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넬료의 용기(행10장23-29;44-48) 성경본문: 사도행전10:23-29;44-48 10:23-29;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 44-48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용기입니다. 여러해 전에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을 보면서 메달 하나 하나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 유도 선수 송대남 선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90킬로 남자 결승에서 금메달을 땄는 데 현재 나이가 35살입니다. 35살이면 운동선수로서는 나이가 많은 데 그가 올림픽에 나온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그는 80킬로 선수였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80킬로급에 이번에 금메달을 딴 김재범 선수가 나타났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 김재범 선수가 나오니까 송대남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선수로 평생을 꿈꿔어온 올림픽입니다. 그래서 체급을 10킬로 더 올렸습니다. 남들은 몸무게를 줄이며 운동하는 데 송대남은 몸무게를 늘리면서 까지 힘들게 운동했습니다. 결국 결승 종료 10초를 앞두고 뒤축감아치기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중 누가 쉽게 시상대까지 올라갔겠습니까? 수없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이겨내고 거기 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용기입니다. 올림픽 이야기 할 때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때 있었던 장면입니다. 400미터 달리기를 하는 데 150미터 지점에서 한 선수가 갑자기 쓰러렸습니다. 함0 주인공의 이름은 데렉입니다. 그가 갑자기 허벅지 근육 파열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섰으니 그를 일으킨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그가 가진 불굴의 용기였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뛰어넘는 용기, 그 용기가 그날 금메달 딴 선수보다 그에게 더 많은 박수를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주저 앉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합니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고넬료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고넬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유일한 로마군 장교입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인물 이야기를 다룹니다. 1-9장까지 베드로, 11-28장 바울입니다. 그 한 가운데 10장에 고넬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 이전에 로마로 보내어 로마를 복음화하기 위해 준비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만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고넬료가 전도한 것입니다. 행10장은 그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다 여기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함께 인간의 철저한 순종과 믿음이 따랐습니다. 한 마디로 용기가 따랐습니다. 용기는 두 사람에게 다 필요했습니다. 고넬료에게도 필요했고 베드로에게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어떤 용기를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용기를 주셨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용기를 주십니까? 말씀을 통해 피곤하고 지친 이 여름에 하늘의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1. 고벨료에게 하나님이 먼저 주신 용기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지난 주에 본대로 고넬료는 로마의 군대장교였습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조직의 기본인 100명을 다스린 장교로, 요즘 말로 하면 소대장입니다.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행10:2을 볼까요?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로마 장교인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자신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온 식구와 함께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뿐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는 긍휼의 마음도 가졌습니다. 사실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믿기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더구나 그가 구제한 백성은 피정복국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는 구제하려고 이스라엘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가 구제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유대인도 로마 장교로부터 구제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구제했습니다. 구제할 뿐만 아니라 기도했습니다. 그나마 항상 기도했습니다. 어쩌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넬료는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요즘 어떤 교인이 “목사님, 은퇴하고 나니 남는 것이 시간밖에 없어요” 하고 열심히 교회 나옵니다. 은퇴하고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아직 현역입니다. 그렇게 매일 새벽기도, 매주 심야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넬료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로마사람입니다. 로마사람은 로마정부의 지시를 받고 로마종교를 믿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공인입니다. 그가 혹 이스라엘 종교를 믿고 싶어도 남들 눈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그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로마 장교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돈이 나옵니까? 보너스가 나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계급이 올라갑니까? 살림살이가 나아집니까? 자신의 미래 성공을 무엇이 유익합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하나님 믿으라고 강요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많은 유대인도 로마장교에게 하나님 믿기를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강요해야 했다면 로마장교가 로마 종교를 믿으라고 유대인들에게 강요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믿음은 전혀 자발적인 것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고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철저히 믿은 것도 그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지만 “이왕 하나님 믿을 바에는 잘 믿어야겠다“ 그것도 그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첫 번째 용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억지로 믿기를 강요당하는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 “이것은 옳은 일이야”하며 결단하는 믿음입니다. 신앙은 선택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어쩌다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이것이 옳다“ 믿어야 진짜임을 믿습니까?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반드시 자라서 스스로 선택해야 함을 아십니까? 하나님믿는 것도 선택이지만 하나님 잘 믿는 것도 선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 내가 잘못 믿고 있다면 누가 내게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을 아십니까? 이 말은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믿었어도 이 시간 잘 믿기로 선택하면 앞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제가 성경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은 후 아담이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인가 하고 보았더니 선택하는 일입니다. 창2:15-17 사이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두 나무를 지으셨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창2:17,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많은 선택할 기회를 주신 가운데 한 가지만 선택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나무는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는 수없는 좋은 선택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해도 하나님은 다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이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좋은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확률상 그렇게 되기도 어려웠습니다. 말하자면 사과상자에 수 백개의 사과가 있고 그 중에 썩은 사과 하나가 있었는 데 하필 그 많은 사과중에 썩은 사과를 선택한 것입니다. 수많은 좋은 선택의 은혜앞에 한 가지 안 좋은 것을 선택한 아담, 그래서 아담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성경은 선택의 책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창녀였습니다. 가난과 운명주의와 패배주의가 그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스라엘 정탐꾼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숨겨 주어야 하느냐? 신고해야 하느냐? 그는 숨겨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것은 정탐꾼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수2:11절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는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나온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선택하자 하나님도 그를 선택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유대인 살몬과 결혼하게 되고 그 몸에서 보아스가 태어나고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이스라엘 왕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선택했습니까? 부모님이 믿으니까 나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했습니까? 아내가 가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입니까? 스스로 온 것입니까? 선택의 원리가 세 가지입니다. 여호수아의 말입니다. 수24:15,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아를 섬기겠노라“. ☞첫째 예배할 자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종교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중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불확실하며 현재만 우리 시간입니다.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셋째는 내 가족과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나 혼자로는 부족합니다. ”나와 내 가족이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그 용기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앞에 엎드리는 용기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누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도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청하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래서 세 사람을 급히 보냈습니다. 그래서 종들은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약 60킬로를 밤새워 걸었습니다. 그리고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에서 기도하고 있는 베드로를 발견하고 그를 모시고 다시 가이사랴로 왔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어떻게 했는지 보겠습니다. 23절에서 25절입니다. 행10:23-25,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여러분,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 기이하지 않습니까? 고넬료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온 로마의 군인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볼 때 대단하지만 사실 로마입장에서 보면 피식민지의 한 종교인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까? 세계를 다스리는 나라의 장교와 지중해변의 작은 나라의 종교인이 어찌 같겠습니까? 더구나 베드로는 어부 출신이 아닙니까?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그가 가진 자격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자세를 보십시오. 온 일가 친척을 다 모으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그것도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요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신앙은 목마름입니다. 생수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홍수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넘쳐납니다. 문제는 내가 목마르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나 신앙은 물보다 목마름입니다. 기다리자 드디어 베드로가 나타났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참 대단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지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33절입니다. 행9: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 데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앞에 있나이다”. 이 말씀속에 고넬료가 베드로에 대해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납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고넬료가 원했던 것은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간증이 아니었습니다. 고넬료가 원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나마 보세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 고넬료는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한 모든 말씀을 듣기 원했습니다. 고넬료는 취사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말씀만을 듣기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말, 자기 입맛에 맞는 말, 자기 교리와 신학에 맞는 말말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증거된 모든 말씀이 주님이 명하신 말씀이기만 하면 무슨 말씀도 듣겠습니다”. “취사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버리지 않겠습니다”. “위로의 말씀이든 책망의 말씀이든 잘했다는 말씀이든 못했다는 말씀이든 다 듣겠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자,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거기서 멈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선택해야 하는 데 거기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안 자라는 이유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면 “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앞에 복종하십니까? 하면 “글쎄요”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격리되어 있습니다. 더 서글픈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목회자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절했습니까? 세상 권력으로 말하자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절한 것은 베드로의 인격이나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때문입니다. 이것이 카톨릭신학에서는 되는 데 개신교에서는 잘 안됩니다. 물론 개신교 신학에서 목회자는 신자와 하나님사이의 중보자가 아닙니다. 중보자는 예수님이요 목회자는 조력자입니다. 그러나 신자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말씀하는 한 목회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개인에게 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했듯이 신자들은 늘 그 마음으로 목회자를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가 권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음을 잃습니다. 묻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말씀앞에 복종하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믿음으로 나아오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함으로 나아오십시오. 이것이 두 번째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러나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3.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지금까지는 고넬료에게 필요한 신앙의 용기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필요한 용기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고넬료입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하나님께 나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해 로마로 갔던 은혜의 배후에는 베드로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고넬료 혼자 잘 해서 잘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우선 욥바의 무두장이의 집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즈음 욥바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욥바에서 베드로는 여제자 도르가를 살려났습니다. 그가 살아나자 하나님이 또 말씀합니다. “베드로야, 무두장이 시몬의 집으로 가라”. 사실 집을 옮기는 일은 베드로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집이 무두장이 집이라는 것입니다. 무두장이는 요즘으로 말하면 가족제조공입니다. 양이나 소의 사체에서 가죽을 벗겨 그 가족을 염색하고 말려 구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깨름칙했지만 순종해서 그 집을 찾아갑니다. 그 집에 며칠 머무는 데 어느날 하나님의 명령이 또 임합니다. “베드로야, 지붕으로 올라가 기도하라”. 유대인 지붕은 물건을 올려 놓고나 가끔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한 낮에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행10:9절에 의하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기도하러 올라간 시간은 제6시입니다. 제6시는 우리 시간으로 12시, 정오입니다. 하루중 가장 더울 때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무리한 순종을 계속 요구합니다. 한참 기도하는 데 보자기 하나가 내려옵니다. 무엇인가 보았더니 벌레가 우굴거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잡아 먹으라”. 어떻습니까? 여러분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쉴새없이 베드로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베드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고넬료가 예수님 영접하고 로마로 가서 사도 바울이 오기 전 전도했던 위대한 사건의 배후에는 베드로 사도의 눈물겨운 순종이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고넬료 한 사람의 믿음만 가지고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를 선택하는 용기와 함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언어가 주로 “하라”보다는 “하지 말라”에 있는 줄 알고 하지 않을 것을 안하면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 했는 데도 매 순간 “가라”는 말을 또 듣기 바라며 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기드온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미디안 군대가 처들어오자 기드온을 부릅니다. 삿6:12,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그런데 기도온은 이 말을 “가라”는 말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표를 구합니다. 처음에는 바위에 무교병 하나를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무교병을 살랐습니다. 하나님이 이 기적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을 영을 기도온에게 부어줍니다. 삿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도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아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그렇다면 기드온은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 데도 기드온은 떠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저를 부르셨다면 땅위에 양털을 놓아둘테니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맺히게 하시고 다음 날은 반대로 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끝까지 인내하여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었지만 기드온은 그때 시간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라고 명하셨는 데 우리는 여전히 안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를 기드온처럼 불러 미디안과 싸우라 부르시고 성령을 부어주셨건만 우리는 “하나님, 정말 제가 맞아요? 저보고 전도하라고요? 차마 저는 아니시겠지요? 저는 약하고 부족하잖아요? 만일 저를 전도자로 불렀다면 제가 잘 때 천사 셋이 나타나 제 이름을 크게 불러 주세요” 이런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도 기도온이 안가고 짬짬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드디어 큰소리로 말씀합니다. 삿6:14절입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다같이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영적 생활의 초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명령한 것을 또 다시 묻지 마십시오. 또 다시 물으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기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라“.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는 기도하면 되지 기도해야 하느냐고 또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하라“. 용서는 용서하면 되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라“. 사랑은 사랑하면 되지 사랑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하라“, 전도는 전도하면 되지 전도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기드온의 기도요 시간낭비 기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언제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가 이미 명한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가려는 도피처나 안 하여는 핑계나 게으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선포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사실 기도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기도가 순종의 방해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를 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사랑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기도하면 전도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게 합니다. “아이든의 모험”이란 책이 있습니다. 행동의 중요성, 순종의 아름다움을 끼닫게 닫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험을 떠나는 아이든이 여행이 시작되는 곳에서 자신과 함께 서 있는 메이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두려워요". "무엇이 두려운가?" 메이븐이 조용한 소리로 물었다. "이 여행이 두렵습니다. 제가 알아야 할 것들을 다 채워졌나요?" 메이븐은 그를 엄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그를 야단쳤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다 안전하지는 않아. 너를 지켜주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존재야. 그리고 이것만은 확실하다. 가라,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가라. 그러면 그곳에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한다고 너무 구부정한 자세로 있지 마세요. 순종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가라. 그러면 그 곳에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할까요? 묻지 마세요. 이미 명령은 떨어졌습니다. 사랑할까요? 더 이상 기도하며 사랑을 지체하는 일을 하지 마세요. 사랑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라, 미디안에게로. 내가 이미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에게 명령이 이미 떨어졌습니다. 기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시간에 너무 오래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가 행동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베드로처럼 순종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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