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기념 매봉교회와 생가 교회 전경 교회 옆 유관순 생가 지하 기념관 전시실 류관순 열사 매봉교회 머릿돌 매봉교회와 역사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1리 338-6에 위치해 있습니다. 옛 이름은 '지령리'라고하며 지금은 '용두리'라 부르고 있습니다. 지령리는 산이 서쪽으로 병풍같이 에워싸고 있으므로 산서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옛부터 산이 에워싸고 물이 돌아 흘러서 인물이 많이 날 땅이라 하여 지령리라고 불러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병천이란 말도 순우리말로 하면 '아우내','아오내','아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름이 생기게 된데는 병천을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이나 봉우리들에게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들이 모두 병천에 와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천이 이곳에 와서 서로 아우르고 있는 자연 때문에 아우내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아우내 장은 병천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장의 개설은 1720년대 조선조 영조 때의 암행어사인 박문수가 조상의 묘 앞에서 시장을 연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령리에 복음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99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그후 1901년에는 박해숙 전도사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리고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도처에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이름 아래 소위 을사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목적아래 시작된 의병운동은 먼저 지식인들에 의해서 항일 언론운동이 일어났고, 그리고 아울러서 애국적 유생들과 종교계 또는 전직 관료들에 의해서 상소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서울에서 시작한 이러한 운동은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되자 이러한 의병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일본군이 도처에 파견되어 진정시킨다는이름아래 갖은 횡포가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의병을 도왔다는 이유로 불태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매일학교를 세워 ①농촌계몽 ②미신타파 ③문맹퇴치 ④독립운동 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전국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의연금을 모아 대한매일신문사에 보내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참가한 숫자는 82명에 달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교회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자 다시한번 매봉교회를 불사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꾸준히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도하다가 드디어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운동에는 전교인이 참여하였고, 결국 교회는 집회금지령이 내려졌고, 있던 교회마져 불살라지고 말아 해방이 될때까지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1967년 이화여고에서 동창생들이 모여 다시 교회를 세웠으며, 현재 교회는 1998년 기독교 대한 감리회 남부연회에서 모금하여 다시 건축하였습니다. 처음엔 공주에서 선교사와 사부인이 왕래하여 복음을 전했으며 그 후 케블 감리사와 대목사, 안명도 전도사 등이 다녀가며 교회가 세워져 갔습니다. 선교사들의 교통수단은 주로 당나귀를 타고 다녔으며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어른, 아이들이 20리까지 고개를 넘어 마중을 갔습니다. 선교사들은 반갑다고 선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새 예배를 시작하던 날은 부근 동일에서 미국사람 구경도 할 겸 수백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이 이곳에 들어오자 복음이 불길이 번지듯 급속도로 전도가 되어 그 일대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도 있으려니와 교회를 의지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대대로 유교를 숭상할 뿐 아니라 토질적으로 고집이 세고 강직한 곳이지만 그러한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씨 집안은 물론 그 이웃인 조씨 집안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매봉교회가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은 1908년이래 지령리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이 기독교를 통해서 얻어진 기독교의 정신이 민족독립운동에 열렬하게 참가하도록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니까 병천 3.1운동은 물론 이 지역 6군에서 참가한 민족적인 운동이었지만 매봉교회의 운동이요 기독교 운동이었습니다. 유관순은 철저한 기독교인이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믿음의 사람이요, 유중무씨도 또한 그러하고, 조인원씨는 당시에 속회장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분의 아들은 조병옥 박사로 물론 임시정부에서 공헌을 세우기도 했고, 서울에 유학을 가서는 정동교회의 교회학교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모두 매봉교회가 길러낸 훌륭한 애국지사들입니다. 또한 김구응씨도 철저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매봉교회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민족교회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3.1운동후 모든 교인들이 투옥되거나 순교하게 되었고, 교회마저 일본인의 손에 불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교회는 계속적인 박해로 인하여 차츰 교인이 줄어 마침내 자연적으로 없어지게 되었으니 그때가 1923년경입니다. 해방 후 이화학교는 지령리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여러모로 원조를 하여 또 다시 복음의씨를 뿌렸습니다. 전 교회는 1967년 유관순 열사의 동기동창이며 당시 이화학교의 교장이시던 서명학 교장님께서 힘을 써 건립된 것입니다. 현 교회는 1998년 9월 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 충청연회에서 6억을 들여 다시 건축한 것입니다 류관순 열사 류열사의 본관은 고흥(高興) 류(柳)씨이며, 중시조 류태우의 10대손으로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 군 동면 용두리 (현재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류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열사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인사로서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 운동자입니다. 류 열사는 어릴 때부터 매봉교회 주일학교에 다닌 기독교신자로서 본래부터 총명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시켰습니다. 1919년 3월 1일 만 17세의 소녀의 몸으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 하셨습니다.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동년 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아우내장날인 4월 1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천안, 연기, 청주, 지넌 등을 누비며 계획하였습니다. 3월 31일 매봉산의 봉화불을 신호로 4/1 장터에서 수천명이 모였고 열사께서 선봉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 시위로 류 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하였고, 류열사도 부상을 입은채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송치되었습니다. "한국인으로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을 수 없다." 고 항거하여 3년형을 받았으나 복심 법원에서 법정 모독죄로 처벌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8월 1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부르시다 헤아릴 수 없는 폭해와 악독한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10월 12일 오전 8시 만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나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나라 독립은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 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목숨을 거두셨습니다.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고 1972년 10월 14일에 봉화지와 생가지를 사적 230호로 지정,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출처: 성화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bae sung 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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