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창세기 강해

횃불언약 -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에반젤(복음) 2019. 7. 7. 06:06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그분의 약속을 믿고 어려운 일에 뛰어든 적이 있습니까? “이 일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감당하리라”는 자세로 난제를 감당하는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홉 나라가 다섯과 넷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롯이 재물을 약탈당하고 식구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식솔들을 동원하여 롯을 구하러 떠났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식구들을 구하려는 무모한 시도가 아님이 밝혀집니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약속을 굳게 믿고 벌인 신앙의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롯과 그 가족들과 붙잡혀 갔던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많은 재물까지 얻어 돌아왔습니다. 다섯 나라의 동맹도 쩔쩔 매던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을 맞이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셀렘 왕 멜기세덱과 소돔 왕입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두 왕에게 보인 행동입니다.

먼저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행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십분의 일, 즉 십일조를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첫 기록입니다.

십일조에는 아주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은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두번째 소돔 왕에게 행한 일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이 말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전리품을 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롯을 구하겠다는 용기,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로 왔음을 인정하며 드렸던 십일조, 전리품조차도 포기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온전함. 이것이 아브라함이 갖추게 된 거룩한 성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을 대견스럽게, 때로는 흐뭇하게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그런 아브라함을 조용히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친자식이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아브라함의 나이는 벌써 구십입니다. 아들을 낳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브라함의 반응과 하나님의 평가를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신약성경에서 야고보 사도는 더욱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엄청난 말씀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십 세의 노인이나, 벌레만도 못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 믿음 외에는 없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의 영혼에 믿음의 유전자가 생긴 것입니다. 얼마나 기다리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변해 주십니다.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창 15:9) 그리고 그것들을 반으로 잘라 마주 대하여 서로 대칭으로 늘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해가 지고 밤에 하늘에서 연기 나는 풀무불이 나타나 쪼개놓은 고기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이러한 광경은 고대인들이 상호 계약을 맺을 때 행하는 관습이었습니다. 계약 당사자 두 사람은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며, 계약을 성실이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와 같이 쪼개지는 죽음을 당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 쪼개놓은 짐승 사이를 아브라함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나가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서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죽음을 당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의 내용들은 친히 성실히 이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단 하나의 계약조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만 하라는 조건도 어겼으며 하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곳에서 이렇게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이 꼴로 사는 것입니까?” 마치 왜 나를 낳아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는 철없는 자식들의 항의에 가슴아파하듯, 빗나간 자녀를 자신의 책임으로 아는 부모처럼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잘못을 책임지시고 대신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몸을 쪼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야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 사람은 미래를 살아갑니다. 그는 결코 한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전만을 말할 뿐입니다. 초대 교인들의 별명은 “능욕을 기뻐하는 자, 세상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의 약속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20)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서 온전히 이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