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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맥 잡자(16)*박진호목사

에반젤(복음) 2022. 1. 3. 22:51

성경 맥 잡자(16)*박진호목사

창조는 십자가의 출발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부작용

 

 종교개혁을 이룬 마르틴 루터는 요한복음 3장16-17절을 “작은 성경”이라 칭(稱)했다. “16.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 말하는 바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며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음에 인간의 자격, 공적, 선행, 희생, 능력 그 어떤 것도 전혀 기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 이는 종교개혁으로 회복시킨 성경의 절대적 계시(啓示)이자 여타 모든 종교와 구별(區別)되는 기독교만의 진리(眞理)다.

 

 당연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어라!”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되었고 또 지금껏 그래왔다. 오히려 너무 자주 듣다보니 마치 정치집회에서 아무 의식 없이 그저 따라 외치는 구호처럼 여겨질 정도까지 되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성경대로 온전히 가르쳐지지 않고 그 문자적 표피적 의미로만 적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믿는다는 것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로 되어버린 것이다. 믿는다는 것이 과연 정확히 무슨 뜻인지 따져 보지 않는다.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동의하면 믿은 것 즉, 구원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또 일단 그런 형식적(?) 고백만 받아내고선 교회에서 필요한 일을 하게끔 만드는데 너무 바쁘다. 역으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간소하고도 섣부른 신앙고백의 절차로 실질적인 구원과 대체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요한복음 3장16절만 해도 그렇다. 단순히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신 의미를 믿어야 한다. 나아가 그 독생자를 자기에게 주셨다는 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깨달아 그 뜻에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 나아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도 정확히 구별하여 믿기 전과 후의 상태가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그런 신자가 얼마나 될까? 자신의 죄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 없다는 정도로만 인식한다. 자신의 전부가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해서 더럽고 추한 냄새만 진동한다고 절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희생양 삼고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몇몇 행위들을 다 용서해 주었다고만 받아들인다. 요한의 죄를 씻는 세례는 받았을지라도 성령으로 자기 존재 전부가 거듭 나는 세례와는 거리가 멀다.

 

 또 그런 고백의 형식만 거치고 나면 정말 거칠 것 없는 신앙생활을 한다. 무엇이든 믿고 기도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붙드는 데만 전부를 걸고 있다. 그것도 자신과 가족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의 형통과 안락만을 위해서다. 당연히 외부에서 볼 때에는 기독교 신자라고 다른 종교인과 확실하게 다른 점이 없다고 여긴다.

 

 문제는 결국 인간 쪽에서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는 사실만 강하게 부각된 데서 기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믿었기에 마치 여러 종교 중에서 기독교가 가장 옳아서 선택한 것 같다. 바꿔 말해 여러 구원의 길이 있는 중에서 가장 좋은(The Best Way) 길을 고른 것처럼 그 당사자나 국외자가 이해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를 신자들이 나서서 퇴색, 수정,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구원의 유일한 길(The Only Way)이다. 다른 길이 없다. 이는 성경의 선언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고안해 낸 교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살아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 작정하시어 실행하신 절대적 진리다. 인간이 동의하든 안 하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지 여부에 따라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뿐이다.

 

다른 하나님을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가장 좋은 길이 되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공평하고도 타당하게 여겨져 상호간에 문제나 충돌을 야기하지 않는 편리함이 있다. 기독교 외부로부터 별다른 반발이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성자요, 가장 심오한 도덕 선생이요, 가장 그럴싸한 종교의 창시자로는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아무 죄 없는 그분이 정치적 누명을 쓰고 너무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알기 때문이다. 왜 모로 가면 서울로 가지 못하느냐고 따진다. 기차나 버스나 자전거나 도보든, 어떤 코스를 택해가든 결국은 서울에 도착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한 분 뿐이므로 구원의 길은 당연히 하나뿐이어야 한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로 제시되면 당장에 난리가 난다.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한 분 뿐으로 종교들이 가르치는 신의 이름만 다를 뿐 같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여러 방식의 구원의 길이 가능하다면 신의 존재에 관해선 두 가지 가능성만 성립한다. 신이 여럿이거나 한 신이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능성은 그 자체로 이미 논리적 합리성을 전혀 함의(含意)하지 못한다.

 

  신이 여럿일 수 없으며, 한 신이 일구이언하면 벌써 믿을만한 절대적 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신이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동시에 구원의 길은 여럿이라고 즉, 사실은 절대자가 하나가 아니라고 스스로 번복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자기들이 그런 우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나님과 관련된 영적인 문제에서만큼은 어리석다 못해 완전히 눈과 귀가 가려져 있는 것이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의 실체다.

 

은혜와 믿음의 근본요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너무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차츰, 알아보겠지만 우선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은혜'와 '믿음'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신자가 예상 외로 드물다는 것이다. 십자가 구원의 길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두 요소임에도 말이다. 인간의 공적, 선행, 자격, 능력, 희생, 제사 등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 절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그런 것들은 인간이 행하거나 취하고 있어서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동 내지 모습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믿음은 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적용하여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의지적 결단"이 믿음이라고 믿는 것이다. 한마디로 “믿음”을 인간의 행동과 대비되는 뜻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그렇지 않다. 인간 내면의 의지적 사고도 단지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엄연히 행동에 속한다. 염려하는 것, 기뻐하는 것, 소망을 품는 것, 결단하는 것 등등 모든 것이 인간이 자기 지정의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십자가 구원의 교리를 배워서 납득, 동의, 선택, 결단, 헌신하는 것도 마음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행한 결과다. 보이지 않는다고 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다.

 

 믿음을 행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시도는 했지만 사실은 인간 쪽에서 시행한 행동이 믿음이 되어버렸고 나아가 행위구원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술이 절대적으로 전제하는 바는 인간 쪽에서 출발한 것은 그 무엇이든, 단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나 모습뿐만 아니라, 전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들의 은혜에 대한 이해에도 동일한 잘못이 드러난다. 도무지 자격도 없는 데 주신 공짜 선물이란 측면만 강조하다 보니 신자에게 이미 베풀어진 좋고 풍성한 결과에만 초점이 모인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신 죽으셔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기에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믿음에 적용된 절대적 전제가 당연히 은혜에도 그러함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너무 당연하다 보니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믿음이 인간 쪽에서 기인하는 모든 것이 배제되듯이 은혜 또한 그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하나님 쪽에서만 베푸신다는 것이 은혜의 가장 근본 요소다.

 

 요컨대 구원에 인간이 관여하거나 영향을 미칠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 이후에는 선행, 기도, 구제, 봉사 등이 인간 쪽의 의지와 결단과 행동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믿음이나, 구원을 주시는 은혜나 공히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가 구원을 얻었는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이 하나 생긴다. 자기 쪽에서는 스스로 구원을 도무지 이룰 수 없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을만한 수준의 의에 아예 다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정말로 자신의 영적 실체에 비추어서 철두철미 깨달았는지 여부다.

 

  깨달았다고 표현하니까 또 다른 정신적 활동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자신의 옛 자아 전부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겨진 후에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전과 후에 실제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기에 은혜가 되며, 또 그런 은혜의 과정에 자신이 포함된 것을 구원 받은 후에야 깨닫게 된 것이 믿음이란 뜻이다. 나로서는 시종일관 도저히 내 죄를 감당하지 못하는 죄의 노예였음을 진정으로 자인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므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만을 갈망해야 한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구원에서 인간의 지정의에 의지하여 행해야 할 부분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마16:16)라고 고백하기까지는 근 3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동안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 수긍하여 따르도록 노력했고, 그분의 품성과 사역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나름대로 분석 판단했었다. 마음이 상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의지로 극복해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예수님을 구주임을 믿게 된 데는 인간 쪽의 사고행위가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고 깨우쳐 주었다. 그런 믿음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먼저 베풀어진 결과로 생겼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훌륭한 도덕 종교 선생으로는 인간의 지적 활동만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분이 자신을 구원하는 구주임은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구원과 심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몫이지 않는가? 죄에 찌든 인간으로선 자기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음을 절감하고서 완전히 겸손해져 그분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또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스스로는 도무지 자격이 없음을 철두철미 자각하지 않는 한에는 아무리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어도 여전히 부족한 구원 내지 믿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믿으려 노력한 그 자체가 또 다른 인간의 공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구원의 길이 믿음으로 출발

 

 유감스럽게도 십자가 구원의 유일성이 창세기 1장1절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원리를 많은 신자들이 간과하고 있다. 세상 모든 이들이 동의하듯이 하나님이 정말 한 분 뿐이라면 당연히 그 구원의 길은 하나여야 한다. 그 하나님도 마땅히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한 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니까 당연히 그 길도 하나이지 않는가 말이다.

 

 인간이 고안한 구원의 길이라면 수도 없이 많으며 그 중에 자기가 분석하여 옳은 것을 골라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유일한 구원이라면 인간으로선 정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십자가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기에 유일한 길일 수밖에 없다. 자기가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와 타락을 성경대로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다원주의의 반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십자가의 유일성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 간에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정작 신자 스스로 믿음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창조의 깊은 의미는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몸통과 팔 다리는 없이 머리만 달린 기형적 신앙이 된다.

 

 창조와 진화의 논쟁이 단순히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기원만 따지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이며 개연성이 높은 이론인지 과학적으로 분별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다른 종교의 인간 기원 이론과 비교해서 기독교가 더 합리적이라고 선택해야 하는 차원이 아니다.

 

 젖 먹는 아이들은 부모를 떠나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부모가 죽어서 없거나 아이를 두고 떠나버렸다면 아예 생존조차 하지 못한다. 설령 생존해도 평생을 고아로 살 수밖에 없다.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이 땅에 출생하는 순간부터 바로 이런 부모자식 같은 관계가 그분과 이미 형성되어졌다는 뜻이다. 그 존재와 삶과 일생 전부가 오직 그분과 연관되어질 수밖에 없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부인내지 취소할 수 없다. 부모가 아이를 유기하거나, 반대로 아이가 부모를 떠나 가출해도 여전히 부모자식 간임은 틀림없다. 부모가 아이를 버리거나 아이가 가출한 것은 단지 그 사이(fellowship)가 나빠진 것이지 관계(relationhip)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며 없어질 수도 없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부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혈연으로 맺어진다.

 

  천하의 어떤 것도 그 관계에 개입하지 못한다.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다. 창조주가 모든 인간의 뿌리일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모든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과 연관되어진다는(related) 것이다. 인생의 의미, 가치, 안전, 만족, 행복, 모든 것들이 그분에게서 기인한다. 그분이 인간에게 베풀지 않으면 인생에 어떤 것도 선한 것이 생길 수 없다.

 

  모든 인간에게 창조주가 동일한 은혜로 연관되어진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열의 차가 있는 여러 가지 구원의 길이 존재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한 부모가 유달리 편애하는 자식이 있거나, 차별하여 구박하는 자식이 있다는 뜻이 된다. 연약하며 불완전한 인간끼리는 그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벌써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창조주와 인간은 한 줄기다.

 

 재차 강조하지만 모든 이에게 동일한 하나님이라면 한 가지 구원의 길만 제시하여 모든 이에게 동일한 소망을 품게 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민족 문화 사상 관습을 편애하는 불공평한 하나님이 되거나, 아니면 특정 민족 고유의 신으로 제한되어져 버린다. 이해하기 쉽게 말해 보자. 모든 인간을 한 핏줄로 만든 창조주가 있으면 당연히 구원의 길도 하나뿐이다.

 

 반면에 여러 민족을 각기 다르게 만든 신들이 여럿 있으면 구원의 길도 여럿이 된다. 민족과 나라마다 고유의 종교나 신을 섬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배후에는 결국은 개별 민족마다 다른 다신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한 분 창조주를 믿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인간 구원의 길이 창세기 1장1절에서 출발되지 않는다면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유효한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고안해낸 구원일 수밖에 없으며 또 그것은 당연히 민족, 나라, 문화, 관습, 언어, 시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조변석개하는 인간인지라 심지어 동일한 종교 안에서도 구원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교단과 교파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은 인간의 사고가 충분히 신뢰할만하기에 구원조차 인간이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일 뿐이다. 하나님을 제쳐두고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격이다.

 

 성경을 관통하여 이해하는 가장 첫 걸음은 진화를 부인하고 창조를 믿는 것보다는 사실은 창세기 1장1절이 구원의 출발선임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다.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성경은 아예 믿으라고 권하지도 않지 않는가? 그저 그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포하고 있을 뿐이다. 진화와 창조 중에 선택은커녕 믿음조차 초월한 절대적 사실이자 진리라는 것이다.

 

 또 그래서 그 이후에 진술되는 예수님의 십자가도 구원의 유일한 길이자 절대적 진리라고 이 창세기 1장1장이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장1절과 연결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문제 하나가 남아 있긴 하다. 창세기 1장1절을 믿는 종교가 셋이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회교와 기독교다. 셋 다 명목상으로는 전적으로 창조주가 베푸시는 구원을 인정하지만 실질 내용상으로는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유대교나 회교는 공히 각기 요구하는 계명의 준수 여부로 즉,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표방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먼저 오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감당하여 십자가에 자원해서 육신을 죽으신 후에 영적인 세계의 길을 열고 성령으로 임하셔서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해준 구원과는 전혀 다르다. 인간이 그분과 원수 된 상태에서도 그런 은혜를 베푸신 구원인지라 유일한 길일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베푸실 수 있는 절대적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