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형성과정
예수는 자서전을 쓰시지 않았다. 예수는 글이라고는 아무것도 남기시지 않았다. 그저 그를 알고 사랑한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자기와 자기의 가르침을 일임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복음서라 일컬어지는 작은 네 책은 우리의 제1원리가 되며 세계를 변화시켜온 생애와 말씀에 관한 유일한 정보원인 셈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가 보다 많고 자세하게 기록되었으면 하고 바랄런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의 기록이 짧긴해도 그것으로 충분함을 우리는 아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시대 종족에게 그리스도를 주었다.
엄격히 말하면 복음은 전기가 아니다. 예수의 지상 생애는 30여년 남짓되는 기간을 망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책들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도 있는 짧은 것이다. 예수의 생애의 대부분은 완전히 침묵 속에 보내어졌다.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한복음 21:25)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한편의 "언행록"(memoirs) 곧 회상록 선집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목적이 있는 선집이다.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1).각 전도자는 선생의 모습을 묘사하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각자 그 나름의 각도에서 쓰고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예수의 초상화를 네개 갖고 있는 셈이다. 이점은 오늘의 우리에게 사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예수는 너무 크시고 경이로운 분이므로 어느 한 사람의 관찰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초상화가 그 나름의 특징을 갖고는 있어도 모두가 동일한 예수를 그리고 있다. 곧 그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가지신 예수인 것이다.
얼마후에 다른 "복음들"이 각기 면면을 들어내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복음서들"이 신약성경으로부터 제외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 속에는 사실과 전설이 풀수 없이 뒤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 중 제일 일찍 기록된 것은 서기 65년내지 70년 사이에 나타났을 것 같다. 즉 예수의 지상사역이 끝난이후 35년 내지 40년 어간에 나타났던 것같다. 그 사이에 어째서 이렇게 장기간의 시일이 경과했을까? 오늘 같으면 위인이 죽을때 그 친구들이 한 세대 이상이 경과한 후 그의 "전기"를 출판해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인 것이다. 전도자들이 이 명백한 의무를 지연시킨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일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것은 지연이 아니었다. 이렇게 늦어진 한가지 이유는 그들과 거의 모든 초대교회는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에 너무 바빴고 그들이 활발한 활동에 너무 열중하여 여념이 없었고, 왕되신 이의 업무가 너무 급한 것이라 확신했음으로 이런 유의 문서사역은 옆으로 떠밀려져 나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이 세대가 속히 끝날 것을 예기하고 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라고 하시지 않았으며 다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런 기대가 책들을 써 내는 일을 별 필요 없는 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타나신 일은 그들 대다수에게 있어 너무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처음에는 그들이 예수의 말씀고, 주께서 육신을 입으셨을 때 행하신 일로 계속 되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에 날이 불어서 달이 되고 달이 늘어서 해가 되었다. 그래서 한 세대가 지나간 후에야 최초의 복음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은 전도자들이 기록하기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예를 들어 누가는 그가 기록한 복음의 처음 몇절에서 그가 잡다한 많은 자료들을 정선해서 그 자신의 기록을 작성하는 일에 착수했다고 말해준다. 비유,이적 이야기, 교훈의 말씀들, 안식일, 혹은 금식,혹은 기도에 대한 기록들이 여기 저기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전도자들은 이 정도로 그 길이 준비된 것을 발견했다. 이 귀절들을(눅1:1-4) 용의주도 하게 읽고 연구해야 한다. 이 귀절은 성서적 "영감"의 의미와 성서적 영감이 아닌 것을 결정함에 있어 극히 중요하다. 영감 받은 성서저자들이라 해서 기타 저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어려운 역사적 연구의 필요를 기적적으로 면제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가는 여기서 완전히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영감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성과 기능을 마법을 써서 초월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영감은 하나님이 사람의 지성과 기능을 통해 자기의 의지를 표현하시는 것이다. 영감은 성서 저자 자신의 인격을 대신하여 그를 하나님의 기계 (도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영감은 그의 인격을 보충,강화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윽고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하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되자 여러가지 동기가 덧붙여졌다.
예를 들면 돌연히 세상에 종말이 오리라는 기대는 감퇴되었고 해가 지나감에 따라 예수를 알았고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죽어 세상을 떠남에 따라 구전과 단편적 기록 문서에 계속 의존하는 것이 극히 불확실하여 위험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전도자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을 위해서 예수의 이야기를 남겨두어야겠다는 소명감을 느꼈다. 더구나 이교에서 개심한 수많은 젊은 이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 이후 세대에 태어나 교려할 들어온 젊은이들이 성만찬의 의미와 그 기원을 알고 싶어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것은 예수께서 배신당하시던 밤에 다락방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믿을만한 기록은 그들 손에 쥐어주는 일이었다. 이외에도 이단들의 위험도 있었다.이자들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교회 안에 믿음 문제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해지자 이런 문제가 불가피하게 일어났다. 즉 예수는 실로 이것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그리고 교회가 외부로부터와 교인들 중 성격과 행동과 동기가 거짓되고 해로운 대표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때 세상의 눈 앞에 교회를 창설한 주님의 이야기,그들이 섬기기로 서약한 주님의 이야기를 치켜들어보이는 일 이상으로 더 좋은 변증이 있었겠는가?> 이 여러가지 방침을 따라 주님의 귀중한 이야기를 뚜렷하고 영구적인 형태로 보존할 필요가 점차 느껴졌음으로 전도자들은 이 일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최초의 복음
최초로 나타난 것은 마가복음이었다.그런데 고래의 신빙성 있는 전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이것은 초기 기독교 저술가의 한 사람인 파피아스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다) 곧 '마가는 베드로의 해석자'였으며, 그가 들은 베드로의 강설과 설교로부터 "기억하고 있던 것을 모두 정확히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이것은 젊은 요한.마가가 위대한 사도의 전도여행에 동반하고 다닌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다. 베드로가 시장에서 무리들에게 설교하는 동안 시장 한편에 서 있거나 집회가 끝나고 설교 내용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상담하는 베드로를 도와주는 마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입술에서 나오는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거듭 거듭 귀를 기울여 마침내 그 이야기를 전부 외우고 그 분위기 속에서 살던 마가를 보게 되며, 마침내 죽음이 그의 위대한 친구요 지도자를 데려가자 마가는 주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최초의 복음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전해졌다. 마가복음 배후에는 주님의 가장 내밀한 친구의 하나였던 베드로의 증거가 서 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런 까닭에 마가복음의 역사상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마가복음 "이란 명칭은 뒤에 첨가된 말이다. 마가 자신은 아무 명칭도 붙이지 않았다. 전도자들은 문필로 명성을 날리려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저들의 열정이 자아의 온갖 생각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던가를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는 것에는 그들의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이야기를 매우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결코 제자들의 집단을 호감을 가지고 제시하거나 그들의 실수와 허물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도 하지 않은 사실이 이것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마가의 복음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사실은 베드로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의 허물을 가리우려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예수께서..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8:33).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14:50)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이야기(14:66 이하)등등이 모두 여기에 아무것도 숨김없이,아무 것도 꾸밈없이 그대로 담겨 있다. 땅 위의 명성은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만이 전부였다.
헌데, 비록 마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사도행전의 다음 귀절들을 보라. 12장 12절은 마가의 집이 만찬을 가졌던 "다락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흥미 있는 암시를 제공하며 이럴 경우 마가 자신이 예수를 지켜본 증인일 것은 틀림없다.12:25,13:13,15:36 이하와, 서신 중에서 골로새 4:10,디모데후서 4:11,빌레몬 24절, 베드로전서 5:13등이다. 여기서 한가지 특별히 매력 있고 매혹적인 암시,곧 본복음서의 한 곳에 저자에 대한 살짝 감취어진 암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막 14:51-52).겟세마네 동산에 이렇게 수상하게 나타난 "한 청년"은 누구였을까? 네 전도자 중 마가만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베드로에게 들은 것일 리도 없다. 베드로는 이미 도망가고 난 뒤였으니까(14:50). 이 이야기는 '청년'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만일 이 사람이 그 이후 초대교회의 제법 걸출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미지의 인물은 마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이 문제를 뚜렷이 결정짓는 일은 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누구인지 모를 것 같지는 않다.
3. 유대 기독교인들을 위한 복음
마가의 "예수의 회상록"에서 마태의 회상록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한 가지 차이점이 즉각 눈에 뜨인다. 마가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의 생애의 사건에 있고 마태는 오히려 주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다. 또 다른 초대 기독교 전통은 (역시 파피아스로부터) "마태가 예수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기록했고, 각자가 이것을 할 수 있는 한 잘 해석했다"고 말해준다. 제자 마태는 일기를 썼는데 거기에 가끔 그의 대화와 교훈을 기록했던 것 같고 마가의 기록을 첨가한 이 일기가 마태복음의 토대가 되고 여기에 마태의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마태복음은 특히 유대 기독교인들을 위한 복음읻. 이와 관련해서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고 모세 율법을 중요시하고, 유대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대망의 강조와 이 대망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을 주목하자. 앞서 이미 살펴 본대로 모든 전도자들의 특징이 되는 겸손을 지닌 마태는 자기 자신의 개심의 이야기를 단 한절(9:9)를 말하고 있다. 주께서 그를 깊은 타락의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신 사실을 감추려는 노력이 전혀 없다. 그는 "세관에 앉아 있던"세리였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던 부류였다. 왜냐, 그는 자기 나라와 자기 양심을 팔아 먹은 자요, 틀림없이 자기 인격도 팔아 먹은 자였기 때문이다. 이 직업은 모든 충성된 유대인의 눈에는 치욕으로 낙인 찍혀 있던 직업이다. 이 얼마나 있을 법하지 장소에서 주님은 전도자들과 대사(全權大使)들을 찾아내셨던가!
4. 이방 기독교인들을 위한 복음
유대인이 아닌 전도자는 누가 뿐이다. 누가는 마가와 마태복음에 나타난 출처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자료들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방인 혈통과 교감은 그의 복음의 가장 인상적인 면모를 설명해 준다. 즉 누가복음은 선교적 복음이요, 본 복음서가 묘사하는 그리스도는 우선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인 것이다. 본서가 데오빌로-로마 정부의 고위 관리였던 것 같으며 아직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에게 증정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누가가 바로 시작부터 순전히 지방적인,팔레스타인의 배경을 둔이야기를 말 했고 이것을 일부러 세계 역사의 구조속에 배열하려 한점을 주목하라.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인 아담에까지 거슬러 밟아올라갔을 뿐 아니라(이스라엘 국가의 창건자인 아브라함으로 시작하는 마태와 대조해 보라) 예수의 오심을 세계적 사건들(예를 들어 3:1)과 관련시키고 있다. 더구나 누가에게 있어 그가 임으로 사용할 수 있던 수 많은 자료들 중에서 어떤 사건과 비유들을 예수의 회상록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는 선교의 동기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관계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감사를 표시한 문둥이 이야기(17:16,"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기타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13:29)와 ,특히 탕자 비유, 이방인 세계를대표하는 큰 아들 비유등등이 나온다. 누가복음은 특히 세계의 소망의 복음이다.
제 3 복음서와 함께 사도행전을 기록한 (행1:1) 누가는 의사였다 (골4:4).그가 처음에 바울에게 소개된 것은 그가 의사였기 때문일 것 같다. 그후 그는 바울의 전도 여행의 동료가 되었다. 누가의 의술이 위대한 기독교선교사였던 바울에게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의 건강은 미심쩍은 것이었기 때문이다(고후12:27이하).바울은 주님의 일을 하며 자주 매를 맞고 상처와 흉터를 많이 갖고 있었다(고후 11:25 이하,갈6:17,행14:19).누가의 의사수업은 복음서 중에 예수의 병 고치신 이적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그 당시 의학용어로 사용되던 어떤 전문용어들을 통해서 그때 있었떤 사건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윌렴.램시경(Sir William Ramsey)은 다음과 같은 매우 매혹적인 암시를 하고 있다. 즉 누가가 그 당시에는 소아시아에 살고 있었지만 바울은 여기서 처음 누가를 만나 그를 기독교에 개종시켰다. 그는 원래 빌립보 출신이었다는 것과 바울이 환상 가운데서 드로아에서 어떤 마게도냐 사람이 그들에게 "와서 우리를 도우라. (행16:9) 고 손짓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본 것은 그의 친구 바로 누가였다. 누가복음이 저자가 기독교를 서방 세계에 가져 오는 도구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제3복음의 정신과 그 강렬한 선교적 관심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5. 제 4 복음
처음 세복음서(이 세 복음에 공통되는 관점 때문에 자주 공관복음이라 불리운다)에서 제 4복음으로 옮겨갈 때 우리는 즉각 다른 분위기 속에 들어감을 느끼게 된다. 이 차이는 초대시대부터 느껴졌다. 알렉산들이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가 그 이전의 저자로부터 인용한 말들은 이 점을 잘 서술하고 있다. 곧 "육적 제 사실이 이미 다른 세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요한이 영적 복음서를 썼다"라고 했다. 4복음서 저자가 그의 독자들 편에 다른 세 복음서에 대한 지식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자는 다른 세 복음서의 내용을 보충하고, 그 자신의 영적 천재성과 신비성의 도움을 받아 예수의 인물됨과 사역의 보다 깊은 의미를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한 사람의 평생의 명상과 골똘한 생각가 영교가 제 4복음서 기록에 담겨져 있다.
요한복음이 그 앞의 복음서들과 구별되는 많은 점들 중 다음의 특징들을 말할 수 있겠다. 본 복음에는 비유가 하나도 없다. 거의 예수의 유대지방 사역에 집중하고 있으며 갈릴리 사역은 거의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그리고 개개인들과 예수 사이의 사사로운 대담, 특히 나다니엘,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과의 일련의 대담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인간적 면이 강조된 어떤 장면들은 생략하고 있다. 특히 광야의 시험, 겟세마네의 고뇌, 유기되셨을 때의 십자가 위로부터의 외침 등등이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인물됨과 사역의 영원한 면들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나사렛의 목수"가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제 4복음이 다른 세 복음을 보충하는 일을 착수함에 있어 그 목적을 영광스럽게도 성취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였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묘사를 충분하고 완벽하고 완전하게 했다.
우리의 기록으로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우리의 모든 연구는 이 작은 네 책에 의존해야 한다. 이 책들이 우리에게 세 가지를 제공함을 기억하자. 첫째 우리에게 역사를 제공한다. 여기에 우리는 견고하고 확고한 난공 불락의 역사적 기본 사실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 이상의 것을 주고 있다. 계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들려오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요,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하지만 역사와 계시 이상의 것을 준다.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이다. 각 페이지는 우리에게 이 도전을 새롭게 해준다. 그리고 구구절절이 이 도전을 통감하게 한다. 그 도전이란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결국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전은 우리가 대답하기까지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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