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시 금산리 290-1, 모악산(母岳山) 기슭에 한국교회 초기형태인 'ㄱ자 교회' 형태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금산교회는 문화재로 지정된 교회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교회가 유일하게 'ㄱ'자 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금산교회는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한국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결합시켜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건물로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금산교회의 내부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5평정도의 강단은 2단으로 꾸며져,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구조이면서 동시에 '뜰, 성소, 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하고 있다. 이렇듯 금산교회는 복음의 토착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 내부는 강단의 좌측으로 여신도들이 앉는 자리이며, 정면은 남자들이 앉는 자리로 구별되어 강당과 여신도 좌석은 커튼을 치게 되어 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 철저하게 지켜지던 시대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던 차단막(커튼)은 시대의 변천에 다라 1940년대에 걷혔다고 한다. 또 금산교회는 강단 뒤쪽으로 목사들이 드나들던 조그마한 쪽문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야 하는데, 목회자들은 이 문을 드나들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적인 특징 외에도 금산교회는 신앙적으로 매우 독특한 교회이다. 불교의 고찰 금산사와 증산교의 본부가 있는 김제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905년. 전주에 와 있던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선교사(한국명 최의덕)가 이 지방 마방의 주인이며 지방의 부호였던 조덕삼과 그의 집안의 마부였던 이자익을 전도하면서 부터이다. 특이한 것은 주인과 하인이 나란히 입교하였으며, 교세가 커지자 교회에 장로를 세우게 되었는데 교인들의 투표 결과 주인 조덕삼은 떨어지고 그 집의 머슴으로 일하는 이자익이 장로로 추천되었다고 한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따지던 봉건 시대에 이것은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조덕삼 옹은 의연하게 교회 앞에 나가 말했다고 한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가 되고,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평신도의 관계가 되어 두 사람 모두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조덕삼 옹도 장로가 되었지만, 주인 조덕삼 옹은 후에 이자익을 평양신학교에 유학을 시켜 훗날 유명한 목사가 되게 하였고,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는 큰 인물이 되었다. 교회 초기 금산교회는 엄격한 교회였다. 당회록을 보면 '불신자와 결혼하 자 000 출교, 도박을 한 자 000 출교 등' 1908년 사재를 털어 교회를 건축한 조덕삼은 유광학교를 설립, 지역 청소년들을 교육했다. 유광학교에서는 한글을 비롯 우리나라 역사, 성경 등을 가르쳤으며, 매일 아침 예배를 드렸다. 양반의 신분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학문 교육에 힘쓴 조덕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조영호 장로에 의해 금산교회는 지탱돼 왔다. 그 뒤 조부와 선친의 뒤를 이어 국회의원을 지낸 조세형 의원이 이 교회의 장로로 피택되기도 했다.한편 지난 1989년 결성된 금산교회문화재보존위원회는 금산교회와 유광학교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사업과 이자익 목사, 조덕삼 장로의 기념관을 세우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금산교회는 지난 1997년 7월 1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36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