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중세 교회사

[스크랩] 중세교회사 개관

에반젤(복음) 2021. 8. 18. 11:53

중세교회사 개관

 

 

---------------------------------------------------중세교회의 특징

 


중세교회란 그레고리 1세 교황이 즉위한 590년부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1517년까지 약 일천년 간을 일컫는다. 이 긴 기간 동안에 일어난 교회사를 연구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중세교회사의 구분에 따라 네단계로 구분을 짓고, 그 단계마다의 심층적인 고찰을 하고자 한다.

중세교회의 시대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City of God)의 이상이 실현되어가는 듯한 역사이기도 하다. 어거스틴이 신의 도성과 현실적인 교회를 동일시함은 지상을 천국화해야 할 소임을 암시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는 지상의 도성을 정복하고 신의 도성,즉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이것이 중세시대 교황권과 황제 의 권력 간의 분쟁의 요인이기도 했다.

중세시대의 동방교회는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고,기독교의 중심은 서방교회로 쏠리게 되었다. 중세시대에 로마 교황권이 확장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인들이 있다.

 


● 정치적 자질이 풍부한 라틴사람들은  그 능력을 로마교회 내에 쏟아 놓았다.

● 로마교회 내에는 로마제국 고대로 부터의 전승과 문명이 잘 보존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새로 입교하였다.

● 캐논(Canon)법이라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황권이 강화되었다.

● 샬레만(Chalemane),오토(Otto) 등의 영웅들이 왕이 되어 나라를 크게 흥왕시키고,교회와 협력하였다.

● 소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봉건암흑시대에 돌입하면서부터,교회는 봉건 영주 사이에서 더욱 교황권을 확장하게 되었다.

 

 

 

----------------------------------------------------중세의 종교생활

 


중세 사람들은 지역적이고 소극적이었으며, 극한된 세계에 살고 있었다. 자기가 속한 장원(莊園)의 영주에게만 책임을 지고 있어서 자기 고장의 말 외에는 몰랐고 다른 곳에 사는 입장이 같은 사람들과 연락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북방 야만인의 침입으로 인해 국어는 점차 폐쇄되어가고,라틴 문자는 잊혀져서 많은 이들이 자기의 성명조차 쓸 수 없는 무학(無學)의 시대가 오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무예는 크게 발달하였다. 소위 암흑시대(the Dark Age)였다.

그러나 이롷듯 서로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사람들은 유별나게 강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이었다. 유럽 전역을 통틀어서 단 하나의 교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또 누구든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는 것은 정치상, 법률상의 제권리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처럼 중세 유럽은, 겉으로 보기에는 토막 토막 흩어져 있는 것 같았지만 정신적으로는 하나의 공화국, 즉 로마 교황의 종주권 밑에 있는 기독교국이었다.

 


중세 기독교인들의 종교생활의 특징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한 국민성은 중세 기독교의 장엄한 기풍과 신비를 산출케 하였다. 수많은 성자와 위인들이 나타나서 신앙의 감화를 끼쳤다. 건축,조각,회화에 있어서도 불후의 거작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교리 면에서 본다면,중세교회는 고대교회의 주요한 논의들을 거의 답습하였으므로,큰 발전은 11-13 세기까지의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의 부흥을 제외한다면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중세교회의 심각한 타락에 대한 반동작용으로 수차례의 부흥운동이 일어났고,그 중심은 거의 언제나 수도원에서 일어났다. 당시의 수도원은 학문과 지성의 요람이요,신학과 교회제도가 만들어지는 중세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레고리 1세

 

 

 

------------------------------------------------------ 생애와 사상   

중세교회사의  첫째 단계로서 중세교회 초기를 먼저 보게 되는데, 이 시기는 590년 그레고리 1세 교황의 즉위로부터 교황으로부터 샬레만이 황제의 호칭을 얻은 800년 이전까지를 다루게 된다.

그레고리 1세는 고대교회사의 최후 교부요,중세사의 최초의 교황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로마의 부호의 가정에서 540년 경에 출생했다. 그는 엄격한 수도사로서 생활했으며, 펠라기우스(Pelagius) 2세의 교황 비서 역으로 있었다. 교황이 죽은 후에는 590년 수도사에서 처음 교황에 올라 604년까지 일하고 별세하였다.

그레고리 1세의 정치적 자질은 뛰어나서, 롬바드(Lombard) 족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교황의 권위로 그들과 화해하고 로마가 정복 다아는 것을 방어하였다. 이방인들은 황제보다도 교황을 로마의 실권자로 보게 되었다.

강력한 대지주로서의 그레고리는 교황권 수입을 착실히 늘려,그 수입으로 성직자들의 보수와 로마의 방비사업,그리고 각종 구제사업 등에 사용하였다.

그의 정력적인 신앙생활의 결과로 인해,예배순서의 규정,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를 만들고,성경주해,설교집 등의 저술도 많다.

교리적으로 볼 때 그는 마태복음 12장 32절을 인용하여 연옥(煉獄; Purgatory) 사상을 확고히 하였다. 즉 유전(遺傳)된 원죄는 세례를 통해서 없어지지만,실제로 짓는 모든 죄는 현세에서,또는 내세에서도 갚은 바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갚는 방법은 통회,배상 그리고 고행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사상적으로 어거스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교리적 노선에 있어서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Semi-Pelagians)였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명을 부여함으로서,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운 자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이같은 교설은 어거스틴의 단독사역론(Monergism)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 로만 캐톨릭의 제도적 의식을 신의 내적 은총으로 보고,그것을 외적인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예배에 구체화시켰다.

                                      

 


---------------------------------------------------------- 선교사업

 


교황이 된 그레고리는 베네딕트파의 목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인 이교도의 개종을 언제나 유념하고 있었다. 선교사업에도 힘을 써,그는 영국을 선교하고,고올, 스페인 등지에 세력을 크게 미쳤다.

그레고리의 뜻에 따라 596년에 전도사업의 선두에 나선 것은 로마의 베네딕트파 수도원장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와 그 부하 수도사 약 40명으로서, 그들은 모두 은으로 된 십자가와 그리스도으ㅟ 그림을 휴대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남부 잉글랜드이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최초로 캔터베리의 대사교가 되었다. 영국의 교회가 융성해지자 이번에는 거꾸로 대륙에 전도자를 보냈다.

자기 자신도 수도사였던 그레고리는 새로운 나라에 선교사업을 전개함에 있어서 수도승과 수도원의 역활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견된 수도승들의 임무는 왕들과 통치자들을 개종 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부족이 점령되고 나면, 거기에는 군사력에 의한 황제의 보호와 선한 통치를 받기위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것이 곧 개종으로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정복 권력과 신 종교의 제휴라고 하는 위험스러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 당시의 선교는 복음의 전달이 아니라 차라리 문화의 전달 이라고 함이 좋을 듯 하다.이와 같은 형편에 대하여 라투렛트(K.S.Latourett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이야기들은 결국 형태만 달랐을 뿐 표면상의 굴복을 가능케 한 것과 그 뒤에 따른 선교사들의 평화적인 노력, 또 다른 반역과 이 에 따르는 새로운 진압전쟁, 그 다음에 다소 마지못한 순종, 그리 고 또 새로운 반역과 최종적인 승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반복인 것이다.이와 같이해서 결국 색슨족을 굴복시키기는 했으나, 그 배 후에는 순교와 살육의 처참한 정경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그레고리와 그의 수도사들의 선교 방법에 있어서의 특징은 이교도와의 타협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을 들 수 있다. 교황의 방법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개종시키는데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교적 요소가 그대로 교회로 흘러 넘쳐들어 왔다.

로마는 라틴어만이 서방 교회 유일한 예배용어 임을 주장하였다. 야만인들의 언어는 투박하고 문자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의 존엄성에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이 방법의 장점은 서방 세계의 통일에 기여 했다는 점이다. 18세기 말까지 라틴어는 공통어로서 하나의 거대한 결합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의 약점은 예배자들이 예배진행을 거의 알수 없었다고 하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비감이 늘어 났으며 이성적인 참여도가 줄어 들었다. 이와 같은 심각한 현상은 "당시의 미개인들 가운데서 일하던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문화적 유익을 사용하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높은 문명을 과시할 기회를 늘 이용했었기 때문이다"라고 바빙크는 말했다.

 

 

 

 

 

 

떠오르는 과제들

 

 

 

----------------------------------------------------동서교회의 갈등

 


문화적 차이

동서교회는 각각 교회가 자란 토양이 달랐다. 동방교회는 헬라 문화권에 의지해 사변적이고, 따라서 교리논쟁이 많았으나 서방교회는 라틴 문화권으로서 실제적이었고 동방교회에 비해 교리 논쟁이 적었다.사상적으로 볼 때 동방은 교리 중심이요 학문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면이 강한데 비해,서방은 제도 중심이요 법률과 정치적 신학을 강조하여 전개하였다.인종적인 면에서 볼 때도 동방은 스라브 인,서방 아시아 인의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동양적이며 내세적인 신앙이 강했다. 그러나 서방은 고트 족,게르만 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현세적 신앙이 강했다.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도,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썻으며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서 동방교회에서 일반 성직자들은 결혼할 수 있고, 고위 성직자만 결혼을 금했는데, 서방교회에서는 모든 성직자에게 결혼을 금했다. 동방교회 성직자들은 턱수염을 길렀는데, 서방교회는 턱수염을 깎을 수 있었다.

 


정치적 갈등

정치적,지리적으로 볼 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멀리 나눠져 있었다.정치적으로 콘스탄틴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여, 정치적,종교적 분열의 길을 열어 놓았다. 395년 데오도시우수(Theodosius) 황제 사후 먼저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되었다. 즉 장자인 알카디우수(Arcadius)는 동로마황제가, 차자인 호노리우수(Honorius)는 서방의 황제가 되어 행정적으로 제국이 양분되었다.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후 로마교회는 간섭할 황제가 없어졌고, 동로마황제는 너무 멀리 있어 간섭하기가 어려웠다.

로마의 교황은 국가의 위기시 종교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의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감당하여 그 권위를 크게 신장하였다. 한편 로마교황과 경쟁관계에 있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동로마제국 황제의 그늘에 가려 그 영향력이 크지 못하였고 황제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주후 800년에 로마 교황이 샬레만에게 황제의 관을 줌으로서,로마의 교회가 프랑크 인 왕국을 의지하는 것을 선언한 격이 되었다. 그러자 동로마제국의 보호를 받는 동방교회는 자연히 분리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   모슬렘의 침공

 


아라비아의 메카(Mecha)에서 570년에 출생한 모하메드(Mohammed)를 교주로 하는 이슬람교의 침공은 기독교회의 역사적 충격임과 동시에 하나의 커다란 각성거리이다. 당시 기독교회는 신앙논쟁과 당파 싸움으로 많은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여 큰 혼란 중에 있었으므로,이와 같은 침공을 받을 헛점을 보이고 있었다.

모하메드의 사후 후계자(Califs)들을 통하여 이슬람교도들은 1세기 동안 코란(Koran)과 칼로서 팔레스틴과 소아시아, 북아프리카와 유럽을 휩쓸었다. 그래서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동쪽으로는 중국 당나라까지 하나의 사라센 제국을 형성하였다. 주후 638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되고,

그러나 이슬람교 내의 정치적,교리적 분열로 인하여 단일지배 체제는 다시 힘을 잃게 되었다. 그후 챨스 마르텔(Charles Martel,715-740)은 731년의 투르(Tour) 대전에서 이슬람 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두텁게 하였다.

731년에는 투르(Tour) 전쟁에서 프랑크 족에게 패하여 다시 많은 영토를 기독교 문화권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장구한 역사와함께 언제나 이슬람 세력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 중세시대의 이슬람교는 당초 기독교 세계에 속했던 동지중해 지방의 태반을 탈취했고, 5세기 간에 걸쳐 에스파니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그것을 완전히 기독교의 재정복에 넘겨준 것은 중세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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