사용하였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막 바로 옆에 살았으며 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진을 깨워 알리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었을 것이다. 이 구절들을 읽어 보면 나팔이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보게 된다. 즉, 성막 문에 진을 모을 때(3, 7절)와 지파들이 수령들을 함께 모을 때(4절), 전쟁이나 진의 이동을 알리는 경계 신호로(6-9절), 특별한 날이나 새로운 달이 되었을 때(10절) 등의 경우에 사용되었다. 나팔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연합시킨다는 것은 흥미롭다. 하나님께서 그의 총회를 소집하실 때, 곧 교회가 휴거할 때 나팔소리가 울려날 것이다(고전 15:51-53/살전 4:16-17/계 4:1 참조). 그가 흩어진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실 때도 나팔이 울려날 것이다(마 24:31/레 23:23-25 에서 나팔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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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백성을 질서있게 인도하신다(10:11-28).
각 지파는 성막 주위의 특정한 장소에 진을 쳤다. 그리고 각 진은 나팔의 명령에 따라서 이동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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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10:29-36).
호밥은 모세의 처남이었고 르우엘은 모세의 장인인데 이드로라고도 했다(출 2:18-21/출 3:1 참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모세는 육신의 팔에 매달리려고 한다! 구름과 법궤가 그 민족의 선두에서 이것은 그들이 필요로 한 모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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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1-12
2. 자기 백성을 벌하시는 하나님(11-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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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탁월한 증거들이 나온 후에 백성의 불평을 읽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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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불평했다(11:1-3)-그래서 하나님은 불을 보내어 그들을 벌하셨다. 불평했던 바로 그 백성이 모세에게 도움을 청한다. 모세는 친절하게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다베라는 “불사름“이란 뜻이다. 하나님께 불평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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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탐욕을 품었다(11:4-35)-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고기를 공급해 주셨다. “혼합된 군중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마음은 애굽에 있었다. 오늘날의 많은 세상적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는 대신 애굽의 육신적인 일들을 기억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늘의 만나에 대해서 불평하였다. 8절은 그들이 만나를 바꾸어 보려고 온갖 힘을 다했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것을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며 과자를 만들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애굽의 음식과 같은 맛을 내려고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출애굽기 16장 31절은 만나의 맛이 꿀과 같았다고 했는데 8절은 유대인들이 만나를 “개량“하려고 했을 때 맛이 기름같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재하는 육성(肉性)은 불행한 결과들을 초래한다! 중의 하나는 지도자들을 낙담시키는 일이다(10절 이하). 모세 자신도 하나님께 불평한다 ! 그의 기도 중에 “내가“, “나의“, “나에게“가 자주 나오는 것에 주목하자.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모세가 알아야만 했던 일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셨고, 먹이셨으며, 광야에서 고기를 먹이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기도는 믿음을 소멸하는 길로 인도한다. 마침내 모세는 포기하려 한다. “나는 할 수 없나이다.“ 출애굽기 18장 18절에서 그의 장인이 한 말을 찾아 보자. 물론, 혼자서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이끄시므로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죽여달라고 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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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두 가지 필요를 다 채워주셨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을 돕도록 70장로들을 주셨고 갈망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요청한 고기를 주셨다. 그러나 두 경우에 있어 하나님의 응답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권능을 주게 한 똑같은 영을 70장로들에게 주셔서 그들을 돕게 하셨다. 그러나 그 영을 모세에게만 주심으로 그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모세에게 주실 수도 있으셨다. 그리고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비록 먹기는 했을지언정 큰재앙으로 인해 죽었다(시 79:25-32/시 106:13-15).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만 그 응답이 우리에게 전혀 축복이 되지 않음을 알게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26-30절에서 모세는 다른 두 사람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예언을 하는데에도 아무런 질투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것은 위대한 사람의 표시이다. 그렇듯이 모세에게도 우리 모두가 실망한 날들이 있었으나 그의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었다.
31절에 보면 메추라기떼가 바다에서부터 몰려와 땅 표면에서 두 규빗 위에 내렸으며 유대인들이 잡기에 충분할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백성은 그 고기를 모으는데 하루 종일과 이틀 밤을 보냈다. 이들 중에서 하늘의 만나를 모으는 데 충실했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 “기브롯 핫다아와“라는 이름은 “탐욕의 무덤“이란 뜻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롬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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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이 비판했다(12장)-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셨다. 아론은 대제사장이었고 미리암은 여선지자로서(출 15:10-21) 둘은 그의 동생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다. 논란의 표면적인 이유는 모세의 아내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구스사람(이디오피아인, 즉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참된 이유는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질투였다(2절). 모세는 그들과 싸우기를 거절함으로 그의 온유함(겸손)을 증명했다. 하나님은 자기 종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사 54:17).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분명히 미리암이 주모자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문둥병에 걸렸고 그녀의 죄는 7일 동안 진의 행렬을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아론은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모세는 그의 누이를 위해 기도하였다. 이는 참된 사랑과 겸손의 증거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서로 시기할 때 이는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온 회중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새 아내인지 아니면 오래 전에 얻은 십보라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이 제안하듯이 그녀가 흑인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아마도 두번째 결혼일수도 있겠으나 십보라가 죽었다는 내용은 어느 곳에도 없다. 8절에 나오는 “명백히“란 말은 “솔직히“란 뜻이다.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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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3:1-27
열 두 명의 정탐군-민수기 13-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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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4장은 이 장들에 대한 신약적인 주해이다. 이 부분의 핵심 사상은 불신앙이다. 이 사건들에 나타난 불신앙의 증거들에 대해 유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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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탐군의 파견(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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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장 20-23절을 읽어보면, 정탐군들을 보내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이 아니라 백성들의 욕망이었던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이 계획을 허용하신 이유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진실로 어떠한가를 나타내 보이는 데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이 어떠하며, 어떤 민족들이 살고 있으며 그가 그들의 적을 어떻게 멸하셔서 약속된 유업을 그들에게 주실 것임을 여러 번 말씀했었다. 그러므로 정탐군들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슬픈 일이지만 인간의 본성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기를 더 좋아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에 의존하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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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 땅을 정탐하였고 놀라운 과일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나쁜 보고를 가져와 백성들의 마음을 실망시켰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그 민족 중 아무도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지 않았다! 이 열 명의 정탐군들은 오늘날의 여러 그리스도인들을 상징으로 보여 준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업을 “정탐하였고“ 하나님의 축복이란 열매를 맛보기도 했으나, 그들의 불신앙은 믿음으로 들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가지게 된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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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진급“을 주목해보면 흥미롭다. 민수기 11장 28절에서 그는 “모세의 종“으로 불리워졌으나 결국은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다(수 1장). 출애굽기 17장 8-16절에서는 그가 군인이었고, 출애굽기 24장 13절에서는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있었고, 출애굽기 33장 11절에서는 성막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민수기 13장은 그가 정탐군 중의 한 사람임을 보여 준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든지 성실했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맡은 책임이 하나 하나 진보되어 갔다(마 25:21 참조)."
민 13:28-33
2. 그 땅에 가기를 거절함(13: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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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의 정탐군들은 그 땅의 영화로움을 자세히 설명하고는 “그러나...“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단어는 대개 불신앙을 표시하는 말이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인들을 보았고, 자신들을 메뚜기같이 보았으나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다. 그들의 눈은 장애물들을 보았으나, 그들을 거기까지 인도한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다! 갈렙은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하여 참된 믿음을 보여 준다. 반면에 백성들은 “우리는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불신앙을 나타낸다. 그 땅의 축복을 보고하는 대신 열 명의 정탐군들은 어려움을 강조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 대하여 “나쁘게“ 보고하였다. 불신앙은 언제나 문제거리를 보지만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해답을 바라본다.
들어가기를 거절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유업을 누리기를 거절하는 신자의 모형이다(히 3-4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안식과 축복에 들어가 모든 필요에 대하여 그를 신뢰하는 대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제거리와 장애물들을 보고 안식을 얻지 못한 채 방황하며 그들의 축복들을 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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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4:1-39
3. 지도자에 대항하여 반역함(1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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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5장에서 우리는 큰 승리를 얻어 노래부르는 이스라엘을 본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망 중에 울고 있다! 그들은 노래를 잊었던가?(출 15:14-18 참조).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반역과 불신앙의 태도로 그를 시험하고 있다(22-23절).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세를 교체시키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욕망을 표현할 때까지 기다리셨으며, 이제 행동을 개시하셨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것이 반역일 뿐임을 인식하고 있었다(9절). 하나님의 영광이 갑자기 나타났고 모세에게 말씀이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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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제의(11-12절)-하나님은 전 민족을 멸망시키시고 모세의 가족으로 새 민족을 만들려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 겸손과 사랑이 놀랍다! 모세는 자기 자손들이 지금 인도하고 있는 민족들과 다를 바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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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중재(13-19절)-이 일이 있기 바로 전에 모세는 그의 백성이 그토록 짐스러워서 불평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그들의 행위를 변호하고 있다! 그는 참된 목자의 마음을 가졌다. 그는 자기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모세는 하나님께 그의 약속과 그의 성취하신 일을 상기시킨다. 위태로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자비하심과 용서를 상기시킨다(출 33:18-23/출 34:5-9 참조). 이 장면에서 모세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유업을 기꺼이 포기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하나님의 심판(20-39절)-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의 통치에 있어서는 죄의 쓴 결실을 거두게 하셔야 했다(삼하 12:13-15 참조). 먼저 하나님은 백성들이 요구한 것을 주시어 그들이 광야에서 죽게 될 것임을 알린다(2, 28-30절).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그들의 믿음과 충성으로 인해 이 심판에서 제외되었다. 백성들은 자녀들의 일로 인하여 안달을 했으나 그들이야말로 그 땅에 살며, 그 땅에 들어갈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40일간 그 땅을 정탐했으므로 40년 간 그 민족을 심판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동안 광야를 방황하도록 하실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와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불신앙의 마지막 유대인이 죽어야 그 민족은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되는 것이다! 결국 나쁜 보고를 한 열 명의 정탐군들은 재앙이 내려 즉시 죽임을 당했다(37절).
하나님께서 믿음을 높이시고 불신앙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믿음은 순종으로 인도하고 불신앙은 반역과 죽음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약속들과 확신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승리 가운데 행할 수 있을 때에 불신앙으로 방황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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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4:40-45
4. 하나님없이 싸우려고 함(14: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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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얼마나 변덕스러운 것인지! 한 순간 그 민족은 그들이 처한 곤경 때문에 불평하며, 다음 순간에는 무모하게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축복을 떠난채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죄를 고백했으므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어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세가 그들에게 경고했으나 그들이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믿음으로 행하고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육은 언제나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에게 만족한다. 이러한 예를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다(눅 22:31-54).
남자들이 산 꼭대기에 진을 쳤고, 적들은 이들을 패배시켰다! 이 모든 모험은 분수를 모르는 주제넘은 일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기회로 살고 있었다. 그들의 외관적인 회개와 열심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믿음으로는 어떠한 일도 결코 할 수 없다. 그 백성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과 그의 뜻에 굴복하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광야를 방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밖에서 패배의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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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장은 믿음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모든 약속들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에 근거하고 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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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6:1-18
고라의 반역-민수기 16-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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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의 반박“(대항하여 말함)은 마지막 때의 거짓 선생들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유다서 11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모세의 권위와 아론의 제사장직분(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속죄제도)에 대항하는 연합된 반역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임이 분명한데(출 6:21), 이로 말미암아 반역이 보다 심각한 것으로 대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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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세와 아론에 대한 고라의 반역(1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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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는 성막에서 수종드는 일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레위인이었다. 그는 또한 제사장으로 섬기기를 원했다(10절). 물론 이런 태도는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는 직접적인 반역이었다. 왜냐하면 성막 임무들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고라는 혼자서만 반역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의 잘 알려진 자들, 아마도 대부분이 레위인이었을 것인데 250명의 족장들을 모았고, 야곱의 장자 르우벤의 지파에서도 세 사람이 합세하였다. 이름이나 수나, 단결이나 태도에 있어 이 반역은 아론과 모세에 대항하는 강력한 경우였던 것 같다.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론을 거부했던 반면 다단과 아비람과 온(장자 르우벤의 자손들)은 모세의 권위에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이 음모에 함께 단결하여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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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은 공격의 참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3절에서 그들은 민족 전체가 “제사장의 나라“(출 19:6)이므로 모세와 아론은 지도자의 지위를 차지할 권리가 없다고 논란을 벌인다. 물론 이 반역은 자기 추구와 시기심에 근거한 것이며, 이 사람들은 회중 앞에서 “자신을 높이기를“ 원했다! 분명히 전 민족이 하나님께 거룩하였지만 하나님은 자기 뜻에 따라서 몇몇 사람들을 지도자의 지위에 두셨다. 오늘날 교회도 이와 같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사람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치리하는 사역을 위하여 영적인 은사들과 영적인 직분들을 주셨다(엡 4:15-16/고전 12:14-18). 성경은 “영적인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격려를 하지만(고전 14:1) 다른 사람의 영적인 직분을 사모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지도자의 지위를 원하면 그의 성품과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이 거기에 합당함을 증명케 할 일이다(딤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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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아론은 스스로 방어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방어하시게 했다. 모세는 고라와 그의 추종자 250명에게 향로들(향을 태우는 항아리)을 성막으로 가져오게 했으며, 여기서 누가 옳은지를 하나님이 나타내시도록 했다. 모세는 다단과 아비람을 오라고 불렀으나 그들은 모세의 권위를 부정하였으며 복종할 것을 거부하였다! 25절에서 모세가 그들에게로 가는데 그의 방문은 축복이 아니라 징벌을 뜻한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실패에 대하여 그 사람들이 모세를 어떻게 비난하는지 유의하자(13-14절). 그 길을 가로막은 것은 그들 자신의 불신앙이었다.
오늘날 말세의 징표 중에 하나는 권위에 대한 반역으로, 모든 면에서 제멋대로인 점이다. 모세에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아론에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은 제단, 곧 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거절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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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6:18-35
2. 모세의 권위에 대한 하나님의 옹호(16: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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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반역자들을 심판하셨다. 여호와께로서 온 불이 250인(35절)을 죽였고 땅이 입을 열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그들에 속한 모든 소속과 소유물들을 삼켰다. 26장 11절에서 고라의 가족은 멸망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 “고라 자손의 시“(시 84, 85, 88편)가 수록될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고라의 자손들은 분명히 제사장이 아닌 겸손한 사역자들로 만족하였다. 그들은 시편 84편 10절에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기록하고 있다(“악인의 장막“에 대해서는 민 16:26 참조). 몇 사람들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죽게 되는 것은 참혹한 일이다. 이 반역이 끝나기 전에 14,950명이 죽었다(49절). 베드로후서 2장 10-22절을 읽고 “권위를 훼방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항하는 반역을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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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6:36-17:13
3. 아론의 권위에 대한 하나님의 옹호(16:36-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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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들의 향로를 아론에게 주심(16:36-40)-모세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250개의 향로들을 모아서 놋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고 말하였다. 누구든지 제단에 오는 사람은 언제나 놋단을 싼 편철을 볼 것이며 반역의 죄가 그토록 참혹한 심판을 받는 것임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이 향로들은 왜 거룩한(성별된) 것이었는가?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가르치는 특정한 방법으로 그 향로를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향로를 “고물“이나 보통 용구(用具)로 취급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심판의 충격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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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이 백성을 중재하도록 허락하심(16:41-49)-당신은 아마도 250명 이상의 죽음이 공포를 일으켰으며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 바로 다음 날 그들은 다시 반역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 법이나 심판이 아무리 많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결코 변화시킬 수는 없다. 대중은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하여 운집해서 “살인자들“로 고발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의 종들을 방어하셨다.
모세가 편협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그 재앙이 백성을 멸망시키도록 버려두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그의 형으로 하여금 자기 향로를 가지고 재앙 복판에 들어가게 함으로 심판을 멈추게 했다. 그 백성은 그들을 향한 모세의 사랑과 희생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였다. 아론은 문자 그대로 그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그 재앙을 막았다. 그의 향로 하나가 반역자들의 250개 향로들보다도 더 많은 일을 성취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아론은 우리 구세주의 사역을 상징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안전한 곳을 떠나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셨으며 죄의 삯에서 우리를 구하셨다. 이 무대에서는 모세가 그 민족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제사장만이 죄있는 백성을 위해 중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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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심(17:1-13)-하나님은 이제 아론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권위를 단번에 모두 확정지으려 하신다. 백성들은 아직도 가르침을 받지 않았으므로 모세는 각 지파마다 지팡이 곧 죽은 막대기를 가져다가 성막 안의 법궤 앞에 두라고 지시했다. 꽃 핀 지팡이가 하나님이 제사장 직분을 위해 선택한 사람임을 나타내 줄 것이었다. 8절은 아론의 지팡이가 싹이 났을 뿐 아니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고 말해 준다. 다른 지팡이들은 그대로 죽어 있었으며, 족장들은 죽은 지팡이를 도로 가져갔고,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아론을 제사장으로 임명한 증거로, 그리고 민족의 반역을 증거하기 위해 성막에 남겨졌다.
지팡이에 순이 돋은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다. 부활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그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제사장이심을 선포하셨다. 모든 다른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관여되어 있으며, 명성이 높고, 진지하게 일한다 해도 모든 다른 제사장 직분은 거부되었다. 지극히 높은 한 제사장, 한 제사, 그리고 하늘을 향한 유일한 길만이 있을 뿐이다. 히브리서 10장을 읽자. 오늘날에도 제사장 직분을 넘겨받으려고 감히 대드는 고라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12-13절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고 두려워함을 주목해서 보자. 15,000명 이상의 죽은 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죽은 지팡이에서 난 조용한 순이 성취할 수 있었다!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몇 가지 실생활에 적용시킬 점이 있다.
하나님의 종은 자신을 스스로 방어할 필요가 없다.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시킬 때는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이며 종을 방어하실 것이다(시 37 참조).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자신을 스스로 변호한 것은 교회를 영적으로 돕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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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대항하는 반역은 위험한 죄이다. 오늘날은 사방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심판하실 것인지 궁금해진다. 악한 사람들이 영적인 권위의 자리에 앉고 싶어한다. 지교회들에서도 이런 면을 본다. 영으로 행하며 열매맺는 생활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하지 않고 영적인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또는 여자)을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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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권위가 있다. 그는 살아 있는 말씀이시며 살아 있는 제사장이시다. 더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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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0:1-13
놋뱀-민수기 20-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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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두 가지의 모형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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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얻어맞은 반석이신 그리스도(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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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7장 1-7절에서 이미 모형에 대해 소개를 받았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반석으로 상징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반석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백성은 물 없이는 살 수가 없었으며 오늘날 우리는 생명수 없이 살 수 없다(요 4:13-14/요 7:37-39). 성경에서 하실 물은 성령의 모형인데 이는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만족시켜 주신다. 씻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며, 이 말씀은 깨끗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요 15:3/엡 5:26).
두 장면을 대조해서 보는 것이 유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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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7장 민수기20장
반석을 치라고 하셨다 반석에게 말하라고 하셨다
모세의 지팡이로 폈다 아론의 지팡이로 폈다(9절)
물이 나왔다 물이 나왔으나, 모세가 심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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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한 번만 죽으실 수 있으시다. 모세가 반석을 두번째 쳤을 때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고 모형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모세가 첫번째 쳤을 때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신의 지팡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율법의 저주로써 얻어 맞은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그러나 모세는 아론의 지팡이를 사용하라는 말씀을 들었으며(17장) 이 지팡이는 제사장의 손에 들린 생명의 지팡이였다. 바위를 치지 말고 말로 하라고 하신 데에도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살아계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우리가 필요해서 간구하는 바 영적인 축복들을 주신다. 한 사람이 구원을 여러 번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령의 은사도 반복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할 때 성령을 한 번에 받는다. 그리스도께 나아와 간구할 때 성령의 충만함은 여러 차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심판하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주된 이유는 그가 자신을 높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이다. 백성을 “패역한 너희여“라고 부르며 “우리(아론과 모세)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교만과 불신앙의 증거이기도 했다(12절). 모세의 온유함은 최강의장점이었지만(12:3) 바로 이 점이 죄의 공격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베드로가 용감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으나, 그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바로 이 점에서 실패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처리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축복들을 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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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1:1-9
2. 들려진 놋뱀이신 그리스도(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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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뱀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어떻게 상징하는지 주목해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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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성-백성이 두 가지 방법으로 죄를 범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말을 했으며 모세에 대항하는 말을 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법의 이중성을 발견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으며 서로간에도 죄를 범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죄들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왔으며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는다(요 3:16-18).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의 불뱀에게 물린 상태에 있는 것이며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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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은 그들의 재앙을 모르는체 할 수도 있으셨다. 그들은 죽을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과 은혜로 하나의 해결책을 제공하셨다. 7절에 나오는 모세의 중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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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뱀-모세가 또다른 뱀을 만들어야 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전에 있던 뱀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데 놋뱀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입으신 분이다(고후 5:21). 놋은 심판을 의미하는 금속이며,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다. 모세의 손에 들린 뱀이나 선반 위에 둔 뱀은 효력이 없었다. 그 뱀은 들어 올려져야 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야 했다(요 3:14/요 8:28 /요 12: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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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백성들은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쏘는 것을 이기는 것이었다. “쳐다본즉 살리라.“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었다. 고통을 받는 백성이 구원을 받은 것은 물린 것을 모르는 체 해서나, 뱀을 때려서나, 약을 바르거나, 도망했기 때문은 아니다. 진 중앙에 높이 세워진 뱀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사 45:22). 놋뱀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성막과 관련되지는 않았음을 눈여겨 보자. 제사를 아무리 많이 드려도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유용성-뱀은 구석에 숨겨져 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보고 생명을 얻을수 있도록 진영 한복판에 세워졌다. 그리스도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오늘날 가까이 계시며, 그를 통하여 치료함을 얻는다(롬 10:6-13). 이 치료법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오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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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쳐다봄으로써 살게 되므로 죽어가는 사람이 값을 치를 일은 없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왜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구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믿음으로 살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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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함-그 하나의 들려진 뱀은 온 진을 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뱀을 쳐다보고 그 다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제물을 가져오거나 더 잘 하겠다고 약속을 하여 구원받은 것도 아니다.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현 세대와 그리고 영원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시기에 넉넉하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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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인 치료-구원이란 발전의 과정이 아니다. 구원은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일어나는 즉각적인 기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한 번에 조금씩“ 우리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미루지 않고 즉시로 구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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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한 가지 해결책-“천국가는 길은 많아 구원받는 길은 여러 가지야!“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이스라엘 진 중에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으며 오늘날도 한 가지 방법만이 있다(요 14:6/행 4:12 참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죄 중에서 버림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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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이중(二重)의 확신-그 치료법이 효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죽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이다. 쳐다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의 생애에 일어난 일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특별한 계시가 내렸거나 특별한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의지해야만 했다.
이 모든 일이 세상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일런지도 모른다(고전 1:18-31).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 들리운 뱀을 쳐다보는 것을 상상해 보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비웃는 반면에 뱀을 죽이거나, 뱀이 아닌 다른 새로운 처방을 만든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모든 치료법, 즉 개혁, 교육, 보다 훌륭한 주택, 휴식 등은 실패해왔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전성시대를 가치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여전히 죄 중에서 죽어간다. 유일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열왕기하 18장 4절을 읽으면 유대인들이 이 놋뱀을 보존했다가 우상으로 바꾸어 만든 기록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물질적인 것을 바라보고 우리가 마땅히 신뢰해야 할 하나님은 무시한다. 그 백성을 고쳐준 것은 뱀이 아니라 뱀을 만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시다. 뱀을 보는 것, 곧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다(롬 1:25). 히스기야는 뱀을 조각 조각 깨뜨리고 “느후스단-구리 조각“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수백만의 우상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하다. 이들은 신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신뢰와 찬양을 훔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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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2
발람이 이스라엘을 유혹하다-민수기 22-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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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처럼 의문을 일으키는 사람은 성경에서 몇 안된다. 그는 분명히 이방나라 출신이었으나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언자였으며, 이스라엘의 장래를 예언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며 신실하게 그 말씀을 선포했으나, 변절하여 이스라엘을 죄와 심판 가운데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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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락이 발람을 방문함(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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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방문(22:1-14)-발락은 모압의 왕으로 미디안과는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나 동맹을 맺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복을 보았고(민 20-21장) 자기 백성이 정복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육체의 힘으로는 유대인을 멸할 수가 없을 것을 깨닫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발람을 고용하여 영적인 현혹에 의지하려 했다. 그는 이 일을 하도록 발람에게 많은 값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 상의한 예언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발락의 사신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실패했음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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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방문(22:15-41)-발락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첫번째 때보다 지체가 높은 왕자들을 파송했고, 발람에게 부귀와 영예를 약속했으며, 이 문제를 재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일단 명확히 결심했을 때 사탄이 언제나 하는 일이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소득을 탐하였으므로 발람은 사신들과 같이 가고 싶었다. 이것이 “발람의 길“(벧후 2:15-16)이며 부를 얻는 방법으로 종교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발람이 왕자들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허락하신 것 뿐이었다(20-22절).
여기에 잘 알려진 당나귀와 천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발람은 그의 길에 천사가 선 것을 보지 못했다. 당나귀가 천사를 보고 이상하게 행동했으므로 발람은 그 당나귀를 때렸다. 이것으로 발람이 경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일에 몰두하여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지 못했다. 그의 눈이 뜨이자 천사를 보았고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였다. 하나님이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다“고 하셨으므로(32절), 발람은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라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장난하고 있었고 그 뜻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 보려고 했다. 하나님은 발람이 발락을 만나도록 허락하셨으며, 발락은 발람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주었다(40절의 “대접하였다“는 말은 “잔치를 위해 잡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그를 데리고 나가 이스라엘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의 주된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 거기 순종하고 개인적인 욕망이나 부수적인 환경을 고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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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3-24
2. 이스라엘에 대한 발람의 예언(23-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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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저주하기를 원했으며 이런 방식으로 미디안과 모압을 방어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람은 입을 열 때마다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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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예언-이스라엘에 대한 특별한 소명(23:1-12)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으므로 그들을 저주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특별한 백성으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별되었음을 본다(신 26:18-19/신 32:8-9/레 20:26). 그는 이스라엘의 티끌처럼 많은 수적 증가를 보며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 가운데 죽는 의로운 유대인들처럼 죽고 싶다는 욕망을 나타낸다. 물론 이 예언은 발락을 기쁘게 할 리가 없었다. 그는 “다른 관점“에서 보도록 “다른 곳으로“ 발람을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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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예언-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용납됨(23:13-30)
발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후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명백히 밝힌다.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지 않으신 분이다. 그는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린다! 물론 유대인들은 자주 죄를 범했으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에 관계된 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용납을 받았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써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값주고 사신 그의 소유인 것이다(출 19:1-6).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실패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물론 이때 발락은 격노하지만 그에게 또다시 새로운 장소에서 이스라엘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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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예언-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누림(24:1-9)
이번에는 발람이 자기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의 눈을 여신다. 이 예언은 다른 나라들이 멸망하며 이스라엘은 약속된 땅에서 축복을 누리게 됨을 묘사한다. 이 예언에서 “물“에 강조를 두고 있음에 유의하자. 물은 광야에서는 귀중한 품목이다. 이 예언은 발락이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는 것이었고, “여호와“께서 부와 영예를 얻지 못하도록 막으신다고 암시를 줌으로 발람에게 위협을 가한다(24:10-11). 그러나 예언자는 네번째 예언에 임한다.네번째 예언-이스라엘의 장래 영광(24:10-25)
이 상징적인 멧세지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다윗 왕이 이 묘사에 적중하는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가 모압, 에돔 등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삼하 8:2/삼하 8:14 참조). 그러나 보다 더 위대하게 이 예언을 성취하신 분은 “야곱의 별이요 이스라엘의 홀“이신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 완전한 통치권을 소유할 것이며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많은 적들은 멸망될 것이다(눅 1:68-7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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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은 이 네 번의 예언을 통하여 한 민족으로 선택되어 왕국으로 승격되는 이스라엘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물론 이 진리를 신약 신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의로워지고(사랑하는 분께 영접을 받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유업을 받으며 미래의 영광을 약속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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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5
3. 발람이 이스라엘을 이김(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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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이 하나님께 받은 예언들로 끝을 냈으면 안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발락이 약속한 돈과 영예를 원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방법을 왕에게 말했다. 그의 계획은 간단했다. 유대인들을 초청하여 이방의 희생제사 잔치에 참여케 함으로 그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다. 바알의 축제는 극히 사악한 것이었으며, 발람은 유대인들이 모압 여인들과 어울리려는 유혹을 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이 꼭 그대로 진행되었다. 사실상 어떤 이스라엘 사람은 모세가 보는 앞에서 미디안 여인을 집으로 데려올 정도로 대담하였다. 다른 나라 군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이 하고 있었다. 사탄이 사자처럼 백성을 정복하지 못할 경우에는(벧전 5:8) 다음으로 뱀처럼 다가온다. 하나님의 적들이 베푸는 친절을 조심하자! 그들의 미소는 올가미이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는 여호와를 위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사람들과 섞이는 것을 반대하였다(고후 6:14-18). 여호와께로부터 재앙이 이미 임하였다. 비느하스가 그 남자와 여자를 죽이자 재앙은 멈추었으나 이미 24,000명이 죽은 후였다(민 31:16 참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인 적들에게 친절하라고 말하지만 비느하스와 같이 용감한 사람이 더욱 필요하다.
물론 발람은 이스라엘의 죄가 그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유다서 11절에 언급된 “발람의 실수“이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교회를 볼 때 그 “얼룩과 주름과 흠“을 보고 비난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관점에서 교회를 보신다. 진실로 그는 우리가 불순종할 때 우리의 죄를 벌하시며 우리를 징계하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는다. 발람은 이 축복된 은혜의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요한계시록 2장 14절은 발람의 교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을 초대하여 그들과 혼합시켜 모압여인들과 결혼케 하며 축제에 동참케 하자고 건의한 사람이 발람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타협이었다. 이에 대한 경고가 버가모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 실려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버가모“는 “결혼하다“라는 뜻으로, 이른바 콘스탄틴의 “개종“과 더불어 교회가 로마제국과 연합되어 세상과 결혼했던 교회 역사의 한 시대를 상징으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큰 위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교파적으로) 세상과 구분되라는 소명을 잊은 채 세상에 스스로 뛰어들고 있다. 이것은 타락과 심판을 의미할 뿐이다(발람에 대한 참고 구절- 신 23:4-5/수 24:10/느 13:2/미 6:5/벧후 2:15-16/유 1:11/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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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33-
36
도피성-민수기 33-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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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들에서는 이 민족이 가나안을 소유했을 때를 내다보며 유업을 분배하는 내용을 다룬다. 각 지파들은 자신의 지역을 할당받고 레위인들은 특별한 성들을 지정받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도피성들이 명시되는 점이다(35장). 여기서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 여섯 도피성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신명기 19장, 여호수아 20장에 첨부된 사실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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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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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민족에게는 경찰력이 없었으며 각 성의 장로들이 경우에 따라 법정을 구성했다. 어떤 사람이 사고로 다른 사람을 죽였으면 그는 자신을 보호할 어떤 대책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살해당한 사람의 가족 중 하나가 그 살해당한 친척의 피를 복수하려고 하는 것이 율법적이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9장 6절에서 사형의 원리가 세워졌는데 출애굽기 21장 12-14절에서 모세가 확정짓고 있다(13절에 도피성의 암시가 있음을 유의하자). 달리 말해서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은 자기 생명이 위험했다. 왜냐하면 “피의 복수자“(혈족)가 살인자의 무죄함을 증명하기 전에 그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수기 35장 16-23절은 고의적인 살인자와 사고로 인한 과실치사범을 하나님이 다르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다. 현대법에서도 이 구별을 따르고 있다. 살인자에게는 고의적인 의향이 있으며, 거기에는 증오하며 불화하게된 원인적인 내용이 있다. 그러나 사고로 타인을 살해한 사람에게는 살해의 의향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자기의 경우를 설명하고 생명을 구원할 권리가 주어질 만하다. 이것이 도피성을 두는 목적이었다. 살인자는 장로들이 있어 자신의 경우를 듣고 재판을 열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성으로 도망해야만 했다. 그들이 살인의 죄가 있다고 결정하면 적절한 책임자에게 넘겨져 처형된다(신 19:11-13). 그것이 사고였음이 분명하면 그는 그들의 보호 아래 그 성에서 살 수있으며 피의 복수자는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 성을 떠나면 그는 살해될 수가 있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사람은 자유롭게 되어 자기 성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 법의 목적은 그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민 35:29-34). 살인자는 그 땅을 더럽히며, 살인자가 정죄를 받지 않으면 그 땅을 보다 더 큰 죄에 빠뜨린다. 이 법은 무죄한 자를 보호하며 정죄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정당한 법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법은 범죄자가 자유롭게 풀려나기 쉬운 경향이 있다. 현대 세계가 피로 더러워지고 법과 질서에 대한 존경심이 거의 없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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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형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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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섯 도피성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형이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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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셨다.
이것은 은혜의 행위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죽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성들을 선택하지 않았는데, 이는 율법으로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성들은 제사장들이 거하는 곳이었으나, 그들이 성을 지정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정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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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언급되어 있다.
여섯 성은 여호수아 20장 7-8절에 그 이름이 나와 있으며, 결코 변경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살인자는 그 성에 들어갈 수 있었고 아무도 그를 금지시킬 수 없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다. 구원은 말씀에 약속되어 있고, 구원은 결코 변경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는 이들보다 크고 뛰어난 성들이 있었지만 이들 중에서 죄인을 숨겨줄 수 있는 성은 하나도 없었다. 오늘날 많은 종교들이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알려진 바와 같이 구원을 얻는 데에는 유일한 길,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외에는 없다(행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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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들은 누구나 접근하기 쉬웠다.
만일 지도를 펴서 점검해 보면 여섯 성들이 잘 배정되어 있어서 어떤 지파에게도 이 안전한 성들이 멀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단강 서편으로는 북쪽에 가데스, 중앙에 세겜 남쪽에 헤브론이 있다. 강을 건너 동쪽(르우벤, 갓, 므낫세가 정착하기로 됨)에는 북쪽에 골란, 중앙에 라못, 남쪽에 베셀이 있다. 이 성들은 접근하기가 쉬운 곳에 있었다. 이 성들 중에는 산에 위치한 곳도 있어서 훨씬 눈에 잘띄기도 했다. 전언에 의하면 이 여섯 성으로 가는 길이 잘 보수되어 있는지 제사장들이 확인했다고 하며, 도망하는 사람을 안내하는 경계표시가 규칙적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 성문들은 절대로 닫는 법이 없었다고 랍비들은 전한다.
도피성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으로서 참으로 훌륭하다. 물론 “성으로 가는 길“은 명확하다. 누가 구세주인지, 또는 어떻게 그에게 가는 것인지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다. 믿음으로 그에게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죄인을 돌려보내는 일이 없으시다(요 6:37). 한 가지 대조되는 점은 살인자가 성에 와서 영접을 받으며 또한 재판도 받게 되지만 우리는 재판을 받지 않는 점이다.우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 3:18 참조). 그 성의 장로들은 살인의 죄가 없는 사람만을 인정했으나 그리스도는 유죄한 죄인들을 영접하신다. 큰 은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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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들은 필요에 대처하기가 적절했다.
그 사람이 성에 머무르는 한 그는 안전했으며,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 구원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은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가 영적인 그리고 육신적인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게 된다는 뜻이다(당신은 모형에다 교리를 맞추지 않고, 교리에 근거하여 모형을 해석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가 살아계시므로 우리도 또한 살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에 대처하기에 충분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성들의 이름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게데스는 “의(義)“라는 뜻으로 우리에게는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면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고후 5:21/골 2:13). 세겜은 “어깨“라는 뜻이며,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친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쉴 장소를 발견하게 됨을 암시해 준다. 새신자들은 늘 “내가 붙잡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온다. 그 질문은 “그가 당신을 붙드실 것입니다“로 대답된다. 헤브론은 “교제“란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암시하며, 또한 우리가 다른 신자들과 가지는 교제를 시사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외로울 수가 없다. 베셀은 “요새“란 뜻이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보호와 승리를 나타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다. 라못은 “높음“이란 뜻이며, 신자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게 되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엡 2:4-10). 죄는 언제나 인간을 끌어내리나, 그리스도는 인간을 높이신다. 어느 날 우리는 구름을 타고 함께 올리워져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다. 끝으로, 골란은 “원(圓)“ 또는 “완성“을 뜻하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완전함을 나타낸다(골 2:9-10). 어떤 사람은 골란이 “행복“을 뜻한다고도 하는데 생의 시련과 문제거리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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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은 그 성으로 도망하도록 되어 있는 것에 유의하자. 꾸물거릴 여유가 없었다! 오늘날 잃어버린 죄인들도 역시 유일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도망하는 일을 꾸물거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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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대주의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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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이 성들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스라엘은 무지하고 눈이 멀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행 3:14-17/고전 2:8).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살인자가 아니라 과실치사자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에게는 용서와 안전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도피성의 과실치사자처럼 지금 “유배된“ 상태에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계시며, 어느 날 용서와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 날은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보게 될 때이다(슥 12:11-13:1).
이와 똑같은 원리가 다른 사람을 죽인 죄를 지은 바울에게도 적용될 수 있겠다(딤전 1:12-16 참조). 그는 장차 구원을 받게 될 유대인들의 “본보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영광 중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행 9장).
당신은 도피성으로 도망하였는가?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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