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능력입니다(행4장23- 31)
성경본문: 사도행전4:23-31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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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인간의 가장 큰 본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도입니다.
1991년. 9.11 테러로 많은 미국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9.11 사태를 보면서 쓴 것을 읽었습니다.
이 사람에 의하면 세계무역센터에 불이 나자 사람들은 불의 열기 때문에 밑으로 내려올 수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앉아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뛰어내린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뛰어내렸을까?
손을 잡든 안 잡든 그들은 어차피 죽으리란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 손을 잡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가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 의지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가 누굴까? 그가 하나님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점점 기도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도가 어려워진 이유는 우선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바쁜 세상에 일은 안하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뭔가 시간낭비같고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가치가 성취와 생산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기도가 힘듭니다.
기도는 투자한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이 적어 보입니다.
금방 효과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가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냉소주의 때문입니다.
“아니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러다가 기도가 응답되면 “기도안해도 그렇게 될 거였는데 뭐“.
기도가 응답안되면 ”그럴줄 알았어“.
이 차거운 냉소주의는 교회 밖에도 있고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냉소주의는 현재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치명적인 부정의 영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수는 오히려 더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갤럽 연구소에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삶이 만일 한 주간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있겠다’. ‘하던 일을 마저 하겠다’. ‘뭔가 선한 일을 찾아 보겠다’. 했지만 가장 많이 대답한 것이 ”기도하겠다“ 였습니다.
바쁘다고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더 바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금방 효과가 없다고 기도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바쁠수록 더 기도하고 금방 효과가 없어도 기도할까요?
왜 그렇게 많은 앤티, 냉소주의, 종교다원주의, 지성주의, 생산성과 과학과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일까요?
기도의 본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과학과 물질주의가 판치는 미국에서도 열 명중 아홉 명은 기도하고, 네 명중 세 명은 매일 기도합니다.
갤럽 조사 결과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본성이 있는 것 아십니까?
문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어떤 축복을 받는가입니다.
1. 고난이 기도를 낳습니다
기도의 첫 번째는 고난이 기도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로부터 이어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그들은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냥 갇힌 것이 아니라 위협과 협박을 받으며 갇혔습니다.
4장 18절입니다. 행4: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 착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나쁜 일을 해야 고난받지 않습니다.
착한 일을 해도 고난받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착한 일을 했는데도 고난받은 사람은 베드로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행10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설교합니다.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쳤으니”.
예수님이 행하신 일중 선하지 않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왜 착하게 사는 데 사람들은 우리를 핍박할까?
왜 우리가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데 고난은 오는가?
사도행전을 통해 고난에 대한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23-24절입니다. 행4:23-2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혀 가로되”.
고난당할 때 사도행전 사람들은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무릎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24절,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혀 이르되”.
듣고 기도했습니다.
듣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유없는 고난을 주십니까?
왜 선한 사람이 고난받습니까?
고난을 막지 못하시는 하나님은 무력하십니까?
왜 그리 불공평합니까?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우리는 대개 이렇게 묻습니다.
“Why me?” ”왜 나 입니까? 왜 하필 나입니까?”
그러나 역사상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하여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욥이 이런 질문을 던졌지만 그가 원하는 해답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왜 나입니까?” 하고 묻지 말고 “왜 하나님이?” 라고 물어야 합니다.
“왜 나입니까?” 하고 물으면 해답이 없습니다.
해답이 있어도 우리의 이기심을 만족시킬만한 해답은 없습니다.
만일 “왜 나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우리가 고난당할 때뿐 아니라 우리가 잘나갈 때도 물어야 합니다.
어떤 집의 아들이 재수해서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이때 어떤 부모도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축복을 주십니까? 왜 다른 사람은 서울대에 떨어뜨리셨습니까? 불공평합니다” 아무도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경쟁회사와 경쟁해서 어떤 회사가 엄청만 매출을 올렸습니다.
경쟁회사는 거의 망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하필 우리 회사입니까? 왜 우리 회사에는 그렇게 많은 축복을 주시고 경쟁회사는 망하게 하십니까? 불공평합니다. 왜 우리의 축복을 나누어 그 회사도 잘 되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만 편애하십니까?”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못될 때만 하나님께 따집니다.
사도행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로 기도합니다. 24절,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혀”.
사도행전 성도들은 모두가 함께 기도했고 그나마 소리를 높혀 기도했습니다.
그들이라고 억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라고 질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기도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언제나 고난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기도를 가져옵니다.
목숨을 건 기도는 언제나 고난가운데 일어납니다.
우리 일생에서 언제 가장 절박한 기도를 했는가 물으면 당연히 가장 많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지금 목숨 걸고 기도합니까?
여러분이 만일 지금 목숨걸고 기도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그럴만한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절박하거나 다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고난가운데 기도하는 것,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고난가운데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 지극히 비정상입니다.
고난이 없어도 기도하는 것, 최고의 기도입니다.
누구나 고난이 없는데도 기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난가운데는 기도해야 합니다.
가끔 고난가운데 기도하면 하나님께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안하다가 기도하기 때문에 조금 속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가운데 하나는 오랫동안 우리가 기도하지 않다가 갑자기 무슨 힘든 일 때문에 기도하면 그때에도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실만큼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생명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서 기도의 열심을, 하나님에게서는 은혜와 선하심을 나타내게 합니다.
고난가운데 기도하면 국가가 교회나 개인이나 누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계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신 순간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 배경에는 기도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공산권 국가중의 하나인 루마니아의 공산당 철권통치가 무너졌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1980년대 토케스라는 헝가리계 목사가 루마니아의 조그만 개신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용감하게도 공산당의 불의를 비판하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고 처음 40명이던 교인이 5천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어느 날 저녁, 토케스 목사를 끌어내겠다며 경찰관이 몰려왔습니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삽시간에 퍼져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택을 에워쌌습니다.
그 일로 그날 도시에 모인 수가 20만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군중들앞에 토케스 목사가 섰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했습니다.
“우리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루마니아 공산정부는 기도로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배경을 아십니까?
공산당에 눌려 살던 사람들이 1989년, 동독의 어느 작은 교회에 모여 촛불을 켜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하가 오르간 연주한 것으로 유명한 이 교회에 사람들이 하나 둘 기도하러 모였습니다.
결국 그 수는 만명, 3만명, 5만명, 그리고 50만으로 불어났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그래서 승리했고 우리 나라가 3.1운동, 일제시대, 6.25를 통해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도 고난속에서 성도들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고난가운데 기도하면 나라도 교회도 개인도 승리합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한 어머니가 아들 하나 하고 사는 데 그 아들이 속을 썩입니다.
툭하면 사고치고 집을 나갑니다.
어머니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달래도 설득해도 그때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작정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들은 집을 나가 아예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한 이웃이 아들을 어느 도시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그 도시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무릎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아들은 허랑방탕하다 돈떨어지고 갈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굴뚝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서양의 굴뚝은 넓고 큽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들이 굴뚝 청소하다가 다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굴뚝에 들어가 안 방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빠져 나오는 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거기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다른 굴뚝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를 만난 것입니다.
낯선 도시에서 모자가 기적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누가 이런 기적을 만나게 했습니까?
기도입니다.
기도는 항상 기적을 가져옵니다.
<여수 성광교회> 한 집사님이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을 간증했습니니다.
이 집사님이 여수에서 시아버님 생신 때문에 서울로 오다가 서대전역에서 기차가 쉴 때 잠시 쉬면서 국수를 하나 먹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열차가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부랴 부랴 15개월짜리 아기를 안고 달리는 열차를 탔는 데 그만 발을 헛디디어 열차 바퀴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열차 바퀴에 깔려 죽을 상황에서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는데 정신을 다시 차려 보니 아이는 온데 간데 없고 자기는 기차 바퀴에 옷을 걸려 질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살려 주세요” 소리질렀는 데 고함소리 때문에 열차가 섰습니다.
사람들이 이 집사님을 끄집어 내고 보니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났으나 큰 이상은 없었고 아기는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살았다고 하고 집에 도착했는 데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야, 무슨 일 없었냐?”
그래서 역에서 된 일을 이야기했더니 그렇잖아도 내가 아침부터 자꾸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데 자꾸 ‘살려달라고’하는 기도만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집사님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고난은 기도를 낳고 기도는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기도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사람들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다시 24절입니다.
행4:24,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혀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오”.
여기서 “대주재여”가 중요합니다.
대주재는 세상을 통치하는 가장 큰 통치자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오늘 말씀에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24절 뒷 부분입니다.
행4:24,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오.”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를 지으셨습니다.
25절입니다.
계시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통해 임금들과 통치자들이 함께 예수님을 대적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예고합니다.
다윗은 주전 1,000년 전 사람입니다. 천년 사람이 어떻게 천년후의 일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미래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감추인 비밀을 열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27, 28절입니다.
다윗의 예언대로 1세기가 되어 이스라엘의 헤롯과 로마의 빌라도를 합작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나님의 예고대로 역사속에서 구원의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25절과 28절 사이에 중심 단어가 셋 있습니다.
24절, ”지으셨다“,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25절, ”말씀하셨다“, 다윗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계시의 하나님입니다.
28절, ”정하셨다“. 헤롯과 빌라도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역사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합니까?
기도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주부터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이야기하다가 빌2:10을 읽었습니다.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 말씀을 읽고 다시 한번 예수님이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먼저 하늘을 다스립니다.
하늘은 천군 천사들과 그룹들과 영들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하늘을 다스립니까?
누가 그룹들, 스랍들을 다스립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땅에 있는 자들과”,
예수님은 땅을 다스립니다.
지난 주에 “해를 품은 달”이라는 드라마가 끝났습니다.
조선의 왕이 대단하지만 기껏해야 땅의 한 모퉁이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땅을 다 다스립니다.
그나마 영원히 다스립니다.
“땅아래 있는 자”,
땅 아래가 무엇입니까?
음부입니다. 악한 영들입니다. 지옥입니다.
예수님은 거기까지 다스립니다.
“다스린다”는 동사가 현재형입니다.
지금도 계속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분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전적인 의존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기도는 어린 아이같은 기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에게 어떻게 요청합니까?
모든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한번만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줄때까지 달라고 합니다.
결국 부모가 지칠 때까지 조릅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 이스라엘의 어느 집에 여섯 살짜리 딸이 아빠에게 졸랐습니다.
“아빠, 오늘 너무 더워. 수영장에 가면 안 돼?”
아빠는 딸에게 “나중에” 했습니다.
아빠는 사실 수영장 갈 돈 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딸은 막무가내로 가야한다며 떼를 쓰더니 안되니까 “앙”하고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방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말합니다.
“아빠, 그럼 나 하나님한테 부탁할 거야”.
아빠가 문앞에 들었더니 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여기 너무 더워요. 오늘 수영장에 가고 싶은데 아빠는 안간대요. 하나님이 도와 해 주세요”.
놀랍게도 딸은 기도를 마친 후 수영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근처에 살던 목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집사님, 마침 수영장 무료티켓이 하나 생겼는 데 같이 가실래요?”
하나님이 딸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인간 아빠는 못 들어줘도 하나님 아버지는 들어주십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장군이 타냐에게 묻습니다.
“넌 왜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니?”
타냐타냐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그때가 전쟁 중이었어요. 거리는 온통 불바다였고 저를 보호해 줄 상황이 아니었어요.”
남자가 타냐에게 또 묻습니다.
“아니, 아빠와 왜 헤어졌냐고? 아빠와 헤어진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타냐는 말했습니다.
“사실은......빠가 제 손을 놓았어요”.
그때 장군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네 아빠가 아니다. 아빠는 어떤 상황에서도 딸의 손을 놓지 않지. 너의 친아빠는 닥터 지바고란다.”.
그렇습니다.
인간 아빠도 자식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어쩌다 손을 놓칠 수 있지만 “이 손 놓으면 내 딸과 영원히 헤어지지” 하면서 절대 손을 놓지 않습니다.
아빠도 딸의 손을 놓지 않는 데 하나님이 놓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무려 170번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에는 한번도 없던 일입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까?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절대적으로 의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없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요8:28,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12:49,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합니다.
“엄마, 아빠 없이는 나는 나는 아무 것도 못해. 아빠, 엄마없이는 나는 못살아“.
그래서 기도의 본질은 무기력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가 기도에 대한 탁월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도한다”.
기도해야만 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기도가 좋아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이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의 태도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내용도 중요합니다.
28절에서 30절이 기도의 내용입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28절, “하나님의 예정된 권능과 뜻을 이루소서”.
29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30절,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자신의 이기적 목적, 개인의 성취, 자기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예정, 둘째 하나님의 말씀, 셋째 하나님의 표적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중심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와 의를 구했습니다.
최고의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면 그 속에 다 있습니다.
16세기 프랑스의 성녀 쟌느 귀용이 말했습니다.
“그분께 나아갈 때는 연약한 아이처럼 가라.
온통 때가 묻고 상처투성이인 아이, 연거푸 넘어져서 다친 아이처럼 가라.
혼자서는 전혀 무력한 사람으로 주님께 가라.
스스로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그분께 가라”.
기도하면 능력을 받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기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1절입니다.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전적으로 기도하자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진동했다”는 말은 바다에서 이는 큰 파도를 말합니다.
목숨걸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능력이 파도처럼 밀려온 것입니다.
1년전 일본의 대지진을 보셨습니까?
그때 밀려온 집채만한 파도를 보셨습니까?
집이니 자동차니 배니 다 쓸어 버리지 않습니까?
이것이 기도로 인한 성령의 능력입니다.
행4:31,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 힘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 힘은 영혼의 해일처럼, 영적인 쓰나미처럼 우리를 압도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필요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도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가 저급한 기도가 아니며 오히려 필요한 것은 구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사는 데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다는다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 도움이 필요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 교제를 위한 기도입니다.
내가 주님안에 있고 주님도 내 안에 있는 기도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바라보듯이 하인이 주인을 바라보듯이 주님안에 도란 도란 대화라고 사랑을 나누는 기도입니다.
필요합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능력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먹을 양식도 필요하고 주님안에서 누리는 교제도 중요하지만 실제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절박한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없이 한 시라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시간 적어도 두 가지 능력을 받읍시다.
30절에 병 고리치는 능력, 31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 먼저 30절 보십시오.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병낫게 하는 능력은 사도행전 교회에 사도들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성도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필요한 능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병들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믿으십시오.
기도하면 병 낫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소서”.
누구나 기도하면 병 고칩니다.
또 하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능력”입니다.
누구나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있는 말씀 전파의 능력은 기도에서 옵니다.
미국의 무디가 1872년 영국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열흘 동안 400명이 구원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디는 왜 이렇게 작은 마을에 부흥이 임하는가 기도하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교회에 선천적 장애로 침대에 누워있는 마리안 아들라르드라는 여인이 매일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나는 몸이 아파 예배에 나갈 수 없지만 우리 교회에 부흥을 보내주시옵소서. 부흥을 보내주시옵소서.”
이 여인의 기도로 말미암아 그 교회는 크게 부흥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기도로 고난을 이깁시다.
어린아이처럼 주님만 의지합시다.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읍시다.
필요를 위해, 교제를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능력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주여, 손을 내밀어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옵소서. 주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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