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장 14~22절/부유한 자의 빈곤.
사람은 사람이기에 당하는 고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적인 고통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먹는다, 입는다, 산다고 하는 문제는 동물적인 고통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만의 차원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자는 인격자대로 자기가 누리고 있는 인격과 자유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 봅니다. 지성인은 지성인으로서의 고민이 있습니다. 지성인이 지성인다운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면 지성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고통을 느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지성인들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실망이라고 하는 고통입니다. 실망은 기대가 있고, 믿는 바가 있었기에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은 진실의 반대에서 생겨집니다. 진실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용기가 없다면 진실에 직면할 용기를 가지지 못하여 거듭되는 실망을 하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서 실망이 체질화되면서 생겨진 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보다 더 큰 용기는 없습니다. 용기의 부족은 거짓과 실망에 기인한 것입니다. 실망은 그 사건이 변했다든가 사람이 달라졌다든가 환경이 급변하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본래부터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다거나 혹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을 있는 것으로 믿어 온 허위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제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깨달았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마음 아파합니다. 없었다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에 있는 줄로 알고 살았다는 것 때문에, 속았다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 중에 가장 큰 것은 자기에 대한 실망입니다. 세계의 경제문제, 나라의 안보문제, 복잡한 사회 문제를 말하지만 실망의 근본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이 사업을 한다고 동분서주하게 다녔는데, 사업진단을 해 보니 완전히 적자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줄 알았는데 손해였습니다. 무엇이 된 줄로 알았는데 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렇게 무능할 수 없고 초라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진단해 보니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좀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습니다. 내 딴에 진실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나 같은 위선자가 없더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무너질 때, 혹은 허위성이 노출될 때 또는 진실이 허위로 드러날 때, 그 실상이 나타날 때 여기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있었다고 믿어 사실이 허위로 들어났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망입니다. 믿음은 진실입니다. 진실은 사실에 기인합니다. 이 실상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부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자신에게는 어떠한 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늘 풍요롭게 생활하였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 것 말을 하고 살았습니다. 항상 자신의 인생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한 들여다보니 자신만 알지 못하였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 주었고 자신은 사소한 것이라 치부해 버렸습니다.
자신은 부족함이 없다. 다 가졌다 하고 자랑을 하고 살고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가난합니다. 초라합니다. 너무나도 비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해 주시는 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허위적인 나와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나, 내가 보는 진실한 나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내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딱할 뿐이지 자기 자신은 세상에 편안합니다. 그 어리석음과 무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실망도 없는 거짓된 부자, 그는 얼마나 속고 있고,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것조차도 모르니까 여전히 고개를 들고 다닙니다. 여전히 자랑만 늘어놓습니다. 여전히 허구에 완전히 속아 삽니다. 모르면서 아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가진 줄로 압니다. 아무 것도 못하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크게 착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그는 그대로 불안하고 괴롭지만 어디로 말미암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한심한 형편입니다. 실망할 줄도 모르는 사람, 그는 썩었습니다. 그는 없었습니다. 이 실상을 모르고 있는 동안은 편합니다. 그러나 알고 나면 이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실망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있어야 합니다. 실망하는 순간만이 실상을 아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성공은 가장 큰 실망 위에 세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진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쓴 약입니다. 이것이 싫어서 평생 앓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진실이라고 하는 쓴 약을 먹어야 하겠습니다. 철저히 실망하여야겠습니다. 우리는 내일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 철저하게 실망해야 합니다. 오늘 철저하게 실망하는 사람은 내일 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벌거숭이 진실로 돌아가십시다. 더 이상 속지도 속이지도 맙시다.
진실에로 의식을 돌려야 되겠습니다. 미지근한 상태, 미온적인 상태, 차지도 덥지도 않는 그런 모호성 속에는 어떤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15~16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니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우리의 삶이 진실하게 서야 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허허실실 하면서 띠라가는 인생에는 참된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분명한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확히 직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여 세워가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상태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괴롭고 아프지만 철저하게 실망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현실에 직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나의 선택은 인생의 출발점이고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신명기28장 13~14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리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없이 우리를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만한 실력을 갖고 있어야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머리가 되길 원하시지 꼬리가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부리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이 높여 주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심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이 이루어 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존귀함을 더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선택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선택이 우선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좌우로 치우지지 말아야 합니다. 정확히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살리라 고백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용서가 없습니다. "너는 가난하다." 나는 부요한 자라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너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형편없다." 이렇게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진실, 이 실상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도 없는 것이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속히 인정하십시다.
어떤 분들은 나이 좀 들어 가지고 사업을 한 것, 그 동안 돈 버느라 애쓴 것, 일하느라고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지금 알았나요? 본래 허무한 것인데 말입니다. 자기 딴에는 굉장한 것을 발견한 것 같지만 원래 물질이라는 것이 그렇고,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속은 것이 잘못이지요. 자녀들을 키운다고 애써 수고하다가 출가시켜 놓고는 허무하다고 웁니다.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지 언제는 자기 것이었습니까? 뒤늦게 철든 것이 답답한 것뿐이지요. 본래가 가난한 것입니다. 본래 내가 없었어요.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오늘 17절에는 눈이 멀었다. 장님이라 했습니다. 눈먼 것이 얼마나 비참하냐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승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는데 자기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보고 부딪칠까? 하는 생각에서 등불에다 불을 켜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가다가 어떤 사람하고 부딪혀서 상처가 났습니다. 장님이 화가 나서 “이 사람아 나는 장님이니까? 그렇지 자네는 눈뜬 사람이 왜 사람을 들이받는 거야?”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때 반대쪽에서 하는 말이 “여보세요, 당신이 든 등불은 불이 꺼진지 이미 오래되었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장님이 불쌍한 것은 빛을 못 보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둠도 못 봅니다. 소망만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절망할 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상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절망할 줄도 모르는 것, 이것이 장님입니다. 어서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장님이었고, 얼마나 어두운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속히 긍정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벌거벗은 수치를 모릅니다.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것은 도덕적 빈곤을 말합니다. 명예, 위신, 체면 등을 굉장히 중시합니다만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위신이 다 없어진지 언제입니까? 벌써 망신당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새삼스레 이제 와서 거짓된 허상을 붙들고 체면이니 위신이니 하는 가치가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어떤 가정의 며느리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데 시어머니는 교회에 안 나오십니다. 아무리 며느리를 말리며 교회에 나가지 말고 나 죽은 다음에 제사를 좀 지내라하는 말을 해도 말을 안 듣고 교회에 나갑니다. 결국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따라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되셨느냐? 하고 물으니까 그 대답이 “가만히 보아 하니 제사는 드려주지 않을 것 같이 생겼으니 이미 틀린 바에는 내가 며느리 따라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나왔소." 하고 교회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생각입니까? 제가 받기는 틀렸어요. 새삼스럽게 붙들고 있다고 됩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진 위신, 체면 등 뭐 남은 것이 있습니까? 어떤 분들을 보면 벌써 다 치워 버려야 될 사업을 아무개 망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붙들고 있다고 합니다. 계속 붙들고 있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왜 쓸데없는 위선을 부리고 왜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까? 부끄러움을 아십시오. 이미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미 벌거벗었는데 더 가릴 것도 없습니다. 좀 더 진실해 보십시다. 자기의 수치를 긍정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현실에 직면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러면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18~19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원문대로 다시 번역을 해보면 "열심을 내어서 회개하라." 즉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실상, 그 본래의 진실, 그 진실 그대로가 나올 때까지 낮추고 또 한 번 깨져서 자기의 본래성, 자기의 실상, 자기의 진실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리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장님 되고,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이제 그대로 고백하라는 얘기입니다. 열심을 내서 회개하라.
여러분, 더 이상 위선과 허구에 매여 있지 맙시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명예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가 아니라 벌써 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마지막 남은 진실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철저하게 실망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나면 이제는 다시 실망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속는 일도 없겠습니다. 따라서 속이는 일도 없겠습니다.
1)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세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서 그 믿음으로 진실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진실을 찾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부요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욥기23장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주님이 불로 연단한 금, 즉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깨어지고 부서진 다음에 찾은 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광물을 캐내어 용광로에 들어가서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순금이라고 말합니다. 광물이 용광로를 지나면서 자신이 불순물들이 다 빠지고 순금이 되면 그 가치는 측량할 수 없는 만큼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 이와 같이 귀한 존재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견고하고 바른 믿음위에 세워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허락하신 부요함이 있는 것입니다.
2)흰옷을 사서 입어 부끄러운 수치를 가려라, 흰옷을 사서 입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주님의 은총을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7장 13~14절에서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하고 물으니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 라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너무나 안일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고통이 없고 안전하다는 곳에만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오히려 큰 환난을 이기고 나온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고 새로운 인격을 가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개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하실까? 하면서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 더럽혀진 나를 깨끗이 씻겨서 하나님의 거룩한 옷으로 입혀주시고 수치됨을 부끄러움을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환난을 통과하게 하시고 고난의 현실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현실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기쁘게 생각하고 믿음으로 인내하여 축복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3)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뜨였지만 영적인 눈은 맹인이 아닌지 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11장 34~35절에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인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눈은 내 몸의 등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이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눈이 성하면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몸이 어두워진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고 바르게 결단하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거짓에 속아서 우리의 눈이 가려지면 당연히 우리의 몸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 미래의 약속을 보며, 그 깊은 곳을 보며 하나님의 뜻과 그 오묘한 역사를 볼 줄 아는 신령한 눈을 가져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유혹을 받아 어두원진 나의 눈이 다시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력으로 회복해야겠습니다.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이웃을 볼 줄 아는 시력을 가져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고백합니다. 위대한 사도가 자신의 모든 체면을 벗어 던지고 오호라 나는 곤고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신에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악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22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고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 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중심에 모셔 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은혜를 통해 먹고 축복의 사람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 비춰서 자신을 밝히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요 축복의 사람으로 살게 됨을 믿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말씀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성도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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