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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약형성사(동방정교회사)

에반젤(복음) 2021. 7. 14. 03:27

신약형성사(동방정교회사)

1. 동방 정경의 발전
신약의 여러 책들이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어진 여러 지역에서 어떻게 받아 들여졌는지 살펴본다.
1) 시리아
시리아는 헬레니즘의 영향권 밖에 위치하였으나 정치적으로 발전한 상황 가운데 있었으며 기독교 역시 헬라철학과 로마의 통치방식에 귀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전되었다.
(1) 타티안
타티안은' 디아테사론'에서 사복음서를 하나의 연속적 설명으로 조화시켜서 다루었다.
(2) 안디옥의 데오빌로스
안디옥의 6대 감독이었던 데오빌로스는 신약의 정경으로서 사복음서,사도행전,바울서신들을 인정했다.
(3)안디옥의 세라피온
데오빌로스의 후계자인 세라피온은 논쟁 가운데 있는 책이 교회에서 읽혀지는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그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작품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책들이 인정된 전통에 의해 지지받지 못했음을 알기 때문에 사도들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을 거절하였다.

2) 소아시아
(1) 폴리갑의 순교
폴리갑의 순교에 대해 저술한 저자는 그 사도의 여러 서신들과 어떤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서신들로부터 어떤 구절들을 빌려와서 이야기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2) 사르디스의 멜리토(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의 감독)
구약정경을 정확히 구분하려는 관심과 동시에 구약의 비유적 주석들을 예수의 지상사역의 사건들과 일치시켜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 정통적인 신약 문서들을 확인하는 일에도 관심을 쏟았을 것으로 추론된다.

3) 그리이스
(1)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A.D.170년까지의 고린도교회의 감독)
디오니시우스가 로마에 보낸 서신 가운데에서 추측할 수 있는 바는 바울 서신을 정기적으로 읽었다는 사실이다.
(2) 아데나고라스
2세기의 기독교 변증가 중 가장 유능했던 아데나고라스는 적어도 목회서신 중 하나를 포함한 여러 바울서신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음서와 계시록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3) 아리스티데스
기독교 변호의 내용을 담고 있는??변증??이라는 작품에서 직접적인 인용은 없으나, 사도들의 작품 속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러한 작품들에 대해 정경적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4) 이집트
이집트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안디옥과 로마와 함께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로서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문화와 그리스의 지성적 문화가 혼합된 곳이었으며, 교리문답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1) 판테누스(교리문답학교의 첫번째 교장)
판테누스는 히브리서의 저작권에 대해 익명성으로 보존하고자 했다고 보여진다.
(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클레멘트는 기독교와 이방문헌의 폭넓은 범위에서 인용하였 뿐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전승까지 자유로이 인용하였지만, 권위있는 것으로 간주한 것은 사도행전,베드로전서,요한일서 및 계시록 그리고 사복음서와 히브리서를 포함한 열네개의 서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대체로 클레멘트의 이해에 관한 한 그는 하나의 ??열려있는??정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오리겐
동방교회의 저자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오리겐은 신약의 책들을??신약??이라는 이름으로 결집시키면서 똑같은 성경을 통해 같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복음전도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거룩한 경전??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사복음서를 확실한 정경으로 간주하였으며 사도행전,베드로전서,요한일서,유다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뿐 아니라, 바울의 열네서신을 받아들였지만, 야고보서,베드로후서,그리고 요한이서,삼서는 유보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클레멘트의 작품과 같이 거룩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라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기독교적인 증거로서 수용하기도 했다.
오리겐을 통해서 나타난 정경화의 과정은 포함시킬만한 많은 책들에서 점차 추려서 소수의 책들에 이르는 방법을 거쳐 이루어졌다.

2.동방정경의 종결 시도
1) 예루살렘의 시릴에서 트룰루스 회의까지
동방교회는 계시록과 서신서에 대한 권위를 상당히 의심하는 경향을 가졌었다.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예루살렘의 시릴,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이고니온의 암필로키우스,블린드의 디디무스 그리고 살라미스의 에피파우스 등에 의해 정경의 범위를 정하기 위한 문서 목록이 작성되기에 이르렀다.
(1) 예루살렘의 시릴에 의한 목록
시릴의 주요 저서인 ??교리문답강의??에서 그는 구약과 신약의 목록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계시록이 신약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2)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약 296-373)
정경문제를 다루기 위해 감독의 지도자라는 직책을 이용했던 아타나시우스는 367년에 이집트 교회와 수도원에 보내는 39번째의 축제 서신 속에서 구약과 신약 정경의 목록을 다루었다. 즉 그는 현재의 구약만을, 그리고 27권의 오늘날의 신약이 유일한 정경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신약정경의 범위가 오늘날과 같이 정확하게 27권의 문서로서 선포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3) 나자안주스의 그레고리
구약에 있어서는 아타나시우스와 의견이 같았으나, 신약에 와서 일반서신을 바울서신 다음에 두고,계시록을 제외시켰다.
(4) 이고니온의 암필로키우스
베드로후서,요한이서,삼서,유다서, 계시록 등이 신약정경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5) 사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
아타나시우스와 같이 계시록을 신약의 일부로 보았다.
(6) 종합
동방교회는 정경 목록에 대해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모두 절충한 결정을 내렸다. 즉 교회에서 법을 제정할 수 있게 할 권위있는 것들을 결정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정경 목록에 대해 불일치되고 모순되기까지 한 여러 회의들 - 카르타고회의와 아타나시우스는 계시록과 일반서신을 정경으로 인정하였으나,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와 사도정경은 이를 제외시켰다 - 을 모두 함께 인정함으로써 정경 결정 시도 속에 많은 혼란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2) 독립적인 동방 교회에서의 정경
(1) 시리아 교회들
시리아 교회에서의 최초의 정경은 복음서,바울서신,사도행전 등으로 구성되었다. 즉, 따로 구성된 사복음서 대신에 한데 묶여진 ??디아테사론??이 사용되었고 일반서신과 계시록은 빠졌다. 그후 5세기 즈음에 시리아인 정경과 헬라인 정경의 차이를 조정하는 견지에서 열네편의 바울서신과 세편의 조금 긴 일반서신(야고보서,베드로전서,요한일서)은 포함함으로써 오직 22개의 서신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2) 아르메니아 교회
12세기 말경에 아르메니아의 한 종교회의가 계시록을 신약의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3) 콥트 교회
85개의 사도교령으로 알려지 수집본에 의거할 때, 신약의 순서가 다르고 이외에 클레멘트 서신 두개가 첨부되어 있다.
(4) 이디오피아의 교회
이디오피아의 신약을 구성하는 정경의 범위에 속하는 것은 35권이었다. 즉 사복음서,사도행전,일반서신,바울서신,계시록과 이외에도 신노도스와 클레멘트,계약서 그리고 디다스칼리아 등이다.

3. 서방 정경의 발전
1) 로마
(1) 순교자 저스틴
저스틴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권위를 지니고 있다면, 복음서들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권위있는 증언을 가지고 있는 한 가치가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제4복음서를 공관복음서보다 빈번하게 사용하고 바울서신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요한계시록을 사도적인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2) 로마의 히폴리투스
히폴리투스는 사복음서와 바울서신,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요한일서,이서 및 계시록은 받아들였지만,히브리서는 거부하여 전부 21권을 인정하였다.
2) 가울
리욘의 장로였던 이레니우스는 그노시즘이 구약과 신약을 분리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양자의 통일성을 주장하고 신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많은 인용을 하였다. 그는??복음전도자들과 사도들의 작품들??을 ??율법과 예언자들??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견지에서 사복음서와 사도서신들을 정경으로 수용하고 요한계시록, 헤르마스의 목자서를 경전으로 취급하였다.
3) 북아프리카
(1) 터툴리안
터툴리안은 베드로후서,야고보서,요한이서,삼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책들을 인용하였으며 사복음서와 사도서신들의 권위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규칙에 일치되지 않는 작품은 경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2)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키프리안은 사복음서,바울서신,베드로전서,요한일서,계시록들을 중요하게 인용하였으며 특히 신약의 복음서나 서신서들의 수를 언급할 때, 그에게는 영감에 의해 그 수가 결정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4. 서방 정경의 종결 시도
1) 디오클레시안부터 초대말까지
(1) 제롬
제롬의 신약은 오늘날 사용하는 신약의 문서들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으며 그는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문서의 목록에 따르는 입장을 취했다.
(2)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현재의 기독교 신약의 27권과 그 순서에 관하여 세번에 걸친 종교회의(393년 힙포,397년 카르타고,419년 카르타고)에서 강하게 주장한 결정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문서의 목록가운데 어떤 문서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한 권위 위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2) 중세,개혁자들 그리고 트렌트 회의
(1) 중세
중세에 서방 교회는 제롬에 의해 형성된 라틴어 신약을 받아들였으나, 신약의 범위 내에 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2) 문예부흥과 종교개혁기
문예부흥과 종교개혁기에 접어들자, 신약의 여러 문서들의 진정성에 관한 이전의 불확실성에 대한 각성이 있었다.
인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히브리서를 바울이 썼다는 것과 야고보서를 야고보가 썼음을 대담하게 부인하였고 칼쉬타트의 보덴쉬타인은 공의회의의 결정을 거부하면서 성경의 독자적 권위를 주장하고서 신약문서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는 시도를 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데 연관되는 것에 근거하여 신약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히브리서,야고보서,유다서,요한계시록의 사도적 정경성을 의심하는 뜻을 비쳤다.
칼빈은 여러 문서들의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언어학적 연구를 시도하여 히브리서의 가치를 인정하나, 바울의 저작성을 부인하고 베드로전서와 후서의 문체를 다르게 보았다.
(3) 트렌트 회의
1546년에 트렌트 회의에서 교회 역사상 최초로 성경 내용에 대한 의문이 완전한 신앙의 조항으로 규제되고 잘못된 자들의 파문으로 확산된 하나의 법령이 선포되었다.이는 정통교부들의 예를 따르고 신구약의 모든 문서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전통을 거절하면 파문시킨다는 법령이었다.

5. 정경성을 결정하는 기준
정경성에 대한 기본적인 선행조건은 그 선정된 문서가 규범적이라고 교회가 인정한 기본 전통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로서 내용에 대한 신학적 평가이다.그리고 저작권의 문제로서 사도성의 여부 및 정통교회의 수용성에 영향을 주는 역사적 고찰이 정경성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이러한 세 기준(정통성,사도성,교회들 간의 일치성)은 2세기에 채택되어 그이후로 수정되지 않고 적용되었는데 어느 기준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며, 기계적으로 적용되지도 않았다.

6. 영감과 정경
초대 교부들에 의하면, 영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정통적인 기독교 문서들을 정경적인 것과 비정경적인 것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비경전 문서들을 영감받은 것으로 언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경의 저자들이 지닌 특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정경으로 지정된 문서들이 곧 영감받은 문서와 같다고 주장되었다. 반면에 정경을 구성한 문서들 외에 다른 문서들에도 영감이 주어졌으므로 영감성 자체가 정경성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인정으로 말미암아 영감성이 인정된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7. Canon이란 단어의 역사
헬라어로 갈대의 뜻으로 주로 곧바른 막대를 의미하며 여기에서 많은 의미가 파생되어 사용된다.
초대교회에서 이 단어는 규칙 또는 규범의 의미에서 주로 사용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나 가르침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규범을 언급하고자 하였다.
이후 ??카논??이란 단어는 교회에서 보다 구체적인 것, 이를테면 어떤 결정이나 사람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하여 종교회의에 발표된 규칙 및 신조들을 가리키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분명하고 확정적인 것을 암시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권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책들의 목록에까지 사용되게 되었다.
요약해볼 때, 처음 3세기 동안 교회는 기독교를 위한 내적인 신앙을 묶어주는 규범(신앙의 규칙 또는 진리의 규칙)이 무엇인가를 언급할 때 ??카논??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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