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중세 교회사

[스크랩] 중세교회사-기독교의 사상사

에반젤(복음) 2021. 8. 28. 10:06

기독교의 사상사

 

 

 

11세기 무렵에는 세 개의 주요 권력 집단이 이전의 로마제국을 대체하였다.

 

동방신학: 비잔틴 신학(동방교회 신학)

콘스탄티노플시를 중심으로 이 지역을 지배한 그리스도교 형태는 헬라어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 학파나 다마스커스의 요한과 같은 동부 지중해 지역 교부들의 저서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서방신학: 중세 신학(암흑시대말기부터 16세기 이전까지의 서부유럽신학)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포함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였던 그리스도교 형태는 로마 시와 교황으로 알려진 감독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대 분열로 알려진 아비뇽 유수기간에 로마에 거점을 둔 교황과 아비뇽에 거점을 둔 교황이 존재하였다. 이 지역에서 신학은 대성당과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아우구스투스와 암브로시우스, 프와티에의 할라리우스의 라틴어 저서에 기반을 두었다.

 

칼리프 지역: 이슬람지역

지중해 극동지방 대부분과 지중해 남부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이슬람 지역으로 이슬람교의 팽창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으로 유럽지역에 충격적인 파장을 던져주었다. 15세기말 이슬람교는 유럽대륙의 두지역인 스페인과 발칸반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확산은 1590년 스페인에서 무어 족이 패배하고 1523년 비엔나 외곽에서 이슬람 군이 패배함으로써 중단되었다.

 

서방의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 사이의 분열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상의 문화 교류가 단절되었고 후기 정교회 신학자들의 저서들은 서방에서는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가 서방신학이 20세가 들어서 동방 정교회의 풍부한 전통을 재발견하기 시작하였다.

 

 

 

중세시대 문예부흥

 

 

1. 12세기 중세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대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교회도 스스로 개혁하면서 세속 제후들에 대한 우위권을 주장하고 나왔다. 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으로 사회와 경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신학 활동도 수도원을 박차고 나와서 도시에 있는 성당학교로 옮겼다. 이러한 변화는 곧바로 13세기에 설립될 대학들에 대한 예시가 되었다. 중세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신학은 신속하게 학문 연구의 중심지를 확립해 나갔다.

 

수도원 공동체 내의 학교들 → 성당 학교의 증가 → 대학의 시작

 

2. 유럽의 경제가 안정이 되고 이슬람 신앙과 혼돈 하는 현상으로 인해 중세 시대에 새로운 교육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학의 출현은 수도원 교육의 시작과 함께 수도사와 사제의 교육을 경건주의 적 기도양식, 성경해석, 영성훈련의 추구로써 논쟁을 통한 지성의 개발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변화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화하기 위하여 논리학과 철학을 응용하였다.

 

대학 교육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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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과목(철학, 고전학 등)

성서학 학사

문법학 학사

석사(박사의 동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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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훈련

.....................................

성경주석

문 법

수사학, 논리학

 

 

 

3. 서유럽에서 대규모 교회들과 대학이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1088년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처음 대학이 세워지고 볼로냐가 대학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고 발전해 나가자 11세기 말 프랑스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자 프랑스 파리 대학이 급부상하여 유럽 지성의 중심이 된다.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은 대단한 명성을 얻었고 옥스퍼드대학이 도약하기 시작하고 캠브리지 대학, 바젤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 비엔나대학, 피사대학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새로이 출현한 학교들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을 포함하는 3학과, 과학, 논문준비를 강조했다, 전형적인 중세 대학은 4개의 학부(예술학부와 신학, 의학, 법학의 3개 고등학부)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초기에는 프랑스에서 발전이 주도적이었다. 탁월한 그리스도교 저술가와 사상가들을 배출하였다. 그중 랑프랑과 안셀름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며 둘 다 노르망디의 벡 수도원 출신이었다. 소로본 대학은 에라스무스와 존 칼빈 같은 유명한 학생들을 배출하였다. 파리 대학은 아벨라르와 알베르 토마스아퀴나스, 보나벤투라와 같은 학자들로 인해 신학적 사고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4. 중세 스콜라주의와 르네상스 인문주의

중세 스콜라주의와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13-15세기 사이에 지성세계를 풍미하였다. 인문주의가 발흥하게 된 것은 문화적 빈곤과 스콜라주의의 엄격한 신학적 잣대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라는 것이 일반적이 견해이다. 이 때문에 두 운동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1)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 저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16세기 말쯤에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신학이라는 용어는 암흑시대 말기부터 16세기 이전까지의 서부유럽신학(중세신학)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되었다. 소위 암흑시대가 서부유럽으로부터 떠나감에 따라 중세가 탄생하게 되는데 중세는 모든 학문의 부흥으로 특정지어진다.

 

서부유럽 역사상 1453년 콘스탄티노플 몰락 이전인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지가 북쪽으로 중부 프랑스와 독일 쪽으로 옮겨졌다. 로마가 이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권력의 중심지이기는 했지만 지성적인 활동은 샤트레, 라임, 벡과 같은 프랑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500년대에 이르러 스콜라주의가 쇠퇴했다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그 무렵에도 스콜라주의는 파리 대학 등 많은 유럽대학에서 여전히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며 종교개혁이 어떠한 종교적 지성적 압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특별히 중요하다.

 

 

2)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프랑스어 용어로 14-15세기에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문예와 예술부흥운동을 가리킨다. 르네상스 저술가들은 고전적 영광과 그들 자신의 시대 사이에 끼인 중세 문예부흥 시기에 의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서 그들은 중요하고 창의적인 시기와 구분되는 재미없고 따분한 시기를 언급하면서 중세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스콜라 신학이 이탈리아에는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 같은 이탈리아 신학자들이 스콜라 신학자들로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대체로 북유럽에 살면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14세기의 이탈리아는 지적인 진공상태가 된다. 이 진공상태를 무엇으로 채우려는 경향이 르네상스의 인문주의가 진공상태를 채운다. 인문주의가 발흥하게 된 것은 문화적 빈곤과 스콜라주의의 엄격한 신학적 잣대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남유럽의 르네상스와 북유럽의 르네상스로 나눈다. 이탈리아에서 출발된 초기 르네상스는 반로마 교회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졌다. 중세교회에 대한 권위적 교회, 신앙, 금욕주의에 대한 반감을 노골화했으면 반교회적 새로운 자유에 대한 추구를 내세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은 고대문화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중세의 지성적 성취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성서본문과 교부시대의 저서들이 신학의 주된 열쇠였다. 북유럽의 인문주의는 발전과정의 모든 과정에서 이탈리아 인문주의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방법과 이상이 북유럽으로 확산된 주요한 통로는 이탈리아 대학에서 공부한 북 유럽 학자들을 통해서나 외교사절의 일원으로 이탈리아에 갔던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르네상스의 정신을 가지고 갔다. 또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과 서신 교환을 통해서 북유럽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또 인문주의자들의 저서가 인쇄된 책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3) 인문주의라는 용어는 이제 하나님의 존재나 연관성을 부정하는 세계관 또는 순전히 세속적인 세계관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런 의미로 해석된 것은 아니었다. 르네상스 당시의 인문주의는 대부분 종교적이었고 그리스도교를 정화하고 갱신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인문주의의 많은 저술가들은 플라톤주의를 선호했다. 학계에서 인문주의란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운동으로서 수사법을 발달시키는데 관심을 가졌던 일련의 흐름으로 본다. 도덕, 철학, 정치에 대한 관심은 이차적인 데에 지나지 않는다.  4)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비교스콜라 신학(1100-1300)인문주의(1300-1500)주요 연구 분야신학과학 의학 신학문제신학으로 답변해결책이 필요하지 않음진리교회에 근거이상 자유 도전초점천상에 관한 것실제적 즉시 사용할 수 있는것 스콜라 신학은 중세 후기의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핵심요소가 되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과 상당히 다르다. 연구 분야는 르네상스가 더 넓었지만 연구의 목적은 철저히 달라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진리는 교회의 가르침과 반드시 밀접하게 연관된 것은 아니었다.  초기 중세신학(1066-1290) 1. 스콜라 주의 정의: 특히 중세와 결부되어있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특별한 이해의 하나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이성적 정당화와 이의 조직적 제시를 강조한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을 통하여 입증하고 이해하려했던 중세철학이다. 12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꽃피웠던 중세의 운동으로 종교적 신앙의 이성적인 정당화를 강조했으며 신앙에 대한 조직적인 설명에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스콜라주의는 신학을 조직화하는 특별한 방법. 즉 고도로 발전된 자료 제시방법, 정확한 구분법, 신학적 견해를 이해하는 방법 등을 다룬다. 인문주의 비평가들에 의해서 논리 짜 맞추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은 바로 이런 경향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콜라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많은 분야, 특히 신학에 있어서 이성과 논리의 역할과 관련하여 중요한 작품을 배출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스코투스, 옥캄은 스콜라 신학자로 꼽히는데 신학에 있어서 이성과 논리의 역할부분에 대해 대단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다. 신학을 뛰어넘어 중세 지식인들의 사유와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근대 철학의 발달에 밑바탕이 되었다. 

 

1) 스콜라 신학적 인식론

중세의 황금기 13세기에 교황청을 인노센트 3세(1198-1216)가 차지함으로써 그의 지도아래 교황권은 절정에 이르게 되며 스콜라주의의 초기의 사상인 실재론과 함께 신과 권위중심의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초기의 스콜라주의(1200-1350)는 실재론으로 대표되고

후기의 스콜라주의(1350-1500)는 유명론으로 대표된다.

 

 

스콜라주의라는 용어는 특정한 교리를 의미하기 보다는 접근 방법이나 방법론을 지칭하는 말이다. 스콜라 신학에서 주요한 논의의 하나는 인식 행위의 본질이다. 스콜라주의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던 두 가지 중요하면서 서로 상반되는 인식론인 실재론과 유명론에 대해 살펴본다.

 

(1) 실재론(전제주의)

두 개의 하얀 돌이 있으면 두 개의 돌을 구체화시키는 하얗다라는 보편개념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얀 돌들은 시간의 공간 안에 존재하는 반면 하얗다라는 보편개념은 형이상학적인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이들은 만물의 궁극적인 통일이 있다는 대전제에서 보편은 참이며 개인의 개별적 존재보다도 더 명확한 확실성이나 영구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이 되었고 보편으로부터 출발해 우주는 논리적인 계층구조로 이루어졌고 교회와 국가는 이러한 계층구조를 잘 반영해 주는 한 예로 볼 수 있다.

 

 

  보편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신 플라톤적-유출설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맨 위의 궁극적인 보편(one-일자)으로 부터 계속해서 흘러 흘러서 맨 밑의 유출(many-다자)되어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모든 존재에는 계층 질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인노센트3세는  보편으로부터(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유출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자신을 베드로의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르며 자신이 구세주의 대리인으로서 전 교회의 목자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초기 중세는 보편인 신 중심으로 그 신을 대리하는 교황의 권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교회가 인간의 이성을 지배하였다.

 

 

(2) 유명론(주관주의)

하얗다라는 보편개념은 불필요한 개념이며 그 대신 개체에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두 개의 하얀 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하얗다라는 보편개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명론을 통해서 중세는 신 중심으로 하나의 보편개념에서 출발한다는 사상이 점점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이제 인간의 개개인에 관심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서구 신학에 도입함

서구교회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할 능력을 소유한 자들을 양성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신학에 도입하였다. 개별자에 대한 강조는 정신과 물질의 일원화를 이야기하며 생각만 구분할 뿐 실제로 구분하지는 않고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 안에 있는 것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더불어 재차 도입이 되면서 신 플라톤적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중세가 주장했던 신 중심으로 하나의 종합을 이루고자 했던 기초를 파괴시키면서 종합이 서 있는 대전제 그 자체를 도려내고 말았다.

 

 

3) 스콜라 주의의 대표적 학자들

 

(1) 안셀름

 

① 생애: 북이탈리아의 피에드몽트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논리학과 문법의 기교를 습득하고 노르망디 벡 수도원에서 교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1093년 켄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했으나 왕과 여러 가지 면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으며 평신도 서임권 문제로 부딪치자 1097년에 자발적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3년의 망명을 끝내고 켄터버리로 돌아왔으나 3년 만에 또다시 새로운 망명길에 오른다. 1106년에 평신도 권위에 관한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자 교구에 돌아와서 죽을 때까지(1109) 자리를 지켰다. 조직신학의 아버지이며 실재론자였다. 그는 신앙이 이성을 선행한다고 믿었다

 

② 저서:

벡 수도원에 머무는 기간에 쓴 저서: 모노로기온, 프로스로기온, 문법교사에 관하여, 말씀의 성육신에 관한 서신

 

1097년 망명길에 쓴 저서: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동정녀 임신과 원죄에 관하여, 성령의 발출에 관하여 등

 

말년에 쓴 저서: ⌜선지식, 예정, 은총이 자유의지와 일치함에 관하여⌟

 

③ 안셀름이 주장한 속죄의 의미:

죄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모독이며 공의는 범죄자에 의한 배상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류는 불순종한 대가를 치러야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행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근거는 하나님 자신의 온전한 성품이다. 해결책은 참신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짊어짐으로 그들과 동일한 분이 되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 자신의 인격으로 죄를 담당하시고 참 신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딜 수 있는 분이었다. 그리스도의 속죄 하나님의 공의와 연관된다고 주장하였다.

 

 

(2) 피터 아벨라드(1079-1142)

 

① 생애: 1079년 브리타니에서 태어났으며 뛰어난 유명론자 로스켈른 문하에서 공부한 뒤에 실재론의 대가인 샹뽀의 윌리엄의 제자가 되었는데 아벨라드는 두 분의 스승 밑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독립적인 강의를 개설하였으며 윌리엄의 강의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윌리엄의 친구들이 박해함으로 라온에서 자신의 독립적인 학교를 조직해서 에스겔서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파리로 옮겨 철학과 신학교사로 명성을 날렸다. 이곳에서 엘루아즈를 만나 비밀리에 결혼하여 아들이 태어났으나 비밀결혼은 가문의 명예훼손이라고 엘루아즈의 친척이 아벨라드를 거세시켰다. 엘루아즈는 수녀가 되었고 아벨라드는 수도원에서 계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환영받지 못하였고 영혼과 육체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은신해 버린다. 그의 은신처에까지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학교를 세워서 성령께 봉헌하였다. 엘루아즈가 그를 따라와 수녀원을 세웠다.

 

클레르보의 버나드는 유명한 신비주의자로 아벨라드의 이성을 신앙의 문제에 적용시키는 방법론에 반대하여 아벨라드는 1141년의 대회에서 소환되었고 인노센트 2세에 의해 정죄를 확정 받았다. 그는 클루니 수도원에 은거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② 저서: 신앙의 선언, 변증학, 네 자신을 알라, 헥사메론 주석, 로마서주석, 신학입문, 기독교신학, 예와 아니오

 

③ 속죄의 의미:

그리스도의 속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사건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순종으로 응답하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취약한 죄 이해로 인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빈약한 이해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안셀름의 견해                                                                   아벨라르의 견해

 

                    루터교회                                                                           소시누스주의자

                    칼빈주의자                                         /                              일신교도들

                    알미니안 주의자들                                                              종교적 자유주의자들

                    웨슬리안 주의자

 

 

안셀름 따르는 견해: 속죄를 신적 배상설로 본 견해로 죄를 신의 배상만이 그 영향을 제거할 수 있는 황폐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아벨라르 따르는 견해: 배상 설을 잔인하고 불공평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는 오해받고 죽임을 당하면서 사랑에 대한 도덕적 교훈만을 가르쳐준 최고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3) 피터 롬바르드(1100-1160년경)

 

① 생애: 피터는 자신의 지명에 따라서 롬바르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130년경에 파리에 와서 성 빅토 학파와 유대관계를 맺고 수년이 지난 후 노트르담 신학교수가 된다. 1159년에 파리의 주교직을 맡았으나 이듬해에 죽고 말았다.

 

② 저서: 4권의 조직신학

 

③ 롬바르드의 신학사상

 

*공로의 근거와 적용

은혜는 하나님의 성도에게 점차 많이 주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행의 실천을 불러일으키고 그 선행은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도록 이끌어 마침내 완전한 은혜에 이른다고 보았다. 칭의는 실제로 점진적 성화의 열매이며 그것은 사후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다.

 

*은혜 개념

은혜는 언제나 공로를 앞서는 것으로 처음에 아담과 연관된 원죄의 사함을 가져오는 세례를 통해 주어진다. 그 다음부터 은혜는 최종적 은혜 혹은 칭의에 이를 수 있게 만드는 더 큰 순종으로 이어지는 성례를 통해 주어진다. 롬바르트 신학은 칭의와 성화이다, 칭의의 은혜가 증가시킬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의 체험이 시작될 때 즉시 수용된다는 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성경적 통찰이다.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칠성사(성례)

중세교회가 플로렌스회의(1438-1445)에서 공식적 지위를 획득한 가르침인 칠성사론(성례론)에 동의한 것은 피터 롬바르드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영세(세례), 견진성사(견신례), 성체성사(성찬례), 참회성사(회개), 종부성사(임종예식), 신품성사(성직 임명예식), 혼배성사(결혼례)

 

영세: 연약한 죄성 외에 아담이 지은 원죄의 죄책에서 해방시키는 새로운 탄생이다.

혼배성사: 거룩한 양식을 통해 과도한 성적 유혹을 억재 하는 은사이다

참회성사: 개인이 협력할 수 있을 때 은혜를 다시 채우는 반면

종부성사: 죽음에 임박했을 때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다, 사망했을 때 남아있던 불완전함은 사후에 연옥에서 제거된 후에 천국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성찬론의 역사

로마의 클레멘트, 디다케, 순교자 저스틴: 찬양의 제사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키르리아누스, 오리겐, 예루살렘의 씨릴: 희생의 제사인 동시에 찬양의 제사

피터롬바르드, 토마스 아퀴나스: 희생적 찬양의 제사인 동시에 공로의 제사

 

 

(4)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① 생애: 이탈리아의 로카세카 성에서 랜돌프 백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244년 도미니크의 수도회에 들어가기를 결심하나 부모님은 중세교회에서 막강한 특권을 누리고 있던 베네딕트회에 들어가 몬테카시노 원장처럼 되기를 바라셨다. 형들은 그를 강제로 가두고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하나 아퀴나스는 결국 자기의 길을 택하여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1248년 콜로뉴 지방으로 옮긴다. 1252년 다시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4년 후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② 저서 “신학대전”을 저술하여 가톨릭 신학자의 일인자가 되었다. 온전한 실재론자였으며 신앙과 계시를 얻기 위하여 이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중세 신학자들 전체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③ 아퀴나스의 신학사상

온건한 실재론자였는데 신앙과 계시를 통해 어느 정도 보충된 진리를 얻기 위하여 이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은혜의 증가를 통한 공로:

그는 피터 롬바르드의 견해보다 더욱 명확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을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분리 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구원은 점진적 의인의 열매이며 은혜는 공로에 의해 보상되는 경건 혹은 행위의 증가를 불러일으키는데 그러한 공로는 최종적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증가를 가져온다고하였다. 여기에서 또 다시 은혜와 행위가 복잡하게 뒤얽히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

의롭게 됨을 성례를 통해서 획득된 능력이 증가됨에 따라 성령의 열매에 의해 죄가 서서히 극복되고 대치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은혜(사죄) - 자선행위 - 공로(의) - 영생(의)

영생이라는 공로를 쌓는 것은 원칙적으로 자선행위에 달려있다. 우리의 공로는 2차적인 의이다, 인간은 모든 공로행위와 매번의 행위에 의해 은혜의 증가라는 공덕을 쌓는다. 하지만 최초의 은혜를 공로에 의해 얻을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아퀴나스의 개념을 거부한다.

 

*칭의: 의로움이 없는 사죄

죄를 사하심(조건적 사죄) - 성화(공로를 통해 쌓여지는 은혜) - 칭의(구원하시는 은혜, 의)

인간은 믿음에 의해 의롭다 인정하는데 이것은 그가 믿음으로서 의인이라는 공로를 얻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의롭게 되어가고 있음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구원에 이르는 단계(점진성)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주입이 시작

결과: 도덕적 협력, 은혜의 도움을 받는 동시에 인간의 최선을 다하기

목적: 정당한 대가인 영생으로 보상됨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점진적이 아니라 즉시 주입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퀴나스의 화체설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는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실재 몸과 피로 변화된다.

로마 카톨릭 전승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혜 구원 공로에 대한 견해는 트렌트회의(1545-1563)에서 로마 카톨릭의 교리의 토대를 이룬다.

 

             토마스 아퀴나스                                                     종교개혁자

 

          죄론 사항: 의의 전가                            /                 죄론 사항: 의의 전가

                          공로가 되는 행위

 

 

 

후기 중세신학(1290-1485)

 

 

스코투스는 1308년에 죽었는데 이즈음은 중세교회의 멸망이 명백한 사실로 등장했으며 일년 뒤인 1309년에 교황은 아비뇽에 거처를 마련하고서 점점 더 프랑스 왕조의 도구로 전략되었다. 70년(1309-1378년) 동안 아비뇽에 교황이 머물면서 아비뇽 궁전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교회 세 제도를 도입했는데 결국은 모든 교회가 시모니(성직매매:simony)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때에 프랑스 왕국과 영국의 100년 전쟁(1337-1453년)이 계속 되었다. 1378년에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자 프랑스 추기경들은 자기네들의 교황을 별 부담 없이 선택하였다.

 

대서방 교회는 분열을 초래했으며 두 명 또는 세 명의 다른 교황에게 충성을 보이면서 나뉘었다. 교회가 일반적으로 영적 권위를 잃어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여러 각도에서 영적 안위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일반회의를 통해서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일부는 단순하게 교회를 떠나서 모든 문제를 팽개친 채 신비주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후스 위클리프 사보나롤라 등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길이 기존 권위세력과 충돌을 일으킬 것을 알면서도 교회의 개혁과 일반적인 갱신을 도모하였다.

 

 

1. 스콜라주의 사상가들

 

(1) 요한 둔스 스코투스(1264-1308년경) - 실재론

 

① 생애: 짧은 생애동안에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파리 대학에서 교수였으며 독일 쾰른 수도원장이 되었다. 중세시대의 급박한 정치적 교회적 문제와 별개로 신학을 독립적으로 발전시킨 마지막 위대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유명론자이다.

 

② 저서: ‘주요어구에 대한 주석’을 3판까지 펴냈다.

 

-스코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 관한 한 챔피언이었다.

 

-신적의지를 신적 지성보다 앞선 것으로 보았다.

토마스아퀴나스가 신적 지성을 으뜸으로 여긴 반면에 스코투스는 신적 의지에 우선권을 두었다며 아퀴나스를 반대했다.

 

- 마리아의 무죄 잉태 설을 정립하였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다른 인간들과 같이 죄에 의해 오염된 상태라고 하였으나 스코투스는 그리스도는 완전한 구속사역으로 마리아를 원죄의 오염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③ 스코투스의 기독교사상사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여러 각도에서 평가

*일부의 사람들은 그가 중세의 종합을 화해시킨 최초의 비평가라고 말을 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프란시스 학파의 최절정을 이룬 인물로서 보나벤투라가 세운 제도를 최종적으로 열매 맺게 했다고 평가한다.

*한편으로는 그의 우회적인 논증방법과 그의 섬세한 기법을 강조하면서 이런 방법자체가 중세 몰락을 말하는 징표라고 평한다.

*그에게서 신앙과 이성이 결렬하기 시작했다고 보면서 그로부터 스콜라주의의 몰락이 초래되었다고 한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복종심과 무죄잉태 설의 개진 등은 중세 기독교 신앙에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평한다.

 

 

(2) 윌리암 옥캄(1300-1349) 근대적 방법론

옥캄은 근대적 방법론으로 유명론의 열렬한 수호자였다. 보편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한 설이라고 선언하고는 이를 제거해 버린다. 서유럽에서 근대적 방법론이 차츰 중시된 것은 상당부분이 옥캄 덕분이다.

 

(3)가브리엘 비엘 - 근대적 방법론

 

(4) 피에르 드엘리 - 근대적 방법론

 

(5) 14세기 초기의 옥스퍼드대학 - 근대적 방법론의 거점 가운데 하나였으나 그 운동에 대해 반발이 일어난 것도 옥스퍼드 대학이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토마스 브래드워딘에 의해 ‘펠라기우스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주장’이라는 저술을 통해 근대적 방법론에 대한 개념에 공격을 가하고 이 책에서 어거스틴의 견해를 뜻하는 칭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15세기 동안에 근대적 방법론이 많은 북유럽 대학들에 유입되기 시작하였는데 파리, 하이델베르크, 에르푸르트 등을 들 수 있다.그 운동은 철학적 유명론 뿐 아니라 칭의의 교리를 수용하였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것을 펠라기우스적인 것으로 낙인찍었다.

 

옥캄과 가브리엘 비엘의 구원의 단계는 피터롬바르드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업을 능가했다.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수용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구원의 원인은 자기 노력에 근거한 것으로 그러한 노력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수여하도록 만든다. 그와 같이 해서 획득한 은혜는 더 깊은 순종을 낳게 되어 결국 정당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하였다.

 

옥캄과 가브리엘 비엘 두신학자의 설명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노력에 의해 구원이 얻어진다는 것이다.

 

 

 

2. 인문주의 사상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1469-1536)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문주의자로서 16세기 전반 그리스도교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도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종교개혁의 지성적인 주춧돌을 놓은 사람으로 손꼽힌다. 헬라어 신약성서가 그의 편집 작업을 거쳐 처음으로 인쇄되었다. 그의 저서‘그리스도교 전사안내서’는 1503년에 최초로 출판되었고 1509년에 재 인쇄 되었으며 1515년에는 세 번째로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무려 6년 동안 23판을 거듭하였다. 취리히와 비덴베르크에서 일어난 개혁의 물결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직후에 일어났다.

 

이 책은 당대의 교회들이 교부들의 저술과 성서로 되돌아감으로써 개혁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논제를 전개하였다. 그기 바라는 것은 인간이 종교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가톨릭을 냉정하게 비판했다. 그리스도교의 미래의 생명력이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달려있으니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을 자신들과 같은 이해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자가 되어야 하며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의 우위에 있다는 헛된 믿음이 들어설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고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묻는다. 왜 우리는 죄를 고백하면서 성직자를 괴롭혀야 하는가?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면 될텐데 라면서 성직제도가 없어도(고해성사) 그리스도교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낳게 하였다. 종교개혁을 도우면서도 종교개혁에 가담하지 않았다.

 

최초의 헬라어 신약성서를 제작하였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을 비롯한 교부들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로써 이차적인 인용문에 의존하지 않고 교부들의 주요 작품들을 완전한 원문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② 단테(1265-1321): 이탈리아 시인과 철학자, 중세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최고의 인물로 일컬어지는 단테는 신곡을 통하여 온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되었다. 감성적이며 지성적인 신곡은 중세를 마감하는 총체이며 최고의 묘사로 가장 품위 있고 가장 탁월한 방언으로 저술한 저작이었다. 이 저작은 자유로운 사고에 속하며 인간의 언어를 열어주었다. 지금까지 라틴어로 한정되었던 신학과 사상의 보다 고차원적인 문제들을 번역해주었고 다시 표현해 주었다.

 

 

③ 페트라르카(1304-1374): 최초의 현대인, 르네상스의 창시자로 불림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의 대표, 당시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의 부패를 가장 예리하게 공격하였다. 플라톤을 선호하였으며 당대의 학문적 경향이었던 스콜라주의, 이론주의 대학,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공격하였다.

 

 

④ 발라(1406-1457):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이며 탁월한 고전 연구학자였다. 교황청의 비서를 감당하다 1450년 대학의수사학 교수가 되었다. 저서‘쾌락에 관하여’는 고대 스토아학파, 에피큐러스학파, 기독교적 관점과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감각의 즐거움을 가장 거대한 선으로 옹호한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를 향한 가공된 신뢰와 위조에 대한 강연’은 근대역사비평방법을 도입한 작품으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가 위조임을 밝혀내고 교황권에 도전하는 내용도 함께 실었다. 그래서 종교 재판소에 소환되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자유의지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조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대담한 시도와 입장은 르네상스 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신약원전에 대한 그의 연구는 에라스무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