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의 우울증, 어떻게 할 것인가? 우울증에 대한 목회적 접근과 치유 목회 김서택/대구동부교회 담임목사 “예수 믿는 사람도 자살할 수 있나요?”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고 자살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신을 살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믿는 자들이 우울증으로 시달린 나머지 자살을 기도하는 경우가 있으며 더러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앞으로 21세기는 우울증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정신과 전문의나 상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행태에 대하여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능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귀신에 의하여 조종 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신 이상이나 미친 사람들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완전한 정신 이상보다는 의식은 있지만 감정이 완전히 파괴되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많은 우울증 환자들을 교회 안팎에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영적인 것인가 육체적인 것인가? 또한 이것은 한번 은혜를 받으면 단번에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은혜 받는 것과 상관없이 고쳐질 수 없는 불치의 병인가? Ⅰ. 우울증이란 무엇인가 우울증은 감정적인 침체(depression) 상태가 지속되는 것으로 자발적으로는 그런 침체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는 거기서 더 발전하여 지속적으로 밤에 잠을 자지 못하거나 환청이나 환각 상태까지 나타나서 반드시 전문적인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우울한 감정이 들거나 혹은 어느 정도 우울하다가 자발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우울증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친구의 슬픈 소식을 듣거나 혹은 계절이 바뀌어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을 우울증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울증은 감정적인 침체 상태가 지속적이고 자발적으로 회복이 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침체(depression)라고 하는 것은 감정이 완전히 붕괴되어 의욕 상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염려나 근심보다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좋지 않은 일을 눈앞에 두고 있거나 혹은 일어날 것으로 예상할 때 염려하고 근심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과도하게 근심하거나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침체라고 하지는 않는다. 침체는 완전히 의욕 상실의 상태까지 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런 침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된다. 그러나 어떤 요인으로 인하여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붕괴된 것을 우울증이라고 한다(이것은 학문적인 정의가 아니라 우울증에 대한 나의 목회적인 정의임을 양해 바란다). 예를 들어 고무줄은 잡아 당겼다 놓으면 원상태로 회복된다. 그러나 자꾸 잡아당기면 그때는 고무줄 자체가 늘어나서 줄을 놓아도 원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우울증은 바로 이런 현상과 같다. 필름이 끊어져 그야말로 자기가 한 행동을 본인이 알지 못하는 상태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장기적으로 침체되어 시간이 지나도 정상적인 상태로 감정이 회복되지 않는 증세를 말한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우울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울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질문은 도대체 이 우울증이라는 것이 영적인 것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셔서 이런 현상이 생겼다고 하면서 더욱더 자신을 자책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순전히 육체적인 현상으로 생각해서 뇌의 어떤 신경 계통에 이상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수술을 하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다양한 원인에 의해 우울증이 생길 수 있다. 1. 기질에 의한 우울증 다시 말해서 우울증에 잘 걸리는 기질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기질적인 약점 때문에 어려운 경쟁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우울증이 걸리는 경우이다. 대개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정직하고 자존심이 강한데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경우이다. 즉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기준은 높은데 실제로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안에 다른 사람들은 다 명문학교 출신인데 본인은 그렇지 못할 경우에 이런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병이 심각해지기 전에 상담을 통해서 자신의 기준을 낮추거나 현실적인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하면 극복할 수 있다. 2. 환경에 의한 우울증 원래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인데 환경적으로 스트레스가 장기화되는 바람에 우울증이 생기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를 직업적인 우울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무리 정신이 건강하고 낙천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장기간 경쟁적인 분위기에 오래 노출되어 있으면 결국 우울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아주 젊은 은행 지점장이 자살을 했는데 결국 바로 이런 경쟁적인 분위기에 오래 노출되어 있다가 우울증이 생겨 자살하게 된 경우이다. 3. 죄의 결과에 의한 우울증 특히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죄를 지었을 때 양심의 고통과 함께 죄의식이 따른다. 그런데 이런 양심의 고통을 빨리 해결하지 않고 오래 마음속에 담고 있으면 결국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해서 자학적인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은 우울증과 비슷하지만 원인은 다른 데 있기 때문에 결국 목회적인 상담이 필요하다.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책임질 수 있는 목회자와 만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체험하지 않으면 일반 상담으로는 잘 고쳐지지 않는다. 사실 자기 양심을 속이는 사람에게는 죄를 지었다고 해서 이런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 나름대로는 깨끗한 양심을 가지려고 노력을 해 왔는데 순간적인 충동으로 범죄하게 되었을 때 결국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서 감정적인 슬픔이 지속되고 나중에는 이것이 침체와 우울증이 될 수 있다. 4. 상처로 인한 우울증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경우이다.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어렸을 때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나름대로 극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이것이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거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한번 듣지 못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하거나 혹은 부모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성장 과정에서 너무나 무참히 자존심을 짓밟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으로 인해 우울증이 오는 경우이다. 사실 이런 경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분노의 감정이 품어지고 키워졌기 때문에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Ⅲ. 우울증은 영적인 것인가 육적인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우울증을 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즉 자기가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계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일단 육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개 사람들은 위나 간이 탈이 나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우울증에 대해서는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을 대단히 기피하고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데는 전혀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도 또렷하고 밥도 잘 먹고 몸에 전혀 다른 이상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 불안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 화가 나며 잠이 오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우울증이라는 것은 간이나 위가 탈난 것보다 훨씬 더 고치기 어렵고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나중에는 결국 그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서 목숨까지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동안 사람 안에 있는 감정의 요소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연애 할 때나 필요하지 밥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사치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서운 우울증의 원인이 바로 ‘분노’의 감정에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자꾸 화를 내고 있다. 특히 내성적이거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분노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출을 시키지 못하고 속으로 스스로 삼킨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분노의 감정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감정의 못(pool; 이것도 학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본인의 목회적인 표현임을 양해 바란다)을 마르게 해 버린다. 예를 들어 지구에는 많은 양의 물이 있어서 지구 표면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거나 낮아지는 것을 막고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게 한다. 만일 지구 표면에도 물이 없으면 밤과 낮의 기온 차이가 달 표면과 비슷하게 섭씨 백도 이상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 안에는 감정의 못이 있어서 급격한 감정의 상승이나 하강을 막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 준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화가 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화가 가라앉게 되고 의심을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마음이 안정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지속적으로 화를 내면 이 분노의 감정이 마음속에 있는 감정의 못을 모두 다 갉아먹어서 감정의 변화를 지켜 줄 안전장치가 없어져 버리게 된다. 그때부터는 아주 작은 분노도 그의 인격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작은 의심도 강박 관념으로 그를 지배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우울증의 내부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자주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지속적인 분노의 감정을 품음으로 감정을 완전히 말라 버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이 세상에서 기쁜 일과 소망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모두 감정으로 느끼게 되는데 그런 감정이 모두 다 말랐기 때문이다. 사람이 처음에 화를 내는 것은 화를 낼 만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화를 낸다고 하자. 그러나 자꾸 그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는 화를 낼 일이 없는데도 자동적으로 화가 나고 나중에는 기뻐해야 하는데도 화가 저절로 나게 된다. 그 이유는 감정 통제는 자신의 의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이런 우울증 환자가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나도 조심 없이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자꾸 표출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화를 참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 정도의 일로 화를 낸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많이 화를 내실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표출하기 때문에 화가 나면 자꾸 화를 낸다. 그리고 또 화를 낸다고 해서 당장 병원에 가는 것도 아니고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더 화를 낸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가장 치명적인 고통으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즉 우울증의 특징인 불안의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는 것 같고 자기만 이 세상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자책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구약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형제에 대하여 “분노로 말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마 5:22 의역)라고 하셨다. 결국 살인이라는 것은 남의 목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든지 자기 자신을 해치든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우울증으로 진단되면 그것은 영적이면서도 육체적인 질병이라고 진단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전히 영적인 질병이라고 볼 수도 없고 또 순전히 육체적인 질병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영적인 병이라면 기도를 하거나 은혜를 한번 강하게 받음으로 끝날 수 있고 육적인 질병이라면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함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겠지만 우울증은 그렇게 간단한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우울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지면 저절로 고쳐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울증에 걸리게 되면 일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분노를 어떻게 해소하며 또한 파괴된 감정 체계를 어떻게 재생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며칠씩 잠을 자지 않거나 환청을 듣거나 혹은 자살의 충동을 느낄 때에는 빨리 전문적인 의사의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울증 치료에 있어서 약물 치료는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급한 발작을 막는 것이지 분노를 없애거나 감정을 재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우울증 환자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꽉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대화 치료밖에 없다. 대화가 아닌 다른 방법은 분노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히는 방법은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해야 속에 있는 분노가 빠져나간다. 옛날 이야기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이발사가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인 것을 말하지 못해서 병이 생겼는데 산에 가서 소리를 지르니까 나았다는 것이다. 즉 아무도 없는데 가서 소리를 지르니까 속이 조금은 시원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에 잘 걸리는 사람의 기질 자체는 그렇게 밖에 나가서 소리를 지를 정도의 화통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런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예 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Ⅳ. 교회 안의 우울증 환자 그리스도인들은 우울증에 걸릴 수 있는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거의 완벽주의적인 기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주님을 모를 때에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설사 어떤 죄를 지어도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면 되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는 양심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견디지 못하는 양심의 고통이 찾아온다. 그리고 결국 그 죄를 토하여 내기까지 양심의 고통이 계속된다. 그런데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완전하게 살 것을 요구 당하고 있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너무나도 많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쉽게 자신의 부족함이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 결과가 우울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우울증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사탄의 가시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너희들이 믿는다고 하지만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된다. 죄를 지으면 바로 바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늘 다른 사람 앞에서도 정직하고 겸손하라”는 뜻으로 이런 가시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짓고 나서도 고집과 자존심을 내세우며 스스로 낮아지지 않을 때 이런 무서운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죄 용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한 순간도 빠짐없이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우울증 환자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일단 그들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이미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친구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들을 상대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우울증 환자들은 이미 같은 일에 대하여 수백 번 수천 번씩 생각해 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똑같은 말을 그렇게 반복해서 많이 하는 줄을 모른다. 그리고 자기 생각에 꽉 차 있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이런 사람은 자기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말로 다 쏟아 내어야 하는데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더욱 그를 어렵게 하는 것은 설교를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배에 나와서 앉아 있지만 설교를 듣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자기 생각에 빠져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예배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아도 이런 사람들은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다른 사람의 잘못만 지적하기 때문에 결국 그를 도울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병이 있다면 그것은 우울증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완전히 미친 사람보다 더 불쌍하다. 왜냐하면 완전히 미친 사람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우울증 환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뿐 아니라 그 모든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우기 때문에 영혼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가장 고통스러운 병이라고 진단을 내릴 수 있다. Ⅴ. 우울증은 치료될 수 있는가 그럼 과연 우울증은 치료될 수 있는가? 우선 의학적으로는 완치가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약물로 급한 발작이나 자살 충동은 막을 수 있고 또 장기간의 상담으로 속에 들어 있는 분노를 어느 정도 풀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미 파괴된 감정의 체계는 회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울증은 그 원인에 따라 치료가 다르다는 것이다. 대체로 선천적인 기질이나 환경적인 스트레스에서 온 것은 비교적 치료가 빠르지만 성장 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인한 우울증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죄의식이 오래되어 우울증으로 발전한 경우는 감정 파괴의 정도에 따라서 치료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치료받지 못할 질병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우울증도 치료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번의 기도나 한번의 상담으로 하루 아침에 치료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다. 우선 그리스도인들도 우울증이 심해서 잠을 여러 날 자지 못하거나 환청이나 환각의 증세가 보일 때에는 입원을 시켜서 의학적인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계속적으로 상담을 통해서 속에 있는 분노를 해소하며 특히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질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미 다 해결하셨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상담에 대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목회자는 너무 이런 상담에 매달리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일단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혹시 환자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이야기가 설교에서 나오면 목사님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오해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파괴된 감정은 누가 회복시키는가? 그 일을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결국 이런 우울증 환자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하여 성령님의 치료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즉 예배 안에서 온 교회가 뜨거워질 때 예배를 통하여 우울증 환자가 치료될 수 있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런 사람을 잘 용납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어떤 우울증 환자가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의 원인으로부터 그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상담만 한다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우울증 증세가 있음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가족들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를 들면 직장을 그만두게 한다든지 아니면 이사를 하게 한다든지 학교를 쉬게 한다든지 등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이때 몸의 다른 부분에는 이상이 없기 때문에 가족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일단 목숨만이라도 살린다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리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본인의 의지가 아주 중요하다. 본인이 자기는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고 계속 우기거나 다른 치료를 고집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병 자체가 고집이 센 사람에게 생기는 병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인내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만나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그리고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는 자살의 충동이다. 대개 자살의 충동을 느껴도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어떤 경우에는 약을 많이 먹거나 동맥을 그어서 진짜 죽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거나 증세가 좀 수상할 때에는 미련을 갖지 말고 바로 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 많은 경우에는 우울증이 치료된 후에도 영적인 장애인으로 한 평생 소극적인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단 우울증 환자가 매사에 감사를 하게 되고 기뻐하면 일단 그 사람은 치료가 되었고 그의 감정 안에 기적적인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우울증은 결코 치료하기에 쉬운 병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명히 치료가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자신의 노력이 중요하다. 만일 본인 스스로가 치료되려고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고쳐줄 수가 없다. 일단 교회 안에서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상담자를 많이 준비시켜 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설 상담실을 열어 놓아서 이런 증세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언제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크리스천 정신과 의사가 있으면 언제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으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함부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창조질서를 깨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 지속적인 설교의 심리적인 접근을 통하여 상처받은 심령이 치료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특히 살아 있고 뜨겁고 감동적인 예배는 우울증의 치료에 절대적인 효과를 준다. 오늘날 마귀는 사람의 심리 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사람의 감정을 완전히 황폐화시켜 놓았다. 이제 목회자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의 심리 속을 파고 들어가서 마귀가 파괴시켜 놓은 심령을 다시 회복시켜 놓아야 한다. 김서택/서울대를 나와 총신대신대원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대구동부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고난의 시대에 찾아온 하나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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