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초대 교회사

[스크랩] 1세기(世紀)의 핍박

에반젤(복음) 2021. 7. 14. 02:47

1세기(世紀)의 핍박

네로 황제의 박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운명과 재림의 광경을 알려 주실 때 당신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신 후부터 권능과 영광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러 다시 오시기까지 당신의 백성들이 당할 경험에 대하여서도 미리 말씀해 주셨다. 구주께서는 감람산 위에서 사도 시대의 교회에 밀려올 폭풍을 보셨다. 그분께서는 또한 먼 미래를 내다보시면서 장차 올 암흑과 박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칠 맹렬한 폭풍을 보셨다. 그리고 지극히 의미심장하고 분명한 말씀으로 이 세상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어떠한 일을 할지에 대해서도 예언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동일한 굴욕과 비난과 고난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고 세상의 구주를 향하여 쏟아졌던 증오는 그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구주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입증하였다. 세상과 음부(陰府)의 권세는 전력을 다하여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함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다. 이교(異敎)는 만일 복음이 승리를 얻는다면 그들의 신전(神殿)과 제단은 일소(一掃)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그러므로 이교는 그리스도교를 박멸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박해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집에서 내어 쫓겼다. 그들은 “고난의 큰 싸움에 참”고,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히 10:32, 11:36)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증거를 그들의 피로써 인 쳤다. 빈부와 귀천과 학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바울이 순교당한 당시의 네로 황제 때부터 시작된 박해는 그 정도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후 몇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무서운 죄목으로 거짓 고소를 받았고 기근, 질병, 지진 등의 재난도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원망을 들었다. 그들이 일반 사회의 미움과 의심의 대상이 되자 밀고자들은 이(利)를 얻기 위하여 무죄한 사람들을 무고(誣告)하였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반역자, 종교의 적, 사회에 해를 끼치는 자로 정죄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형 극장에서 짐승의 밥이 되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거나 짐승의 가죽을 씌워서 투기장(鬪技場)에 던져짐으로 개에게 찢겨 죽은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처형은 축제 때 자주 오락거리로 삼아졌다.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와서 그 광경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고, 그들의 죽음의 고통을 보고 크게 웃고 손뼉 치며 기뻐하였다.

 

“카타콤”(塋窟)에 피난한 성도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어디로 피난하든지 맹수에게 쫓기는 것처럼 추적당했다. 그들은 불가불 황량하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 은신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히 11:37, 38)다. “카타콤”(Catacombs)은 무수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로마 성 밖에 있는 언덕들 밑에 흙과 바위를 뚫고 만든 긴 굴들이 있었다. 그물 모양으로 이리저리 뚫린 굴은 성 밖 멀리 수십 리의 지점에까지 뻗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하의 피난처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체를 묻었다. 또한 그들이 의심을 받고 그들에게서 법률의 보호가 제거되었을 때 여기서 살았다.

 

생명의 시여자께서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들을 깨우실 때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 음산한 굴속에서 나올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깨끗이 보전하였다. 그들은 온갖 편리한 것들을 다 빼앗기고 햇빛조차 볼 수 없는 어두운 땅 속에서, 그러나 부드러운 땅의 품속에서 지내는 동안, 한마디의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과 인내와 희망이 가득한 말로 서로 격려하며 궁핍과 괴로움을 견디었다. 온갖 세상적인 축복들을 잃어버리는 것도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도록 만들 수 없었다. 시련과 박해는 그들이 받을 안식과 상급을 향하여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발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옛적의 하나님의 종들처럼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히 11:35)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였다. 그들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 받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었다는 사실로 즐거워하였으며 딱딱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믿음으로 위를 쳐다보고,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천사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주목하시고,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기꺼이 받으시는 사실을 눈으로 보았다. 그들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었다.

 

패배함으로써 승리함

 

폭력으로 그리스도 교회를 멸하려던 사단의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명을 바친 대쟁투는, 그 충실한 기수(旗手)들이 자기의 담당 구역에서 싸우다 쓰러졌을 때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로 정복하였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죽임을 당했지만 그분의 사업은 꾸준히 발전되었다. 복음은 끊임없이 전파되었고, 믿는 자의 수효는 더욱더 증가되었다. 복음은 로마의 수리표의 군기(eagles of Rome)조차도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계속하여 박해하기를 주장하는 이방인 통치자들에게 어떤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당신들은 우리를 죽이고 고문하고 정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롭지 못한 당신의 처사는 우리가 무죄하다는 증거이다. …당신들의 잔인성이 당신들을 이롭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박해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들이는 더욱 강한 초청이 될 뿐이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목 베임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의 수효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다”(Tertullian, Apology, paragraph 50).

 

무수한 사람들이 옥에 갇히거나 살육을 당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의 자리를 채웠다. 이와 같이 신앙의 이유로 순교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보증을 받고, 승리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선한 싸움을 싸웠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당한 고난은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그리고 그들의 구속주께 더욱 친밀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들의 일상생활의 모본과 임종 시의 증언은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증인이었다. 전혀 가망이 없었던 사단의 부하들이 사단을 섬기는 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단은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정부를 대적할 계획을 세우고, 자기의 깃발을 그리스도 교회 안에 꽂았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을 속여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도록만 한다면, 그들이 힘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쉽사리 자기의 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큰 원수는 폭력을 씀으로 손해를 본 것을 계교를 써서 찾으려고 애를 썼다. 박해는 그치고, 그 대신에 세속적 번영과 세속적 명예라는 위험한 미끼가 놓이게 되었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부분은 받아들이고 중요한 다른 진리들은 거절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노라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자각하거나 회개 혹은 마음의 변화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일치하기 위하여 먼저 양보하였은즉 그리스도교 측에서도 그만큼 양보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 안에 들어온 타협 정신

 

이제 교회는 무서운 위험에 봉착했다. 투옥, 불, 칼 등은 이것과 비교할 때 축복이었다. 물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경우에도 굳건히 서서 전혀 타협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일부를 버리거나 변개하여, 그리스도교를 부분적으로만 용인(容認)하는 자들과 결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온전한 회개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깊은 번민의 시기였다. 그리스도교의 가면을 쓴 사단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신자들의 믿음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였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그들의 표준을 낮추는 데 동의하였으며 그리스도교와 이교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상 숭배자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改宗)하고 교회에 입교하였다고 공언했으나 여전히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고 그 예배의 대상을 예수님의 형상과 마리아와 모든 성도들의 형상으로 바꾸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들어온 우상 숭배의 누룩은 계속적으로 해로운 일을 하였다. 불건전한 교리와 미신적 의식(儀式)과 우상 숭배적인 허식이 그리스도교의 신조와 예배에 혼합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우상 숭배자들과 타협한 결과로 그리스도 교회 안에 우상 숭배의 그릇된 사상과 좋지 못한 풍습이 수입되었고, 교회는 타락하여 순결과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에 넘어가지 않고, 진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오직 그분만을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무리들 가운데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 왔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구주의 생애를 연구하고, 자기들의 결점을 고치고 그분의 모본에 일치되고자 열심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며, 그 다른 편의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을 보여 주는 명백하고도 실제적인 진리를 피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비록 그 형편이 가장 좋았던 시대에 있어서도 진실하고 순결하고 성실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우리 구주께서는 고의적으로 죄 가운데 빠지는 사람들을 교회에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품성이 불완전한 자들로 더불어 사귀심으로 당신의 가르치심과 모본을 통하여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고칠 기회를 가지게 하셨다. 열두 제자 중에도 한 반역자가 있었다. 유다가 제자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의 품성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서였다. 그가 제자들 가운데 속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품성이 어떠한 것임을 배우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거룩한 은혜를 힘입어 진리를 순종하므로 그 심령이 정결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에게 그토록 은혜롭게 비추어진 빛 가운데서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죄에 빠짐으로 사단의 유혹을 자초(自招)하였다. 그의 품성의 나쁜 특성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암흑의 세력에 맡겼다. 그는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책망을 받게 되자 화를 내었고, 마침내는 자기의 주님을 파는 무서운 죄를 범하기까지 되었다. 이와 같이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면서 악을 품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죄악 적 행동을 지적함으로 마음의 화평을 깨뜨리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들은 유다처럼 어떤 기회를 만나면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견책해 주는 사람들을 도리어 배반할 것이다.

 

빛과 어둠 사이의 투쟁

 

사도들은 교회 안에서 입으로는 경건하다고 공언하면서도 불의한 것을 마음에 몰래 품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기만적인 일을 하였다. 그들은 겉으로 볼 때 하나님께 완전히 희생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탐심을 품고 재산의 일부를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 감추어 두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그 거짓된 자들의 본성을 사도들에게 드러내 주셨고, 하나님의 징벌은 그 더러운 오점을 제거하고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게 해주셨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낱낱이 가려내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교회에 나타난 현저한 증거는 모든 위선자와 악인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다. 그들은 습관과 품성에 있어서 항상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언제까지나 같이 지낼 수는 없었다.

 

핍박과 시련이 이를 때에 진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기를 꺼리지 아니하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같이 하여 핍박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교회는 비교적 순결을 유지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치자 철저하지도 못하고, 헌신하지도 아니한 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사단의 발판 노릇을 하게 되었다.그러나 빛의 임금과 어둠의 임금 사이에는 연합이 없으며, 그들의 추종자들 간에도 연합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교(異敎)로부터 반쯤 개종한 자들과 연합하기를 동의하므로, 그들은 진리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져 가는 길을 걷게 되었다. 사단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많은 제자들을 속이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하여 미칠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사단은 그들에게 더욱 충분한 능력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아직도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핍박하게끔 충동하였다. 한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옹호하던 자들만큼 참된 그리스도인 신앙을 반대하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다. 이러한 배도한 그리스도인들은 반쯤은 이교적인 신도들과 연합하여 기독론의 가장 기본적인 면들을 공격하였다.

 

거짓에 대한 결사적인 투쟁

 

충성스럽게 되려는 자들이 성직자의 옷으로 위장하고 교회에 들어온 기만과 가증한 것들을 굳세게 대항하는 데는 투쟁이 필요하였다. 성경은 신앙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종교 자유의 교리도 이단으로 불렸으며, 그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증오를 받았으며 법률의 보호에서 제외 당했다. 오랫동안의 격렬한 투쟁 끝에, 충성된 적은 무리는 이 배교적인 교회가 거짓과 우상 숭배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들과 결코 연합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분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들의 심령에 치명적인 오류를 묵인하거나, 후손들의 신앙을 위태롭게 할 모본을 남기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 저촉되지 않는 양보라면 화평과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할 수도 있지만 원칙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진리와 정의를 양보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연합이라면 차라리 불화와 투쟁의 편을 택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굳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고무(鼓舞)시킨 원칙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되살아날 수만 있다면,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얼마나 좋을까!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둥이 되는 교리들에 대한 무관심은 우려할 만한 정도이다. 결국 이런 것들은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널리 퍼지고 있다. 이러한 타락은, 사단의 부하들의 손을 강화시켜 주고 있다. 그리하여 과거 여러 세기 동안에 충성된 사람들이 생명을 무릅쓰고 거부하고 폭로시킨 그 거짓된 이론과 치명적인 기만들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칭하는 수많은 자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다.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특별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흠 없는 행실과 견고한 믿음은 언제나 죄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해주는 견책이 되었다. 그들은 수효도 적고, 재산과 지위와 명예로운 칭호도 없었지만 그들의 품성과 교훈은 어디서나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치 아벨이 경건치 못한 가인에게 미움을 받은 것처럼 그들은 악한 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똑같은 이유로 성령의 지배를 거스른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곧 그분의 품성의 순결과 거룩함이 그들의 이기심과 타락에 대한 끊임없는 견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시던 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충성된 제자들은 죄를 좋아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자들의 미움과 반대를 받아왔다.

 

평화냐, 칼이냐?

 

그렇다면 복음이 어떻게 평화의 기별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이사야는 메시야의 출생을 예언할 때에 그분을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불렀다. 천사들이 예수님의 출생을 목자들에게 선포할 때에 베들레헴 상공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이 예언적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신 말씀은 서로 배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그 둘은 완전히 일치된다.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기만 하면 세상에 평안과 조화와 행복을 전해주게 된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그 교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친한 형제의 관계를 이루어 준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고 상호간에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대적인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복음은 그들의 습관과 욕망과는 전혀 반대되는 생활 원칙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그것을 죄라고 지적해주는 순결을 증오하며 공의롭고 성결한 복음의 요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인다. 그러므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고상한 진리가 증오와 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은 검으로 불린다. 악인의 손에 의인이 핍박받는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믿음이 연약한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가져다 준 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몹시 악한 자들은 번영케 하시면서 선하고 순결한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버리려고까지 한다.

 

공의롭고 자비하시고 무한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와 같은 불의와 압박을 묵인하실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조금도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섭리의 역사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하여 그분의 자비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구주께서는 어두운 시련의 때에 제자들의 마음에 의혹이 생길 것을 미리 아시고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요 15:20)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이 악한 자의 잔인한 행위로 말미암아 받는 고난보다 더욱 심한 고난을 받으셨다. 혹독한 형벌과 순교를 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벧후 3:9)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잊으시거나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이 악한 자들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고자 악한 자들이 그들의 참 본성을 드러내도록 허락하신다. 또한 의인이 고난의 풀무 가운데 던져짐을 당하는 것은 그들을 정결하게 만들고, 그들의 본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과 경건의 실재(實在)를 보여 주고, 그들의 일관된 행동으로 불경건하고 믿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가 번영하고, 그들이 당신께 대한 적의(敵意)를 나타내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악의 잔이 찰 때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완전한 멸망 가운데서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 곧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한 모든 자들이 공정한 보응을 받는 날,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에게 행한 모든 잔학하고 불의한 행위가 그리스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인정되어 벌을 받는 날이 신속히 다가오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주의해야 할 더욱 중요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하였다. 그러면 박해의 불이 거의 꺼진 듯이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 유일한 이유는 교회가 세속적 표준과 타협하여 별로 반대를 받을 일이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생활하던 당시의 그리스도인의 신앙처럼 순결하고 거룩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서 인기가 있는 유일한 이유는 죄와 타협하는 정신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진리들이 너무도 무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 내에 활력이 넘치는 경건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신앙과 능력이 되살아날 때에 박해의 정신은 다시 나타날 것이며, 핍박의 불길은 다시 타오를 것이다.