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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양사상 : 고대 그리스 시대

에반젤(복음) 2021. 8. 28. 10:30

서양사상 : 고대 그리스 시대

그리스 철학(Greek philosophy)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철학. BC 585년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아카데미학원이 폐쇄된 529년까지 1000년 이상 지속된 고대의 철학을 말한다. 그리스 철학의 절정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속했던 시기, 즉 아테네가 ‘헬라스의 학원’이었던 고전기인데, 그리스 철학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필로소피아(愛知學)의 형성기이다. 이 때의 관심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 있었는데, 이오니아 식민지의 그리스 사상가들이 동방에서 습득한 기술에서 ‘원리와 원인에 관한 지식’으로 전환하여 철학의 정초를 이루었다. 제2기는 아테네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원래 아티카에는 독창적인  철학자들이  없었는데, 페르시아 전쟁(1차 BC 490, 2차 BC 480)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명성이 있는 사상가들이 대거 아테네에 몰려들어 여기에 그리스 철학이 꽃피우게 되었다. 이 때 대우주(자연)에 쏠렸던 관심이 소우주인 인간에게 돌려졌다. 제3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BC 336∼BC 323)에 의한 헬라스(Hellas, 고대(古代) 그리스인(人)이 그리스를 자칭하는 경우의 이름. 현대 그리스인도 마찬가지로 자국칭(自國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엘라스’라 발음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나라는 전설적인 영웅 헬렌(Hellen)이 만든 것이며, 그들은 모두 헬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일컫는다.) 통일과 동방원정이 있은 후 그리스 철학은 순수한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의 특색을 상실함과 동시에 세계의 그리스화를 꾀하는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상의 3시기를 살펴보면 그리스 철학은 지역적으로도 지중해 전역에 걸쳐 있어 그리스 본토뿐만 아니라 아시아·남이탈리아·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이른다. 민족적으로도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로마인·유대인·이집트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용어도 그리스어 외에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광범위한 그리스의 철학을 한마디로 특징짓기는 힘들다.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I.칸트가 표현한 대로 그리스 철학은 ‘하나의 학문의 확실한 진로’를 보여주었다. 인류의 긴 암중모색 이후 그리스인은 인류가 더 이상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확실한 진로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철학은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만물의 원리와 원인을 추구했던 최초의 철학자들이 탄생한 곳은 이오니아 식민지의 밀레토스이다. 식민지에 나온 사람들은 타향살이에서 전통적인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 닦은 생활지반에서 오는 여유로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자연에 대해 활기 있는 질문을 하였다. 만물이 그것으로 이루어지고 최초로 그것에서 생성되고, 또 마침내 그것에서 소멸되는 것, 실체는 변하지 않고 모습만 변하는 것, 그런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구하였다. 이오니아학파에 속했던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는 각각 그것을 ‘물’ ‘무한한 것’ ‘공기’라고 하였다. 이들의 탐구방식은 자연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설명이었다. 한편,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나 남이탈리아로 이민한 사상가들이 있다. 사모스섬에서 크로토네에 갔던 피타고라스와 콜로폰에서 남이탈리아의 엘레아로 갔던 크세노파
네스가 바로 그런 사상가들이다. 영혼의 불멸을 믿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희구하는 남이탈리아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그들은 이오니아 사람들의 경험적 태도와는 달리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하면서도 철학하는 목적을 영혼의 정화에 두고 종교 교단을 창설하였으며, 크세노파네스는 그리스 대중이 신봉하는 의인적인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전체로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격적인 유일신을 소개하였다. 이탈리아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의 철학적 유산에 의해, 그리스철학에서 감각에 의해 알 수 있는 것과 정신에 의해 알 수 있는 것 2개의 세계로 구분된다. 엘레아 출신인 파르메니데스는 정신의 활동이 감각의 활동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여 플라톤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실재는 부동·불변의 ‘있음’이라고 보았던 파르메니데스에 맞서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았다. 한편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부정한 데서 초기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사물의

 

혼합과 분리라는 방향으로 추구하여 다원론(多元論)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엠페도클레스의 ‘4개의 뿌리’, 아낙사고라스의 ‘씨앗’,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原子)’가 나온다. 여기에도 이탈리아와 이오니아의 흐름의 특질이 있어,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정열로써 혼의 정화를 외쳤고, 아낙사고라스는 클라조메나이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을 이어받아 태양은 신이 아니고 불붙은 돌덩이라고 외쳐 화를 입었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아브데라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따라 기하학적으로 분할할 수 있으나, 물질적으로 더 분할할 수 없는 원자를 말하였다.

 

 

 

【아테네의 철학】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급속한 발전을 하여 봉건적 귀족제도가 붕괴되고 민주제도가 형성되었다. 페리클레스의 문화정책(BC 460∼BC 429)으로 학자들이 각지에서 아테네에 모여들어 젊은이들에게 삶의 교양을 가르쳤다. 이들이 궤변론자라고 일컫는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의 대표적 인물은 아브데라 출신인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노이 출신인 고르기아스, 엘리스 출신인 히피아스, 케오스 출신인 프로디코스 등이다. 이들은 넓은 분야에 걸쳐 스스로 지자(知者)라고 말했으나, 진리를 구하기보다는 진리에서 생기는 이득을 얻는 데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플라톤은 그들을 ‘정신양육의 무역상인이나 소매업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사람은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또 장소와 시간에 따라 동일한 것도 다르게 판단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참과 거짓, 선과 악이 없다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에 의하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고, 각자의 감각에 의해 파악된 세계가 곧 그에게는 참된 세계이며, 각자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참이라는 것이다. 이런 진리의 상대론을 펴나가면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진리가 없
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수립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소피스트의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를 검토

 

하기 위해 물음과 답에 의한 대화방식을 택하였다. 이 방식으로 그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여 수정을 통해서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게 하였다. 가령 ‘덕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제를 놓고 개개의 덕행을 검토하여 귀납적으로 덕의 본질에 알맞은 정의(定義)를 구한다. 이 보편적인 정의를 얻어야 비로소 덕에 대한 지식이 확립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행위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하여야 할 것을 알면서 그 반대의 행위를 하는 자는 지자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철학적 순교 역시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세계관에서 유래된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보고 자기 삶을 스승이 못다한 일을 완수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보편적인 것이란 인간의 감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타고라스학파가 사물을 ‘수의 모방’이라고 했던 것처럼, 감각적인 것은 그 본질과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이 정신적인 눈을 떠서 볼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존재라고 보고, 그는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 20년 간 철학을 배웠는데, 나중에 독자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아 경험의 세계를 중요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데아론(論)에 대하여 그는 같은 종류의 여러 사물 속에는 하나의 공통개념(이데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통개념을 사물에서 독립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떠난 본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데아[形相]와 감각적 재질[質料]의 결합을 강조하여 ‘질료·형상설’을 내세웠다. 플라톤의 경우, 인간은 모름지기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갈망하여 감각의 세계를 떠나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충동,
즉 에로스(eros:사랑)를 목표로 하는 데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을 이성에 의한 영혼의 활동으로 규정짓고,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사랑이 아닌 시민의 상호협조로서의 필리아(philia:우정)를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출현은 그리스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알렉산드로스가 건립한 대제국 밑에서 종래의 도시국가(폴리스) 중심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이 그 의미를 잃고, 세계국가(코스모폴리스)의 성격을 띠게 되어 국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로마의 J.카이사르의 세계 통일(BC 46)이 이루어진 후, 그리스 철학은 아테네에서 서쪽은 로마로, 동쪽은 알렉산드리아로 옮아갔다. 국운이 쇠잔해진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론적 추구의 여유가 없어지고 옛 철학이론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실천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BC 3세기에 아테네에서는 키프로스 출신인 제논이 붉은 주랑(柱廊)에서 창설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가 그의 정원에서 가르친 에피쿠로스학파가 대립되었다. 스토아학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무욕의 생활’을
이상으로 했던 키니코스학파(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쾌락이 선이다’라는 키레네학파(역시 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인간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인생은 자연에 따르는 생활에서 그 행복이 획득된다고 믿었으나, 스토아학파는 그 행복이 자족생활(自足生活)에 있다고 보는 데 반하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에 있다고 보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의 ‘무감동(apatheia)’이나 에피쿠로스학파의 ‘혼의 평안(ataraxia)’은 다같이 인간의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비슷한 입장이라 하겠다. 한편, 엘리스 출신인 피로가 체계화한 회의론은, 원래 인간이란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으므로 헛된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중지’를 내세워, 그것으로 혼의 평안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입장이다. 스토아학파는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의 교사였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학자들로 이어졌고, 에피쿠로

 

스학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어머니 플로티나 같은 신봉자를 로마에서 얻었다. 동쪽 알렉산드리아로 뻗어나간 그리스 철학은 동방의 헤브라이종교와 접촉하여 이른바 ‘구제(救濟)의 철학’으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은 플라톤 철학과 헤브라이종교의 결합을 꾀하여 인간은 하나님 속에 머무는 행복을 위하여 자기 의식에서의 탈출(황홀)을 지향하였고,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간자로서 ‘로고스신학’을 제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은 이집트인으로 후에 로마에 가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인데, 그는 플라톤에 따라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태양에서 광선이 비추어 나오듯, 이 일자에서 예지(nous)가 유출되고, 이 예지의 하부에서 영혼이 흘러나오고, 영혼 다음에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내려오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인간은 상고(上告)라는 기도와 주술의 작용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플라톤의 학원을 폐쇄하자 고대의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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