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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8세기의 감리교와 성결운동의 교단들

에반젤(복음) 2021. 7. 14. 03:25

18세기의 감리교와 성결운동의 교단들

남병두 교수의 “기독교의 교파- 그 형성과 분열의 역사” 중에서, 2010. ㈜살림출판사.

감리교회

18세기에 영국국교회에서 분립된 또 하나의 주요 교단은 감리교(Methodist Church)였습니다. 감리교는 무엇보다도 존 웨슬리의 탁월한 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7세기에 분리주의 운동의 결과로 영국 땅에서 많은 교단들이 설립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러 또 하나의 주요 교단이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감리교의 분리는 어느 교단들의 분리와는 그 양상이 달랐습니다.

어떤 기존 신학에 대한 반성이나 교회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른 분리가 아니라, 하나의 신앙운동 혹은 영적 부흥운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분리였다는 점에서 독특하였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감리교의 생성에 있어서, 웨슬리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지만, 자신은 국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감리교는 웨슬리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미국과 영국에 각각 설립되었습니다. 웨슬리가 평생 동안 국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신학과 사상이 기본적으로 국교회적인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18세기의 감리교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의 영국은 종교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18세기 초까지 국교회를 포함한 영국의 여러 개신교 교단들은 영적인 활기보다는 교리 논쟁에 빠지고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활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실패하고 있었고,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농촌을 떠난 도시 빈민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던 많은 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교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농촌의 교회들은 교인들을 잃고 도시의 교회들은 그들에 대한 어떤 대책도 없었습니다. 또 17세기 이후의 계몽주의적 철학사조들은 그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결과 영국의 대다수 기독교 교단들은 영적침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한 새로운 부흥운동은 영국의 기독교 전체에 참신한 도전을 던져주었고, 영적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1703년 영국 링컨샤에서 교구 목사의 열다섯 번째 아들로 출생,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종교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5세 때, 화재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사건은 어릴 때부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명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한 뒤 동생 찰스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 등과 함께 ‘신성클럽’ 혹은 ‘메소디스트’라고 불렸던 소그룹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메소디스트라는 말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원칙과 격식에 따라 판에 박힌 듯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 활동은 나중에 메소디스트 운동이 소그룹 운동으로 전개되는 데에 귀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1735년 웨슬리는 당시 식민지였던 신대륙의 조지아에 파견되었는데, 배에서 만난 모라비아 교도들에 의하여 새로운 영적 도전을 받았습니다.

조지아 사역에서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인 피터 뵐러를 만나고, 독일의 모라비아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영성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휫필드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으나, 곧 신학적인 차이로 인해서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계속해서 그의 감리교운동을 확장시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 운동을 독립된 교단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또한 그럴 의도도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공회의 미사에 참석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감리교 그룹은 개인들의 신앙을 돕고,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돕는 사설단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웨슬리의 탁월함은 커져가는 운동을 조직화하는 일에서도 잘 나타났습니다. 그는 ‘속회’라는 소그룹을 기본단위로 하는 ‘신도회’를 구성하고, 여러 신도회들을 지역별로 묶어 ‘순례 구역’을 조직하였으며, ‘감리사’를 파견하여 돌보았습니다. 이 모든 단위모임들이 합쳐져서 ‘감리교연합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기도 하였지만, 지금까지 감리교 교단 구조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의도와는 달리 감리교운동은, 결국 독립된 교단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팽창하는 사역의 필요에 따라서 설교자들을 안수하여 사역지로 파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성공회와의 마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역자들을 세우는 활동은 감리교 운동이 국교회와 독립하는 첫 단계였습니다. 공식적 교단이 먼저 발족된 것은 영국보다는 미국에서였습니다. 미국에서도 이 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웨슬리에 의하여 감리사로 파송된 토마스 코우트와 프란시스 애스베리는 미국에서 감리교 교단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웨슬리의 뜻과는 달리, 스스로를 감독(bishop)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미국 감리교는 감독주의의 방향을 나아가게 되었고, 영국의 감리교운동과는 독립된 노선을 견지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감리교회는 남북전쟁으로 남북 감리교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합동하여 ‘연합 감리교(UMC)’를 형성하였습니다.

영국에서는 휫필드의 칼뱅주의적 감리교운동의 결과로 1779년에 ‘헌팅턴 부인의 연합회’라는 독립된 교단이 형성되었고, 후에 ‘웨일즈 감리교’가 되었습니다. 웨슬리 그룹도 웨슬리가 1791년 타계한 후 결국 국교회와 결별하고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감리교는 1884년 미국 북감리교의 일본주재 선교사 R.S. 맥클레이와 헨리 아펜젤러가 와서 세웠습니다.

감리교 전통에 있는 교회들은 그 교리적/신학적 논거를 웨슬리의 가르침에서 찾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영국국교회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흔히 웨슬리의 신앙적 표준을 ‘사중표준’이라는 말로 설명을 합니다. 국교회가 교리와 신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표준을 성경, 이성,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두는데, 웨슬리는 여기에 경험을 추가하여 신학의 ‘사중표준’으로 삼았습니다.(성경, 이성, 교회의 전통, 경험)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였으며, 기독교 신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자료였습니다. 웨슬리는 또한 성경의 이해와 해석을 돕고 보완하는 2차 자료로서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하였습니다. 또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인간의 이성이 유용하게 쓰인다고 보았습니다. 이성은 영적인 진리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신앙의 광신주의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여기에 더하여 신앙의 경험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성경에 계시되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며, 이성에 의해 확고해진 복음의 진리”는 실질적인 신앙의 경험을 통하여, 생동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웨슬리가 신앙의 경험을 중시한 것은 이후의 감리교의 중요한 신앙적 특징이 되었고, 그것은 감리교에서 비롯된 여러 성결운동의 교단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웨슬리 신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구원론과 성화론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우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고 전제하고, 동시에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이 점에서 웨슬리의 구원론은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 구원을 칭의의 사건에서 시작하여 성화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극단적인 은총론의 결과로 야기될 수 있는 ‘값 싼 은혜’의 개념을 경계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웨슬리는 또한, 초기부터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여 감리교 운동의 중요한 유산이 되게 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신학과 교리에 대한 설명은 주로, 그의 신약성경 주해와 설교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감리교 교리가 가장 잘 요약되었다고 평가받아온 감리교 찬송집도 감리교 교리의 표준이 되어 왔습니다.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이 성공적으로 발전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산업혁명의 결과로 도시에 모여든 당시의 소외계층이었던 노동자들에 대한 사역의 필요를 잘 인식하고, 적절히 대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복음운동과 산업도시에서의 사회운동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것도 성공적 사역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조직력도 한 몫 하였습니다.

감리교 운동의 핵심적 특징은, 그것이 소그룹 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소그룹을 통한 교육과 영성 훈련을 강조한 것은 당시의 교회 상황에서는 사역의 주체를 뒤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역의 주체가 고위성직자가 아니라 사역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으며, 웨슬리 운동의 가장 중요한 영성과 사역의 방법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탁월한 평신도 설교자들과 여성 사역자들이 배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또 소그룹의 활동이 생활의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과 “교육하지 않을 것이면, 전도하지 않겠다.”라는 복음 전도 이후의 양육 과정을 강조한 것도 이 운동의 지속적인 강점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웨슬리의 개인적 영성과 복음의 열정이 이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가 경건한 영성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그 영성이 실제로 사회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은,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개인적인 삶의 모범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교회 갱신을 생각하는 자들에게 한 표본을 제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현재에도 교단을 초월하여 웨슬리의 영향은 지속적입니다.

 

 

성결운동과 성결교회

 

19세기 이후로 웨슬리와 감리교의 전통에서 여러 현대의 교단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많은 이들이 감리교가 초기의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느끼면서, 원래의 전통과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면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웨슬리의 성화에 대한 가르침과 성결한 삶의 비전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 그들의 정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구체화된 것이, 곧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활발하게 일어났던 ‘성결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발생 원인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선, 19세기에 이르러 많은 신자들이 미국의 감리교회가 신학적 ‘자유주의’에 물들었다고 판단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자유주의라는 말은, 그 카테고리가 모호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대체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형성된 이성적/과학적 방법론들이 신학에 긍정적으로 도입되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해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 보수주의는 성결운동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습니다.

성결운동의 또 다른 원인은 ‘도시화’라는 사회적 현상에 있었습니다. 원래 18세기의 감리교운동은 도시의 빈민들과 같은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그 중심이 도시의 중산층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으며, 저소득층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었습니다. 성결운동이 초기에 도시의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사실이 이를 반영합니다. 영국의 ‘구세군’ 설립도, 감리교 내의 이러한 반성의 예가 될 것입니다.

성결운동이 웨슬리의 성화와 성결의 정신에서 그 신앙적 유산을 찾을 수 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19세기 초에 있었던 부흥운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기간에 피비 파머가 사랑 안에서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두 번째 축복이라고 주장한 것이 “성결로의 인내”라는 잡지를 통하여 널리 소개되었고, 그 시대의 탁월한 부흥운동가 찰스 피니도 유사한 가르침을 전파하였습니다.

부흥운동에서 일어났던 회심의 초청과 결신, 간증, 회심의 가시적 표적에 대한 관심 등은 곧 성결운동의 특징이었으며, 이러한 특징들은 이 운동이 웨슬리의 신앙적 전통을 넘어서게 하였습니다. 신유의 경험에 대한 기대와 성화를 성령침례로 이해하는 것은, 성결운동의 일반적 특징이 되었습니다. 1908년에 창설된 ‘나사렛 교회’는 이 운동이 낳은 대표적인 교단이며, 20세기 초의 ‘오순절 운동’도 성결운동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독특한 신앙운동이었습니다.

한국의 성결교회 역시,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성결운동의 한 뿌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천적으로는 감리교회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존 웨슬리의 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자들 중에서 마틴 냅과 셋 리스는 1897년에 ‘만국성결회’를 조직하였고, 이 단체에서 파송된 C. E. 카우만과 E. A. 킬보른 등이 1901년 일본에서 ‘동양선교회(OMS)’를 창설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성결교회의 모체는, 바로 이 선교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선교회가 1907년 우리나라 선교를 시작하면서, 독립된 교파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성결교는 교단적으로 말한다면, 자생적인 교단입니다.

성결교의 신앙과 신학은 감리교와 마찬가지로 웨슬리의 전통에서 그 기본적 골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성결교 고유의 특성은 그러한 기본적 골격에 성결운동의 신앙적 특성들이 가미되어서 나타납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중복음’은 그러한 특성을 잘 설명해 줍니다. 사중복음은 곧, 중생, 성결, 신유, 그리고 재림을 말합니다.

중생은 칭의의 사건, 즉 구원을 말하며, 성결은 구원 이후의 거룩한 삶을 세워가는 것인데, 곧 온전함을 이루는 성화의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신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육체적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 재림은 성도들의 희망의 원천으로서 성결교는 특별히 전천년설을 믿고 있습니다.

사중복음에서 중생과 성결은 웨슬리 신학의 강조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신유와 재림에 대한 강조는 19세기 성결운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결교는 또한 개인의 신앙고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감리교와는 달리 유아세례를 시행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오순절 운동

 

성결운동에서 나온 또 하나의 주요 운동은 20세기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이었습니다.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보수적인 신학, 엄격한 도덕성, 그리고 미음을 통한 신유를 중요시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였지만, 성령강림의 교리와 방언의 교리는 후자에만 있기 때문에 그 차이가 서서히 뚜렷해지면서 분리된 운동으로 각각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운동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흑인 부흥사인 윌리엄 시모어가 연속적으로 부흥집회를 개최한 이후였습니다. 그 부흥집회는 3년간 계속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이 운동은 초 교단적이고, 전 세계적인 운동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운동은 처음부터 교단을 형성하려는 운동이 아니었지만, 곧 다양한 교단들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또 이 운동의 초기에 참여하였던 많은 이들은 그들이 원래 속했던 교단을 떠나지 않고, 자기 교단 내에서, 그들의 ‘오순절적’ 신앙방식을 유지하였고, 그들에 의해 많은 교단들이 오순절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 가운데는 칭의와 성화 이후에 일어나는 성령체험을 중시하여, 그것을 성령침례라 하고, 제2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1914년에 새로운 교단 ‘하나님의 성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교단은 오순절 운동이 낳은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오순절운동은 지역과 지도자의 특성에 의하여 전 세계에서 다양한 교단들로 발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순복음교회’가 이와 유사한 오순절운동의 교단입니다.

이 교단의 신학적 특징은, 특히 ‘삼중구원’과 ‘오중복음’으로 요약되는 ‘전인구원의 교리’에 잘 나타납니다.

삼중구원은 영혼의 구원, 질변으로부터의 치료, 제반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고, 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재림을 말하는 오중 복음은 성결교의 사중복음을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전인구원의 근본 의미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사실적으로 속한 선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도 당연히 추구해야 할 선”이라는 데 있습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대체로 웨슬리의 구원론에 입각해 왔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의 편에서 당위적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강조합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