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박사/전도의 창

전도현장에서 꼭 필요한 전도예화들

에반젤(복음) 2021. 7. 17. 16:54

 

전도현장에서 꼭 필요한 전도예화들

 

 

전도예화 1/ 벤허(BEN HUR)

 

“벤허”라는 제목의 영화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영화는 본시 류 월레이스(Lew Wallace)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어느 날 월레이스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요, 유명한 무신론자였던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부인하는 글을 써서, 기독교를 영원히 사라지게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한 사람의 평범한 인물로 헐뜯는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 후 이년 동안 세계 각국의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기독교를 완전히 부인하고, 없애 버리는 글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준비를 다 갖추고 난 뒤에, 드디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 2장을 쓰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살아 계셔서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그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뒤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변화를“벤 허”라는 주인공 인물에 고스란히 투영시켰습니다. 벤 허는 본시 칼과 창의 무력을 통해서 자기의 신음하는 동족 유대인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겠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의 손에서 칼과 창을 빼앗아 갔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벤 허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월레이스도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17절에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로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전도예화 2/ “하나님이 너무 오래 참으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주일 예배를 끝내고 목사실에서 잠시 묵상에 잠겨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교회 어느 집사님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어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전화였습니다. 부랴부랴 그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다른 데는 크게 이상이 없었지만 얼굴 부위는 붕대를 두른 채 겨우 한쪽 눈만 내어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너무 급하게 당한 일이기도 하고 또 얼굴 상처가 너무 심한 것 같아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목사님은 그의 손을 잡고 그저 “집사님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조용히 목사님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한쪽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얼굴을 감은 붕대를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면서 차분히 가라앉은 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염려 마세요.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오래 참으신 것이지요!” 그 집사님의 짧은 말속에서 목사님은 깊은 의미를 알듯하여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서로 손을 잡은 채 침묵만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선 너무 오래 참으신 것이지요!”라는 집사님의 말속에는 감사와 함께 어쩌면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뜻이 들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사고를 통해서 그가 볼 수 없었던 과거를 한 눈으로 보는 것 같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래도 버리지 않고 지키셨다는 감사가 서려 있는 말인 줄 압니다. “하나님이 너무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 말이 우리들 모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3장9절입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전도예화 3/ 타이타닉호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라고 자랑했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였습니다. 1912년 그 배는 영국 사우스샘프턴에서 미국 뉴욕시로 처녀항해를 하는 도중 빙산과 충돌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바다에 완전히 빠지는 데는 2~3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배에 있는 사람들은 구명보트를 타고서 배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배 안에는 구명보트가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등객실의 손님들과 여성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습니다.

 

마지막 구명보트가 배에서 내려올 때였습니다. 그 보트에 타도록 되어있던 여성 한 사람이 선실을 향해서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원은 깜짝 놀라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울면서 통사정을 했습니다. “객실에 보석상자를 깜빡하고 놓고 왔어요! 얼른 가서 그것만 가져올 테니까 제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선원은 어쩔 수 없이 5분간의 여유를 주었습니다. 선실로 뛰어가는데 1분, 거기서 보석상자를 찾는데 1분,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데 1분, 넉넉잡아 3분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5분이 지났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5분을 더 기다렸습니다. 10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구명보트는 배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 여인이 돌아오지 못했을까? 자기의 보석상자만 들고 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실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온갖 패물들을 보고서는 차마 발길을 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것들을 줍다가 보트를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영원한 것을 상실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16절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전도예화 4/ "악의 본능에서 거룩한 본능으로"

 

어떤 조류학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새의 알을 몇 개 가지고 와서 다른 지방에서 인공부화를 시켰습니다. 그 새는 갈대를 가늘게 찢어서 둥지를 만들고 그 밑바닥에 구멍을 만들어 출입구로 삼는 특이한 새였습니다. 그 학자는 인공부화를 시킨 새로 하여금 다시 알을 낳게 하고 또 다시 그 알을 부화시키는 방법으로 5대째까지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5대째 되는 새를 다시 그들의 조상이 서식하는 남아프리카로 데려갔습니다. 물론 이 새는 인공 부화되었기에 갈대로 만든 둥지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새는 제일 먼저 갈대를 발견하고는 가늘게 가지런히 짜서 집을 짓고는 바닥에 구멍을 내어 출입구로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본능이란 것이 얼마나 원초적인가 하는 것을 한 마리의 새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초의 원죄를 그대로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락한 죄 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악으로 오염되어 그것이 본능으로 되어버리기 이전에 인간은 악이 아니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한 모습으로 창조되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악에 앞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먼저 인간의 본능에 깃들여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악의 본능이 이를 가리워 버렸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죄의 본능, 악의 본능을 깨뜨리고 다시금 거룩한 본능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전도예화 5/ 베벌리 쉬아(George B. Shea)

 

1928년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해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조지 베벌리 쉬아(George B. Shea)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다니던 대학을 중퇴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부적으로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시카고 방송국에서 전속가수를 뽑는다는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1,500명이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 가운데서 쉬아가 당당히 뽑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10년 동안이나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 하나를 그에게 읽어보라고 주었습니다. 화려한 가요계에 데뷔하는 아들의 장래가 염려되어서, 어머니는 자기가 애송하는 시를 아들에게 건네준 것이었습니다. 쉬아는 그 시를 읽고서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피아노 의자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서 그 시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102장이 탄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날 시카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때 쉬아는 자기의 결심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음악적인 재능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그는 부귀와 명예가 보장된 가수의 길을 그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부터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의 한 일원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빌리그래함 한국집회 때에 같이 와서 찬양인도를 하였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전도예화 6/ 모파상의 목걸이

 

모파상의 단편소설 “목걸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주인공 마틸드는 젊고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는 호화로운 삶을 꿈꾸어 왔으나 현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문부성의 하급관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마틸드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 때문에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장관이 주최하는 파티의 초대장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마틸드는 기쁘지를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변변한 옷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은 자기가 아껴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서 새 옷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마틸드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새 옷에 걸치고 갈 만한 마땅한 목걸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틸드는 자기의 부자 친구를 찾아가서 아주 값비싼 목걸이 하나를 빌렸습니다. 그제야 마틸드는 기뻐했습니다.

 

그 날 저녁 파티에서 마틸드는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황홀했던 순간도 잠시 잠깐뿐이었습니다. 그는 새벽녘이 되어서 자기 남편과 더불어 초라한 자기의 집으로 되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집에 와서 외투를 벗는 순간 마틸드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분명 자신의 목에 걸려 있어야 할 목걸이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두 부부는 미친 듯이 밤새도록 목걸이를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찾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보석상에 가서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부부는 돈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처분했습니다. 그래도 모자라는 것은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 부부는 그 후 10년 동안이나 뼈빠지게 고생을 해야만 되었습니다. 마틸드의 곱던 얼굴도 다 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마틸드는 우연히 길을 걸어가다가 자기에게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깜짝 놀라서 왜 그렇게 변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그의 친구는 깜짝 놀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엾기도 해라! 그것은 가짜 목걸이였는데……” 그러니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가짜 목걸이를 위해서 그들 부부는 10년 동안이나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전도서1장3절에 “해아래서 새것이 없다”고 합니다.

 

전도예화 7/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은 어떠한 곳인가?”

 

첫째로, 마 25:41의 말씀처럼, 본래 지옥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해서 만든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마귀를 추종하면 그와 더불어서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에 떨어져 귀신들과 더불어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둘째로, 마 13:40의 말씀처럼 지옥은 불타는 곳입니다. 가스레인지의 불에 엄지손가락을 대고서 5분 정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가스불 정도가 아닙니다. 더 뜨거운 풀무불입니다. 거기다 전신이 들어가서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또 5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끝없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 곳입니다.

 

셋째로, 마 8:12의 말씀대로 지옥은 흑암의 나라입니다. 어린 시절에 캄캄한 밤을 혼자 걸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소름이 좍 끼칩니다. 이렇듯 어두운 밤을 걸어가도 무서운데, 지옥은 전혀 빛이라고는 없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넷째로, 지옥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마 13:48절의 말씀처럼, 지옥의 구더기는 죽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존재 자체가 영원하니까 사람을 괴롭히는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

 

다섯째로, 지옥에서는 모든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마 13:50에 보면 “거기서 울며”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고집 피우지 말고, 예수님을 믿었어야 하는 건데……”하면서 뉘우침의 눈물을 흘리는 곳입니다. 아울러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내 부모 때문에 내가 이곳에 왔구나! 내 아내가 자기만 믿지 말고 기를 쓰고서라도 나를 믿도록 만들었어야지!” 원망하면서 이를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처럼 무서운 지옥만큼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30절입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전도예화 8/ “Behold, this is glorious!”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마치 어둡고 무서운 곳을 혼자서 가야하는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죽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을 지극히 평안하게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가올 영원한 세계에 대한 기대감, 받을 상급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 있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D. L. Moody, 1837~1899)가 임종할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디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Behold, this is glorious(보라, 영광이로다)!”

 

“The earth recedes and the Heaven is coming(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임하는구나)!”

 

“God calls me(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여러분,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났다 할지라도 믿지 마십시오! 무디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앞에서 이렇게 하늘로 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디는 환희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아쉬움을 보이면서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다가올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지극한 기쁨 속에서 눈을 감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죽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죽음이라고 하면 혼자서 무섭고 캄캄한 곳으로 가야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에서 나온 것이기보다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사람은 언제 하나님이 부르시더라도 주저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8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전도예화 9/ “가족과 사랑의 대화를”

 

현대인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는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부부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숨을 죽인 채,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실에서 싸우는 소리를 마음 졸이며 듣고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급기야 화를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쫓아가더니 주방에 있는 가스밸브를 틀었습니다. 그리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말았습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 안에 불길이 크게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방안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면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아들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까 거센 불길이 아파트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엉겁결에 창문을 열고서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순간적으로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급히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따라 창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아버지는 홧김에 불을 지르기는 했지만,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가족 세 사람이 모두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무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

 

첫째로, 아버지는 제비족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제비처럼 날아서 땅에 사뿐히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머니는 날라리였기 때문이랍니다. 훨훨 날아서 땅에 사뿐히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아들은 비행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러니 고층에서 떨어져도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정이 얼마나 병들었는지 우리들에게 풍자적으로 꼬집어주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을 혹시 등한시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펴보고, 바쁜 일과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가족들과 함께 하십시오.

 

시편 128편3절입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전도예화 10/ “당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영화인 “로베레 장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독일의 나치정권에 항거하는 불란서의 레지스땅스들, 곧 저항 운동가들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인상적인 장면 한 토막입니다.

 

많은 레지스땅스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차례대로 끌려 나가서는 무참하게 고문을 당하며, 결국에 가서는 처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갇힌 사람들 가운데는 저항운동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감옥으로 끌려온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소리 높여 하소연했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나는 저항운동과는 전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유대인을 죽인 일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장사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그 때였습니다. 그와 함께 갇힌 레지스땅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직이 그에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까? 그 한 가지 이유만이라도 당신은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5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이미 수백만의 사람이 피를 흘리면서 죽었습니다.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조국과 민족은 멸망직전에 놓여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그 소리에 고함을 지르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던 사람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혹시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가 없는가? 우리의 이웃이 죽어갈 때, 우리는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치지는 않았는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합니다.

 

에스겔 3장17절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전도예화 11/ John Steinbeck의 “진주이야기”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의 중편소설 “진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고기를 잡으면서 살아가는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이따금씩 바다 속에 들어가서 진주를 채취하기도 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그들이 어느 날 보기 드문 큰 진주를 찾은 데서 시작이 됩니다. 그들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가난이 끝나고 행복한 삶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큰 진주를 찾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값진 진주를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듯이 늘 키노의 오두막집을 기웃거렸습니다. 어느 날 그들 부부가 병이 들어 병원에 갔습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아이가 전갈에 물렸을 때,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던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 그 의사는 과잉친절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몇 번씩이고 키노의 오두막집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병을 낫게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병이 더 오래 가도록 처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주가 탐이 났던 것입니다.

 

도회지의 진주 장사들은 키노가 가진 값진 진주를 헐값에 사기 위해서 온갖 농간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폭력배를 동원해서 그들 부부를 협박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밤중에는 강도가 침입하기도 했습니다. 키노는 진주를 지키기 위해서 격투까지 벌여야 했습니다.

 

진주는 그들의 삶에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진주 때문에 날마다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진주를 깊은 바다 속에 다시금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참 행복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전도서 5:10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출처 창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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