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교육/365일 설교의 집

성탄을 기다리는 자세 (설교)

에반젤(복음) 2020. 12. 6. 04:08

성탄을 기다리는 자세
설교자 : 홍석운목사
성경본문 : 누가복음 2 : 25~28

어둠에 익숙하여

드러내기 싫은 모습

더는 망설이지 말고

빛으로 오시는 아기 앞에

눈물로 무너지는

환희를 맛보아야 하리



사랑이신 예수님이

사랑으로 태어났기에

집이 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온 인류를 가족으로

힘차게 끌어안으며

우리 모두

하나 되어야 하리



눈 속에 묻혀서도

일어서는 보리처럼

우리의 언 가슴에

푸른 희망 키우며

어린이로

어린이로

맑아져야 하리



얼음 밑에서도

쉬임없이 흐르는 냇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겸허함으로

우리 모두 이웃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리

성탄주일이 한 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준비하며 맞이해야 할까요?

혹시 의미없는 성탄절을 상상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성탄절을 기다리지 않습니까?



이번 성탄절은 마리아처럼 하나님께 선택받는 성탄절.......

쓰임받기 위해 준비하고 준비하는 성탄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감격적인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두 선지자가 나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중에 오늘 우리가 만나 볼 사람은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이들을 선지자입니다.

시므온은 남자 선지자, 안나는 여자 선지자입니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이들은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만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와 구약성경에 예언하였던 그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당시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도 수많은 종교지도자들, 정치지도자들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정말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소수에 이들은 포함되었습니다.

그 소수에 포함되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을 선지자라고 소개하지만 이들은 보통사람입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나이가 들고 주님 앞에 가야하는 보통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메시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성전에 오시자 메시야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에 대한 궁금점은 더해 갑니다.

도대체 이들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메시야를 만났을까요?

도대체 이들이 어떠하였기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런 복을 주셨을까요?

도대체 이들이 어떠하였기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을까요?

도대체 이들의 영성이 얼마나 뛰어나기에 아기를 보자마자 메시야임을 알았을까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런 믿음을 주셨을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주인공은 아닙니다.

성경의 주인공, 성탄절을 주인공은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는 욕심을 갖어야 합니다.

나도 이들처럼 하나님께 쓰임받아야 겠다.

내 인생도 이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겠다.

나도 주님을 만나는 인생을 살아야 겠다.

나도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사용되어야지......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은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시간 이들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이와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을 찾아서 사용하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이들의 삶과 신앙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 모두도 성탄의 나심에 사용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두 사람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하나님은 시므온을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합니까?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므온을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시므온이 얼마나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훌륭하였으면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께 이런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나바입니다.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에 비하면 시므온의 기록은 부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시므온은 훌륭한 신앙과 인격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또 시므온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새번역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렸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메시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과거에 일제의 지배를 받는 상황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은 메시야였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해방되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얼마나 해방을 기다렸습니까?



아마 시므온도 이스라엘의 외적인 해방과 자유를 기다렸을 겁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단순히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만을 기다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임하여 있었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있었다”(25c)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 안에 들어 갔을 때에“(27a)





시므온은 성령의 임재속에 살았습니다.

또한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시므온은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그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안고 이렇게 찬송합니다.



29절을 읽겠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새번역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놓아 주시는도다”

“평안이 떠나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아마 선지자 시므온은 나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언제부터 성령님의 임재와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나이는 점점 들어 늙어가는데 메시야는 만나지 못하고......

얼마나 초조했겠습니까?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메시야를 기다린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선지자 안나입니다.



37절을 읽겠습니다.

“과부된지 팝십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여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경건한 여 선지자 안나는 나이가 많아 매우 늙었습니다.

그녀는 일곱해 동안 남편과 같이 살다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된지 84년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과부중 가장 과부생활을 오래한 사람입니다.



두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과부된 지 84년이 지났다”라는 해석입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안나의 나이는 100살 정도는 족히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84세에 이르기까지 과부로 있었다”

과부 안나의 아니가 이때 84세였다는 말입니다.



이 두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어느 경우이든 “나이 많아 매우 늙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 여 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고 기다렸습니다.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며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잠시동안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철저히 준비하여 기다렸습니다.

인격적인 준비, 신앙적인 준비를 하며 기다렸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며 기다렸습니다.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기다렸습니다.



이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어떻게 기다립니까?

성탄절을 기다리기는 기다리는데 어떤 마음으로 기다립니까?

어떠한 준비를 하며 기다립니까?







둘째, 두 사람은 메시야를 만나자 감사(찬송)했습니다



28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안나의 감사를 보겠습니다.

38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두 사람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부모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성탄절의 가장 큰 의미는 구세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드릴 선물, 그것은…



류태영 박사님를 모두 아실 겁니다.

우리에게는 유대인의 자녀학습법과 관련해서 많이 알려 졌습니다.

이분의 간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류태영씨의 집은 지지리도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품팔이를 다녔고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태영은 늘 배를 주려야했습니다.

돌보아 줄 사람도 없이 자랐습니다.

배고픔에 칭얼대고 다니다보면 이웃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먹을 것을 주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정직하고 부지런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땅 한 평 없는 농부의 삶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굶기가 예사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가족 중 몇몇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도저히 공부를 시킬 수 없었던 집안 형편 탓에, 어려서부터 신문배달, 가정교사,

아이스크림 장사 등을 해가며 스스로 학비조달을 해야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꿈마저 포기할 순 없었지요.



중학생이 되어서는 부모님 품을 떠나 서울의 달동네에서 생활했습니다.

그곳에서도 몸 하나 거처할 곳이 없어 거지처럼 방황했던 날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개나 먹을 법한 버린 음식을 주워 먹었습니다.

결국, 영양실조에 걸려 걸어다니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그러나 그것을 원망해 죽음이나 가출이나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합니다.

그는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내리라. 그리하여 반드시 성공하고 말리라.'



새벽이면 언제나 내 발걸음은 교회로 향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히려 그 와중에도 나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불쌍한 아이들만 보면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고 합니다.

나 먹을 거 모아 남 주는 게 삶의 낙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고 기뻤다고 합니다.





1950년 중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그는 신문을 돌린 후 은행에 들러 돈을 찾았습니다.

그 돈이란 신문배달과 아이스케키 장사 등을 하며 푼푼히 모은 돈 중에서

크리스마스에 쓰기 위해 저축을 해오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만 이천 원 정도, 그리고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일곱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대상은 누구인지 모르니 이름도 당연히 알 수없었습니다.

길가의 천막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을 떠올리며 편지를 썼습니다.



"이 돈 300환(화폐개혁이전 우리나라 화폐단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기쁜 성탄절에 무엇이든 맛있는 것을 사 드세요."



물론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돈과 함께 봉투에 넣었습니다.

포대 종이로 두껍게 봉투를 만들어 쌀도 조금씩 담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신문이 도착하기도 전에 후다닥 일어났습니다.

밤에 만들어 놓은 쌀과 돈 봉투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은 무척 쌀쌀했습니다.

하늘의 총총한 별을 바라보며 여의도 백사장으로 갔습니다.

당시 비행장 주변의 모래사장을 향해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곳에서 모래움막을 짓고 겨울을 나는 빈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모래사장에 굴을 파고 나무를 세운 후 그 위로 천막이나 비닐을 덮고

다시 그 위에 모래를 덮는 식의 움막집,

때문에 그곳에서 겨울을 나는 사람들 중엔 얼어죽거나 굶어 죽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천막을 향해 다가가 쌀과 돈 봉투를 준 후

그들에게 복음을 건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태어나신 날이랍니다.

이것은 그분이 당신을 사랑해 주시는 선물이니 받으세요.

그리고 그 예수님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한 움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런데 웬 일인지 그 움막에선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수십 번을 소리쳤을까요.



"콜록‥‥ 콜록‥‥ 뉘‥‥ 뉘시오‥‥‥



겨우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병색이 짙은 노인 한 분이 슬며시 얼굴을 내밀더니

움막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들어가 보니 그 공간이란 게 얼마나 좁던지, 한 사람도 거의 누울 수 있을까 말까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이 있었답니다.

그좁은 공간 한 가운데에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성경책과 십자가 목걸이가 놓여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잠시 언 사람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노인은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누추한 곳에서도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오! 주님‥‥‥'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습니다.

그는 노인의 손을 잡고 정말로 진지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구유에 천한 몸으로 태어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주님,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

이 할아버지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비록 지금은 삶이 궁하나 마음 가운데 주님의 기쁨과 화평을 내려주십시오."



"할아버지, 이 선물은 모두 할아버지 겁니다."



그는 준비했던 선물봉지를 모두 들고 와 그 노인의 움막에 넣어주고 말았습니다.



그의 간증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빈궁한 중에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찬양하는 그 마음에

감동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항상 마음에 평화가 깃드는 법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평화가 넘칩니다.



가축들의 오물 내 나는 누추한 구유에서 예수님은 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평화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의 평화입니다.

날 언제나 포근히 안아주셨던 그분,

낮은 자들의 친구와 기쁨이 되어주셨던 예수님



동방 박사는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성탄절 예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니 감사의 마음은 평생에 드릴 선물입니다.







셋째, 두 사람은 메시야를 전하였습니다



30절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

38절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는 늙고 나이가 많았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보자 무어라고 고백합니까?

“이제야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안나는 과부로 84년을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들이 살아 생전 예수님을 본 것은 영광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의 인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어진 사명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눈으로 보고 증거하는 것이 이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이 사명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었겠지만 비전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보자 마자 이분이 누구인지 금새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므온의 고백을 읽겠습니다.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흑암가운데 거하던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예수님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전합니다.

단지 유대민족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이란 뜻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 곧 새 이스라엘의 영광이란 말입니다.



이 말씀을 뒷받침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2장 10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기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빛이 아닙니다.



시므온은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메시야를 전하는 한나는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일생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기다렸는데.......

그렇게 소원하던 메시야를 만나자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가이드 포스터에 있는 내용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고 불리는 9세 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나이로는 4학년이지만 지적 증력이 다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해 성탄절이 가까워 오자 교회에서 연극을 준비하게 되었다.

선생은 윌리에게 여관집 주인역을 맡겼다.

성탄절이 되어 교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와 여관집 문을 두드렸다.

주인이 나와 여관에 방이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더욱 간절히 간청하였다.



"우리는 너무 멀리서 왔습니다. 아내는 출산할 날이 찼고 쉬어야 할 곳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도 없이 마리아를 오래 쳐다보았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잊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윌리는 막 뒤에서 선생이 일러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안돼요. 방 없어요. 가요!"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듯이 뒤로 돌아 걸어갔다.

이때였다.

각본에 따르면 윌리는 방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윌리는 문간에 서서 걱정스러운듯 눈물을 흘리며

마리아와 요셉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돌아와요."



물론 각본에도 없는 대사였다.



"내 안방을 써요. 내 방에서 쉬란 말이에요!"



연극은 그것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장면을 지켜 본 수많은 관중은 가장 뜻 깊은 성탄 연극을 보았다고 말했다.





성탄절의 가장 큰 의미는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말과 행동으로 전해 주는데 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지구촌 전체가 종교와 국경을 떠나 축제 분위기로 돌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탄절이 왜 그토록 기쁜 날인지 모릅니다.

그날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탄절의 참 본질을 모르는 이들이 이날을 여흥과 환락으로 보냅니다.

상술만이 판치는 날로 만들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코 화려한 날이 아닌데도 일 년 중 가장 화려한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백화점마다 요란스럽게 불을 켜 놓고 호화로운 선물을 파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베들레헴 구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없는 비신자들이 더 설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사단(the Satan)의 문화전략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결코 '화려한 스타탄생'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 이하에 그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주님도 그런 화려한 데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10절에 주님의 관심사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합니다.

아무도 돌아보는 이 없는 마구간 구유 위에 나신 아기 예수.......

메시야의 겸손한 탄생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며, 이날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날의 본질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바른 방법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하도록 기도하며 계몽을 해야 할 것입니다.



껍데기뿐인 성탄절 문화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다시 모셔야 합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거리가 먼 이웃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고 계시다는 뉴스를 알려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돌봐야 합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성탄절 계획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