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학/성경적 교회
2013. 4. 11.
1과 잘못된 교회관
교회란 무엇인가(교회의 정의)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모여지고(선택),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거룩하여진 하나님의 자녀들이(칭의의 거룩),하나님왕국의 백성으로서의 삶(이러한 삶의 절대적 모범은 우리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삶) 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서론:엡1:12절을 읽을 것-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이다(우리라고 표현이 된 부분)
또한 이 에베소서1:19-23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안에서,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풍성하심을 누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몸박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누릴 수 없다)
(바울의 기도-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하려함(19)-그 능력-그리스도안에서 역사(20)-죽은자가운데서 살리심-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심(21),만물을 발아래 복종시키심(22)-그를 만물위의 교회의 머리로 주심-교회는 그의 몸이니(만물위의 몸) 만물을 충만케하시는자의 충만이니라(23)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그리스도안에 있고,그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몸인 교회에 충만히 내려오고,그 교회는 그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지극히 풍성함을 이 세상가운데 충만히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서,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고,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담아 그겻을 이 세상에 충만히 나타내는 기관이라고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그러나 우리는 과연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느끼고 있는가?
50년대 미국대학생들의 구호가 “그리스도는 좋다.그러나 교회는 싫다”였는데,지금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우리주위에 간혹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이 들린다.“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좋은데,교회생활은 싫고 부담스럽다”,“교회에 다니다가 오히려 내 신앙을 버리겠다”,“기성교회를 떠나 전혀 새로운 교회를
찾아가고 싶다”,“교회는 끝났다.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신앙만을 지키는 것 뿐이다”.“교회에 가서 사람을 보지말고 하나님만 보아라,사람보면 시험든다”,“지상의 교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단지 우리는 저 천국만을 기다릴 뿐이다” “교회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은 하나의 필요악이다”
이와같이 왜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간에 이런 괴리적인 현상이 일어나는가?(나의 이야기-사실 위에서 말한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제가 경험한것이다.그런대 에베소서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교회가 영광스럽다는 것이다.또한 교회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되게 할 기관이라는 것이다)
저는 앞으로의 강의를 통해 왜 교회에 대한 이러한 오해들이 생겨났는지를 먼저 살펴졸것입니다.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물음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같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첫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교회에 대한 잘못된 견해때문에 교회의 풍성함을 누리지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즉 많은 한국교회교인들이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교회에 대한 실천신학적인 관심만 있고,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본질적인 물음이 부족하다)
-대부분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입장들은 대부분 단순히 교회에 대해서 우리의 세속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요구사항에 의해서,교회는 이런 곳이며 이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군인인경우에는 교회를 군대식으로 생각을 하고,학교선생일 경우에는 교회를 학교처럼 생각하고,장사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장터처럼 생각하고,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단순한 종교적 사업체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교회관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A.교회는 단순한 건물 그 자체일 뿐이다.
우리가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을때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이 “건물”이다.그 교회가 좋습니까?라고 했을 때 우리는 간혹 단순한 건물을 보고 판단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건물에 대해서 “성전”이니,“성물”이니 하면서 굉장한 의미들을 부여합니다.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모두 유대교적인 생각이면,전통적인 천주교회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요2장을 보면 완전히 깨어집니다.요2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당시의 헤롯성전을 참된 성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이 참된 성전이라고 하십니다(요2:20,21)
또한 엡2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성전을 이루는 건물에 비유하고 있으며,그러한 건물들이 모여서 성전이 되어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유대나라에서 성전은 건물들이 모여서 성전을 이룬다)
(엡2:21)즉 성전이란 그리스도인들이 한 몸으로 모인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서 모이는 이 건물은 무엇입니까?이것은 단순히 성도가 모여서 예배하고 교육을 하기위한 단순한 건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재정의 우선권은 어디에 두어야 겠습니까?그것은 비인격적인 건물이 아니라,인격적인 건물(엡2:21)인 사람에 우선권이 있어야 합니다.(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건축이란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건물로 비유)를 세우고 교육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교회건물건축을 할때 반대시위를 하거나 교회건물건축헌금을 할 때 혼자서 빠져서는 되지 않는다.교회의 건물은 참된 건물이자 성전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할때,비를 피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B.교회는 본질상 단순한 하나의 제도적인 조직체에 불과하다.
교회라 할때 연상되는 것은 하나의 딱딱한 권위와 전통,관습에 메인 제도,또한 갑론을박하는 무수한 회의들의 연속만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교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것에 잘 적응하고,순복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교회에 있어서 제도적인면과 전통,관습등을 부인할 수는 없다.위트니스리의 지방교회같은 데서는 제도없는 교회를 부르짖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다(교회의 본질과 제도성의 관계연구,김광석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의 제도,또는 관습등을 결코 부인 할 수 없고,또한 그 권위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가 단순히 세상적인 조직체처럼,그 안에 말씀을 절대적기준과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한체 단순히 제도적인 권위와 인간의 관습만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드러내고,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단체와 비교해 볼때 교회도 사람이 모인단체이므로 제도와 조직이 필요하다는 보편적인 면이 있다.그러나 교회는 세상단체와는 다른 특수한 면이 있다.교회의 제도적보편성이 성경적교회의 특수성에 예속될 때에만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성경적 교회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음)
C.세번째 잘못된 교회관은 “교회는 단순히 우리에게 필요한 성경적 지식만을 공급하는 학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학원강사처럼 급료를 받아 필요한 성경강의만 하면 그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그리고 교인들은 설교자가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감상하다가,설교에 대한 헌금(수강료)만을 내고 돌아가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입시학원이지 교회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에서 말씀증거와 성경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그러나 교회란 그 말씀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체우는 것에 불과한곳이 아니라,그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 실천하고,또한 그 말씀을 가지고 성도간에 서로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우리의 가장 효과적인 교제의 수단인 것이다.말씀안에서의 교제와 만남이 제일중요하다.(영남교회의 경우,처음 교제없이 교제만 했다,나중에는 성경교제를 통해서 교제하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음)
교회란 말씀과 성령안에서의 성도의 교제의 공동체이다.(교회의 정의)“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교회란 단순히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교제하는 교회이다,그리칠 ㅡ교자가 아니라 교제할 교자이다)
D.네번째 잘못된 교회관은 “교회는 종교적 사업을 벌리는 단체”라고 생각한다.
교회를 생각 할때 맨 먼저 떠 올리는 것은 일입니다.전도행사,구제행사,--등 교회는 그저 종교행사를 벌이가 위한 단체로 생각합니다.물론 이러한 일들이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그런데 종교적인 사업만 성공하면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교회관이자 생활입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시기바랍니다.거기에 보면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이 나옵니다.여기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일이 왜 잘못되었습니까?(설명)
이와같이 아무리 그 사람이 교회에서 종교적이고 거룩한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일 그 사람이 이웃에 대한 사랑없이 전도행사만을 벌인다면 그러한 전도행사에 대해서 예수님은 채찍을 드실 것입니다.
혹 이 가운데서 일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있습니다.그래서 회장 부회장 맡을 때는 열심히 일하다가 그 직임이 끝나고 나면 교회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교회생활입니다. 교회는 일하는 곳이기 이전에 먼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형제들로 부터 공급과 양육을 받는 곳이어야 합니다.(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또한 형제와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 갈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야한다)
그런데 이제 이와는 반대되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E.다섯번째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교회는 개인적인 만족을 체워주는 영적병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교회란 단지 개인적인 영적 만족만을 체워주기 위해서 필요한 곳이라고만 생각한다.물론 교회가 성도의 개인적인 영적갈급함을 체워주어야 하며,또한 영적인 병들을 치유하는 곳이어야 한다.요즈음 서울에서는 치유목회,또는 치유교회(영적,육적질병을 치유해주는 교회)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한다.당연히 이러한 치유가 교회에서 필요하며,또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가 단순히 영적인 도움이 필요한 영적인 환자들만이 모인 병동이라고만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큰 오산입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치유함을 받으면서, 또한 치유함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곳이다.(이러한 영적인 봉사가 없이 바싹마른 손만을 내어미는 사람은 영원한 영적환자일수 밖에 없다)
골1:24을 보시기 바랍니다.거기에 보면 바울은 무엇을 두고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교회의 지체들을 섬기기 위하여 당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두신 고난을 말합니다.
교회는 봉사함으로서 참된 영적인 공급과 만족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공급받는 것이 없이 너무 지나치게 종교적 사업만을 벌인다면 이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수출과 수입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한기관 봉사,한기관 교육및 교재)
F.다섯번째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교회는 같은 신앙인끼리 모인 사교적인 모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회가 왜 필요한가?그것은 한마디로 심심하기때문이다.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이기적인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그래서 같은 값이면 착한 교인들과 같이 노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이와같이 교회를 단순히 인간들끼리만의 친교를 위한 모임이라고만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운데 교회를 인간들끼리의 사교를 위한 목적으로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 교제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바람에 불려가는 물없는 구름이요,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불결과 같다고 유다는 말하고 있다(유12,13)
이런 사람들은 힘을 합하여 쫓아보내야 한다.
우리가 친교를 하고 교제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그것은 엡1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이다.(엡1,2) 그런데 우리의 만남과 교제를 통하여 단순히 인간적인 교제만 이루어지고,인간적인 것들로만 서로 체워진다면 그것은 참된 교제의 목적이 아니다.
엡1,2장에서 보여주는 성도가 하나되어야 할 이유는 우리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함을 더 누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몸이 서로 갈라져 있으면 피가 잘 흐르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제와 만남뒤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와 영광의 풍성함이 느껴지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2.그외에도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A.한국교회교인들의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영향이다.(공동체적의식의 부족)
B.교회숫적성장주의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한국교회가 숫적인 성장주의에서 벗어나면 금방이라도 창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그러면 왜 숫적성장주의가 문제인가? 열심히 전도하여,교회에 예수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이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도 날마다 믿는 사람의 수가 더하여 갔다고 하고 있고,안디옥교회도 일설에 의하면 굉장히 많은 성도가 모였다고 한다(50만?)하나님의 교회가 커지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문제는 숫적성장주의라고 할때 교회의 참된 성공의 기준을 모이는 사람의 숫자에 삼는 다는 것이다.이것은 자본주의적인 가치관과 일맥상통한 것이다.즉 많은 사람이 모이면 많은 헌금이 나오고 그러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많다.크다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성공의 기준)
그래서 이러한 숫적성장주의적 가치관으로 교회를 보게되니 무조건 사람만 많으면 성공이라는 것이다.그러다 보니 참된 신자 아닌 사람들이 교회에 너무 많게 되었다.또한 작은 교회의 성도들과 목사들은 작게 모였기 때문에 그 교회를 너무 초라하게 생각하고 있고,많이 모이는 교회를 부러워하고 있고,많이 모이는 교회의 성도들과 목사들은 교회가 큰것을 가지고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가지고 내교회가 크니,작으니,그렇기때문에 성공했다 실패했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잘못된 것이다.많이 사람이 모였으면 누구때문에 모였는가?그것이 단순히 목사와 성도의 피와 땀으로 모이게 되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교회는 문제가 있다그렇지 않고 교회의 기초가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땀의 공로로 세워졌다면 우리는 많이 모이고 적게 모이는 것을 가지고 너무 큰 가치를 둘필요도 없다.많이 모이면 많이 모이는 대로 주님앞에 황송하고,적게 모이면 적게 모이는대로 참된 교회를 이루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제2과:성경적 관점에서 본 교회란 무엇인가?
지난시간에 우리가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인상들을 가지게 된 이유를 말했다.그것은 우리의 의식 가운데 교회에 대한 바른 성경적인 입장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또한 성경적인 관점에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성경적 관점에서 본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교회란 두가지 큰 개념이 있다.하나는 하나님백성으로의 공동체(에클레시아)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전자는 구약적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고,후자는 기독론적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1.교회는 택함 받은 하나님백성의 공동체이다.
교회란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이다.그런데 이 에클레시아란 말이 구약성경에서도 사용되어지고 있다.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 70인역 성경이다.그런데 이 70인역 성경에서 하나님백성의 공동체라는 말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하고 있다.그러니까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백성의 공동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백성의 공동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첫번째로는,하나님백성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공동체를 뜻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선택은 받은 공동체는 이스라엘백성이다.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모든 이스라엘백성이 택하심을 받은 것은 아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혈통이나,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한다.그것은 오직 하나님편에서의 일방적인 선택이다.(유대인의 공동체와 비교)
이러한 의미에서 봤을 때 하나님의백성의 공동체로서 교회란 무엇이며,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불리우심을 입은 무리이기에 어떠한 인간적인 자랑도 할 수 없고,또한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이 된 것은 결코 우리의 혈통이나,학벌에 의해서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잘못 오해해서 그들은 선택받은 자로서 민족적인 우월의식이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잘못 오해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서 선택받은자들의 모임이기에 어떠한 인간적인 차별과 계층이 사라져야 한다.
두번째로 하나님백성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동참하는 공동체이다.
창18:19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의와 공도를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다.출19:5,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선택한 것은 그들로 거룩한 백성,제사장나라로 삼기위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에 아무런 목적과 계획없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원하시는 계획속에 부르신 것을 알 수 있다. 즉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동참하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봤을 때 하나님의백성의 공동체로서 교회란 무엇이며,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동참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신 구속경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어떤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셨는가? 우리는 간혹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죽어도 천당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 이상의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베소서 1-3장 까지 이다.
특히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가지셨던 계획을 “경륜(오이코노미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가지셨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얼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가?
* 이것을 에베소서1장에서 나타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계획(경륜)을 중심으로 살피면 다음 도표와 같다.
????하나님의아들들(5)???????
? ? ???????????
경륜에 따른 예정(11)?????? 그리스도안에서통일(9)???????교 회(22)?
? ? ???????????
??? 그 안에서 기업(11)??????
위의 도표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경륜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그 경륜에 따라서 우리를 구원받기로 예정하셨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계획)에 따라서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을 하나님의 아들들의 공동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된 공동체, 그 안에서 기업(신32:8-9)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공동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하나)된 공동체, 또는 하나님의 기업이 바로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교회를 이루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안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가 교회안으로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하나(통일)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개인적 구원이 아니라,공동체적 구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왜 중요하냐고 하는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질 필요가 없다. 만일 당신이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교회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제도적 교회에 가입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천주교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범 우주적인 교회를 말한다.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말이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 도 있다)
질문/1. 교회에는 나오는데 공동체속에서 교제나 양육이나 봉사를 회피하려 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권면을 해야할까?
질문/2. 범우주적이고 버편적인 교회의 입장에서 교회성장경쟁주의에 대해 서 비판해 보시오?
또한 엡3장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경륜을 한 차원 더 높여 이야기한다.
엡3장 9,10,11-“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계획(경륜)은 이 교회를 통하여 정사와 권세자들에게(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각종지혜(하나님의 모습)를 나타내게 하려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목적이자, 수단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엡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엡 3장에서는 구원의 경륜을 한 차원 더 높여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는 세상을 향한 우주적인 계획”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질문/1.이러한 관점에서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서 말해보시오.
질문/2.하나님의 구속경륜(예정)의 관점에서 본 교회란 무엇이며,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이상의 사실들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성부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만세 전부터 예정하시고, 또한 그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 가운데 당신의 모습이 나타나며, 당신의 뜻이 펼쳐지기를 계획하셨 다(엡1,3:10) 즉 성부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교회를 계획하셨다.
B. 성자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부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다.(엡2장,엡2:13-18) 즉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만드셨다.
문/엡2장13절에서 18절을 읽어보시오. 여기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역은 어떤 것이 있는가? 지금 우리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서로 갈라지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이러한 벽들을 허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예,학생/직장인,부자/가난한자,교회의 기존의 신자/새로들어온 신자,성직자/평신도,개체교회간의 하나됨 등) 30분
C.성령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부하나님의 계획과 성자예수님의 우리를 하나되 게 하셨던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사역을 하시는 분이시다. 즉 성령하 나님의 사역의 핵심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이루시게 하는 사역이다. (엡4:3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진정한 하나됨이 이루어지고, 육신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가 있는 곳에 분열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하나된 교회를 나누이게 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다.
문제/1. 갈5장16-24절의 말씀중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해 보시오? 육체의 일이 어떻게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반대로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보시오?
문제/2. 성령의 은사가 개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교회공동체를 위한 것인가?그렇다면 성령의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겠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은사운동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
2. 교회는 하나님나라(왕국)을 드러내는 유일한 기관이다.
피터 쿠즈믹의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책에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왕국)을 드러내는 유일한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끊임없이 교회를 도전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즉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왕국)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드러내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왕국)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 라고 했을 때 나라란 헬라어로 “바실레이아”이다. 이것을 번역하면 통치,주권,다스림,왕권 등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 라고 말을 했을 때 어떤 장소적인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시고 다스리신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하나님의 나라(왕국)사상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중심되는 사상이다.성경 첫 장을 펼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맨 먼저 에덴동산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건설하시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개 나라(왕국)이라 했을때 주권, 백성, 영토의 3요소가 있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봤을 때 에덴동산은 원형적인 하나님의 나라(왕국)이었다. 태초에 창조자이며, 주권자이신 왕이신 하나님과 다스림을 받는 백성인 아담과 하와가 있으며,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토인 에덴동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왕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주권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을 다스리라”는 긍정적인 명령(문화명령)을 베풀어 주신 것뿐만 아니라,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금령도 베풀어 주셨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에덴동산은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곳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지배하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건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이 범죄함에 따라 이러한 하나님의 왕국은 깨어지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인간들이 자기의 정욕대로 살아가고,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게 되었다(창6장). 이것이 본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도가 아니었기에 하나님꼐서는 노아홍수를 일으켜 이들을 심판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노아홍수가 끝나고 난 다음에 노아에게 언약을 베풀어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신다(창9장). 그리고 죄악된 세상이지만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계속 유지되고, 보존이 되도록 하셨다(벧후3:7). 그리고 온 인류가 심판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자연의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마5:45) 그런데 이러한 노아언약을 통한 자연적인 은혜를 입은 인간들이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벨탑을 쌓는다. 창11장에 있는 바벨탑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나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첫째로 인간적인 뜻과 힘에 의해 바벨탑을 지으려 한다(창11:3,4). 둘째는 그들이 바벨탑을 짓는 의도는 하나님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창9장7절에 “땅에 흩어지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들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짓자는 것이었다(창11:4). 세번째로 바벨탑을 짓는 인간들의 하나님의 의도는 궁극적으로 “인간들의 이름을 내기위함”이었다(창11:4). 이러한 바벨탑에서 나타난 세상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으며, 또한 교회를 왜 세웠느냐에 대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것은 바벨탑에서 나타난 세상나라와는 대조된 하나님의 나라(공동체)를 건설하시기 위함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백성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을 구약의 교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신약에서 교회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또한 창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의 의도인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이스라엘)를 통하여 드러내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교회를 통하여 드러내어야 할 하나님왕국은 어떤 모습인가?(창조의 뜻을 완성은 생략) 교회를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나님나라는 먼저 바벨탑에서 나타난 세상나라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첫째로,하나님만이 홀로 왕되시고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나라(왕국)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의 제도는 결코 인간이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중심의 나라이다. 말씀의 유일한 지배하에 없는 교회는 그것이 어떠한 거룩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교회라 할 수 없다.
세째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나라(왕국)이다. 교회는 인간에게 어떠한 공로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영광을 받고 드러나야 한다.
문/1.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무엇을 건설하시기 위함인가?
문/2.나라(왕국)의 3요소에 비추어 본 에덴동산은 어떤 곳인가? 최초의 하나님 의 나라(왕국)은 무엇 때문에 깨어졌나?
문/3.하나님께서 무슨 언약을 통해서 세상이 심판받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계 속 유지되기를 원하셨는가?(창9장). 창9장에 나타난 노아언약의 규례(창 9:1-17)와 창 1장에 나타난 문화명령을 서로 비교하시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계획은 무엇인가?
문/4.노아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자연적인 은총을 입은 이 세상나라(기관,조직등) 가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있는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드러 내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말을 설명해 보시오.
문/5.교회가 드러내어야 할 하나님나라(왕국)는 무엇과 대조를 이루는가?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3.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4.교회는 성도의 교제이다.(Communio Sanctorum)
5.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제3과:복음서에서 말하는 교회
서론: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때문에,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교회의 풍요로움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그래서 이시간에는 성경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첫번째로 4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교회공동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난 교회
.사실상 4복음서에서?교회"라는 말은 두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마16: 18,18:17)그래서 어떤 사람들은?예수님은 전혀 교회를 세우실 의도 없었다"말합니다.그러나 교회라는 말의 횟수가 중요한것이 아니라,그의 사역과 가르침의 내용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분명한 의도와 가르침이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이것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예수님이 12제자를 모으신 것을 예 로들 수 있습니다.12제자란 구약의 12지파의 회복입니다(겔37)구약의 12지파는 구약에 나타난?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그런데 이?하나님의 벡성의 공동체"가 70인역에서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12제자들의 공동체를 하나의 분명한 교회(에클레시아)로 볼수 있습니다.그러니까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대한 가르침은 장차 나타날 ?교회"에 대한 가르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교회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마16장18절에 나타난?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데 있습니다.그런데 이것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있습니다.그런데 이러한 해석들은 그들의 신학적인 전제를 가지고 많이 해석한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로마카톨릭은 이 반석을 베드로로 보고,이에대해?예수는 확실하게 규정된 교회조직을 세웠음이 분명하며,또한 베드로를 예수를 대신한 후계자로 세우고,그를 머리의 자리에 앉혔다"고 말한다.그래서 말하기를 그 베드로의 후계자를 교황으로 보고,그 교황을 교회의 쌍두머리중 하나로 보고 있다(지상의 교회-교황,천상의 교회-예수~마17)
2)루터는 이 반석을 그리스도로 보고 있고,칼빈은 이반석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보고 있다(루터의 해석은 무리가 있고,칼빈의 해석은 타당성이 있다.그 이유는 헬라어본문에 반석(페트라)는 여성형으로 쓰여져 있다,그래서 이 반석을 베드로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것은 교회의 기초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이다.즉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그러면 그는 어떤 고백을 했나?
A.예수는?주"이시다.B.예수는 그리스도(제사장,선지자,왕)
C.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르다의 고백과 비교)
.마16장에서 또 알 수 있는 교회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교회는 예수님의 소유(이 반석위에 내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것이다.(하나님의 ~).
16장18절에 보면?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는 말이 있다.이 천국의 열쇠는?복음증거"를 말하는 것이다.교회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천국의 문을 열수 있는,복음증거인것이다.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잘이해하지 못하고,그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교회는 사탄의 교회가 된다(16:23-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의 비교)
.교회는 그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나라의 증거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공동체 형성-복음증거의 수단)
.마지막으로 교회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이교회에 대하여?음부의 권세(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는 사실이다.왜냐하면 교회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터위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교회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오지 않는것은 복음서는 주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부활사건이후에 교회가 생겨났고 교회는 그것을 증거하는 증인이었다]
.우리가 교회안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부활의 승리의 터위에 서있다는 말이다.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안에서 승리자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기독교적인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우리들의 신앙의 성공과 실패"로 생각한다.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승리의 터위에서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2.요한복음에 나타난 교회공동체에 대한 비유들(제4과)
.요한복음에서는?교회"라는 말이 없다.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특히 비유들 가운데는 충분히?그리스도인의공동체"를 암시해주는 말이 많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암시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말씀은 요11장52이다?또 그 민족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여기서 보면 흩어진 하나님의자녀들이 하나로 모인 모임이 교회이며,예수님께서 그것을 위해 죽으실것을 이야기하고 있는것이다.
.또한12장32절도 같은 의미이다(들리면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겠고-즉 교회란 단순한 인간의 공동체가 이니라,예수에 의해서 모여진공동체이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대해 가장 극치를 이루는 말씀은 요17장 22절이다.?우리가 하나가 된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니이다.또23절에 보면?~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신것같이 저희도 사랑하신것을 세상으로 알게하려 함이로소이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것은 우리로 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성부,성자,성령이 하나된것같이"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인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됨은 단순한 제도적인,명목상의 하나됨이 아니다.삼위의 관계는 그사이에?영원한교통,교제"이 있다.
*이 영원한 교통이란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것이며(1,5,24),또한 서로 사랑하는것이며(23,24),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는것(21)이며,서로를 아는것(25)이다.
.이로 말미암아 삼위의 하나됨이 이루어 진다.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하나됨 도 단순히 제도적으로 우리가 같은 교회에 있다고 그것이 하나된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위와같은 끊임없는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이러한 영적인 연합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두개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목자와 양의 비유)
.요10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비유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예,사40:11,시23) 그러므로 이 비유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와 목자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로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사실과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아서 불러 내어 한떼의?양무리"를 만든다는 사실이다(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교회는?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요10:14)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목자는 삯꾼과는 달리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다(요10:15-그리스도는 교회에 대하여 지금도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으로,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이다.이에대해 우리도 그와같이 교회의 양무리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요21~교회위임)
.요15장에 있는 포도나무의 비유도 공동체의 연합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5장에서는 포도나무를 이스라엘백성에 비유했음)
.요15장은 주님과 그리스도인간의 일대일의 관계를 중심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나타난 가지는?너희"라는 복수의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포도나무에 한가지×,포도나무에 여러가지0)
.즉 여러가지들이 한 포도나무에 붙어있것은 공동체에 대한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그런데 여기서 중요한것은 그 가지들은 포도나무와의 산 접촉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포도나무를 통하지 않고는 서로간의 관계도 전혀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비,성막에 나타난 등간의 표상)
.여기서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것은 교회공동체는 단순한 조직체가 아닌 영적인 유기체임을 알 수 있다(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나오고,그것은 또한 유기체적으로 각지체들을 활성화시킨다)
*누구든지 교회공동체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는 사람들은 단순히 인간 관계가 문제가 아니라,그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문제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이고,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는 메마른 가지처럼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못하게 되고,그러므로 다른 가지들과의 관계도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자석의 원리)
.그안에 붇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사랑~)를 맺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13장에서 보여준 교회의 조직은 교회는 세상과는 달리 섬기는자가 왕이라는 것이다.그리고 그의 백성들은 그를 따라야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정리비교@
.목자비유-교회는 선택함받은 사람들의 무리임을 강조,목자의 사랑의 돌봄
.포도나무비유-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관계 강조-그리스도에 붙어있어야 하나됨
.요17장-성도간의 영적인 교통강조~하나됨-그것을 위해 예수세상에 오심
제5과: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
지난시간에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살펴보았습니다.오늘 이 시간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초대교회의 시작
.초대교회는 어떤 건물이나,조직의 행성으로 교회가 시작되지 않았다(조직이 전 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증거는 행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이다. 야고보가 수장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제도를 만들어 놓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은 약속된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다.(성령약속-눅 24:44-49, 행1:5,8/성취-행2:1,43,44)
.성령강림의 사건은 이미 예수를 구주로 믿고,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 내 려진 사건이었다.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들 속에 있던 예수에 대한 말씀들이 실제화되고,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성령의 역사는 성령을 드러내는 역사가 아 니다.성령의 역사는 예수의 말씀들을 구체화시키고,실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성령의 체험이 있기 전에, 그들은 예수의 모든 말씀을 지식적으로 듣고, 또 한 예수의 역사적인 십자가와 부활을 목도하였으나 그것이 그들의 실제적인 삶 들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엠마오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베드로를 따라 처음의 고기잡던 자리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예수에 관한 의식이 추상적이 아닌 현실 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성령강림의 사건은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그의 제자들을 통해 재현되게 한 사건이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행적은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행적과 서로 일치를 이룬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 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였다.-그들이 어떤 이적을 베풀었느냐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한국교회 성령론의 문제는 성령과 말씀,성령과 예수를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사실이 초대교회를 형성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면,앞에서도 말한 바와같이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고,제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즉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 제자의 모습을 드러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령강림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는 승천이후 그의 몸인 교회들을 통하여 이 땅에서 계속사역하신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공동체적인 행위로서 예수의 모습을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느냐 할때,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려고 하기 보다는 초대교회가 얼마나 예수의가르침과 그의 모습을 현실화시키고 구체화시켰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지금의 교회를 판단하는 기준도 이와같다)
2.초대교회의 모습
.성령강림후 그들에게 일어난 첫번째의 모습은 믿는자들이 하나로 모이게 된 것이었다.“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행2:43,44)
.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꼐 모인 것이 초대교회였다.
.이것은 단순한 제도적인 하나됨이 아니었고,실질적인 하나됨이었다.
a.언어적 장벽들의 제거(방언-2:5-11)
b.사회적 장벽들의 제거(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함,행2:5-11)
유대인/헬라인-행11:8-9/노예,자유인-고전12:12-13/남자,여자-롬16:3-5,(브리 스길라와 아굴라)/부자,가난한자-행6:1
c.진정한 교통(교제)
1.영적 교통-요일1:3,빌1:5(하나님안에서와 복음안에서의 교제)
2.정신적 교통-빌2:12(권면,사랑의 위로,긍휼,자비,성도의 교제)
3.생활적 교통-행2:44,45(공동생활,학사생활,자취방이용)
4.물질적 교통-예수시대의 예루살렘,애찬3:46.공동분배4:34,35
-이것은 철저히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서 시행되었다.(초대교회공산주의와 막스의 공산주의가 다른 것은 막스의 공산주의는 혁명과 인간적인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 보려고 했고,초대교회의 공산주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자발적인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초대교회의 두번째 모습은 증거하는 공동체였다.(행1:8)
a.그들의 증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었다.또한 선포의 회 개하 고 예수를 믿어,구원받으라는 것이었다.
b.특히 그들은 부활하시고,높아지셔셔,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하여 증거 하였다.
c.그들은 공동체적인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요17: )그래서 그들의 공동 체가 서로 교통하고 교제함에 따라서 믿는 무리의 수가 더하여져 갔다.(행2: )
빌1;27-복음에 합당한 생활
3.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들
a.예루살렘교회
.초대교회의 모태교회(행15), 참된 공동체적 교회형성(공동생활)
.구제하는 교회(행6장) .증거하는 교회(예루살렘과 유대인에게 중점)
.모이는 교회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
b.안디옥교회
.박해받아 흩어진 자들의 모임(신앙을 위해 그의 전 삶을 투자한 사람들)
.이방선교의 중심지(하나님의 뜻에 민감하여 순종)
.구제하는 교회(행11:27-30)
.사람을 키우는 교회(바나바)
.모이는 교회(흩어지는 교회)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
제6과:역사가운데 나타난 교회
(성경적교회론적 관점에서 본 세계교회사)
앞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교회가 어떤 한 곳이 되어야 하느냐는 원리는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찾아보아야 한다.그런데 그러한 교회가 현실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은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초대교회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현대교회의 모습과 너무나도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교회가 현대로 오기까지 어떤 역사적인 과정들을 격었는가? 그 가운데 어떤 잘못되어진 교회의 모습과 긍정적인 교회의 모습들이 나타났었는가? 그것에 대해 2천년의 세계교회사를 약관해보고자 한다.(교회론적 관점)
1.1세기의 교회
.역사상 모든 교회들은 그들의 진정한 믿음의 기초와 성장의 유형을 1세기의 교회에서 찾았다.
.초대교회의 가장 큰 호소력가운데 하나는 사도들이 보여준 생활양식의 단순성이었다. 그들의 사랑,특히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은 유명했다.
.또한 꾸밈없는 기쁨 (구원의 기쁨)과 찬송의 생활이 그들의 특성이었고,말할 수 없는 압제가운데서도 그들에게는 평화가 있었다.
.가난한자와 상처받는 자들에게 관대함을 보이는 일을 쉬지 않았고,자신의 메세지에 신실함을 보여주는 도덕적 표준들을 중시했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시민이었으나 가이사를 “주”라고 부르기를 거절하였다.이로인해 그들은 많은 억울한 핍박과 박해를 받았다.(황제숭배,식인종)네로-성도의 불길 즐김
(박해가 있을때 교회의 순수성은 유지되었고,성령의 능력도 나타났다.사도행전의 구조 박해-성령-박해-성령----김기홍참조)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 새로운 사회의 순수하고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그들을 둘러싼 로마세계의 일반적 표준과 아주 다르므로 “제3의 종족”이라고 불리워졌다.
(믿지 않는자들은 초대교회사람들을 박해하면서도 그들의 도덕적인 면과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공동체적 삶을 보면서 존경했다)
.박해를 당하였던 초기세기들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옥외에서,카타콤에서,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렸다.“교회”라는 용어가 특정한 건물,혹은 구조물을 가리키게 된 것은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뒤였다.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4세기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바실리카(법정으로 사용된 장방형의 회당)를 교회건물을 위한 모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와 더불어 교화라는 용어가 건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기독교인들은 다락방이라 불리우는 장소에서(행1:12-15),회당에서(약2;2),그리고 거의 모든 장소와 가정에서(행5:42)만났다.
신약성경을 벗어나 사도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에 대한 여러다른 정의들과 표현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AD110년에 안디옥의 익나티우스는 로마의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사도들인 베드로와 바울처럼 여러분에게 명령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에는 전 로마제국에 걸치는 조직화된 기독교세게라는 것도 생각되지 않고 있었다.한 지역의 주교가 다른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런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없이,그들이 그들의 지역교회에서 행해야 할 것에 대하여 지시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2세기가 끝날 즈음 교회의 교직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특히 로마에 있는 주교와 교회에게 특별한 영예와 권위의 자리가 부여되었다.(당시의 정치제도영향-로마가 전세게를 지배하고 있었다.거기에 따라서 로마에 있는 교회의 권위도 높아졌다)
.2세기 말경에는 교회들가운데 교회적 체제와 조직이 출현했다.이 조직은 교회의 다양한 직책들 가운데서 서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높 낮이) 그래서 주교의 직책과 장로의 직책사이가 위계적으로 구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두 용어가 동의어로 사용된다)
.3세기에 들어서면서 당시의 교회들은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주교”로 하고,그 밑에 치리하는 “장로”들을 지역의 중심으로 한 집단,그리고 장로들 밑에 “부제”들로 조직되었다.
이 시기의 몇몇의 저작들을 보면 교회를 정의하기를 “주교들에 의하여 대표되는 기구”로 이해라고 있다.그리고 그 기구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3세기 중엽의 북아프리카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단일성”이라는 소책자에서 “교회가 로마를 중심으로 제도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교회임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결국 교회는 하나의 수퍼교회로 조직되었다.
(교훈--교회의 전 우주적인 하나됨을 조직적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다.우리는 그것보다도 신앙고백적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4세기초 콘스탄티누스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종교가 되었다.이것은 교회론적관점에서 본 교회사의 입장에서 교회의 로마에 대한 승리라기 보다는,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교회는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단체가 아니라,오히려 세상의 권력을 입고 세상을 지배하는 단체가 되었다.(로마의 관리가운데 교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그래서 교회에 아무나 들어오게 되었다-교회의 순결성 상실-.이제는 기독교를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기독교를 안믿는다고 박해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초대교회의 순수한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교훈-교회가 세상의 지배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가 아니라,종교적으로 또는 섬김으로서 세상을 지배해야한다.예수-교회-세상,엡1장--기독교가 세상의 정치권력을 입으면 반드시 타락한다.김대통령과의 미련을 끊어야 한다)
이제 교황 레오1세에(440-461) 이르러서 로마의 주교는 수석 사도인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되게 되었다.이로 더불어 중세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교회는 성레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7성례-하늘의 사다리),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통치하는 구원의 기구역할을 한다고 이해했다.
--(6.25당시의 부산 청와대-교회)
--그래서 교회의 결정이면 그것이 하나님의 결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그래서 속죄부를 판매한다던지,성직을 매매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교회의결정이기 때문에 용납되었다)
이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이 나와서 교회의 제일되는 권위는 교회의 제도적 권위나,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로 넘어오는 과정가운데서 교회의 제도가 점점 더 강해져 가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와같은 교회의 제도적인 면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를 보면 제도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위계적인 질서가 있었다.(야고보가 수장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위게적인 제도가 필요하게 된 것은 당시의 복음의 진리를 유지하고 확증하기 위해서였다.행15장에 보면 예루살렘공의회가 모인 것을 볼 수 있는데,여기서 “율법주의”에 대한 문제로 교회가 한 일치된 진리를 정리했다.(이단 대처-감독자-이단에 대한 감독자-한국의 침례교--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한국의 침레교는 이단들이 제일 들어오기 쉬운 곳이다.왜냐하면 그들은 철저한 개체교회중심이기 때문이다)(구약시대-왕제도허용,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게 하기위한 왕제도,신약시대-직분에 따른 제도--교회를 섬기기 위한 제도)
-
--그런데 중세교회는 교회의 제도를 가지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거나,이단을 대처하거나,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기 보다는---교회의 제도권을 이용하여 오히려 세상을 정치적으로 지배거나,교회안의 인간(교황)의 권위만을 높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안에 있는 어떤 인간의 결정보다도,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큰 권위임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이와같은 15세기의 종교개혁이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특히 교회론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재세례파)
이외에도 초대교회는 많은 이단들의 위협을 받았다.(영지주의,가현론자,몬타누스) 이때에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감독,주교(속사도)등이 타나나 바른 성경적 교리를 옹호했다.
2.로마제국의 출현과 몰락-교회의 출현과 몰락
.교회는 네로황제이래로 많은 박해가 있었다.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조롱거리가 되었다.그들은 야생동물의 가죽을 입고 있었고,개에게 찢겨 죽었고 십자가에 메달리거나 화형을 당했다.어둠이 깔리면 그들은 횃불처럼 불타 올랐다”
.이후에도 도미시안,트라이안,플니니 등 많은 로마의 황제들에게 박해를 당했다.이일은 주후 305년까지 계속되었다.
.312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전환기를 맞이했다.결국 395년에 기독교는 로마의 유일한 공식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흠있는 축복이었다.핍박의 열기는 가셨으나 그와 함께 복음의 불길도 꺼져갔다.로마의 공인된 종교적 평안과 더불어 교회의 타락은 시작되었다.이때 교회는 동,서로 분리 되었으며,주교와 사제직의 위계적구조가 심화되었고,성직자와 평신도가의 분열은 깊어졌으며 형식적 예배가 완연했으며,성령의 현존과 능력은 사려져갔다.
아울러 로마제국도 무너져갔다.
3.수도원식 교회갱신과 반성적 운동
.이러한 암울한 교회의 상황들에 대한 돌파구로서 수도원운동이 일어났다.이들은 이러한 현실의 상황에 대해 도피적인 공동생활을 추구했다.
(베네딕트,클루니,프란시스칸,도미니칸)
.교회의 활동을 거의 질식시키는 성직자 지배시절에 대항하여 12세기에 반성직 감정의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왈도파,알미파)
.중세의 제도적 교회의 세속적 권력과 부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많은 영적인 사람들은 수도원주의와 신비주의로 영성을 추구해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은 단명햇다.14,15세기에 영적인 삶과 선교적관심은 사라지고 결실없는 스콜라주의와 끝없는 내적인 갈등(권위문제) 만 있었다.
4,종교개혁
.종교개혁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로마교가 성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그들은 성경을 그들 자신의 중세교회를 위해 이용해 먹었다.
제7과: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원하셨는가?
(지은이,로핑크/요약정리자,김광석)
머리말:교회는 예수님에 의하여 모여지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거룩하여진 하나님의 자녀들이(칭의의 거룩),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으로서 삶(이러한 삶의 모범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이다)을 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교회에 대한 정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모았으며, 참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정작 지금이야 말로 오늘날의 교회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겠느냐고 물어야 할 때이다.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약성경을 보아야 한다.
실마리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나라가 온다는 것은 그것이 개인에게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영혼안에 머물고 그것을 영혼이 깨닫는 것이다(그리스도교의 본질). 하르낙에 의하면 하나님나라는 공동체에 오는 것이 아니라,개인에게 오는 것이다. 최근 신문보도에 의하면 요즈음 베를린에서는 교회쪽에서 순회봉사하는 사령부가 설치되었다는 소식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무선전신시설을 갗춘 자동차가 늘 대기하고 있다가, 목회자나 의사나 심리학자가 밤낮 가리지 않고 곧장 불리어 갈 수 있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고도로 현대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극도로 문제스런 지경에 이러렀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교회는 이제 각자를 한 사람씩 돌보는 원호기관이 되었고, 그 개인의 요구를 상대로 “상품을 방매하는” 공급시설이 되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묻자? 예수님이 과연 이러하셨는가?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과 한 영혼, 그리고 그 개인의 영혼과 영혼의 하나님에만 관심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어떠하셨는가? 예수님은 과연 무슨 단체를 원하셨던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왕국)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과 교회공동체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 우리는 자칫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가 무시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잘못되었다.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공동체를 논한다는 것은 자칫 외식주의에 기울어지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와 또 개인영혼의 치유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칫 그 자체로 머물거나, 아니면 그것이 이 시대의 개인주의적인 조류에 편승하여 나타난 모습이 아니냐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와 개인의 치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철저히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있다. 즉 개인성결은 성도를 고립된 신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성결된 모습로 하나님의 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 공동체 속에 속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치유가 강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공동체적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시대의 조류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산업화되고 기술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그 결과 사람들은 개인주의화되고 군중속에서 소외를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모든 현대인들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들을 가지고 있다. 요즈음 대학가에서 “道”나 “氣”에 대한 것들이 유행이 되고 있는 것은 현대인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온을 느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고 있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개인영혼에 대한 교회에서의 지극한 관심이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시대 조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나온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인 성결을 유지해 나가고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게를 먼저 정립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이 혹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요소에 편승한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행태들 가운데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한다. 예를들어 우리는 성령의 감화,감동하시는 역사에 대해서 종종 말을 한다. 그런데 사도신경과 성경에 보면 성령의 교통케 하심을 주로 고백하고 있다. 성령의 감화,감동이라고 했을 때는 주로 개인적인 체험위주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는 성령의 성도간에 교통케하시는 역사를 고백하고 있다. 이 외에도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개체교회 중심주의적인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문/1. 로핑크에 의한 교회에 대한 정의를 말해보시오?그리고 이것을 설명해 보시오?
문/2. 왜 정작 이때야 말로 교회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되겠느냐고 물어야 할때인가?(새술은 새부대에,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참조)
문/3.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와 공동체적 신앙과의 관계가 무엇인가?지금 우리에게 있는 개인주의적인 신앙행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왜 우리는 공동체적 신앙에 대해서 강조해야 하는가?
1. 예수님과 이스라엘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시면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막3:13-19,6:7-13)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구약의 12지파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겔37과 39장23-29, 40-49장을 보면 종말의 구원의 때에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다시 일어 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부흥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12제자들을 통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바로 그 새로운 이스라엘이 12제자들로 말미암아 시작하는 교회인 것이다.(12제자들의 공동체는 신약교회의 시작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교회)을 만들기를 원하셨다는 것은 기존의 이스라엘과는 대조된 이스라엘(교회)을 세우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분명한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12제자들로 통하여 세우고자 했던 새로운 이스라엘(교회)의 배경이 되었던 기존의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이 었으며, 그들의 사회(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첫째,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러한 율법적 규칙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사회(공동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그들은 혈통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그들에게는 많은 차등적 사회계층들이있었다. 농촌지역에는 부재대지주,소지주,기술공,노동자 그리고 노예들이 있었다. 도시에는 세 계층이 있었다. 먼저 최상류층은 네 가문의 귀족제사장들과(로마의 총독이 대제사장을 임명했다) 일반귀족층이 있었다. 다음은 중류이하의 계층으로 수공업 기술자들, 상인들, 하급관리들, 평신자, 사제, 랍비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최하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때문에도 사회적으로 완전히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율법을 배울 기회도 없거니와 지키기도 어려운 처지에서 살았고, 또한 율법의 수많은 금기와 속박을 한가지만 어겨도 죄인 취급을 당했다. 병으로 신음하는 이들도 마귀들린 사람으로 여겨졌고, 정신병자들과 나병환자들은 불결하게 생각되었다. 이들은 당시의 사회,문화생활에서 제외된 변두리 인생을 살았다.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에게 세례요한이 나타났다(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또한 예수님과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자 하였던 세례요한은 이러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다(즉 민족적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예수님이 등장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등장한 이유는 이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과는 다른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12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이다.
문1/.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 12제자들의 공동체와 신약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문2/.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백성과 대조되는 하나님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다. 이러한 이스라엘백성의 모습과
대조가 되어야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혹 우리 교회의 모습가운데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모습이 없는지 서로 말해보시오.
2. 예수와 제자단
그러면 이제 예수님은 모여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리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1) 제자단
예수님은 모여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교회의 구성원들)을 제자라는 이름으로 부르셨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중에서 제자도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이 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란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왕이시지만 섬김과 희생의 삶이었다. 십자가는 단순히 그의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의 구성원인 그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제자들에게 주신 모든 말씀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말씀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두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류는 자기가 살던 곳에서, 종래의 직업을 가지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경우이다<아리마대 요셉, 나사로/막15:43,요11:11> 또 한 부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제자라고 부르는 종래의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던 12제자와 같은 경우이다. 즉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든지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의 삶의 모범은 낮아지신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문/당신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주님을 따라 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2) 산상설교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그의 제자의 공동체가 지켜야 될 규례들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개인적인 윤리가 아닌 철저히 공동체적인 윤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A. 주기도문(마6:9-15,요일5:13-17);
B. 황금율(마7:7-12);
C. 예배를 드리기 전에(마5:23-26);
문/1. 산상설교에 나타난 말씀들이 왜 개인적인 윤리가 아닌 공동체적인 윤리인지에 대해서 위의 말씀들을 설명하면서 말해 보시오?
문/2. 당신은 용서에 대해서,기도에 대해서,예배에 대해서 과연 주님의 위와같은 가르침을 따랐는지 솔직히 말해보시오? (적용;오늘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해결하지
못하고,용서하지 못한 관계들을 구체적으로 해결하고 예배를 드리시오)
(3) 대조사회로서의 공동체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사회(공동체)와는 대조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원하셨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같이 유대사회와는 다른 공동체이다. 그들은 유대종교를 통한 세상과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참 이스라엘의 공동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사회와 또는 세상과는 완전히 대조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것이냐?
A. 용서가 있는 공동체(요13장,폭력의 단념)
폭력을 단념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이 가장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대목은 마5:39-42,눅6:29이다. 예수님은 폭력사용을 금하고 있으며, 자기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보복행위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원수에 대해서 보복하려는 마음이 생기나 우리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보복하지 않는데 있지 않고, 상대방의 강박에 대해서 넘쳐나는 선행으로 응수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의도는 그를 우리의 형제로 얻기 휘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민족들을, 국가들을, 사회일반을 상대로 한 말씀이 아니다.(이렇게 하면 무정부주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공동체가 세상속에 대조사회가 되기 위해 주신 실천윤리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권세들의 폭력구조가 아니라, 화해와 우애가 지배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함이다.
문/1. 요13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서로의 발을 씻겨주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문/2. 교회가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은 유대공동체와 비교할 때 어떻게 대조가 되고 있나?
B. 오직 하나님만이 아버지가 되시는 공동체 (아버지들의 끝)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을 약속한다. 형제들도, 자매들도, 어머니들도, 자녀들도 약속한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없다(막10:29-30)이 말씀에서 아버지들이 의식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새가정인 교회안에서는 아버지들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배경으로 아버지들 이란 지배의 상징이었다 (아버지들이란 아버지의 남자형제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또는 참 이스라엘(교회)는 오직 하나이신 아버지만 모셔야 한다.(마23:8-9) 이 말씀은 제자들이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권능과 주권이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사회구조는 철저히 지배구조이다 (막10:42-45). 그러나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러한 지배관계가 없어야 한다(원탁형의 직분론).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의 공동체는 철저히 이 세상에서 “대조사회”를 요청한다.
문/1. 교회가 아버지들의 끝의 공동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문/2. 원탁형의 직분론을 설명하시오.
C.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공동체
지금의 교회는 세상속에서 오히려 적응을 하고 있다. 교회가 거의 자기 소임을 포기할 지경으로 사회속으로 잠겨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사회를 변혁시키는 올바른 길인가? 그러나 이것은 복음서기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마5:13-16의 말씀이다. 여기서 너희(교회를 가리킨다)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고 있다.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금이란 음식물과 결합하는 소금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금이란 당시에 흔히 사해에서 얻는 소금인데, 이것은 집안에 갈무리해 놓고 쓰는 썩지 않는 소금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안에서 이미 그 존재만으로도 여러 세상을 성화할 수 있다(벧전2:9).
그런데 여기서 묘사되는 교회가 그렇다고 해서 자기네들끼리 엘리트집단을 이루거나 세상에 대하여 스스로 차단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며 더 넓게 비추이는 도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람들에게 수긍될 수 있는 사회질서의 삶을 사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그 자신이 세상이 되어서는 안되며, 세상안에서 번영해서는 안되며,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4) 서로가 함께 실천하는 공동체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되는 가르침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개인윤리로 실천하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모두가 서로 돕고,서로의 짐들을 져줌으로서 가능한 것이다.(갈6:2)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참으로 공동체인 거기,그들이 함께 모여 있고 모두가 서로 돕는 거기서 “그리스도의 법”이 수행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앞장서서 존경하라, 서로 합심하라, 서로 받아들이라, 서로 충고하라,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라, 서로 기다리라, 서로 위하여 걱정하라,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라,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 서로 위로하라, 서로 건설하라,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서로 선을 행하라,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라,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서로 순종하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죄를 고백하라,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 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하라, 서로 대접하라 - 등(성구생략,책참조,pp.163-174)
문/. 위에서 말한 서로가 함께 실천해야 할 것들중에서 당신이 교회생활에서 참 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결론: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가?
교회를 하나님의 대조사회가 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달성하는 성덕이 아니요, 투쟁적 노력과 공적으로 말미암지 않고, 무법자를 의인화시키고 실패자를 용납하시며, 범죄자를 화해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이것은 공짜로 주어진 구원과 성령의 역사속에서 대조사회라 말하는 그것이 꽃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것은 죄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아니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용서받은 잘못이 있기에 한 없는 용서가 자라나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갈라진 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온갖 골짜기를 뛰어 넘으며 화해의 길을 찾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분쟁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분쟁이 여느 사회와는 달리 해결되어지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끝으로 십자가와 고난이라고는 또다시 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죽되, 또한 그분과 함께 일으켜 지기에 매일 매일 부활절을 경축하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제8과:교회와 하나님왕국
저자:피터 쿠즈믹(명종남 역/새순 출판사)
서론:교회가 무엇이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나라를 이해해야한다.교회란 단독적인 개념이 아니다.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선포의 결과로 말미암아 세워진 기관이다.그러므로 교회를 바로 이해 하기위해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한다.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곳이냐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과 하나님나라와의 관계를 바로 다룬 쿠즈믹의[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을 요약하여 공부하고자한다.
머리말-하나님의 왕국과 예수그리스도의 교회
(역자가 통칭,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한 이유는,우리말 문맥상 왕국이 나라란 말보다 더 통치개념이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두개념은 하나님의 구속목적을 이해하는데 중심적인것이다.
-교회가 왕국과 동일시할수 없는데,이유는 왕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교회보다
더 크고 포괄적인 내용을 갖고 있기때문이다.그러나 이 두개념은 서로 밀
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마16:16~19)
-하나님의 왕국의 교회의 출발점이자,그 목적지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성과 미래성의 두가지면이 있다.즉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실현된 하나님의 왕국은 아직 완전한 완성을 보자 못하고 있으며,그것의 완전한 실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이와같이 하나님의 왕국은 양면성이 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통치도 역시 아미 실현이 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왕국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오늘을 사는 신약시대의 하나님백성에개 대단히 중요한 요점이 된다.즉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이해하므로써,그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왔다는 믿음과 장차 그 왕국에 들어갈것이라는 소망을 누릴줄안다. 동시에 현제에 통치하시는 왕되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되며, 장차 그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실현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라게 된다
*이처럼 왕국의 양면성은 신자의 현재의 신앙생활과 절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므로 이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었나?
1.1~2세기-하나님의 왕국은 온전히 종말적(미래적)인것이다.
로마황제의 권력하에,박해를 받으며 세상을 등진체 자신들의 핍박과 억울함을 보상해줄 종말적 왕국의 도래를 고대했다.
2.콘스탄틴 대제의 즉위-하나님의 왕국은 황제의 왕권과 사제직에 의해 다스려지는 그리스도의 몸으로,교회는 국가 교회로 예속되고,제국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신실한 충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3.중세교회-하나님의 왕국과 유형의 제도적교회제도를 동일시했다.그들은 하나님왕국의 왕좌(thorn)와 유형의 제도적교회의 제단(alter)을 동일시 했다.(예,성례~천상을 실체를 경험하는 것,사제~왕국의 중재자,교황~왕국의 지상적 통치자)
4.종교개혁자들-하나님의 왕국을 무형적교회(불가시적교회)와 동일시 했다.
래드는 종교개혁자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그들에게 있어서 왕국개념은 구속받은 자들의 심령 속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였다.따라서 그것은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앙에 관한 개념이요,주로 현존하는 실재였다"
본론
목차-------------------------+
| 1.과거의 그리스도의 사건 |
| a.유대인의 소망과 기대 |
| b.왕국과 교회에 관한 예수님의 진술 |
| c.왕의 죽으심과 다시 사신주 |
| d.오순절과 성령의 공동체 |
|2.현재의 그리스도의 통치 |
| a.교회는 왕국이 아니다. |
| b.왕(국)의 백성과 그리스도의 주되심 |
| c.교회는 왕(국)의 종이다. |
| d.성령의 능력안에서 |
|3.미래의 그리스도의 강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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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과거의 그리스도의 사건:교회는 왕국의 결과이다.
a.유대인의 기대와 소망.
-유대인들은 장차 도래하실 구원자에 대한 구약의 약속을 굳게 소망을두며,오로지 그약속에 메달려 살아가고 있었다.그리하여 그들은 악의 세력을 쳐부수고,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 대해서 정의를 회복시켜줄,묵시적 역전을 일으킬 메시야를 고대했었다.
(정치적인 메사야와 하나님나라를 고대했었다.즉 다윗시대처럼,모든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쳐부수고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이땅이 정치적으로 통일되는 하나님나라를 고대했었다(삼하7)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기대는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메시야로 자처하면서,고난받는종의 모습을 보이자 무산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지고 있던 메세아관과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보존하기위 해서 그들이 보기에,그들의 고대하던 하나님나라관과 대치된 하나님나라를 주장 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이것은지금 누구의오류인가?)
b.왕국과 교회에 관한 예수의 진술
-예수의 공적사역은?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왕국도래의 선포와 그 왕국에로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한다(왕국이라는 용어는 공관복음에서 121회정도 나온다.엄밀히 말하면,헬라어에서?바실레이야"와 아람어?말쿠트"는?왕국"으로 번역해는 안되고,오히려?통치"?지배"?주권"?왕권"과 같은 좀 더 정확한 의미로 번역되어 져야한다.왜냐하면,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장소의 개념보다,주로 그분의 통치 그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가 이 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할때 언제나 하나님의 일반적인 통치의 개념을 염두해 두되,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적 공동체인 그 분자신의 교회를 지배하시고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할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왕국사상이다.
-하나님의 왕국의 초점은 그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왕에게 모아진다.
따라서 왕국에 관한 연구는 왕국의 왕이 누구시며,어떠한 분이냐로 관심이 집중된다.복음서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의 심장부요,중심적인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만을 증거함으로써 왕되신 주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낸다
그분과 더불어,그분안에서 새세상은 도래되었으며,생명과 용서가 사람들에게 자유로히 제공되었다.이처럼 새로운 축복의 영역으로 들어가기위한 유일한 조건은 회개(마음과 삶의 스타일의 변개),및 왕이신 그분을믿는 믿음(인격적신뢰)으로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구속행위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안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그 말은 우리가 구원을 받아,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둘것은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개념보다,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이 더 앞선다는 것이다.즉 하나님나라를 위한 구원이다-구원파의 문제?)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왕국과 영원한 생명이 상호교제적이며,동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요3:3,5/3:36)
(즉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나라안에 들어왔다는 말은,우리가 또한 그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국전파를 자신의 사명으로 이해했다.그래서 그가 전한 복음도 하나님나라의 복음이었다.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님안에서 두가지 방법으로 드러난다.즉 가르치며 전파되므로써 드러나는 왕국과 이적(병을 고치시는 일과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을 베푸시므로 드러나는 왕국이 바로 그것이다(눅11:20,마12:28)
-마16:18에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던 바 복음서에서는?교회"라는 말이 단 두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마18:17)
(그렇다고해서 예수님이 교회에 관해서 무관심한것이 아니다.비록 드러난 용어상에는 교회라는 말이 별로 없지만,그의 가르침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이 교회에 대한 이해의 모든 재료들을 제공한다.예를들어 복음서에서 주요,선생이신 예수님이 나온다.그것은 나중에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이다.?제자도"에 대한 개념도 그것이 결국 장차의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예비적 교훈으로 볼 수 있다)
-?내가 ~~내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예수님의 진술은 곧이러 말씀하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는 그분의 약속과 도대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어떤이들은 교회와 왕국의 완전한 일치를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이들은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셨던 한 기구의 두 국면을 의미한다고 했다(전자는 천주교회의 견해)
-위의 말은 교회가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중개자로서,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한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다.
(즉 천국열쇠는 복음증거를 말한다.그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는 것은 베드로가 교회의 대표<제자들의 대표>로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복음증거의 사명을 준것을 의미한다<제자들의대표인 베드로에게 한말은 교회에게 한 말과 같아>이로서 알 수 있는것은 교회는 제도적교회 그 자체가 존재목적이 아니라,하나님나라를 위한 복음증거가 그 존재목적인것을 알 수 있다)
c.왕의 죽으심과 다시 사신주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유대인의 기대와 소망과는 판이하게 다른것이었다.예수님은 다윗왕좌가 아닌 수욕스런 십자가에 메달려 죽으심으로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참히 깨어졌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실때?내 나라는 이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구속행위의 중심요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요,그것은 그분 자신의 승리적부활로 그 절정을 이룬다.
-하나님의 왕국의 왕이신 그분은 동시에 고난의 종이시다.하지만 고난의 종으로서 스스로 생명을 버리신 왕께서는 그 사흘 후 첫새벽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시어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와 오는 생명의 보증이 되시므로써 우리의 主가 되셨다.
d.오순절과 성령공동체
-다시사신 그분께서 아직 이루셔야 할 또 다른 사건 하나를 남겨 두고 계셨으니, 그것은 곧?말세"에 부어주시기로 약속한 성령강림(요엘2:28 행2:17)이다.이것은?오순절사건"또는?오순절 성령세례"이다.
-요한의 오순절사건(요20:22)을 어떤식으로 해석하든지 간에,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및 승천사건과 오순절날 성령강림 사이에 신학적 연속성을 의식하고 그러한 사건을 강조했던 것으로 봐야한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오늘날 오순절 또는 은사적 신학은 오순절 성령세례사건을 예수님의 구속사역과는 별개의 부가적 사건으로 파악,결국 성령세례를 구원에 부가되는 은사로 주장하기 때문이다<즉 방언을 성령세례의 결정적인 증거로 보는 것이다.그러나 성령셰례의 결과로방언이 나타날 수 도 있으나,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오순절사건은 은사의 유무를 가지고 판별 할 것이 아니라,그리스도의 임재의 충만이 성령세례의 결정적 증거이다>
그렇지만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증언은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승천을 오순절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요16:7,8/16:13,14/15:26/14:16,18>즉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후 떠나가셔야 보혜사(성령)가 오시게 되어,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에게 권능을 주며 모든것을 가르쳐 주고,생각나게 하며,진리가운데로 이끌고,증인이 되게 해주신다고 약속셨다.그리고 성령이 임함으로 예수님께서 그 성령으로 더불어 제 자들과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셨다(요14:16,18)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구속 사역의 부가적인 사건이 아니다. 구속사역 그자체요,기초요 절정이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교회를 세우신 날이요,주님께서 왕권을 가지시고 본격적으로 온 땅을 다스리기 시작하신 날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은 교회의 형태를 취해 나타나게 되었고, 그 왕국의 왕되신 그리스도께서 휠씬 더 능력있는 모습으로 교회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날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하여 성령은 예수를 대신하여?다른 보혜사"가 계시며(요14:6),그분(다른 보혜사,성령)께서 우리곁에 계신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동체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러 계시며 활동하고 계신다는 점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오순절날 신적인 능력이 강력하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분명한 현상으로 나타나 각사람위에 머물렀으며,그러자?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2:4>"신적인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예수님의약속은 성취되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오는 세상의 능력(하나님의 임재와 왕국의권능)을 느끼고 체험하였다.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담대히 전파 할 수 있었다.
-오순절사건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왕국은 마침내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안에서,또는 교회를 통하여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령의 능력은 그들로 하여금 선교를 지향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그 동기를 유발시켰다(행1:8) 교회의 그러한 선교는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의 사도들의 지휘에 의해 미리 짜여진 전략에 따라 면밀히 추진된 것이아니었다. 그것은 성령에 충만한 공동체에서,성령이 내몰고,성령이 다스리시며 지시하시므로 일어난,그야말로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제2장:현재의 그리스도의 통치:교회는 왕국에 참예한다.
a.교회는 왕국이 아님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인하여 이땅 위에 존재하고 있으며,또한 이 두 개념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으므로 우리가 교회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약의 근본개념인 하나님의 왕국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와 관련하여 교회를 바라볼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 두개념이 절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교회는 하나님왕국이 아니다.
-교회는 단지 역사선상에서 하나님왕국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일 뿐이며,가장 신뢰할만한 왕국의 지방자치기관과 같은 정도이다.
-초대교회는 그 스스로를 전파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왕국에 관한 복음,즉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만을 전하였다.
-교회역사가운데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과 동일시하려 할때는 언제든지,또 그러한 시도를 시행하는 곳의 교회는 어디서나,땅의 권력을 쟁취하고,그것을 유지하며,남용하려는 유혹 속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이러한 역사는 콘스탄틴대제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며,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교회는 교회의 존재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다만 교회가 무엇을 향해 움직이고 있느냐에 비로소 그 존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b.왕(국)의 백성과 그리스도의 주되심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하나님의 백성(헬라70인역에는 이것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했다)"이라 하였으며,신약시대에는?하나님의 교회(에클레시아)"로 불리웠다.즉 동일한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강조점은?하나님의"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고,그 주권에 복종할때만 정당하게?그리스도의 교회"라 불리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것,즉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유일한길은 자신의 삶을 전폭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인정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자신과 자신의 삶의 관심을 기꺼이 부정하며 부인하는 자에게만 열려있다.
*| (이 말은 자기부정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말은 천국의 백성된 사람은,그 왕이신 주님께서 보이신 모범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될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백성은 왕을 따라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서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질때,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수 있고,우리에게 임하여져 있는 천국의 보화를 소유할 수 있다.마13:44)
*오늘의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핍박이 하나님왕국에 속한것에 대한 성경적 표징임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하셨다.그러므로 그의 제자된 오늘의 교회가 세상에서 고난을 감수해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마10:16~42,특히 24~25)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에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왜냐하면 왕국의 영은 사랑이요,믿음의 교제(모임)을 이끌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께 속한다는 뜻은 그리스도 그분에 의해서 세워지고 다스려지는 그분의 교회의 한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c.교회는 왕의 종이다.
-왕이신 예수께서는 성육신의 방법을 빌어?종의 형체를 취하시므로,스스 낮추셨다.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그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친히 종의 도를 가르치기 위하여 그들의 발을 씻기는 모본을 보이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방인의 왕"들 처럼 행하지 말것을 경고 하셨으며 오히려 그들중 리더를 향하여?내가 주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느니,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종의 자세가 없는 교회,기꺼이 그분의 뜻을 따를 마음의 준비가 없는 교회,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왕되신 그분을 따라가는 종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 스스로를 세상의 가장 높은 권위로서 세우고자 할때,바로 그 순간 예수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길에서 돌이켜 배교의 길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항상 개혁된 교회를 추구해 가고 있는가?
-혹 우리 교회가 조직속에서 화석모양 굳어져 감으로서 생동력을 상실한 교회로서,종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방법에 있어서 구태의연하게 처신하므로서,그야말로 지리한 모습의 교회로서 교리문제에 있어서 지나친 독선과 아집에 빠지므로 상처투성이의 교회로써 문제시 되고 있지 않은가?
-교회와 그사역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정적인 까닭에 소생과 부흥의 영으로 새롭게 펼쳐나가는 역동적인 하나님왕국의 통치를 오히려 거역하고 있지 않은가?
-여타의 교회들도 마찬가지로 우리 복음주의 교회들도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주님의 손길과 그분의 왕권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하므로 자기만족과 슬픈 이기심에 빠져서 실상은 비참하고,가난하고,눈멀고,벌거벗은 슬픈사실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래도?~말하기를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것이 없다(게3:17)라고 자랑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있지 않은가?
-종교개혁교회의 비극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매일매일의 새로운 교제를통하여 끊임없이 변혁되어 가게끔 강력한 동인을 부여하는 격정적인 진리를 자신들의 공로와 자랑꺼리로 바꾸어 버렸지않은가? 처음에 그토록 역동적인 회개를
힘셨던 교회들이 점차 남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듯한 형식적인 회개운동을 벌이
는 교회로 되어갔다.
d.성령의 능력안에서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하나님의 왕국은 매우 역동적인 개념이다.-예수님께서는 왕국을 선포하셨을뿐 아니라,친히 베푸신 이적을 통해서 그 왕국의 능력과 왕의 자비로우심을 보이셨다.그분께서 베푸신 이적은 각종 병과 마귀 혹은 죽음까지라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그분의 절대주권을 드러내셨다. 자신의 사도들도 파송하실때에도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신것과 아울러,병든자를 고치며 마귀를 내쫓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셨다(마10:1,7~8)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병자를 고치는 일을 가각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그들은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사를 단지 새로운세상의 도래했다는 표징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즉 그러한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왕국의 권능이 현재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현재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그러한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을 드러내야 하는데,그것으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축복들로 연결을 시키고,또한 사람을 높이는데 문제가 있다)
-교회에 관한 교리 역시 성령론의 기초위에 세워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탁월한 설교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아직 그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는 무능하다.오순절운동에 대한 나 개인의 경험은,비록 그곳에서의 설교가 종종 그 내용이나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빈약한 것이 유감이지만 그래도 성령의 임재는?그것을 억제하는 설교자에 의해서 전달되는 수십편의 설교보다도 휠씬더 암시적이며,영감적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말씀만 이면 당신은 바싹마른 자와 같을 것이요,
성령만이면 당신은 부풀어 터진자와 같을 것이로되,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할때,비로소 당신은
올바르게 성장할것입니다"
제3강:미래의 그리스도의 강림:교회는 왕국을 기다리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첫번째 강림안에서 그 시작을 회고하고,그분의 두번째 강림(재림)에서의 그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한편 교회는?이미"의 축복을 누리면서도,?아직"예수님의 왕적인 통치가 전적으로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이러한 인식은 교회로 하여금 겸손하고,소망이 넘치게 하며,감사하고 기다리는 삶을 살게한다.교회는 왕국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역사안에 도래했음을 믿고 있으며 역사의 종말에서의 그것의 전적인 완성을 기다리면서도 한편,역사의 흐름안에서의 그 왕국의 큰 실현을 위해충성되이 일하며,또한 왕국을 고대하는 중에?나라이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눈 아직 본향에 있지 않고,여전히 그 영원한 도성을 향한 순례의 길에 있다.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사회에서 그 자체는 너무 안락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또한 어떤 세상적인 왕국과 그자체를 동일시 하지 않기 위해서 늘 주의해야한다.오히려 교회는 그분의 날이 가까와 지고 있다는 인식속에서 앞을 바라다 보아야만한다.
(이것은 교회나 우리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교회나 개인이 신앙생활의 승리감에 너무 도취되어서도 않되며,또한 좌절감으로 너무 의기 소침할 필요가 없다.우리의 궁극적인 승리와 완성은 그 나라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맺는말:하나님의 왕국은 교회를 도전하고 있다.
첫째:우리는 왕국이 임했다고 고백한다
둘째:우리는 왕국이 충만한중에 도래할 것을 기대한다.
세째:우리는 왕국이 임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위하여!
제9과: 교회와 교회병행단체로서의 SFC
1.교회병행단체의 필요성
파라쳐치운동(교회병행단체)이라는 말을 하면 교회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일부 선교단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교회는 파라쳐치(교회병행단체)이기 때문에 무언가 기존의 교회에 대해서 대립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고, 선교단체에서는 또 그런 오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학생신앙운동을 논함에 있어서 파라쳐치운동(교회병행단체)이라는 개념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파라쳐치, 혹은 파라쳐치운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연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방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지상의 교회는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완전한 모습을 띠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초대교회조차도 지상교회의 상대적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상교회의 절대적 모범이라고 말 할 수 없다.이것은 위에서 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아래에서 본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한 영광스런 구속의 사역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린도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이며 영광스런 교회이다. 이것은 교회를 위에서 본 입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았을 때 거룩하다고 칭해진 교회이지만 실제상에 있어서는 교회는 역사상 항상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시간세계속에서 항상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교회의 불완전한 모습을 고착화시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시대마다 개혁되어야 하며 개혁되어지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라 할 수 없다. 이러한 교회의 연약성의 입장에서 파라쳐치, 혹은 파라쳐치운동의 존재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즉 파라쳐치운동이란 교회의 대립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대해서 상호보완적 개념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것이 파라쳐치운동으로서 학생신앙운동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교회론적 원리이자, 지상교회를 보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문/1. 파라쳐치(교회병행단체)가 왜 필요한가?
문/2. 한국교회에 있어서 교회병행단체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2. 개혁주의적 선교단체로서의 학생신앙운동
그런데 여기서 좀더 나아가 왜 많은 파라쳐치운동이 있는데 우리가 학생신앙운동을 고집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강령에 나타난 대로 한국에서 유일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선교단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가 순교의 피를 흘려가며 우리에게 남겨준 귀중한 신앙의 유산이다.
선교단체를 신학적사상을 중심으로 나누면 대체적으로 4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방신학, 민중신학등 현대신학에 근거한 선교단체이다. 또 하나는 요즈음 학원가에 위협이 되고 있는 이단적사상에 근거한 선교단체이다. 세번째는 선교단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순한 복음주의에 근거한 선교단체이다. 이들은 복음전도와 제자삼기, 혹은 세계선교에 주력하는 단체이다. 학생신앙운동도 이 부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본다.(물론 이러한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이것들을 결코 간과해서도 되지 않는다고 본다) 학생신앙운동은 철저히 개혁주의신학에 근거한 선교단체이다. 개혁주의란 단순히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한 양육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서만 머물지 않고, 이 세상과 교회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이 땅 가운데 펼쳐나가려는 신학사상이다. 이것은 특별히 성경의 중심사상인 하나님나라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즉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교회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이 세상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받고 있고도 그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바벨탑과 같은 인간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명 하나님나라의 은닉성이라 한다. 즉 하나님의나라(통치)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나 그것이 중생치 않는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통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타낼 수 있는 사람들을 구속경륜을 따라 부르셔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또한 구속경륜을 따라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 땅가운데 세우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여 이 땅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드러내게 하시려는 것이다. 현대신학의 잘못은 하나님나라의 은닉성을 간과한 것이다.즉 교회가 아닌 세상의 단체(중생치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려는 것이다.
단순한 복음주의의 잘못은 하나님나라의 보편성과 교회중심성을 간과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단순히 교회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이 모든 만물가운데도 미친다는 것이다.또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교회라는 것이다.그래서 우리의 생활원리는 하나님중심,성경중심,그리고 교회중심이 되는 것이다.여기서 교회중심이라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만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문/.SFC가 다른 선교단체와는 다른 독특성은 무엇인가?
3.개체 교회봉사(개혁)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학생신앙운동원으로서 교회봉사(개혁)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이 점을 논함에 우리는 먼저 이러한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한다. 그것은 한국의 어느 선교단체도 이러한 것을 사명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때문이다.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른 선교단체들은 처음부터 교회봉사의 사명을 포기하고 자기들의 선교단체의 양육과 훈련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우리는 이 두가지를 모두 감당해야하기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선교단체의 추세가 이제 선교단체가 단순히 학원에서의 선교단체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교회를 돕는 기관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 두가지 사명을 놓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살려 다른 선교단체에 대해 이념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선교단체의 존재목적은 궁극적으로 교회세움에 있다는 것)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개체 교회봉사(개혁)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할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칼빈의 견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칼빈시대에는 두개의 극단적인 교회가 있었다.하나는 로마교회이고,또 하나는 재세례파교회였다. 로마교는 말씀과 성레전에 있어서 분명 참된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칼빈은 이러한 로마교회를 루터보다 더 철저히 부정을 하고 개혁을 하고자 했다. 그런데 로마교회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칼빈과 거의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똑같은 것은 아니다),교회론에 있어서 완전주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재세레파에 대해서도 칼빈은 분명히 경계를 하고 있다(칼빈 기강 4권1장13절) 즉 재세례파에서는 교회의 연약성들에 대해서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을때,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서 교회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뛰쳐나가서 자기들의 교회만 참 교회라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은 좀더 부드러운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칼빈은 로마교회와 같은 교회(말씀과 성례전과 바른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 교회)에 대해서 사탄의 무리라고 하면서 차별성과 개혁의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재 세레파와는 달리 지상의 교회가 연약할 수 밖에 없음도 인정하고 있다.그래서 칼빈은 이러한 지상교회의 연약함에 대해서 “이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교회를 떠나거나 부정할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연약한 교회에 대한 용서와 헌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기강4권1장17-22절)
즉 우리는 개체교회에 대해서 두가지의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하나는 말씀에 다른 개혁과 또 하나는 교회의 연약함에 대한 사랑과 헌신과 봉사이다.우리가 지금의 교회에 대해서 이 두자기의 균형잡힌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코 지상의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개체교회에 대해서 무턱댄 사랑만을 부르짖는 것도 교회를 더 완악하게 만들 것이다.그런데 또한 만일 우리가 우리의 교회에 대하여 대안없는 부정과 개혁만을 부르짖는다면 그것도 대책이 없는 것이다.또한 교회가 어렵다는 것때문에 교회를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면,이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 밖으로 내 몰아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이렇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교회의 연약함때문에 당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두신 고난)을 우리가 부인한다면,우리는 바울이 누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과 위로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지상교회를 재림때까지 보양하시고, 신부처럼 단장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가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개체교회에 대해서 지금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이며, 또한 무엇을 헌신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생각해봐야한다.
문/1.지금 우리가 학생신앙운동의 궁극적사명이 교회건설(지상교회를 온전케함)임에 동의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2.지금의 학생신앙운동원(간사)이 개체교회의 연약성에 대해 칼빈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재세레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당위성의 물음이 아니라,현상적인 물음)
4.21세기 한국교회와 학생신앙운동의 전망
(1) 교회연합운동과 학생신앙운동
21세기는 우리나라의 통일을바라보는 세기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통일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교회의 통일성, 혹은 연합성의 문제이다. 이제까지의 한국교회가 개교회주의로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개교회주의가 이 사회속에서 하나의 개체이기주의를 창출해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한국교회가 전체의 통일된 모습으로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개체교회간에도 성장지향적인 경쟁의식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결코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박도호 교수는 한국교회개혁의 1차적 요건은 교회의 통일성의 회복이라고 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한국교회의 성경적교회론이 부족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교회가 그리스도안에서 우주적 연합을 이루었다는 것은 요17장뿐 아니라, 에베소서 등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바 이다. 심지어 에베소서에서는 성부하나님의 구속경륜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엡1:10). 그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려는 구속경륜을 따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엡2장), 성령께서는 이러한 성부와 성자의 사역을 우리에게 실재화시키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앞으로의 21세기의 한국교회는 교회연합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연합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SFC가 담당하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연합운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먼저 거부감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것이 WCC와 같은 에큐메니칼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아니다. 에큐메니칼운동은 교회의 신앙고백은 무시한 체 교회의 제도적 하나됨만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받아들 일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앙고백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운동이란 신앙고백 일치운동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가장 약한 것이 신앙고백이다. 즉 성경적 바른 진리에 대한 고백없이 단순한 종교적인 열정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는 여러 교파가 있지만 교파간의 실질적인 차이가 별로 없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의 내용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개체교회안에서의 실질적인 신앙행태는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되다가 한국교회가 무속종교화 되지않을까 염려가 된다. 교회는 베드로 가 고백한 주 예수에 대한 고백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대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한 일치된 신앙고백이 그 기초가 되어왔다.
이러한 차원에서 배움의 도상에 있는 학생들에게 바른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것이 학생신앙운동의 제일 중요한 사명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SFC강령이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가 있다. 그래서 동,하기 수련회로 모일 때마다 이러한 강령과 신앙고백을 기초로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강령에 나타난 신앙고백적 일치가 일어날 때 비로소 교회의 하나됨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좀더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은 개혁주의적 이념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다. 즉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모든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SFC가 바르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앞으로 SFC가 해야될 일은 개혁주의에 대한 이념적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와같이 교회연합운동은 신앙고백적 일치운동을 통해서 ,또한 개혁주의 정신을 심어줌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두번째로 교회연합운동은 SFC가 교회를 전문적으로 돕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본다.앞으로의 연합운동은 SFC를 통해서 사람을 모으는 것 뿐만 아니라, SFC가 교회를 통하여 교회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특히 SFC가 당장 교회를 도울 수 있는 사역이라면 교회대학부를 도우는 사역이다. 왜냐하면 SFC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대부분은 대학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학원에서 적용되었던 것을 이제는 교회에 제공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SFC의 전문화가 절실히 요청된다. 예를들어 교회가 성경공부에 대한 자료나 교제를 원하고 있다면 SFC는 그것을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을 만큼 자료나 역량이 있어야한다. 특히 개체교회로서는 감당 할 수 없는 전문적인 자료가 공급되어져야한다. 예를들어 신앙과 전공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 또한 구체적인 직업관과 세계관에 관한 전문적인 자료가 공급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의 소그룹이나 리더에 대한 훈련프로그램이 충분히 개발되어지고 제공되어야 한다.
만일 교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전문성을 SFC가 확보하지 않는다면 SFC는 파라쳐치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또한 무엇보다도 간사들의 전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각 분야별로 간사의 전문화를 살려 공동체적 팀웍이 이루어져야한다고 본다.
SFC가 이렇게 할때 SFC는 교회를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
문/.교회연합운동을 위한 SFC의 역할은 무엇인가?
(2) 대안적교회와 학생신앙운동
하워드 A.스나이더는 21세기교회의 전망에서 21세기의 교회는 제도적 전통주의에서 하나님나라의 신학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했다. 즉 이제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이 단순히 제도적 교회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펼쳐진 성경의 중요한 사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신학에 대한 옳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자유주의신학에서는 하나님나라의 세계적 보편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종교다원주의, 또는 세속화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되 중생치 못한 세상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현실참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필요성을 심어준다고 본다. 즉 중생치 못한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교회만이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나라를 드러낼 수 있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초월대립적관계이거나 아니면 동화적관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나라를 가시적인 형태로 보여줄 수 있는 변혁적관계, 또는 대안적관계가 되어야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 속에서는 직접 맛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통해서 맛 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우선적으로 세상의 공동체에 대한 대조사회로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즉 이제 교회가 세상의 제도들에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한 철저한 섬김의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문명과 비인격적문명으로 치닫는 이 세상의 공동체와 철저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교회는 대안적공동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노아언약의 규례를 따라 환경문제와 문화보존의 사역에도 동참해야 한다.
또한 화란 개혁주의교회처럼 교회가 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도 제안 할 수 있어야 된다고 본다. 특히 구원받은(출애굽한) 하나님백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따라 약자의 편에서 약자들을 돌아보는 일들도 교회가 구체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려는 것은 결코 이 세상이 영원하다든가, 아니면 이러한 세상봉사의 사역들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까지 이어진다는 낙관론은 결코 아니다. 단지 너희들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공동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모습으로 행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의 교회가 감당해야할 모습이라고 본다.
이러한 21세기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학생신앙운동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사실상 위와같은 이야기는 그동안 하나님의 주권을 이땅위에 라는 이름으로 학 생신앙운동이 꾸준히 제기해왔던 문제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이 단순히 구호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또는 교회가 이해할 수 있는 대안들을 학생신앙운동이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짦은 간사로서의 사역을 하면서 한계에 부딪치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원론은 알겠는데,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도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간사의 장기적사역과 전문화인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학생신앙운동본부와 교회가 전문적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재정적인 여건과 배려들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교회의 현실참여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해 보시오. 그것을 위해 SFC가 감당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결론 : 21세기의 한국교회와 학생신앙운동을 전망하면서 사 6 장에서 이사야가 바라본 광경을 우리도 바라볼수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온우주의 주인과 주권자이심과 우리의 교회의 주이시라는 사실이다. 21세기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 달려 있고 그것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자에게 열려있다는 것이다.
제1과: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
서론
엡1:12절을 읽어보시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무엇을 가리키 는가? (우리라고 표현이 된 부분= 교회)
이와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영광스럽다, 또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라고 느끼고 있는가?
문/.당신은 지금 당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 까?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각자가 자신이 느끼는 바를 말하시오?
(교사가 학생들의 교회의 생활들을 파악해보시오)
우리 가운데 교회에 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고, 찬송이 저절로 나온는 사 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위에 간혹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소리가 들린다. “신앙생 활을 하는 것은 좋은데, 교회생활은 싫고 부담스럽다”, “교회에 다니다가 오히 려 내 신앙을 버리겠다”, “교회는 희망이 없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 인의 신앙만을 지키는 것 뿐이다”. “교회에 가서 사람을 보지말고 하나님만 보 아라, 사람보면 시험든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다. 성경에서는 교회가 하나 님의 영광의 찬송이라고 하고 있는데, 왜 우리 가운데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생 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이러한 원인을 생각해 보고, 어 떻게 하면 교회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느낄 수 있는가를 공부해보겠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으로 영광스러운 단체인데,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큰 이유는 우리가 교회에 대한 바른 성경적입장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 자기나름대로의 경험과 생각에 의 해 교회는 이런 곳이며, 이런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교회에 대 한 자기나름대로의 생각들 때문에 우리가 교회의 영광스러움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첫 시간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교회관들 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겠다.
1. 교회는 단순한 건물 그 자체일 뿐이다.
우리가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교 회의 “건물”이다. 그래서 어떤 교회건물이 아주 화려하니까,“그 교회는 화 려하고 아름답다”라고 이야기하고, 또 어떤 교회건물은 아주 낡고 초라하니까 “우리 교회는 아주 낡고 초라하다”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교회의 건물이 아름 답고, 화려하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에 보이는 교회건물만을 보고 교회가 어떠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가 않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1. 구약성경 학개2:1-9을 읽어 보시오. 여기서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실망을 느끼고 있습니까?(학2:3)
문/2. 당시의 사람들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당시의 성전이 초라하니까 큰 실망을 느끼고 있다. 이에대해 선지자는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학2:5)
(학2:5,8,마18:20-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나도 그들과 함게 있느니라. 교회의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영광스러운 것은 단순한 교회의 건물이 화려하다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그 모임위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신다는 것이다)
*문/3.엡2:20-22을 찾아 보시오.이 말씀은 비유입니다.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시 오.
*문/4.여기서 교회의 터와 기초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건물들은 무엇을 가리 킵니까? 여기서 건물들이 함께 지어져서 무엇을 이룬다고 이야기합 니까? 이러한 교회에 관한 비류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 인가?
( 성전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하시는 곳이다. 이 성전은 많은 건물들이 서로 연결하여져서 하나의 성전을 이룬다. 이러한 성전을 비유로 하여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의 터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다. 이 말은 교회의 터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성경이 교회의 기초라는 말이다. 이러한 기초위에 건물들이 세워진다. 여기서 말하는 건물이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가 건물의 모퉁이 돌이라는 말 은 교회의 모든 사람들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의지해야 된다는 말이다.또한 이 건 물들이 함께 지어져간다는 것은 교회가 한 두사람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모두가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간다는 것이 다.이상을 통해서 교회란 단순한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 가운 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눈에 보이는 건물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두 번째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교회란 단순히 우리에게 필요한 성경적 지식만을 공급하는 학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목회자들은 학원강사처럼 급료를 받아 필요한 성경강의만 하면 그의 일을 다하는 것이고, 교인들은 설교자가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감상하 다가 설교에 대한 헌금(수강료?)만을 내고 돌아가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입시학원이지 교회가 아니다.
물론 교회에서 말씀증거와 성경공부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란 그 말씀 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배우는 곳에 불과한 곳이 아니라, 그 말씀을 생명의 양 식으로 삼아 살아가고, 또한 그 말씀을 가지고 성도간에 서로 교제를 나누는 곳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우리의 가장 효과적인 교제의 수단인 것이다. 즉 교회는 말씀과 성령안에서의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이다.(교회란 단순히 가르 치는 敎會가 아니라, 교제하는 交會이다)
문/1.행2:42을 찾아보시오. 여기서 초대교회사람들은 어떻게 교회생활을 하였 나?
문/2.당신의 교회에서 성경공부와 교제가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말해보 시오,
3. 세번째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교회는 같은 인간들끼리만의 친교를 위한 모임 불과하다” 는 것이다.
교회가 왜 필요한가? 그것은 한 마디로 심심하기때문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 들은 이기적인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값이면 착한 교인들과 같이 노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와같이 교 회를 단순히 인간들끼리만의 친교를 위한 모임이라고만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교회관이다.
문/1. 만일 우리 가운데 교회를 인간들끼리의 사교를 위한 목적으로 오는 사람 이 있다면 이런 사람에 대해 성경은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유4,12,13)
문/2. 성경에서는 우리의 교제가 단순히 인간적인 교제가 아닌 어떤 교제가 되 어 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요일1:3,빌1:5)
문/3. 그 외에도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잘못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 가?
제2과:성경적 관점에서 본 교회란 무엇인가?
서론
1과에서 우리가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인상들을 가지게 된 이유를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가운데 교회에 대한 바른 성경적인 입장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 문이라 말했다. 즉 성경적인 관점에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가 영광스럽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성경적 관점에서 본 교회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살펴보겠 다.
1.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
우리는 간혹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죽어도 천당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 이상의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베소서 1-3장까지 이다. 특히 에베소 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가지셨던 계획을 “경륜(오이코 노미아)”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분명한 목적 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가지셨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얼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가?
이것을 에베소서1장에서 나타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계획(경륜)을 중심으로 살피면 다음 도표와 같다.
????하나님의아들들(5)???????
? ? ???????????
경륜에 따른 예정(11)?????? 그리스도안에서통일(9)???????교 회(22)?
? ? ???????????
??? 그 안에서 기업(11)??????
위의 도표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경륜이라고 표현 하고 있고, 그 경륜에 따라서 우리를 구원받기로 예정하셨다고 하고 있다. 그 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계획)에 따라서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을 하나님의 아들들의 공동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된(하나된) 공동체, 그 안에서 기업(신 32:8-9)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 들들의 공동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하나)된 공동체, 또는 하나님의 기업이 바로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구원 하신 목적이 바로 목적이 바로 교회를 이루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안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왜 중요하냐고 하는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질 필요가 없 다. 만일 당신이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교회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눈에 보이는 제도적 교회에 가입하면 무조건 구원받 는 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천주교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단순 히 눈에 보이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범 우주적인 교회 를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의 구 성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 다)
문/.우리 가운데 교회에서 예배는 겨우 참석하는데 성도간의 교제를 하거나 양육 전혀받지 아니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위의 사실들 을 근거로 어떻게 권면을 해야 할까?
2. 이 상의 사실들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만세 전부터 예정하시고, 또한 그 교회를 통하 여 이 세상 가운데 당신의 모습이 나타나며,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 당신 의 뜻이 펼쳐지기를 계획하셨다 (엡1,3:10) 즉 성부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교회를 계획하셨다.
2)성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부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 로,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다.(엡2장,엡 2:13-18) 즉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하 나된 교회를 만드셨다.
문/.엡 2장 13절에서 18절을 읽어보시오. 여기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역은 어떤 것이 있는가? 지금 우리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서로 갈라지게 하는 것들 은 어떤 것이 있는가? 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냐를 생각하면 서 이러한 벽들을 허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서로 토론해 보시오?
(예,공부잘하는 학생/못하는 학생, 잘생긴 사람/못생긴 사람, 부자/가난한 자,교회의 기존의 신자/새로들어 온 신자, 성직자/평신도,교회들 간 의 하나됨, 그 외 )
3)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성자 예수님의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던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사역을 하시는 분이시다. 즉 성령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이 루시게 하는 사역이다.(엡4:3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진정한 하나됨이 이루어지고, 육신의 역사와 마 귀의 역사가 있는 곳에 분열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께 서 께서 하나되게 하셨던 교회를 나누어지게 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다.
문/.갈 5장 16-24절의 말씀중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해 보시오? 육체의 일이 어떻게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반대로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보 시오?
제3과:복음서에 나타난 교회
서론
앞에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때문에 교회의 풍요로움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시간에는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교회공동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4복음서에서?교회"라는 말은 두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16:18,18:17). 그 래서 어떤 사람들은?예수님은 전혀 교회를 세우실 의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 러나 교회라는 말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의 내 용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분명한 의도와 가르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예수님이 12제자를 모으신 사건이다. 12제 자 란 구약의 12지파의 회복이다(겔37). 구약의 12지파는 구약에 나타난?하나 님의 백성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하나님의 벡성의 공동체"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클레시아(교회)" 번역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2제자들 의 공동체를 하나의 분명한 교회 (에클레시아 / 하나님백성의 공동체) 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복서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대한 가르침은 ?교 회"에 대한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1. 마16장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1)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마16:18)
복음서에서 교회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마16장18절에 나타난?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데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1)로마카톨릭은 이 반석을 베드로로 보고, 이에 대해?예수는 확실하게 규 정된 교회조직을 세웠음이 분명하며, 또한 베드로를 예수를 대신한 후계 자로 세우고, 그를 머리의 자리에 앉혔다"고 말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그 베드로의 후계자를 교황으로 보고, 그 교황을 교회의 쌍두머리중 하나로 보고 있다. (땅의 교회의 머리-교황, 하늘의 교회의 머리-예수)
2)루터는 이 반석을 그리스도로 보고 있고, 칼빈은 이 반석을 베드로의 신 앙고백으로 보고 있다. 루터의 해석은 무리가 있고, 칼빈의 해석은 타당 성이있다. 그 이유는 헬라어본문에 반석(페트라)는 여성형으로 쓰여져 있 다. 그래서 이 반석을 베드로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기초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 한 바른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와 같 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을 하였나?
A. 예수는?주"이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에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라면,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혹은 종인 것이다.
문/.당신은 과연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의 삶의 주인이시며, 당신의 그분의 종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예수님과의 관계와 형제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B.예수는 그리스도 (제사장,선지자,왕)
그리스도란 “ 기름부음 받은 자” 라는 뜻으로 구원자라는 말이다. 예 수는 우리를 죄와 사명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그리스도이시다.
문/. 당신의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유일한 구원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 고 있는가?
C.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단순한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문/1.요11장27절의 마르다의 잘못된 고백과 베드로의 고백을 비교해보시오.당신의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 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가?
문/2.베드로가 이러한 고백을 하기 전에 사람들은 예수를 누구라고 고백을 했 나? (마16)
문/3.베드로가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 것은 누구때문인가? (마16)
*2)”천국의 열쇠를 주리라” (마16:18)
16장18절에 보면?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는 말이 있다. 이 천국의 열쇠는?복음증거"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천 국의 문을 열수 있는 복음증거인 것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는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기위해 있는 것이다.
문/.당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혹시 그리스도인들간의 교회내적인 교제에만 치우쳐 있고,교회의 외부적인 복음전도에는 소홀하지 않은가?
*3)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하리라” (마16:18)
교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교회에 대하여?음부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터위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안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부활의 승리의 터위에 서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안에서 승리자인 것 이다.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승리의 터위에서 그의 재림 을 기다리는 것이다.
2. 산상보훈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윤리(마5-7)
마5-7장까지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산상보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윤리는 개인윤리가 아니 라, 철저한 공동체적 윤리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개인적인 구원 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구원이기때문이다.(2과)
다음의 산상보훈에 나타난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주기도문(마6:9~15)
문/.마6:14,15은 주기도문의 내용가운데 무엇을 강조한 말씀인가? 마6:12에서 나 자신에 대한 용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에화/어떤 젊은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가시게 되었다.이 목사님은 그 교회에 전에 계셨던 늙으신 목사님에게 목회의 성공의비결을 묻게 되었다. 그 때 그 늙으신 목사님이 말씀하신 목회의 성공의 비결은 걸레목회라는 것이었다.걸레목회란 기도를 하면서 성도들의 잘못들이 생각 날 때마다 자신이 걸레가 되어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매일하면서 목회했다는 것이다)
2)예배를 드리기전(마5:23~26)
문/.여기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예배를 가리킨다.여기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 말씀을 오늘 예배드리기 전에 반드시 적용을 해보시오. 혹 형제와 자매와 다투거나, 또는 다투지는 안았다 할 지라 도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지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서로 관계를 회복한 후 예배에 참석하시오.성경공부교사는 다음 성경공부시간에 이 것을 반드시 확인해 보시오)
3)중보기도에 관한 말씀(마7:7~12)
문/1.이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이다.이 말씀의 결론은 12절이다. 12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 말의 결론적으로” 라는 말이다. 7장7-11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 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고, 응답해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결론으로 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왜 12절의 말씀이 11절까지의 말씀의 결론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7-11절의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하실때 God help me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God help him의 차원에서 말씀하셨다.즉 기도란 나에게 무엇을 달라 는 것이 아니라,그를 위해 무엇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이것을 일명 중보기도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11절까지의 말씀의 결론은 12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문/2.조원들끼리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중보기도를 해보시오.(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해주시오)
제4과:요한복음에 나타난 교회공동체에 대한 비유와 말씀들.
서론
요한복음에서는?교회"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특히 비유들 가운 데는 충분히?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암시해주는 말이 많다.
1. 공동체를 암시해주는 말씀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암시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말씀은 요11장 52이다?또 그 민족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 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여기서 보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로 모인 모임이 교회이며, 예수님 께서 그것을 위해 죽으실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2장 32절도 같은 의미이다. 이 말씀에서 “들리면(십자가 위에 들린다는 말이다)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겠고”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은 교회란 단순한 인간들이 모은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에 의해서 모 여진 공동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대해 가장 극치를 이루는 말씀은 요17장22 절이다.?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니이다”. 또 23절 에 보면?~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 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되게 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성부,성자,성령이 하나된 것 같이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은 단순한 제도적인, 명목상의 하나됨이 아니다. 삼위하 나님의 관계는 그 사이에?영원하고 끊임없는 교통,교제"가 있다. 그러면 이 영원한 교통과 교제란 무엇인가? 이것을 요17장을 통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이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1,5,24), 또한 서로 사 랑하는 것이며(23,24),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는것(21)이며, 서로를 아는 것 (25)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하나됨도 단순히 제도적으로 우리가 같은 교회에 있다고 그것이 하나된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위와같은 끊임없는 교통과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연합과 교제의 공동체 가 교회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이룰 수 있는가?
첫째로는 삼위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그러 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형제 와 자매속에 있는 그리스도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질 그릇속에 있는 진주와 같 다. 우리가 만일 그 형제와 자매(질 그릇)만을 본다면 우리는 실망할 수 밖에 없고, 또한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형제,자매속에 있는 그리스도(진주)를 본다면,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영화롭 게 할 수 있디.
문/.당신은 형제의 허물만을 보고 서로 무시하고 있지 않는가? “왜 저 사람은 저 런가? 왜 우리 교회사람들은 이런가? 이쩔수 없어?” 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눔)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천사 눈에는 천사가 보인다. 은혜받은 사람은 형제와 지매 속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 형제와 자매의 의 인간적으로 부족한 면보다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먼저 보인다).
둘째로는 서로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의 허물을 볼 때 그것을 위해 용서와 수고와 헌신과 기도를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 형제와 자매에게 바른 말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미음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문/.당신은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의 부족한 점이 보일 때, 그것을 용서해주고 또한 그 부족한 점을 체워주기 위해 수고와 헌신을 햊두고, 무엇보다 기도하 고 있는가? (솔직하게 서로 나누어보시오)
세째로는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얼마나 우리의 형제,자매들이이 마음 속에 있는가? 일 주일 동안 공부때문 에 분주하여 우리마음속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잊고 살다가, 주일에 교회에 나 와서 건성적으로만 인사하지 않는가?
문/.당신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인의 형제,자매들이 있는가? 그들이 아플 때 나도 아프고, 그들이 슬플 때 나도 슬픔을 느끼고 있는가? (서로 나누어 보시오)
네째로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파악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 이면을 이해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 다.
문/.당신은 몇 년동안 같이 교회에 다니고 있는 옆 사람의 가정의 문제를 알고 있는가? 또한 그 사람이 지금 무슨 문제로 고민하고 살아가는지 알고 있는가?
(서로 나누어 보시오)
*2. 공동체를 암시해주는 비유들
또한 요한복음에서 두 개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요10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비유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예,사40:11,시23) 그러므로 이 비유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와 목자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1) 첫번째로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사실과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아서 불내어 한 떼의?양무리"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은 교회는?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또한 요10:14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는 삯꾼과는 달리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다.
2) 두번째로 요15장에 있는 포도나무의 비유도 공동체의 연합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구약성경 이시야 5장에서는 포도나무를 이스라엘백성에 비유한 것을 볼 수 있다)
요15장은 주님과 그리스도인간의 일대일의 관계를 중심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타난 가지는?너희"라는 복수의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즉 포도나무에 한 가지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여러가지가 붙어 있는 것이다
즉 여러가지들이 한 포도나무에 붙어있 것은 공동체에 대한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의 산 접촉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포도나무를 통하지 않고는 서로 간 의 관계도 전혀 유지할 수 없다.(포도나무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여기서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교회공동체는 단순한 인간적인 조 직체가 아닌 영적인 유기체임을 알 수 있다. 즉 교회의 생명의 근원은 주님 에게서 나오고, 그것은 또한 유기체적으로 각 지체들을 활성화시킨다.
그래서 누구든지 교회공동체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는 사람들은 단순 히 인간관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이고,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는 메 마른 가지처럼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석의 원리와 같다. 자석에 쇠붙이들이 붙어 있으면, 그 자 석의 자력이 쇠붙이에 전달하여 다른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문/1.당신은 당신의 인간적인 힘과 노력으로 요17장에 나타난 하나됨을 이루기 위한 사랑과 교제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문/2.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몸은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여기서 머리와 몸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골2:19)
문/3.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르게 성장을 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나? 엡4:16의 말씀을 통해 말해보시오. 여기서 말하는 마디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형제와 자매들에 전달해주고, 서로의 지 체들과의 관계를 연결 시킬 수 있는 것이 마디의 역할이다)
@요한복음정리비교@
목자비유-교회는 선택함받은 사람들의 무리임을 강조,목자의 사랑의 돌봄.
포도나무비유-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관계 강조-그리스도에붙어있어야 하나됨
요17장-성도간의 영적인 교통강조~하나됨-그것을 위해 예수세상에 오심
그리스도의 하나되게 하신 교회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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